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댁 이야기] ⑩ 당신이 그리 되실 줄 알고 그러셨나

보성댁의 남편 상덕씨에게 순천 성당으로 오라는 신부님이 요청하여 보성댁의 가족은 다시 순천으로 이사하고, 이사 후 앓아누운 시어머니는 큰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뜬다. 심하게 입덧을 하던 와중에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초상을 치른 후 늦은 가을에 보성댁은 셋째 딸을 낳는다.

“어이, 순천에서 신부님이 좀 오라고 연락이 와서 좀 갔다와야겄네.”
“먼일로 부르신다요? 왜 부르시는지는 말 안 하십디여?”
“이, 나보고 순천으로 오라고 할라는 눈치여. 가봐야 제대로 알겄지만.”
“순천으로 가믄 좋겄네요. 신부님이 와라 그러시믄 두말 말고 간다 그씨오.”
“알았네. 갔다 올겅께 엄니 잘 챙겨 드리고.”

순천으로 이사했을 때뿐 아니라 광양으로 이사한 후에도 시어머니는 보성댁네에 종종 찾아와 달포 가까이 머물다 가곤 했다. ‘성당에 가기 좋응께……’ 하셨지만, 돈 버는 데 악착같고 한번 돈이 들어가면 나올 줄 모르는 큰며느리보다 순탄한 성격의 작은 며느리와 함께 있는 게 더 편해서였다. 거기다 광양으로 이사온 후에는 방이 여러 개라 아들 부부와 한 방에 자지 않아도 되니 더 좋았다. 옛날 노인답게 아들 손주에 대한 사랑이 끔찍하셔서 손주들이 달라고 하면 입 안에 있던 사탕도 내놓았다. 어느 날은 아이들끼리 놀게 두고 미사에 참석하고 왔는데 윗목에서 반쯤 말라가던 메주들이 다 뭉개져 있었다.

“오메, 이것이 멋이다냐? 누가 이랬어?”
“엄마, 아까 성들이랑 노디(징검다리) 밟기 했어.”

셋째 응식이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을 했다. 보성댁은 기가 막혔다. 내가 저 콩을 삶고 허리 빠지게 도구통에 찧고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디 저놈들이……

“정식아! 너 이리 와. 니가 동생들이랑 메주 이래놨냐? 이놈들 엄마가 얼마나 쌔가 빠지게 메주를 만들어 놨는데 이게 머여?”

화가 난 보성댁은 뭐 매가 될 만한 게 없나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엄마의 기세에 놀란 아들들은 모두 할머니 뒤로 숨었다.

“아이고 괜찮다 괜찮아. 자자 이래이래 나가 이라고 다시 만들어 놓으믄 되잔냐. 아그들 잡지 마라. 아그들이 다 글치 뭐. 메주 그게 머라고 귀한 내 손주들을 잡냐. 고만 해라.”
“네 이놈들, 얼른 엄마한테 죄송합니다. 잘못했어요 해야지.”

시어머니가 얼른 손으로 메주를 뚜덕거리며 모양을 잡고 남편까지 짐짓 거드니 보성댁은 더 이상 아들들을 야단칠 수가 없었다.

“담부터 그러믄 안 돼. 메주 망치믄 장도 못 맹글고 반찬이 싱거워서 밥도 못 묵는다.”

작은아들 집에 와서 지내는 걸 좋아하셨지만 죽음만큼은 당신의 자리, 즉 큰아들 집에서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시기라도 한 것 같았다. 사진 출처 : Wonjung Kim
작은아들 집에 와서 지내는 걸 좋아하셨지만 죽음만큼은 당신의 자리, 즉 큰아들 집에서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시기라도 한 것 같았다.
사진 출처 : Wonjung Kim

시어머니가 있을 땐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첫째 딸을 낳았을 때 시어머니는 서운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남편 상덕씨가 딸을 예뻐하며 손에서 내려놓지 않자 ‘가시내가 머시가 좋다고 저런다냐’하며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곤 했다.

보성댁의 시어머니는 딱히 며느리 시집살이를 작정하고 시키는 분은 아니었다. 그냥 그 시대에는 다들 그렇게 하고 본인도 그렇게 하고 살았고 하다보니 며느리가 일을 하고 시댁 식구를 떠받들고 사는 건 당연했다. 보성댁 자신도 힘든 일을 한다고 해서 시어머니를 원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순천에서 단칸방에 사는데도 와서 며칠씩 있다 가는 시어머니가 못마땅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할 도리나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시어머니가 오실 때에는 없는 근력에 뭐라도 들고 와서 보태 주기도 하셨다. 그 ‘뭐’가 쌀일 때도 있었고 고구마일 때도 있었고 김치거리나 나물 등속일 때도 있었다. 때가 잘 맞으면 큰며느리가 해온 갯것 중에서 고막이나 굴 등을 들고 오기도 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며느리보다는 아들이나 손자들 입에 들어가는 걸 더 좋아하기는 했다. 자랄 때 뭐든 좋은 건 병치레하는 아버지 위주로 드리며 살아 왔기도 했고, 천식이 있고 몸이 약했던 남편을 구완한다는 생각으로 맛있고 좋은 건 본인 입으로 넣는 일이 드물기도 했다. 그렇게 몸이 약한 남편이라도 아버지처럼 일찍 세상을 뜨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남편 건강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는 살림 중에도 열심히 챙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어머니는 입덧하는 보성댁이 닭을 잡아 달래서 먹을 때는 ‘그 닭 한 마리 있는 꼴을 못 본다’고 구시렁대기도 했다. 보성댁이 한 그릇 먹고 나면 다시는 먹기 싫어해서 대부분은 아들과 함께 드시기는 했지만. 어린애들을 돌보며 장사하는 게 어려워 동생을 불러서 애를 봐주게 했더니 쌀 닳아진다고 쫓아내기도 했지만 보성댁이 몸이 아프거나 힘들어 하면 걱정스레 들여다보기도 했다.

순천에 갔다온 상덕씨는 예상했던 대로 신부님이 자신이 순천에 와서 근무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광양에 살면서 딸 둘을 낳고 사는 시간 동안 정이 들기는 했지만 친정어머니도 더 자주 만날 수 있고 여수머리 가기에도 더 편한 순천으로 가는 게 좋았다. 광양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시원섭섭한 이별을 하고 보성댁네 식구들은 순천으로 옮겨갔다.

순천으로 오니 순천 성당 마당에 그 사이 집이 새로 지어져 있었다. 보성댁 식구들이 살 그 집은 광양보다는 좁았다. 집의 양쪽 끝에 부엌을 두 개 두고 그 사이에 방이 네 개 있는데 동쪽에 있는 부엌 하나와 방 두 개는 보성댁 식구들이, 서쪽에 있는 부엌 하나와 방 두 개는 신부님들 밥을 해주는 마리아씨네 식구들이 살며 마루는 같이 사용하는 구조였다. 마리아씨는 언제 배웠는지 아일랜드에서 왔다는 신부님들의 밥을 그네들의 음식으로 척척 만들어 내었다. 천성이 착하고 인정이 많아 보성댁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 많은 마리아씨를 언니처럼 따랐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보성댁 네에 와서 지내기 시작하셨다. 이사하는 날도 와서 이런저런 간섭을 하더니 찬 바람 부는 마당에 오래 있어서인지 앓아눕게 되었다. 병원에 모시고 가서 주사도 맞고 약도 받아 왔지만 썩 차도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누워 있던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집에 가고 싶다고 하였다. 몸이나 낫고 가시라 했지만 시어머니는 계속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다 좀 낫기는 했지만 완쾌되지 않은 상태로 상덕씨가 모시고 갔다 왔다.

시어머니가 당신 집으로 가신 후 보성댁은 여섯째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여섯째 아이는 보성댁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뒤꾸지’ 섰다. 입덧이 심해 먹은 것마다 토해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헛구역질이 아니라 진짜로 먹은 걸 다 토해냈다. 어느 때에는 노오란 위액까지 나왔다. 그렇게 토해내는 걸 본 마리아씨가 ‘오메, 똥물까지 다 토해내네.’했다. 먹은 것마다 토해내다 보니 기운이 없고 지쳐 누워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이를 갖고 입덧이 심해 잘 먹지도 못하고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수녀님이 찾아 왔다. 그때 순천 성당에는 세 명의 수녀님이 있었는데 가장 어른인 베드로 수녀님이 소고기를 두 근이나 끊어 왔다. 이거 드시고 기운 좀 차리시라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소고기를 볶아 먹고 나니 입덧이 멈췄다. 먹고 싶은 건 있었지만 토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개고기가 먹고 싶어졌다. 상덕씨에게 개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으나 어영부영 사다 주지 못하고 지내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얼마 전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기어이 돌아가시더니 당신이 그리되실 줄 알고 그러셨나 싶었다.

작은아들 집에 와서 지내는 걸 좋아하셨지만 죽음만큼은 당신의 자리, 즉 큰아들 집에서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시기라도 한 것 같았다. 상덕씨는 서둘러 기차를 타고 큰댁에 갔다. 그러고는 시어머니가 세상을 뜨셨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가장 어린 다섯째는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기저귀를 뗀 큰딸과 위의 아들들을 데리고 큰집으로 서둘러 갔다. 임신으로 인해 몸이 좀 힘든 상태였지만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보니 여수머리에 사는 큰시누이, 험산에 사는 작은 시누이도 자식들을 데리고 와 있었고 상치를 준비를 해주러 온 일가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로 집안이 북적거렸다. 시숙이 도목수로 일하고 큰동서가 갯일을 잘해 자수성가한 집이어서인지 상치를 음식은 넉넉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먹은 것을 토하지는 않지만 아직 입덧이 끝나지 않아 먹고 싶은 것이 많은 보성댁에게는 어찌 보면 다행이다 싶은 시간이었다. 소를 한 마리 잡았는지 육개장을 끓이고도 수육으로 삶은 고기로 바구니가 넘쳐나고 솥에서 계속 고기를 삶고 있었다. 입덧을 하면 늘 고기가 먹고 싶어지던 보성댁은 원없이 고기를 먹었다. 음식이 풍성해서인지 임신한 사람이어서인지 고기를 먹어대는 보성댁에게 타박하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먹고 싶던 개고기는 못 먹었지만 소고기 수육을 실컷 먹어서인지 더이상 개고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염을 하거나 입관을 하거나 할 때에는 다른 식구들과 한마음으로 울고 마음이 진정되고 나면 고기를 먹었다. 평소에 양껏 먹지 못 하던 아이들도 고기며 떡이며 육개장이며 실컷 먹었다. 아들들은 자기들을 많이 사랑해 주었던 할머니 생각이 나는지, 어른들이 울어서인지 같이 울다가 울음을 그치면 맛있게 음식을 먹었다. ‘우리 식구들 맛있는 거 먹여 주시려고 엄니가 때 맞춰 가셨나 보다.’ 혼자 그런 생각도 했다. 천성이 눈물이 많아 평소에도 찔끔하면 눈물 바람을 하던 작은 시누이는 염을 하거나 입관을 할 때에는 물론이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눈물을 흘리곤 했다. 하도 울어 대니 옆 사람이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아이고, 형님. 그렇게 울어 쌓다가 눈이 짓물러 불겄소. 이제 그만 우씨요. 엄니 좋은 데 가셌을 것이요.”
“금메 말이시. 인제 고만 울어야쓰껏인디 자꾸 눈물이 나부네. 어째야쓰까 이”

그러면서 시누이는 또 훌쩍거렸다.

친정어머니가 둘째 딸을 업고 작은어머니와 함께 조문을 오셨다. 이 기회에 어머니도 맛있는 것 많이 드시고 가라고 한 상 푸짐하게 차려 드렸다. 오신 김에 둘째 딸은 보성댁에게 안기고 돌아가셨다.

시어머니의 장지는 태봉산 아래 시아버지를 모신 곳 옆에 모셨다. 보성댁은 출상하는 날, 몸도 무거운 데다 둘째 딸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어 큰집에 남았다.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서 있노라니 눈물이 왈칵 솟아 자기도 모르게 ‘아이고 엄니……’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보성댁의 치마꼬리를 잡고 오징어 다리를 하나 물고 있던 둘째 딸이 자기 엄마가 우니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엄마를 붙잡고 울었다. 그렇게 흐느끼며 멀어지는 상여를 바라보다 집안으로 들어 왔다. 그리곤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집안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집을 치우고 일을 치르고 올 사람들이 먹을 것을 준비했다.

그럭저럭 초상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 왔다. 한동안은 임을 머리에 인 시어머니가 집으로 들어오실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낮잠을 자다가 자신을 부르는 시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일어났는데 시어머니가 보이지 않아 잠시 생각하다. 아, 어머님은 돌아 가싰제……. 하고 깨닫곤 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깜짝깜짝 놀라며 시간을 보내고 가을이 돌아 왔다. 아직은 여름 날씨를 보이곤 하는 초가을을 지나 쌀쌀한 바람에 소스라치곤 하는 늦가을 무렵 보성댁은 진통이 시작되었다.

“정식아. 정식이 어딨냐? 언능 와라”

동생들과 성당 마당에서 놀고 있던 정식이가 달려왔다.

“엄마 왜요?”

하다가 진통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보성댁을 보고 깜짝 놀라며

“어? 엄마 아파요?”
“이, 그래. 애기가 나올랑갑다. 핑 가서 할머니랑 작은할머니한테 말씀드려라.”
“예”

뛰어나가는 정식의 뒤에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작은할머니한테 먼저 가고 할머니한테 그 담에 가.”

형과 함께 놀던 용식이와 응식이, 큰딸이 모두 와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엄마를 보고 서있는 게 보였다.

“용식아, 언능 사무실에 아부지한테 가서 엄마 애기 나온다고 말씀드려.”

입덧하며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는 비교적 쉽게 곧 나왔다. 여자아이였다. 
사진 출처 : Martinus
입덧하며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는 비교적 쉽게 곧 나왔다. 여자아이였다.
사진 출처 : Martinus

용식이가 성당 사무실로 뛰어가자 응식이에게는 동생 데리고 가서 놀고 있으라고 이르고 아픈 배를 끌어안고 부엌으로 갔다. 동이에 있는 물을 솥에 붓고 나니 식은땀이 솟았다.

“예, 금구 아부지 여기 불 좀 때씨요. 나 들어가야 쓰겄소.”

용식이의 말을 듣고 달려온 상덕씨에게 이르고 방으로 들어가 누우니, 산파 일을 보는 작은어머니가 곧 도착했고 곧이어 친정어머니도 한달음에 달려왔다. 입덧하며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는 비교적 쉽게 곧 나왔다. 여자아이였다.

“별로 쓰잘 데도 없는 가시내가 나올라고 즈그 어매를 그리 고생을 시켰구만.”

보성댁이 무사히 순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덕씨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최은숙

35년의 교직생활을 명퇴로 마감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소설로 쓰고 있습니다. 올해 91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글로 남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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