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발명] ⑳ 인문운동가 이남곡 선생 인터뷰

이 글은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탐구하면서 실천하는 인문운동가 이남곡 선생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남곡 선생은 개인주의를 통과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공동체성Ⅱ’, 근대 물질문명과 개인주의를 내장시키면서 넘어서는 ‘단순소박한 삶Ⅱ’가 마을이나 지역 운동의 큰 테마라고 이야기하신다.

신인문운동가 이남곡 선생. (출처 : 이남곡 페이스북)
신인문운동가 이남곡 선생. (출처 : 이남곡 페이스북)

/ 이남곡 선생

이남곡 선생은 1990년대 법륜스님과 함께 ‘불교사회연구소’에서 활동하면서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고민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공동체생활, 인문운동을 하고 계시다. 스스로를 ‘신인문운동가’라고 소개한다.

/ 질문: 이무열

Q. 청년시절의 변혁운동을 지나 공동체생활을 해오시다 최근에는 인문운동가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인문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길을 알려주고 열어준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때 협동조합이나 지역(마을)활동에서 인문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이다 요사이는 인문교육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고 있어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역(마을)활동에서 인문교육의 필요성을 인문운동가의 입장에서 어떻게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인문운동을, 물질 위주의 행복관과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를 벗어나 우애와 협동의 가치를 내재화하는 자각과 실천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을 비롯한 마을 운동들이 인문교육에 관심을 보이다 관심이 낮아지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이 됩니다.

하나는 인문교육들이 내재화에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측면입니다. 표층의 의식을 건드릴 뿐,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항상성(恒常性)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위에 말씀하신 운동들이 내부보다 외부의 요인들에 더 영향을 받음으로써 자생적이고 자립적인 바탕이 오히려 약화되지 않았나 하는 것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칫하면 운동의 대의나 가치마저 훼손할 우려가 큽니다.

교육이라는 말보다는 학습이나 공동학습이라는 말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그것이 협동조합을 비롯한 마을 운동이나 공동체 운동의 자생적이고 자립적인 생산성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구성원들과 소통하는 능력과 우애를 키우며 협동하는 사회적 공기가 성숙하지 않고는 이런 운동들은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문적 바탕을 내재화하는 것은 이런 운동들을 성공시키기 위한 필수 요소라고 안내하겠습니다.

Q. 지역(마을)사업을 하다보면 회의가 많아질 수밖에 없고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소통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을 하기도 전에 지칠 때가 많습니다. 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시면서 일반적인 토론(회의)과는 다른 의사결정 방식으로 연찬을 소개해오시고 계시는데요. 지역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주민, 행정, 중간지원조직, 전문가 등)들이 참여하는 회의방식으로 연찬에 대한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생각하는 연찬(硏鑽)은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는 ‘반과학적(反科學的)’인 단정(斷定)을 벗어나, 누가 옳은가 하는 다툼이 아니라 그 시점에서 무엇이 가장 옳은가를 함께 찾아가는 태도(態度)와 마음가짐이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회의에서 이것을 적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과거에는 리더십이라는 말이 수직적 질서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그 말을 좀 기피해왔습니다만, 요즘은 오히려 새로운 운동의 수평성을 전제로 실제로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십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우선 해당 운동들을 진행하는 리더들이 이 연찬태도를 몸에 익히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쁜 일정에 그런 시간을 내는 투자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일의 올바른 순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을 위해 가장 귀중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지쳐서 일을 진척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불화(不和)만 심화시키고 희망마저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리더들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늘어나서 각종 회의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런 선구자들이 각종 회의나 사업을 진행하면서 구체적인 진행 방법이나 기술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운동의 수평적 리더십을 숙성하는 플랫폼을 만들어보시죠.

근대 물질문명과 개인주의를 내장시키면서 넘어서는 ‘단순소박한 삶Ⅱ’가 마을이나 지역 운동의 큰 테마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Px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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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물질문명과 개인주의를 내장시키면서 넘어서는 ‘단순소박한 삶Ⅱ’가 마을이나 지역 운동의 큰 테마라고 생각합니다.
사진 출처: Pxhere

Q. 2019년 춘천에서 ‘좋은 삶, 좋은 사회’를 춘천시민의 손으로 만들어가자는 취지의 ‘좋은 삶, 좋은 사회’를 위한 춘천인문 포럼에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참가하셨습니다. 또 젊은 벗들과 새로운 운동으로 ‘익산희망연대’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지역에서의 인문운동의 경험을 들려주시겠습니까?

그동안 여러 단체나 운동들에서 요청이 있을 때, 소통과 대화 그리고 공동의 탐구와 실천을 위한 인문적 바탕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 익산으로 이사를 하면서 창립 때부터 참여해 오던 희망연대 활동의 일환으로 내 나이나 건강에 걸맞는 활동을 논의 중입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인문산책’을 아주 편안하게 해보았으면 합니다. 한 시간 정도 ‘논어 산책’을 희망연대의 여러 활동 가운데 자연스럽게 내장(內藏)시킬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 고전(古典)을 매개로 여러 현실과 자신의 마음들을 검토하는 화기(和氣)있는 자리가 된다면 저에게는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Q. 기후재난과 코로나19팬데믹 상황에서 국내외에서 불확실하고 불안한 근대적 삶의 대안으로 지역(마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결국 근대 성장과정의 여러 가지 문제와 함께 훼손되고 중앙 집중화된 지역(마을)을 회복하는 일은 사람들의 몫일 텐데요, 어떻게 지역(마을)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고 싶고, 가고 싶고. 나아가 살고 싶은 지역(마을)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팬데믹이나 기후위기 같은 인류 존속이 물어지는 시대에 흔히 말하는 산업시설이나 돈벌이 사업 등을 유치하는 방법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새로운 문화’와 ‘사회적 공기’를 만드는 것과 이어질 때라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업화 이전의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기후위기와 인공지능(AI)시대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살고 싶어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어떻게 보편화될 수 있을까요?

근대 물질문명과 개인주의를 내장시키면서 넘어서는 ‘단순소박한 삶Ⅱ’가 어떻게 유행할 수 있을까가 마을이나 지역 운동의 큰 테마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과학기술의 발달은 놀라운 세계를 열어갈 것인데, 기후 위기 등을 넘어설 수 있다면 아마도 자연친화적 소농이나 예술성을 발현하는 수공예 등 자아실현에 좋은 일(직업)들이 가장 인기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조건들은 상당히 성숙할 것인데, 오랜 물질 위주의 행복관이나 각자도생의 이기주의 같은 의식의 관성이 변하는 것이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21세기의 르네상스 운동을 꿈꾸어 봅니다.

Q. 공동체에 대한 기성세대의 전일, 집단, 공동, 책임 등의 경험과 다르게 청년들은 개인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연결 짓고 있습니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공동체에 대한 다른 경험과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전 질문에서 대답한 것과 통하는 질문이군요.

이전 세대의 경험들, 전일성, 집단성, 책임감, 공동체성 등이 당위나 사명으로 되는 것은 과거 운동에서는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자유욕구를 억제하는 면이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이기적 경쟁과 결합되는 단점이 있음에도, 개인의 자유와 해방은 하나의 추세라고 생각합니다. 이 개인주의를 통과하여 그것을 넘어서는 ‘공동체성Ⅱ’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꽤 긴 과도적인 시기를 통과하리라고 봅니다.

청년 세대가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개인주의가 공동체성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청년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돕는 방향에서 함께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성Ⅱ’를 지향하기 위해서, ‘활사개공(活私開公)’의 의식의 진화를 바라봅니다.

Q. 행정이 주도하는 도시재생과 마을 사업 등에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반면에 눈에 띄는 성과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많이들 예산을 집행하는 행정이 사업을 주도하고 주민참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지역(마을)사업에 관심을 갖고 자발적으로 지역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행정이 주도하는 지역(마을)사업에 민간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할까요?

어떤 분야는 행정이 주도할 밖에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데 주민이 주인이 될 사업 분야에 관주도의 예산투입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자칫하면 지역(마을)운동의 가치나 희망이 근본에서 훼손될 위험이 크고, 실제로 그런 현상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병아리가 부화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로 ‘줄탁동시’(啐啄同機)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민의 준비가 ‘줄’이라면, 관의 도움이 ‘탁’인 것이지요. 내부(줄)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외부가 먼저 쪼면(탁),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해하는 것이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역(마을)운동에 대한 일대 성찰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중앙이나 지방의 권력이나 정책이 바뀌는 것이 지역(마을)사업에 사활적인 요인으로 되는 것을 넘어설 수 있어야 운동의 건강성이 확보되리라 봅니다.

Q. 지역(마을)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제일 어렵다고 합니다. 지역(마을)을 활성화하려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왜 갈등이 발생할까요? 또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해관계가 달라서 발생하는 갈등은 피할 수 없겠지요. 그 경우는 이해관계를 서로 타협하는 길밖에 없겠지요. 갑을(甲乙)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지 않도록 제도나 법규 등을 개선하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그런데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것도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결국 ‘아집(我執)‘의 다툼 때문이지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특히 리더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연찬태도를 몸에 익히는 장(場)을 만들고, 그것을 항상성 있게 운영하는 것은 결코 ‘한가한’ 일이 아니라, 절실한 현실적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Q. 얼마 전 익산 소통시문에 기고하신 글<협동조합이나 마을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에서 충(忠)과 서(恕)를 예로 들어 자아실현과 상생의 길을 설명하셨습니다. 자아실현이 자기를 넘어 함께 살아가는 지역에서 어떻게 우애와 생산력(활동력)을 증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충(忠)과 서(恕)는 공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했다는 것인데, 서(恕)는 그런대로 많이 인용되는 말이지만, 충(忠)은 인기가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거부감마저 많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국가나 군주를 대상으로 충(忠)이란 말을 사용하다보니까 그렇습니다만, 그것은 그 시대와 사회의 한계이지 충(忠)자체의 의미는 아니라고 봅니다. 서(恕)가 상대를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상대를 살리는 것이라면, 충(忠)은 자기를 최대로 실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이지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전념하여 그것이 기쁨으로 되는 상태가 충(忠)이라고 생각합니다. 협동조합이나 마을 만들기 같은 운동에서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일반 자본주의 사업과 다른 동기로 생산성이 확보되지 않겠어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어지고, 자기가 충분히 자기를 실현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나 마음이 더 쉽게 열리지 않겠어요. ‘충’이나 ‘서’ 같은 말은 고풍(古風)이라 다른 말로 표현하는 것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더 다가가기 쉬울 것 같군요. 좋은 말들을 만드는 것도 큰 생산이라고 봅니다. 한번 만들어보시죠.

Q. 물질주의의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영성과 마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마을 또한 물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포섭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질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물질과 영성의 균형 잡힌 태도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물질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물질에 사로잡힌 태도의 하나일 수 있지요. 물질을 부정하는 것보다, 이제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을 찾고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불교의 개교 표어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구호가 있는데, 보편적으로 음미할만합니다.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에 의한 물질개벽을 긍정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영성’이라는 것도 개인적인 깨달음에 그쳐서는 자칫 아집을 더 교묘하게 키울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영성으로 이어질 때, 자신의 행복은 물론 사회의 행복을 함께 증진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그 영성 가운데 하나가 앞에 이야기한 ‘단순소박한 삶Ⅱ’를 즐기게 되고, 이웃과의 사이좋음이 커지는 것입니다.이웃과 사이가 안 좋고, 단순소박한 삶의 풍요를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을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Q. 끝으로 ‘논어_삶에서 실천하는 고전의 지혜’라는 책을 내시기도하면서 논어와 공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노년의 활동으로 해오고 계신데요, 논어에 나오는 글귀 중에 지역(마을)활동을 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구절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가장 간단한 것으로 두 개만 소개하겠습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화합하되 같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공호이단 사해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 자기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자기에게 맞추려하지 않으면 사이좋게 되고, 자기와 다른 생각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검토의 대상이라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 마을 운동이 즐거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2022년 발행예정인 책 『지역의 발명(가제)』(착한책가게)에 대한 출간 전 연재 시리즈입니다.

이무열

관계로 우주의 풍요로움을 꿈꾸는 ‘마케팅커뮤니케이션협동조합 살림’에서 기울지 않은 정상적인 마케팅으로 이런저런 복잡한 관계를 설계하고 실천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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