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장] ⑲ 예지몽(叡智夢), 일장춘몽(一場春夢)

이빨이 빠지는 꿈은 흉몽인가, 예지몽인가, 일장춘몽인가. 불길한 꿈을 꾸고 난 후 마을에 불길한 일이 닥쳤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하게 해결되었으니, 이 ‘어쩌다 이장’에게도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생긴 게 아닐까?

밤새 어금니가 심하게 흔들리는 꿈을 꾸었다. 물론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힘들 바에야 차라리 속 시원히 빠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서울에서 고3 담임을 연속으로 내리 맡으면서 스트레스로 생니가 빠지는 걸 불쌍히 여기신 부인님의 결단으로 제주에 내려오게 된 나에겐 ‘군대에 다시 끌려가는 꿈’에 버금가는 악몽 중 하나이다.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인 선흘2리에 일단 ‘창고’로 건축허가를 받은 후 유해물질이 포함된 건축폐목재까지 파쇄하는 폐목재파쇄업체로 사업변경하는 방식으로 꼼수를 쓰려 했다. ⓒ이상영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인 선흘2리에 일단 ‘창고’로 건축허가를 받은 후 유해물질이 포함된 건축폐목재까지 파쇄하는 폐목재파쇄업체로 사업변경하는 방식으로 꼼수를 쓰려 했다. ⓒ이상영

재작년 봄에 한 업체에서 마을회로 연락이 왔었다. 우리 마을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제주시 담당부서에서 리사무소로 한번 가보라고 권해서 연락했단다. 며칠 후 음료박스를 들고 온 사장이 가져온 사업계획서를 살펴보니, 유해물질이 많이 포함된 건축 폐목재까지 파쇄하는 ‘폐목재 파쇄’업체였다. 사업자에게, 우리 마을은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인데다가 마을에 폐목재 파쇄업체가 들어오는 걸 주민들은 찬성할 리가 없다며 돌려보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올해 3월, 갑자기 사업자가 연락이 왔다.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다’라는 신조어의 참뜻을 알려주겠다는 듯, 사업자는 2년 동안 물밑에서 차곡차곡 사업 준비를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업지에 샌드위치 패널 건물을 지은 후 일단 ‘창고’로 건축허가를 받았단다. 가보니 창고 입구에는 폐기물을 수집하는 대형트럭이 오갈 수 있도록 건물보다 더 큰 대형 셔터문도 달아 놓았다. 제주시청 환경지도과 담당공무원에게 문의했더니 사업자는 이미 지난해 말 인허가 문턱이 낮은 ‘폐기물 수집업체’로 허가를 받았고, 올해 2월에 대기오염 저감시설이 필요한 ‘폐목재 파쇄업’으로 사업변경을 하겠다고 사업계획서를 다시 제출했단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동물원을 막겠다고 5년간 참 힘들게 싸워왔는데 ‘폐목재 파쇄업체’라니,,, 이미 건물까지 다 지어놓고, 대형트럭까지 앞에 세워 놓았는데 이 사업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을까? 꿈은 어두운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무의식의 세계를 반영한다는 프로이드님의 해석에 의지하면 요즘 이빨이 빠지는 꿈을 꾸게 되는 건 필연적이라 할 수 있겠다. 피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담당부서는 폐기물관리법에 따르면 ‘인허가 조건에 맞으면 지체 없이 허가를 내줘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4월 25일까지 인허가 절차를 마무리해야만 한다고 영혼 없이 말할 뿐이었다.

긴급 마을운영위원회와 주민합동반상회를 개최했다. 피해 당사자인 주민들이 리사무소에 모여 사업진행과정을 공유하고, 대응 방안을 논의해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반상회 전에 마을회의 사업반대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시뻘건 글씨로 ‘세계자연유산마을에 대기오염배출시설 반대한다’를 새겨 넣은 사업반대 현수막도 선인분교 앞, 사업장 앞 도로, 세계자연유산본부 인근에 게시했다.

반상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다양한 방안을 제안했다. 일단 현수막을 추가로 많이 제작해 큰 도로와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세계자연유산센터 앞에 게시하고 문제점을 알리기로 했다. 또 사업계획서도 다시 살펴서 문제점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사업지가 ‘역사문화환경보전지역’이라 허가를 위해서는 세계자연유산본부와 협의가 필요하다고 하니 세계자연유산본부를 최대한 압박하고, 제주도에 다른 폐목재 파쇄업체를 방문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행정에 제출하자고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 주에 모두 함께 제주시청 앞에 우르르 몰려가서 기자회견과 제주시장 면담을 하자고 흔쾌히 결의했다.

밤새 사업계획서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폐기물관리법, 사업계획서, 설치기계 생산업체 홈페이지 등을 비교 분석하다 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파쇄기계업체 브로슈어에 기재된 파쇄기 모델과 사업계획서의 사양이 달랐다. 폐기물관리법상 기계의 처리 능력에 따라 폐기물을 저장할 창고의 면적이 달라지는데, 사업계획서에는 창고 면적을 줄이기 위해 고의로 기계 사양을 허위기재한 분명한 정황을 발견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와 비슷하게 허위로 사업을 승인받고 영업을 하다가 처벌받은 법원 판결문도 존재했다.

‘사실상 행정 절차는 다 끝났다’라는 주관 부서 공무원의 말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는 교훈은 이 사업에도 적용해야 한다. 다음날 아침 9시 제주시청 담당 부서에 전화를 했다. 사업자가 기계 사양을 허위로 기재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리고 담당 주무관을 추궁했더니 당황하는 눈치였다. 다시 담당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인허가 주무부서가 어떻게 가장 중요한 사항을 확인하지 않을 수 있냐고 항의했고, 확인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너무 모질게 몰아 부쳤나?’라는 생각에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다 밤새 어금니가 빠지는 흉흉한 꿈을 계속 꾸었고 새벽 2시쯤 잠이 깨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커피를 마시는데 시청 공무원이 리사무소로 찾아오겠다고 전화가 왔다. 공무원들이 만나자고 할 땐 좋은 결론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었는데…

선흘2리 마을 입구에 게시된 폐기물처리업체 반대 현수막. ⓒ이상영
선흘2리 마을 입구에 게시된 폐기물처리업체 반대 현수막. ⓒ이상영

그래서 만남의 결론은? 두둥!

결국 사업자가 사업계획서를 취하했다고 한다. 내가 제기한 기계 사양 허위 기재도 문제였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시청 도시계획과와 상하수도과가 도시계획조례에 따라 사업지에 공공 하수관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엄청난 공사비용이 부담된 사업자가 결국 사업계획서를 자진 철회했다. 공공하수관이 연결이 안 된 시골 마을이라는 게 이렇게 좋을 일인가!

‘야호!’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이제 주민들 모시고 시청 앞에 가서 악다구니 쓰지 않아도 되는구나!

마지막으로 다시 꿈으로 돌아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가 빠지는 꿈은 보통 흉몽으로 인식되어 찝찝할 만도 했는데, 오늘 새벽에는 분명 ‘앓던 이가 빠진 듯한’ 시원한 기분이 들었었다!! 음~ 이제야 나도 예지몽을 꿀 수 있는 선지자? 예언자? 꽃도령(?)의 반열에 들어선 건가?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나중에 제주시청 앞에서 돗자리를 깔아 볼 심산이다.

이 글은 『제주투데이』 2023년 4월 27일 자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사진저작권 : 이상영)

이상영

20년 가까이 중고등학교에서 지리(사회)를 가르치다, 2018년 한라산 중산간 선흘2리로 이주한 초보 제주인. 2019년 초 학부모들과 함께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으로 선출된 후, 2021년 어쩌다 이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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