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라면, 할 수 있어

지난 9월 25일 전국의 시민이 참여하는 집중 1인 시위가 진행되었다.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각각의 지역과 집 근처의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에서 “지금 당장, 기후정의”를 중심으로 각자가 원하는 문구를 포장박스 종이에 적어 참여하였다. 열 살 아이(그녀라고 부른다)와 함께 인생 처음으로 참가했던 좌충우돌 기후행동 도전기를 공개한다.

기후행동은 처음이라

몇 달 동안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실천 활동을 같이 기획하고 있는 학부모 단톡방에 ’9월 25일 집중 기후행동의 날 – 대규모 1인 시위, 온라인 집회‘라는 제목을 시작으로 긴 글이 올라왔다. 구로지역에서 아들과 함께 참여한다는 분의 말을 들으니 ’나도 딸하고 같이해볼까?’라는 무모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막 하교한 그녀에게 대충 설명해놓고 무작정 신청해버렸다. 나보다 한참 젊은 그레타 툰베리와 청소년 기후행동에서도 적극적인 시위를 펼치고 있는 긴급한 상황에 우리라도 힘을 보태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후행동 신청 완료 화면을 캡처했다. 적어도 우리 둘이 기념해야 할 만한 수많은 날 중에 하나라고 정했다. 사진 제공 : 김은제
기후행동 신청 완료 화면을 캡처했다. 적어도 우리 둘이 기념해야 할 만한 수많은 날 중에 하나라고 정했다. 사진 제공 : 김은제

내가 언제나 늘 그래왔듯이 기후행동 준비도 하루 전날 벼락치기로 시작했다. 엄청난 준비물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시위에 사용할 피켓을 만들어야 했다. 어젯밤 아무 생각 없이 모든 종이박스를 정리한 기억이 났다. 그녀를 집에 두고 종이박스를 찾아 나섰다. 주택가라 어렵지 않게 박스를 구할 수 있었다. 묵직하고 흰색이라 피켓 만들기 좋겠다며 신나게 들고 왔다. 근데 웬걸, 가위로 박스를 자르는데 어디선가 빨간 가루가 떨어지면서 매콤한 향이 난다. 아뿔사, 고춧가루를 담았던 박스인가 보다. 다시 박스를 찾아 나서고 싶지 않아 걸레로 열심히 닦아 그녀 한 장, 나 한 장, 예비용으로 두 장 예쁘게 잘랐다.

근데, 창피하지 않을까?

각자 자유롭게 만든 기후행동 피켓. 이것도 처음이다. 사진 제공 : 김은제
각자 자유롭게 만든 기후행동 피켓. 이것도 처음이다. 사진 제공 : 김은제

자, 이제 글씨를 잘 보이게 써야 하는데. 주최 측에서 예시로 준 문장이 선뜻 내키지 않는다. ‘지금 당장, 기후정의!’는 알겠는데 ‘석탄발전 중단하고 신공항계획 철회하라’라든가 ‘엉터리 시나리오 탄중위를 규탄한다’ 등의 시위대 느낌의(?) 단어가 익숙하지 않다. 처음 1인 시위를 하는, 그것도 아이와 함께할 예정인 기후행동 ‘초보자‘인데, 작게나마 있던 용기마저 사라지려고 한다. 혹시 아이도 마음이 바뀌었을까 싶어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근데, 내일 창피하지 않을까?” “엄마, 사실인데 뭐가 창피해.”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무심히 대답한다. 그래, 네 말이 맞는다. 이건 사실이다. 창피는 거짓으로 감추려는 사람이 느끼는 거지. 암 그렇고 말고. 조심스레 ‘2030 감축목표 정의롭게 수립하라’라고 자신 있게 써 내려간다. 용기낸 김에 ‘작은 실천 강요 말고, 정부가 책임져라’라고 더 적어본다. 중급자의 마음으로 피켓은 완성했다.

나를 버리고 가지 말아줘

손에서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사진 제공 : 김은제
손에서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사진 제공 : 김은제

추석 연휴를 앞둔 주말이지만, 코앞에 닥친 1인 시위 덕분에 집안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집에서 가장 큰 에코백을 꺼내어 피켓을 담는다. 더 필요한 게 있을까 싶어 카톡을 열어보니 드레스코드가 주황색이란다. 어쩌지. 산 넘어 산이다. 아무리 찾아도 주황색 아이템이 없다. 아이가 즐겨 입는 주황색 후드점퍼를 목에 두르기로 한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어느새 3시다. 우리는 아이 학교 정문 앞의 지하철역 출구를 선택했다. 갑자기 아이가 주저한다. “엄마, 나 못할 것 같아. 친구가 지나가면 어떡해?” 이게 무슨 소리람. 너가 나보고 창피하지 않다고 했잖아. 나는 어른이니까. 이건 개인의 선택이니까 강요하지 않는 게 맞겠지. “근데, 같이 하기로 했잖아. 다른 데서 시간 보내다가 올래? (정말 갈 거야?) 엄마는 여기 있고 싶어.” 아이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본다. “엄마 혼자 있으면 외로우니까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아이고, 같이 있어 주신다니 황송합니다. “그래, 한 시간 금방 갈 거야. 주말인데 친구들이 학교 앞에 올 리 없어. 끝나고 돈까스 먹으러 가자.”

이제 남은 건 한 시간의 용기

저렇게 사진을 찍고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보니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건 인정. 사진 제공 : 김은제
저렇게 사진을 찍고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보니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건 인정. 사진 제공 : 김은제

부랴부랴 피켓을 똑바로 들고 출구 앞에 자리를 잡았다. 온라인 기후행동을 같이 한다고 해서 줌(Zoom)에 접속해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10분 지났을까? 킥보드를 탄 무리가 다가온다. 어디선가 본 아이들 같은데. 맙소사, 딸아이 친구들이다. 마스크에 가려지지 않은 아이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더 크게 인사했다. “어! 안녕! 어디 가니?” 인사를 잘하던 아이들이 당황한다. “이게 뭐예요?” “어, 이거 기후행동! 너희 이거 배웠지?” 그냥 나를 지나쳐간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묻고 싶지만, 옆에서 딸아이가 내 옷을 잡는다. 이제 그만 입 다물라는 뜻인가보다. 나도 얼굴이 약간 붉어진 것 같다.

아주머니 한 분은 지나가다 말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이거 무슨 뜻이야?” “얼마 동안 이렇게 있는 거야?” 대견하다는 듯이 쳐다보셔서 다른 사람도 들으라고 열심히 대답했다. 가시는 듯하더니 다시 오셔서 노란색 필통 하나를 주신다. “너무 대견해서 이거 주고 싶어서 왔어.” 옆에 딸에게 주고 나니 “근데 둘이 남매야?” 아니, 내가 잘못 들었나? “네? 제 딸이에요. 제가 엄마예요.” “어머!!! 너무 미안해요. 초등학생인 줄 알고 내가 계속 반말했어요. 에구 정말 실례했네.” 아까 지나가면서 어디 초등학교 다니냐고 물었던 분도, 기특하다며 지나가던 모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다 우리가 초등학생인 줄 알았나 보다. 딸이 옆에서 신나서 웃는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즐기자

한 시간이 지나고 손가락 브이를 만들 만큼 여유가 생겼다. 목에 두른 건 스카프가 아닌 주황색 점퍼다. 사진 제공 : 김은제
한 시간이 지나고 손가락 브이를 만들 만큼 여유가 생겼다. 목에 두른 건 스카프가 아닌 주황색 점퍼다. 사진 제공 : 김은제

어느새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가 옆에서 몸을 배배 꼰다. 40분이 지나니 우리 둘 다 사람들의 관심도 익숙해졌다. 집에 가고 싶단다. 들고 온 태블릿으로 영상도 찍어보고 묵찌빠도 여러 판을 하니 지겹다. 남은 10분 동안 달리기를 해본다. 한 명이 피켓 두 개를 들고 역 앞에 있고 나머지 한 명은 얼마나 빨리 지하철역 한 바퀴를 돌고 오는 시합이다. 시위 규칙에 가만히 서 있어야 한다는 건 없었으니까.

나는 아이와 함께 기후행동 한 시간을 채우는 게 목적이니까. 언제나 그랬듯, 우리만의 방식으로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꺄르르르 웃는 아이의 목소리가 역 앞을 채운다. 달리기가 느린 엄마 모습이 재미있나 보다. “엄마! 4시야!” 서둘러 가방에 피켓을 주워 담는다.

“엄마, 오늘 정말 뿌듯했지? 우리가 해냈어.” 그녀가 돈까스를 오물거리며 말한다. 그래, 우리가 해냈어. “엄마, 다음에 우리 또 같이해. 알았지?”

김은제

세상의 오만 가지 것에 호기심을 가지고 살다가 뒤늦게 생태 전환적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필요한 곳에 쓰임을 감사하며 동네 사람들과 잡지도 만들고, 아이들에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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