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을 따라 그리는 픽셀의 무한 – 김현우 전시회 《픽셀: 무한한 공간》 전시평

김현우 작가는 픽셀을 그린다. 파편적인 기호의 픽셀이 다른 픽셀과 만나 층위가 쌓이고 새로운 형상이 되기를 반복한다. 최근 픽셀은 ‘소리’를 담으며 점차 화면 바깥으로 과감하게 뻗어나간다. 무한하게 증대되는 픽셀의 확장, 그 기저에 생명을 향한 긍정적 역능과 신체에너지인 정동이 흐른다. 그것은 소통을 향한 작가의 적극적인 대화이자, 세상을 향한 관심 그리고 사랑과 같다.

신체는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정신과 신체의 속성은 동전의 두 양면처럼 다르다고 하였다. 신체는 ‘운동’과 ‘정지’라는 연장의 속성을 지니는 반면, 정신은 ‘사유’의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체와 정신은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가 된다. 신체는 외부환경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변용(affectio)되며 이것을 정신이 포착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고도화되고 적극적일수록, 인간은 자유롭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기보존능력1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외부환경이나 관계에 의해 확대될 수도, 축소될 수도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대상과 환경을 찾아 나서는 본능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스피노자의 이론을 계승하면서 활동능력의 증감에 영향을 미치는 신체적 변용의 이행과정을 ‘정동’이라 하였다. 정동은신체가 조우하면서 영향을 미치는 이행활동, 그 움직임과 순간성이다. 생명의 역능이기도 한 정동은 오로지 강렬도에만 의존하는 신체에너지다.  정동은 의식과 다른 차원에서 신체안에 잠재되어 있고 다른 신체와의 마주침, 부딪힘에서 촉발된다. 그래서 정동은 미지의 영역이고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다. 존재는 정동을 가지고 있는 한 매순간 변화한다. 마주치는 순간 생성되고 하나의 응결점을 가지다가 다른 마주침을 조우하기 때문이다. 흔히 관념이 재현적 양식으로 사유되는 것과는 다르게 정동은 철저하게 비재현적인 사유양식이다. 생성과 흐름, 변이의 체제인 정동을 우리가 그나마 포착할 수 있다면 어떤 이미지로서 볼 수 있을까.

우연찮게도 필자가 정동이론을 접하였을 때, 김현우 작가의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현우 작가는 장애작가 레지던시인 잠실창작스튜디오의 입주작가로, 픽셀(Pixel)이라는 조형기호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 작가이다. 서울시 역삼동에 위치한 신한갤러리에서 선보이는 《픽셀: 무한한 공간》전에서는 작가가 근 5년 동안 작업한 작품들을 선보이면서 작업변천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너무나 신기하게도 작가의 작품들이 확장되면서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당시 읽고 있었던 ‘정동’이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뒤이어 전개될 글에서 그의 작품의 변천 속에서 느껴지는 미결정적이고 안과 밖을 오가며, 경계를 지우는 그의 확장적인 힘, 정동의 순간을 발견해볼 것이다.

김현우 작가는 이미지의 가장 작은 화소단위를 뜻하는, 픽셀이라는 조형기호를 기본으로 하여 형상을 구축해낸다. 그 형상은 개인의 느낌일 수도, 반복적 층위로 쌓아올린 알 수 없는 형태일 수도 또 어떤 특정 대상이 될 수 있다. 가장 작은 단위의 조형기호, 그것은 픽셀 이외에 수학 기호도 해당된다. 수학공식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화면 가득히 채워 넣는 작가는 자신의 내적 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결국 집합적인 화면을 구성해내고, 응축적이고도 강렬한 느낌을 표현한다. 언뜻 그것은 기계적인 반복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작가 자신의 신체적인 정동에 의해서 생성되고 촉발되는 것으로써 자신에게로 출발하여 결국 자신 바깥으로 나와 연결하고 소통하려는 무의식적인 힘이 내포된 강렬한 개인적 욕망으로 비춰진다.

(좌)픽셀의 화염, 39.4x.54.5cm, 종이에 마카, 2019 
(우)바다모래 수학드로잉, 116.7x91cm, 캔버스에 포스카와 아크릴, 2018
(좌)픽셀의 화염, 39.4x.54.5cm, 종이에 마카, 2019
(우)바다모래 수학드로잉, 116.7x91cm, 캔버스에 포스카와 아크릴, 2018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부딪히는 존재들의 만남은 다양한 형상이 된다. 어떤 모습을 취하든, 연결을 하고자 하는 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루어진다. 멜라니 클라인(M,Kien)에 따르면 연결(connexion)은 “부분대상”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연결을 위한 파편적 기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를 아동정신분석에서 아동이 엄마의 신체를 부분적으로 인식하면서 부분적 대상(예를 들어 머리칼, 침 등)에 집착하는 맥락과 같이 둔다. 이 같은 내용을 작가가 ‘픽셀’이라는 부분적이고 파편적인 조형기호를 구성해내고 이를 쌓아올리며 확장해나가며 새로운 픽셀의 형상들을 만들어내는 것과 겹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분자적 형태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생성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은 외부대상과 끊임없이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만들어낸 그만의 자연스러운 방식인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예술은 시각예술, 청각예술 등 다양한 장르로 파생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공통된 미분화된 감각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여기서 미분화된 감각이란 힘들의 교차, 부딪힘, 횡단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 통일성으로서의 리듬(rhythm)이다. 이성의 힘이 개입하지 않는 이 원초적 감각은 비재현적인 예술로서만 가시화될 수 있다. 따라서 추상(abstraction)은 이 원초적 감각과 보이지 않는 힘을 포착하는 본원적인 예술의 형식이다. 예술은 대상을 모방하려는 충동이 아닌, 대상을 변형시키려는 추상충동2에서 성립하며 대상보다 선행하는 힘을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현의 양식은 대상을 재인(recognition)한다. 하지만 추상양식은 감각의 강도(intensit)을 그려낸다. ‘감각’을 통해 회화는 신체가 출현하는 장이 되며, 하나의 존재론적 사건이 된다. 그리고 이 감각은 감각의 이행을 수반하는 종합적인 것으로, 즉 시각적이면서 촉각적이며, 청각적인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최근 김현우의 그림이 점차 형태를 벗어나 공감각적인 추상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일명 ‘소리 회화’라고 부르는 최근의 신작에서 원초적인 감각의 힘이 보다 적극적으로 발현된다. 캔버스의 크기는 그의 신체사이즈만큼 더욱 커진다. 그는 소리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며 색과 선, 퍼포먼스 과정까지 회화에 개입시킨다. 회화는 더욱 대상과 형태로부터 해방된다. 형상 대신에 캔버스를 채우는 것은 아이들 웃음소리, 새들의 지저귐, 바람소리 등이다. 몸을 움츠리고 정교하게 집중했던 픽셀의 작업이 확장되고, 신체적 움직임이 확대된다. 회화안의 선은 계속 방향을 바꾸어가며 순수 감각들(sensations)을 순간적으로 포착해나가는 ‘유목적인 선’이 된다. 개념이나 언어가 아닌 오로지 강렬도에만 의존하는 신체적 에너지인 정동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이 추상적인 회화는 그의 신체에서 빠져나오는 생성의 힘을 느끼게 한다. 회화는 이를 담아내기에 더없이 적합한 매체가 된다. 어쩌면 이것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매일을 수행하듯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작가 자신과, 회화의 본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좌)공간의 진동, 162.2x130.3cm, 캔버스에 믹스미디어, 2021
(우)나의 여기, 춤, 116.8x91cm, 캔버스에 아크릴과 먹, 2018
(좌)공간의 진동, 162.2×130.3cm, 캔버스에 믹스미디어, 2021
(우)나의 여기, 춤, 116.8x91cm, 캔버스에 아크릴과 먹, 2018

다시 스피노자의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하나의 개체는 관계에 의존적이지만 또 다른 새로운 관계에 의해 무한하게 변이가 가능하다고 본다. 실존한다는 것은 이처럼 변용의 다양성과 함께 자신의 역량을 확대해나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관계성과 사회성을 함축하고 있는 실존의 긍정적 역량은 기존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개체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무한성3에 대한 스피노자의 고찰은 한계 없는 실존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학적 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한성을 본질로 하는 다양한 생명들에 대한 것으로, 되려 반인간중심주의이며 모든 존재의 동등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량을 긍정하는 힘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관념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 흐르는 정동의 힘으로 외부의 것들과 관계하며 공명하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작가가 바람을 ‘친구’삼아 느끼듯이, 아름다운 그대에게 꽃과 나무가 되라고 말하듯이,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고 관계의 지도를 만들어나가며 그들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써내려가는… 그 같은 행위의 또 다른 해석이 될 수 있다.

(좌)잠실에서 만난 사람들 13.5x19.5cm, 종이에 아크릴과 마카, 가변크기, 2017
(우)작가의 노트 중 일부
(좌)잠실에서 만난 사람들 13.5×19.5cm, 종이에 아크릴과 마카, 가변크기, 2017
(우)작가의 노트 중 일부
김현우의 시
김현우의 시

한 명의 작가의 그림에서 도래하지 않은 시간과 살아있는 이행을 보면서 그리고 정동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접하면서, 손뼉의 마주침과 같은 호흡을 느끼고 적잖이 놀라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 이어짐은, 우연한 동기에서 시작했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기에 더 많은 논의가 작가에게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현우 작가의 작품과 함께 논의해보고자 했던 이번 글은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의미와 배움이 있었다. 작가에게 응원을 전하고, 기고의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리며 글을 맺는다.

《픽셀:무한한 공간 Pixel:Infinite Space》展 전시전경 – 신한갤러리 제공

※ 온라인 전시

※사진 및 영상 제공
신한갤러리, 김현우 작가

※참고문헌

  • 김현우, 『나는 직관적인 노래를 잘 부릅니다』, 손들, 2021.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에티카』, 조현진 (역), 책세상, 2019.
  • 질 들뢰즈, 안또니오 네그리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창현, 김상운, 자율평론번역모임 (역), 갈무리, 2014.
  •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하태환 (역), 민음사, 2008.
  • 김은주, 「스피노자의 ‘무한성’개념과 그 존재론적 의미」,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학위논문, 2002.
  • 이찬웅, 「들뢰즈의 신체 개념」, 『철학』, 제 130집, 2017, pp. 127-153.
  • 이강민, 「공동체의 정서전략으로서 해학연구: 스피노자의 정서(affect)이론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대학원 예술학 석사 학위논문, 2011.
  • 김향숙, 「빌헬름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 양식 심리학의 조건」, 『미술사학연구회』, 제 34집2010, pp. 39-66.

  1.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것을 코나투스(conatus) 라고 한다. 코나투스란 모든 사물에게 내재해있는 자기보존능력이다. 이 코나투스에 의해 모든 사물은 자기를 보존할 수 있으며, 인간도 마찬가지로 정신과 신체가 각각 스스로 자기 권리 안에서 코나투스를 전개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인간의 본질로 정의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최대행복과 자유를 위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도 포괄적인 코나투스의 결과라고 이해한다. / 이강민, 「공동체의 정서전략으로서 해학연구: 스피노자의 정서(affect)이론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대학원 예술학 석사 학위논문, 2011, p. 8.

  2. 보링거는 인간의 근원적 심리욕구로서 예술의욕(Kunstwollen)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 욕구는 두 가지 심리적 충동인 감정이입 충동(Einfühlungsdrang)과 추상충동(Abstraktionsdrang)으로 나누어진다고 언급하였다.… 추상충동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구의 충동을 표현해주는 것으로, 꼭 대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잠재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상충동에서는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있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고유의 감정이 순수하게 선과 형태 색채 등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향숙, 「빌헬름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 양식 심리학의 조건」, 『미술사학연구회』, 제 34집, 2010, p. 40.

  3. 무한성은 ‘실존에 대한 긍정’으로 규정되고 유한성은 ‘이에 대한 부분적 부정’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모든 사물은 ‘신의 변용’이자 직접적 표현이기 때문에 무한하다. 즉 자신의 실존을 무제한적으로 긍정한다. 스피노자는 이를 통해 유적 종적 차이들을 배제하고 모든 사물들 간의 동등성을 확보한다. 모든 사물은 ‘그 사물로 변용된 한에서의 신 혹은 자연’으로서 동등하게 무한한 것이다. 이것이 사물들의 동당한 자연권의 근거이다/ 스피노자 무한성 논문 p. 119.

최소현

미술관에서 전시를 진행하고 교육을 기획/진행하였고, 현재는 신한갤러리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인문학의 힘으로 ‘생각을 전환하는’ 인문예술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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