[마이클 하트의 Prison Time] ③ 시간의 폐지

이 글은 예일대 출판부에서 정기 발행하는 저널 『Yale French Studies』 1997년(No. 91)에 실린 마이클 하트의 「감옥의 시간(Prison Time)」에 대한 번역이다. 총 5회로 나누어 연재할 예정이다.

벽이 허물어지고, 시간이 먼지로 바뀌었다.

『장미의 기적』

그러나 주네가 보기에 노출 자체는 충분하지 않다. 실존에 대한 우리의 비참한 수용, 우리의 존재에의 개방성은 어느 정도는 무관심/차이없음(indifference)의 위험을 안고 있다. 노출은 노출된 존재를 채우는 구성 및 사랑의 힘을 동반해야 한다. 우리를 우리의 욕망과 분리시키고, 접촉으로부터 격리시키며, 마주침을 금지하는 감옥의 벽은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감옥 체제의 핵심 중 하나인 성적 박탈은 더욱 일반적인 정동 박탈을 나타낼 뿐이다. 주네는 능동적 기획으로 정동으로부터의 이러한 고립 및 추방에 도전한다. 주네의 글에서 육욕적 사건(몽상이든 살의 경험이든)은 감옥 벽의 바로 그 토대를 뒤흔들고, 그것이 지닌 분리의 힘을 파괴한다. 예를 들어, 한 수감자가 그의 연인이 사형을 언도받는 것을 상상하자, 사건의 지진파에 흔들린 벽이 춤을 춘다. “감옥이 융기하고 흔들리고 있소이다! 도와주시오, 우리는 움직이고 있소!”1 또 다른 예로 수감자 2명이 복도에서 사랑의 불꽃을 나누자, “벽이 허물어지고, 시간이 먼지로 바뀌었다. …”2 사건의 순간 감옥 공간의 구획이나 줄무늬 창살은 해체되어 매끄러운 사랑의 공간으로 대체된다. 수감자들은 더 이상 고립되지 않고 완전히 노출된다. 노출은 육욕적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의 조건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예리코 성 주변을 음악을 연주하며 돌았던 것처럼, 사건은 벽을 허무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3

그러나 주네가 사랑의 순간에 상상하는 이러한 공간의 파괴, 벽의 붕괴는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거룩한 성자이자, 장 주네에게 보내는 육욕적 에너지에 자기의 온 힘을 바치는 아르카몬조차 결국 감옥의 모든 벽을 통과하는 기적을 행할 정도로 강하지 않다. 감옥 벽이라는 현실은 짜증 날 정도로 없애기 어렵다. 사건이 지닌 기적의 힘은 시간적 용어로 더 잘 이해될지 모른다. “시간이 먼지로 변했다.” 사랑이 일어나면, 감옥의 시간 및 그것의 규율과 지루함은 사그라든다. “나는 만남에 관해 당신과 꼭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만남을 촉발했거나 촉발하는 그 순간은 시간 바깥에 위치해 있다고, 그러한 충격이 주변의 시공간을 흩뿌린다고 생각합니다.”4 우리는 여기서 사건과 마주침을 구분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마주침은 외부에서 온 사건에 의해 촉발된다. 사실, 사건 자체가 우리를 시간 바깥으로 이동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사건은 그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갖지 않으며, 그것은 결코 현재도 지속도 아니다. 사건은 번개처럼 내리치거나, 멀리에서 시간의 폐지를 알려오는 전령처럼 도달한다. 열정적인 사건에서, 무한한 순간 그리고 무한소의 순간 동안, 우리는 감옥의 시간의 지루함과 공허함을 벗어난다.

사건은 결코 현실적(actual)이지 않다. (이때 현실적이라는 것은 프랑스어 악투엘르(actuel)가 뜻하는 세속적인 것이나 실존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전히 잠재적(virtual)이다. 그러므로 사건을 사물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사건은 사물의 상태나 마주침—신체 및 정동 등의 배치—으로 현실화될 수는 있지만, 늘 그러한 현실화나 상태 바깥에서 그와 구별된 채 있다. 사건은 클리나멘, 즉 주사위 던지기와 같은 파열의 순간이다. 사건은 우리가 그동안 살아왔던 운명의 고정성을 산산조각 낸다. 사건은 우연의 카오스를 열어젖히며, 우주를 관통하는 길이나 평면을 절단한다. 주네의 마주침을 촉발시키는 시간 바깥의 영역이란 바로 이것이다. 사건은 결코 시간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을 파열시키고, 운명을 거역한다. ‘시간은 먼지로 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건은 시간 자체를 마주 대하는 바로 그 잠재력(potential)이다. 사건은 시간의 폐지이자 그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건이 우리의 세속적인/시간적인(temporal) 실존 위나 밖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을 초월론적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성은 시간을 가능하게 할 조건으로서 시간성 자체에 내재한다. 그것은 가장 깊숙한 안쪽에 있는 외부성이다. 그래서 사건을 순수 잠재성(virtuality)—현실적이지 않은 실재, 추상적이지 않은 이념—으로 인식하는 것이 더 명확할 수 있다. 사건은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의 순수 내재성이다.5 신성한 대상을 둘러싼 후광은 그 대상에 비현실적으로 남아있는 순수 내재성 바로 그것에 의해 야기되는 것일 수 있다. 후광은 잠재적인 것의 광채이다. 사건은 어떠한 시작도 끝도 지속도 갖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에게 삶을 위한 시간을 주지 않는다. 죽음은 정확히 시간 바깥의 잠재적 존재 상태로 상상될 수 있다.6 따라서 사건의 경험은 무아경에 빠지게 하는 것이자 동시에 살 수 없는 것이다.

※ 이 글의 원문은 온라인으로 다운로드 가능하다. Michael Hardt, 「Prison Time」, Yale French Studies, No. 91, Yale University Press, 1997, pp. 64-79.


  1. Genet, “Le condamné à mort”, CEuvres completes, vol. 2, Paris: Gallimard, 1951, p. 215. [한글본] 장 주네, 『사형을 언도받은 자/외줄타기 곡예사』, 조재룡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5, 21쪽.

  2. Genet, Miracle of the Rose, p. 46. [한글본] 장 주네, 『장미의 기적』, 62쪽.

  3. [옮긴이주] 모세의 사후, 리더의 자리는 여호수아가 이어가게 되었다. 그는 히브리 민족을 전투종족으로 개량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고, 체계적인 가나안 공격에 착수했다. ‘하느님이 약속해준 땅이다’라는 명령 하에 마침내 히브리군이 요단강을 넘어 가나안 침략을 개시했으나, 가나안 주민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항전했다. 구약 성경 여호수아서 6장에 따르면 이때 여호수아에게 야훼의 계시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성채를 일곱 번 돌고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서 야훼의 영광을 외치면 예리코의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었다.

  4. Genet, Our Lady of the Flowers, p. 146.

  5. “그것[사건]은 현실화되지 않은 것 혹은 현실화에는 무관심한 채 있는 것의 순수 내재성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실재성이 현실화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은 비물질적, 비육체적, 비생물적인 순수 저장물이다.”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losphie?, Paris: Minuit, 1991, p. 148.(불어에서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해당인용의 수정이 있었음) [한글본]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9, 224쪽.

  6.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Genet, The Screens, trans. Frechtman, New York: Grove Press, 1962, p. 144를 보라.

박성진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전공분야인 영문학에서는 낭만주의에, 비전공분야인 철학에서는 맑스주의와, 탈구조주의에 관심이 많다. 문학과 철학의 접목에 관심이 많다. 특히, 자연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빗발쳤던 낭만주의 시대에 쓰인 시들을 좋아하고,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상상력을 좋아한다.

이승준

형식적으로는 시간강사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맑스주의자, 페미니스트, 자율주의 활동가 등등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특이체이자 공통체이면서, 풀과 바다이고, 동물이면서 기계이고, 괴물이고 마녀이며, 그래서 분노하면서도 사랑하고, 투쟁하고 기뻐하며 계속해서 모든 것으로 변신하는 생명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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