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절대 못 탄다’는 후배를 꾀고 어르고 달랜 끝에 결국 배낭을 싸게 했다. 녀석에게까지 연락이 닿게 된 건 그저 평일에 산에 같이 갈 만한 사람을 찾느라 핸드폰에 기록된 번호대로 무턱대고 전화를 돌리다가 그야말로 ‘딱 걸린’ 탓이다. 그가 산에서 발길을 끊은 지가 벌써 2년이라는데, 그가 밝히는 ‘산에 갈 수 없는 이유’는, 한 마디로 ‘염치’였다. 순천만이 코앞인 바닷가 촌마을에서 나름 신동 소리를 듣다가 상경한 녀석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좋은 대학을 다니며 산악부 활동도 열심히 하고 히말라야 고산 거벽을 몇 번 다녀오기도 하며, 그야말로 쓸 만한 젊은 사람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 바닥에서 선배들의 주목을 받던 재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을 끊곤 두문불출하는 것이었다. “공부하러 간다”는 말을 들은 게 마지막이라 그저 취업 준비로 바쁜 여느 대학생들처럼 책과 씨름하고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진 출처: chulmin1700
녀석은 지금 순천만 갯벌에서 새벽마다 꼬막배에 오르고, 썰물 때에는 ‘널’을 탄다고 했다. 책을 펴면 인수봉이 떠올랐는지 학교는 학사경고 몇 번 끝에 제적당한 지 꽤 됐고, 이제는 부모를 볼 낯도, 산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볼 낯도 없어 그저 뻐근하게 온몸을 부대끼는 것으로 하루하루 산단다. 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녀석은 매일 바다를 향해 통음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녀석에게 산에 가자고 꼬드기고 다그쳤던 날들, 바위에서 얼음에서 그것이 마냥 멋진 신세계인양 떠들었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이 결국 바닷가 빨랫줄에 아무렇게나 걸린 뻘투성이 ‘가빠’로 남았구나. 죄라면 산을 오른 것뿐이었을 터인데, 녀석은 세상의 모든 정규 탐방로에서 벗어나 조금 샛길을 찾아 나섰을 뿐인데.
“형님. 마침 꼬막이 들어왔는데 좀 드실랍니까. 산에서 먹게 무침 좀 해놀랑게요.”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이 다시 전화가 왔다. 그래도 녀석은 봄바람처럼 은근히 찾아온 산행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나 쏟아진 남부지방의 폭우가 이제 그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그만큼 코끝에 전해지는 공기는 옅은 황사 속에서도 사뭇 신선했다. 우리는 광양 백운산(1218m)으로 향했다. 나도, 녀석도 처음 밟는 길이다.
백운산이란 이름 만큼 이 땅에 흔한 것이 없다. 시인 장호는 ‘백운’이라는 산명을 일러 그 수가 단연 한국에서 으뜸갈 것인데,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 등 한자문화권에서도 볼 수 없는 경우라며 흰 구름이라는 이름이 산에 가서 붙은 데 대해 풀어냈다. 그는 “첩첩 산 주름 안에 갇혀 사는 한국인의 눈에 산 너머로 시원스레 흘러 다니는 흰 구름은 분명히 자유의 표상이었을 것’이라며, ‘(산을 백운이라 부른) 이들은 그 흰 구름처럼 집착에서 벗어나듯 속세간 이해타산에서 떠나 무심으로 이르는 길을 생명의 이상으로 살았음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백운산이란 이름은 한국인의 고매하고도 청결한 성품으로서 모든 산에 대한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운이라, 어찌 이보다 더 고고할 수 있으랴.
그러나 마치 “저 숲에 참나무가 무성하다고 하나 정작 참나무란 나무는 한그루도 없다”는 말처럼, 산정에 산악인의 지표와 삶이 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그 ‘백운’과도 같이 흔하디 흔하면서도 실제로 손에 잡히진 않는 무엇이란 결국 장삼이사들의 삶에서 흰 구름이 아닐까. 녀석은 순천에서 백운산으로 이동하는 사이 줄곧 뻘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풀어놨다. 아마도 그동안 대화를 갈망했을 테지. 그는 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참꼬막과 새꼬막을 구별하는 법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지난 겨울 몰아친 한파로 얕은 뻘에서만 자라는 참꼬막은 대부분 얼어 죽었으며, 꼬막 키우는 게 곧 도박과도 같다고 녀석은 말했다.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진한 남도 사투리가 녀석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올 때마다 짭조름한 뻘 내음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난 추임새를 넣듯 그의 말을 받아갔다.
우리는 포스코연수원을 출발해 능선길을 따라 억불봉이 바라보이는 능선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좁은 여관방에서의 한잔보다는 여러모로 그게 우리에게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제법 묵직한 배낭엔 소주 두 병을 끼워 넣었다. 그거면 충분할 터였다. 어스름이 짙어진다 싶을 무렵 노랭이봉에 닿았다. 바람은 시원하기도 제법 거칠기도 했다. 낮게 깔린 나무와 풀들은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부옇게 저물어가는 산마루로 육중하게 꿈틀거리는 능선이 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다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다. 녀석이 물을 뜨러 간 동안 바람을 헤집고 겨우 플라이를 쳐놓았지만 그가 돌아와 드디어 락앤락 통에 담긴 꼬막무침을 까 불과 몇 잔을 주고받는 사이 뺨을 때리듯 갑자기 불어 닥친 바람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아무렇게나 쓰러져버린 병을 주워왔을 땐 불과 몇 방울의 소주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하늘의 별을 세다 겨우 눈을 감아도 이내 나뭇가지를 흔드는 굉음에 정신만 더 또렷해져 갔다.
대부분의 산에서 맞는 아침이 그렇듯, 언제 그런 소란이 있었나 싶게 태양은 고요하게 떠올랐다. 우리의 앞으론 줄기가 푸르른 억새 능선이 쭉 펼쳐져 있었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어 우리는 쉬지도 않고 걸었다. 별로 말이 없었고, 그나마 곧 뻘 이야기로 모아졌다. 산에 안 간지 하도 오래되어, ‘잘 걸을랑가 모르겠다’던 녀석은 늘 저만치 앞서 갔고, 바위턱에 올라 뒤를 돌아보며 기다리다간 또 이내 걸음을 옮겼다. 하나 우리는 무엇에 쫓기듯 한 것은 아니었다. 걷는 게 곧 휴식이었고, 이 침묵은 사실 말보다도 큰 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으로 이끄는 길은 바위턱을 따라 뻗어 있었다. 굵은 동아줄을 늘어뜨려 놓았으나, 녀석은 오랜만에 꺼슬한 바위를 딛고 그리로 올라갔다. 뒤돌아 본 능선은 이제 막 봄이 찾아오는 양 싶었다. 푸르지도, 부옇지도 않은 빛깔들이 그래 거시기하게, 여느 평범한 세상의 모든 백운산과 같은 모습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선대를 돌아 이제 한재까지는 줄곧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는 내리막이다. 또아리봉까지 가볼까나, 아니면 참샘이재나 도솔봉쯤까지도 가서 뻐근하게 하루 수십 킬로미터를 걷는 여느 산꾼들처럼 우리도 걸어볼까 했던 생각은 한재에 다다라 나타난 계곡 앞에서 모두 흩어져 버렸다. 내려가자. 그리고 첫 번째 나타나는 가게에서 막걸리를 마시자. 술기운으로 나머지 동곡천을 걸어가던지 주인장에게 말을 잘하면 트럭을 얻어 탈 수도 있을 게야.
집에서 담갔다는 막걸리는 걸쭉한 것이 그야말로 입에 착착 감겼다. 밥을 청했더니 꼬막 반찬이 나왔다. 술 한 동이를 비우고 나서, 우리는 은근히 술집 주인의 눈치를 살펴가며 요행을 바랐지만 돌아온 대답은 버스 시간표뿐이었다. 결국 “요 앞에 오 분만 걸어 나가면 있다”는 정거장을 찾아 십 분여를 남겨두고 아쉬운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나, 정거장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고개를 빠끔 내밀어 보고서야 눈앞에서 유턴해 저만치 멀어져 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보았을 뿐이었다.
사는 게 늘 그렇지.
걱정 마라 버스는 또 온다.
한 두어 시간쯤 후에라도.
저 부는 바람에 색이 있으랴.
녀석과 나는 또 다른 가게를 찾아 조금은 호기롭게 또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