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하는 소통 – 『숲은 생각한다』를 읽고

숲에 사는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가지며 꽉 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간다, 저자인 에두아르도 콘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들 간의 소통도 모두 기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을 중심으로 숲을 해석하면서 ‘기호’를 통해 비인간들과의 소통방법에 대해 좀 더 깊은 사고를 유도하고 있다.

다른 부류의 존재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이 문제는 중요하다. 다른 부류의 존재들이 우리를 본다는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p.11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숲, 자연 등과는 조금 먼 생활을 하고 있다. 산속에 살지 않는 이상 가장 가까운 곳은 정돈된 공원이나 강변 산책로 정도일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소소한 자연들은 우리의 시선을 잠시 잡았다 놓아줄 뿐 우리가 생각하는 교류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를 남기지 않는다. 그럼 산책길에 데리고 나오는 반려동물들은 어떨까! 산책길에서 만나는 그들은 무척 활발하고 그들의 주인도 자신의 반려동물들을 세심히 잘 살핀다. 그 과정에서 반려동물과 주인이 주고받는 메시지는 인간이 말로 표현하는 것도 있지만, 동물의 소리나 행동, 눈빛 등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어떤 규칙을 가지고 서로에게 의미로 전달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서로가 서로를 표상하는 방법이 있고 이를 통해 상호 교환되는 요소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교류 속에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존재한다.

다수의 종들간의 관계가 가능하고 그러한 관계를 분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기호적 성향을 부분적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p.25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책, 2018)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책, 2018)

『숲은 생각한다』에서 에두아르도 콘은 숲에서 보여지는 여러 모습들(루나족의 ‘추푸’라는 단어. 원숭이들이 보는 나무 꼭대기의 움직임. 쓰러지는 야자나무 등)을 모두 기호로 보고 있으며, 이는 숲의 다른 동물들에게 주는 신호라고 부른다. 이 기호들은 인간, 비인간을 넘어서 살아있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공원에서 반려동물들과 주인이 나누는 교감을 기호작용으로 본다면, 그들은 서로 보여주는 신호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이해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에두아르도 콘이 아마존강 유역에서 4년 여에 걸쳐 아빌라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살아있는 것들과 우리 인간이 맺는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1장 “열린 전체”에서는 우리가 비인간 존재들과 공유하는 다른 형식의 표상들과 인간 언어가 맺는 관계를 생각한다. ‘추푸’라는 단어는 강물에 뛰어드는 멧돼지의 모습을 표현한다. 야자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모방한 ‘푸오’는 행동을 나타냄과 동시에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또한 쓰러지는 야자나무는 원숭이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른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에두아르도 콘’은 로레토에 방문하는 길에 일어난 산사태에서 느낀 다른 여행자들과의 부조화를 렌즈에 풍금조’가 보인 것을 인식하고 현실의 ‘나’를 다시 인식함으로써 극복한다.

2장 “살아있는 사고”에서는 모든 생명은 기호적이며 모든 기호작용은 살아있다고 말한다. 즉 생명은 사고하며 사고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아메리가와 루이사는 개들의 짖는 소리를 듣고 그녀들만의 해석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들의 해석이 아닌 그 개들이 자신들을 짖게 만든 상황을 어떻게 해석을 하고 있냐는 점이다. 큰개미핥기의 진화과정과 가위개미들이 생태적 시간에 맞춰 날아오르는 행위 속에는 그물처럼 연결된 구조와 기호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살아있는 기호들은 자기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숲의 생명체들을 포괄한다. 아발라의 루나족들은 이런 비인간인 자기들과 관계를 맺고, 루나 푸마(인간 포식자)가 됨으로서 숲에서 먹잇감으로 인정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들은 포식자가 되기를 바람과 동시에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를 바란다.

자기는 기호다. 생명은 사고다. 기호작용은 살아있다. 따라서 세계는 활기에 넘친다.

p.175

3장 “혼맹“은 삶이 창출하는 자기의 다양한 소멸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스탠리 카벨이 “일상 생활”의 “작은 죽음들”-우리를 관계 밖으로 끌어내는 수많은 죽음들-이라 부른 것이다.(p.183)

아빌라 사람들은 다른 존재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혼을 가진다. 자신들이 동물의 신체를 흡수함으로써 그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됨으로써 포식자가 될 수도 있고 먹잇감이 될 수도 있었다. 루나족의 샤먼은 혼을 훔칠 수 있었고, 혼을 빼앗긴 자는 더이상 동물을 탐지할 수 없게 된다. 먹잇감을 구별할 수 없어졌기에 더이상 사냥을 할 수가 없다. 루나족은 동물의 신체와 관점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하지만 먹기 위해선 고깃감으로 대상화된다. 결국 혼맹은 활기를 상실한 나약한 자신의 모습일 뿐이다.

4장 “종을 횡단하는 피진”은 생태학 속에서 많은 자기들이 다른 많은 부류의 자기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가는 삶과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재규어를 개로 기르는 주재자들과 개의 꿈을 이해하고 대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환각제를 사용하는 루나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개를 기르는 숲의 주재자들은 백인 지주나 성직자로 표시된다. 예부터 가축화가 진행되었던 개들은 인간과 끊임없이 지배과 복종의 관계가 확립되었으며, 스페인군이 개를 이용해 루나족을 습격한 뒤, 개들은 잠재적 포식자로 인식되었다. 루나족은 개의 꿈을 알고 그들과 대화하기 위해 환각제를 먹이고 땅에 묶기도 한다. 이는 식민지 시절 우위에 있던 백인과 루나족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동물이 인간의 발화를 이해할 수 있는지 혹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다. 개가 인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환각성 물질은 먹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p.255

5장 “형식의 노고 없는 효력”은 생명의 수많은 형식들이 숲의 관점에서 관계하고 생각하고 성장하며 그것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확산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장에서 형식은 각각의 체계들에 부과되는 인간의 인지적 도식이나 문화적 범주와는 다른 무언가의 결과라고 말한다. 형식은 살아있지도 사상의 일부도 아니지만 존재한다. 아마존에서 보여진 고무경제는 아마존에서 자라는 고무나무와 그 주변 환경. 서방의 경제적 요구에 힘입어 강의 패턴 등 일련의 형식들이 연결됨으로써 맞춰진 식민지 경제와 생물적 영역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아마존에 실존하는 많은 부분들(강의 소용돌이 등)은 각각의 형식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얽히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형식은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소멸하게 된다.(하천이 막히면 흐름의 형식이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이 창발하고 관계 맺는 연속성과 방법에 대해서도 주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6장 “살아있는 미래”에서는 영적인 존재인 주재자들이 살고 있는 숲속 깊이 위치한 사후 세계와의 연관을 설명하고 있다.

아빌라에서 루나 푸마는 일종의 자기성숙과 동의어다. ~사후에 그들의 인간적인 피부가 매장된 후에 그들은 재규어의 신체로 들어가 하나의 자기로서 그리고 하나의 ’나‘로서 존속하게 된다. 즉 푸마-되기는 현세의 권력 강화의 한 형식이다.

p.343

루나족은 현재의 ‘나’보다 더 높은 수준의 ‘나’로 들어가기를 원하는데 그것에 사용되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즉 주재자들의 영적인 영역은 인간적인 것을 넘어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숲에 사는 수많은 타자들(동물들. 영들. 죽은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숲은 생각한다』의 각 장들을 살펴보았다. 이 책은 아마존에 사는 원주민인 루나족을 통해 숲과 인간이 관계를 맺고 그들과 공유하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본인이 인류학이나 기타 철학 등에 유능하지 못한 관계로, 만약 편하고 쉽게 숲을 이해하고자 이 책을 찾는다면 기대와 다를 것이란 생각을 하고 읽기를 권한다. 책은 읽는 독자의 관점에 따라 저자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숲은 생각한다』는 숲을 이해하려는 책이 아니라 인간들이 숲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방식으로 숲에서 살아가는 과정을 적은 책이다.

1장 “열린 세계”에서는 숲에서 보여지는 모든 행동과 관계들을 ‘기호’라고 표현한다. 루나족이 숲에서 보여주는 행동과 생각들도 모두 기호와 상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표현하는 의성어들과 내뱉는 말들에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 예상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상호 연관된 숲의 그물 속에서 자신들의 기대와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고 흥미로워한다면 숲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숲은 항상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한 결과는 아닐까? 루나족은 숲에 적응하며 숲에서 발견되는 규칙과 숲이 보여주는 습관을 자신들이 살기 위해 알아갈 뿐이다. 숲을 이해하는 방식도 모두 인간이 중심이 되고 있다.

2장 “살아있는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비인간적인 존재들과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방식을 통해 숲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재규어의 시선을 돌리는 것도 다양한 방식으로 개미핥기를 모방하는 것도 모두 숲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다.

첫째, 영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감각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그들 자신을 사람으로 본다. 둘째. 모든 존재들은 그들 자신을 사람으로 보지만 다른 존재들에게 보이는 방식은 관찰하는 존재와 관찰되는 존재의 각각의 부류에 의거한다. (p.168)

비인간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 숲과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지만 루나인은 그들의 관점을 인간의 관점으로 바꿔 해석하려고 한다. 썩은 고기를 대하는 콘도르의 주관적 관점은 사람의 관점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콘도르의 관점인 것이다.

3장 “혼맹”에서는 ‘혼’과 ‘주술’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존에서 살아온 루나족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인내과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살기 위해 강함을 추구하고 그들의 육체를 취함으로써 그들과 같아져 숲에서 살아남기를 원했다. 결국 샤먼이나 주술 등도 그들의 나약함을 숨기고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재규어를 음식으로 먹을 때, 사람의 혼이 들어간 누군가가 아니라 그냥 죽은 고기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또한 루나족들은 개를 그들 자신의 권리를 가진 자기로 인정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도구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는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대상의 의미가 바뀌는 것과 같다.

4.5.6장에서는 아빌라의 식민지 역사와 아마존의 경제적 수탈 등을 바탕으로 다른 비인간인 존재들과의 관계와 숲을 지배하는 주재자들의 역할과 그 사이의 형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개와 의사 소통을 위해, 주재자들이 영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환각제를 사용한다.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 다른 영들과 소통하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그들의 방식이라 말할 수 있지만, 개에게 하는 강압적 행동은 개들의 자기는 무시한 인간 중심적인 지배와도 같다. 그 사이 소통의 기호는 소통이 아닌 인간중심의 해석일 뿐이다.

숲에 사는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가지며 꽉 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간다. 사진출처 : Pixabay
숲에 사는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가지며 꽉 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간다.
사진출처 : Pixabay

『숲은 생각한다』는 아빌라 사람들과 백인의 관계를 역사적인 사건들을 포함해 해석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숲의 관계와 숲에 생존을 걸고 있는 아빌라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으로 보여진다.(주재자로 보이는 백인. 꿈에 나타난 백인 경찰관 등) 항상 생존을 위해 죽음과 함께 살고 있던 그들은 숲의 생태계에 더 깊은 동화를 위해 혼의 상태로 접근하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연결되어 있다. 아마존의 숲은 루나족에겐 생존의 장소였고 숲의 모든 것들과 소통하고 이해하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행위였다. 상대적으로 약한 그들이 숲에 의존하며 그들과 대등한 혹은 비슷한 위치에 올라 숲을 이용하는 꿈을 가지고 행위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사이 보여지거나 교환되는 모든 모습과 단어들은 모두 기호이며 표상이라고 에두아르도 콘은 말하고 있다.

책의 첫 면에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라고 쓰여있다. 난 이 책이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숲을 본다고 말하고 싶다. 서양 열강의 식민지 시대를 거친 아빌라의 생활을 통해 나는 그들이 자연에 적응하는 과정, 그 사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숲에 대한 이해, 거절할 수 없는 강함에 대한 적응과 갈망을 느꼈다.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말들은 숲을 관찰하고 습득하고 숲에서 전해진 것들이다. 숲에 사는 모든 것들은 서로 관계를 가지며 꽉 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간다. 에두아르도 콘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들 간의 소통도 모두 기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을 중심으로 숲을 해석하면서 ‘기호’를 통해 비인간들과의 소통방법에 대해 좀 더 깊은 사고를 유도하고 있다.

우리는 산책길에 흙을 파거나 풀 냄새를 맡는 개들의 행동. 제 자리에 멈추는 행위를 느끼고 줄을 당기는 주인들, 개가 시끄럽게 짖는 소리들로 산책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추측할 수 있다. 산책길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은 모두 우리에게 주는 기호라고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개들의 생각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생활 속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이 해석했다는 제한을 바탕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빌라 사람들 역시 생존과 삶이라는 생태적 한계가 있는 상태로 숲과 함께 했고, 저자 역시 인류학,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고 숲을 바라본 것 같다.

내 자기를 버리고 완벽한 타자가 되지 못하면 우린 절대 타자를 모두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내 입장이 아닌 최대한 타자가 되어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혼의 세상에서도 아빌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상태를 이해한다(주재자의 영역으로 들어가거나 재규어가 되는 등). 숲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아빌라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원하기 때문이다. 진정 숲이 그것을 원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의미에 숲을 끼워 맞출 뿐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이익을 위해 자연이 보여주는 기호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한다. 자연이 기호를 통해 많은 의미를 창발하고 관계를 형성하지만, 자연 역시 그들의 눈으로 타자를 볼 것이다. 자연이 보여주는 많은 관계들이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한 기호라고 한다면, 인간은 실재하는 관계들 중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의 관계와 기호만을 보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보거나 인식한 것, 그를 바탕으로 생각한 것들을 우리는 인정한다.

비인간들을 인간의 시각으로 보게 만들 것이 아니라 비인간들의 시각으로 인간을 본다면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인간의 눈으로 계속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들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눈으로 본 이 책의 제목이 ‘숲은 생각한다’가 아닌 ‘숲을 생각한다’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다랑

모두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랑’이라 합니다.
혼자보다는 모두와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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