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②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아버지는 당장은 입으로 식사할 수 없었고 호흡기에 의지해 호흡해야 했다. 걸을 수 없었고, 소변이나 대변을 보기 전에 의사 표현을 제때 하지 못했다. 말도 뭉개졌다. 못 알아들을 발음들로 겨우 목소리를 낼 뿐이다. 과연 나아질까? 다치기 전 지랄 맞던 그 아버지로 돌아올 수 있을까?

※ 가정과 돌봄-영케어러의 아버지 돌봄 기록지①에서 이어집니다.

Ⅲ. 아픈 가족을 돌본다는 것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아버지는 당장은 입으로 식사할 수 없었고 호흡기에 의지해 호흡해야했다. 걸을 수 없었고, 소변이나 대변을 보기 전에 의사 표현을 제때 하지 못 했다. 말도 뭉개졌다. 못 알아들을 발음들로 겨우 목소리를 낼 뿐이다. 과연 나아질까? 다치기 전 그 지랄 맞던 아버지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의사는 뇌를 다친 환자들은 대체로 신체적·정신적으로 후유장해가 뚜렷이 남는다 한다. 아버지의 경우 우측 편마비, 연하곤란, 인지장애, 언어장애 등이 예상된단다. 장해가 남는다는 말은 다치기 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과연 기억은 하고 있을지, 어떤 통증을 느끼고 있을지, 표현할 의지와 수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알 수 없는 채로 그는, 당신은, 아버지는 장애인이 되었다. 나와 동생은 돌봄청년이 되었고.

당분간 일반병실에서 지내게 될 아버지를 돌봐야했다. 그러나 나나 동생이 병원에 남아 직접 돌보기는 어려웠다. 동생은 당장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고, 나는 직장을 그만둘지 말지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결국 그만두긴 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아버지를 직접 돌볼 자신이 없었다. 병원에서 먹고 자고 간병하는 걸 언제까지 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덜컥 겁을 먹은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 형제들 중에 아버지를 직접 돌볼 사람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각자 가족과 생계가 있으니.

결국 직업 간병인을 고용해야 했다. 흔히 입원병실이 있는 병원들은 지역 내 특정 간병인협회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어서 환자 가족들에게 연결해 주곤 한다. 나 역시 병원 측에서 간병인협회 연락처를 받고 간병인을 불렀다.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왔다. 간단히 소개를 하고선 아버지에게 다가가 자못 친절한 태도로 인사하더니 걱정 말라며 나와 동생을 안심시킨다.

이제 나는 나대로 병원비 내는 것부터 산재 승인 신청, 보험금 청구, 또 그가 일하던 현장에 가서 동료들에게 아버지가 다쳤던 당시의 얘기를 듣는 등 관련한 일들을 처리해야했다. 먼저 그가 형틀목수로 일하던 3층 규모의 상가 건축 현장에 가 보았다. 그가 타고 다니던 포터 트럭을 몰고 현장에 도착했다. 바로 다가가지 않고 잠시 조금 떨어져 지켜보기로 했다. 과연 어떻게 작업을 하고 있는지, 관리감독자는 어떻게 안전관리를 하는지 따위의 것들을 살피기 위해.

아버지가 형틀목수로 일하던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이 일하고 있다 ⓒ고미랑

아버지와 동일한 직종인 형틀목수들이 2층 높이의 비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형틀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 관리감독자는 없었다. 현장사무실에도 없었다. 어딜 간 걸까? 그러다 현장에 있던 아버지를 아는 누군가를 만났고 사고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다.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목격담을 들을 순 없었고, 속 시원한 해명 역시 듣질 못 했다. 영 찜찜하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다 어떻게, 왜 다친 걸까? 동료들은 왜 119를 부르지 않은 걸까? 자가용에 아버지를 옮겨 실어 병원으로 나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의문과 함께 원망도 일어난다. 6년이 지난 지금도 해소되지 않은 의문과 원망이다. 의문과 원망은 남지만 산업재해로 승인은 되었다.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당연한 것이라 생각을 고친다. 당연하다 해도 이제 그는 장애인이 되었고, 나는 그를 언제까지일지 모를 기간만큼 직간접적으로 돌봐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 후로 한 달 반을 아버진 전남 순천의 최초 입원한 병원에 있다가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재활병원으로 옮겨졌다. 순천엔 그를 돌봐줄 가족들이 없으므로. 나 역시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며 살던 서울의 반지하 자취방에서 나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김포로 이사했다. 다니던 직장도 곧 그만두게 된다. 김포엔 그의 막내 여동생(내겐 고모)이 살고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할머니가 임대아파트에 늙고 병든 몸으로 홀로 살고 있었다. 또 그 옆 동 아파트엔 아버지 바로 위의 형인 둘째 큰아버지가 혼자 살았는데, 그 역시 아버지가 다치기 몇 년 전에 건설노동자로 일하다 낙상사고로 머리를 다친 산업재해 당사자이자 장애인이었다. 졸지에 아버지와 큰아버지, 할머니까지 당장 직간접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세 사람이 김포에 모여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재활병원에, 큰아버지와 할머니는 각각 임대아파트에 홀로 그렇게.

김포로 이사 와 지내는 동안 나는 고모에게 의존했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모은 돈은 없었고, 어머니는 실종 상태였으며 가족이라곤 군 입대를 앞둔 동생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산재 승인이 되었기에 고모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믿고 의지할 어른이라 생각했고, 또 아버지를 모시고 큰 병원에 갈 일이 생기거나 근로복지공단, 보험사, 은행 등에 방문해야하는 일이 생겼을 때 동행·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물론 처음엔 고모의 존재가 무척 힘이 되었고 가까운 곳에 있어 도움도 되었지만, 얼마 안 가 고모와의 관계는 불편해졌고 심지어 불쾌해지기도 했다.

아버지가 가입한 실비 보험에서 후유장해에 따라 1억 상당의 보험금이 나오자 고모는 김포에 있는 농지 300평을 사서 아버지 모시고 외출(소풍)도 오고 언젠가 여기에 농가 주택도 짓자 했고 나는 그의 말만 믿고 덜컥 땅을 사 버렸다. 얼마 되지도 않는 땅이지만 내겐 부담스럽고 영 찜찜한 결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동산에 함께 가서 내 명의로 계약을 했는데 얼마 안 가 알게 된 사실은 고모의 아들, 그러니까 사촌동생과 내가 공동 명의로 해당 농지를 매입한 것이었다. 내겐 사전에 일언반구도 없었고 한참 후에야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공동 명의로 계약을 했다고 얘기했다. 엄연한 사기였다. 결국 아버지의 보험금은 땅에 묶여 버렸다. 그것도 내 이름 반, 고모 아들 이름 반으로. 의존과 의지인 줄 알았던 고모와의 관계는 아버지 돌봄으로 인한 정서적 취약 상태에서 점차 종속적인 관계로 변했고 이는 내가 원치 않은 관계였다.

1년에 약 60일을 아버지 곁 좁은 보호자 침상에서 먹고 자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내곤 했다 ⓒ고미랑

그 사이 동생은 군에 입대했다. 격주 주말마다 그리고 설, 추석 등 명절 때마다 간병인을 대신해 나 혼자 아버지를 돌봐야했다. 아니 그 반대일지 모른다. 그동안 나 대신 간병인이 아버지를 돌봐왔던 것이라면 원래의 내 자리로 복귀한 것일지 모르겠다. 고작 한 달에 4일, 설과 추석 등 연휴 포함 1년에 약 60일을 아버지 곁 좁은 보호자 침상에서 먹고 자는 것으로 죄책감을 잠깐 덜어내곤 했다.

어느 해인가 추석 연휴 때는 무슨 이유에선지 복통을 겪었다. 좀 쉬면 낫겠거니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도 복통은 계속 됐다. 아버지에게 투정 부리듯 배가 아프다 했지만 별 반응이 없다. 괜히 속상하다. 참다 못해 간호사에게 배가 아픈데 처방 받을 수 있는 약이 없냐 했지만 재활병원이기도 하고 규정 상 그럴 수 없단다. 인근의 약국을 검색해 보았지만 연휴 때라 문을 닫았고 문을 연 약국까지 가기엔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 땐 아버지 곁을 오래 비우면 혹 큰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했을 때였다. 급기야 고모를 호출했다. 당장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배가 아프다고 약을 좀 가져다주실 수 없느냐 부탁했다. 다행히 약을 들고 왔고 먹고 나니 좀 안정이 된 것만 같았다.

복통이 잦아들자 그제야 한산해진 병원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환자 상태에 따라 외출, 외박이 자유로웠기에 명절 연휴 때면 환자들은 집에서 가족들과 연휴를 보내고 오곤 했다. 한편 나는 좁은 원룸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와 함께 병원 밖에서 숙식을 하는 게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삼킴장애(연하곤란)도 있고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발작(뇌전증 증상)을 일으키기도 해서 단순히 간병만 필요한 신체적 조건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이벤트 발생 시 상시 의료적 지원이 가능한 환경에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지나고 보니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서라도, 연휴 때만이라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했으면 어땠을까 후회되기도 한다. 위험 부담은 누구나 안고 있는 것인데 위험에 취약한 신체적 조건이라 해도 예방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미리 갖춰 놓을 걸 하는 아쉬움과 후회다. 더불어 심리적 부담도 있었다. ‘병원에 있으면 덜 신경 써도 되니까…….’라는 마음. 내가 편하고 싶은 그 마음엔 죄책감 역시 뒤따라오더라.

2016년 8월부터 2018년 8월까지 거의 2년 동안 김포에 살며 수시로 아버지를 찾아가 간병인 대신 아버지를 돌보곤 했다. 그뿐 아니다. 흡인성 폐렴에 걸려 컨디션이 안 좋아질 때면 큰 병원에 모시고 가고 호전되면 재활병원에 다시 모셔 오길 반복했다. 또 근로복지공단에서 심사 받으러 오라 하면 아버지를 모시고 심사장소로 찾아가 의사들 앞에서 그의 상태를 입증해야 했다.

그럼에도 심사 결과는 말도 안 되게 부당하여 공인노무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고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공부하고 공단 측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게다가 대학 병원에서 아버지 상태에 대한 의학적 근거 자료들을 확보해야했다. 이처럼 직접 간병 외의 일들로 아버지와 나의 시간과 체력, 돈을 써 가며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유보하거나 타협했다.

그 2년 동안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주 3~4일 출근하는 반상근 형태의 일을 하며 내 생활비 일부를 벌었다. 부족한 생활비는 아버지의 산재 보상금이나 휴업급여로 쓰게 됐다. 내 돈 아닌 아버지 돈을 쓰는 것에는 역시 죄책감이 따라 붙었다. 스스로에 대한 무기력도 함께. 그러나 당장 아버지의 산재 보상금과 휴업급여로 내가 번 돈 이상의 돈이 아버지의 통장에 들어오자 죄책감 보다 든든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를 돌보는 데 들인 내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 같기도 해서.

동시에 외로웠고 두려웠고 걱정스러웠다. 아버지와 나 모두에게 해당하는 외로움과 두려움과 걱정이다. 나와 같이 졸업했던 청년들, 나의 친구들, 직장 동료였던 그들의 삶이 어른거리고 부럽고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온갖 감정들을 헤집지만 그 와중에도 선연한 감정은 슬픔이다. 지랄 같던 성미의 아버지마저 그리워지는 슬픔. 하지만 여전히 그는 살아있기에 그리움만으로, 슬픔만으로 그를 돌볼 순 없다.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버지 역시 외롭고 두렵고 걱정하고 슬퍼하겠지. 그의 몸을 돌보고 그의 감정을 살핀다.

어느새 2년이 지나 동생이 전역했다. 당장 지낼 곳을 구해야했는데 김포의 임대아파트에 살던 할머니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동생은 사실 원치 않았지만 고모의 권유였다. 할머니를 집에서, 곁에서 돌볼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고 마침 전역해 지낼 곳도 필요하니 잘 됐다 싶었던 것이다. 동생은 할머니를 집에서, 나는 아버지를 병원에서 각각 요양보호사, 간병인이 자리를 비울 때 그들을 돌봐야 하는 가족 간병인이 되었다. 전문적이지 않은, 자격증도 없고 경험도 많지 않은 그냥 가족일 뿐인.

2018년 9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1년 간 교제하던 애인과 혼인했다. 모아둔 돈도 마땅한 직업도 없었는데 용케 함께 살게 됐다. 혼인 후 나는 김포에서 군포로 이사했다. 언제든 걸어서 찾아갈 수 있던 거리에서 차로 1시간 이상 떨어진 곳으로 멀어졌다. 거리가 멀어지고 얼마 동안은 아버지가 꿈에 자주 등장했다. 언제라도 걸어서 갈 수 있던 곳에서 이젠 반나절 일정은 비워놔야 갈 수 있는 거리로 멀어지니 아무래도 심적 부담이 있었나 보다. 그 부담만큼이나 자주 찾아뵈려 노력했다. 그렇게 3년이 되고, 4년이 되고, 5년, 6년, 2023년 올해로 7년째다. 변한 건 재활병원이 요양병원이 되었고, Covid-19로 더는 아무 때나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의 외출과 외박은,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고향 집 방문은 더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동그랑

'시인'이 되고 싶어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가까스로 졸업했지만 '시인-되기'는 여전히 요원하고 문단에 등단한 적 역시 없다. 대학 졸업 후 개신교 선교단체 간사로 3년 간 일하다 2016년, 목수로 일하던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상시 간병과 돌봄이 필요한 장애인이 되자 하던 일을 관두고 격주 주말과 명절 연휴 때마다 병원에 들어가 그를 돌보게 된다(최근 3년간은 Covid-19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한 인연으로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일상을 지원하는 사회적협동조합에서 사무국장으로 1년, 이후 대안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모여 만든 청년협동조합으로 이직해 커뮤니티 매니저로 3년을 일했다. 2021년, 기술을 배워봐야겠다 싶어 한옥목수 일을 배우고 실제 문화재 복원 및 보수 현장에서 초보 한옥목수로 일을 하다 열악한 근무여건(근로기준법 미준수,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결국 그만두게 된다. 짧게라도 배운 기술과 일 경험이 아쉬워 비록 목수는 아니지만 2022년엔 수원 화성행궁 복원 현장에서 인턴 공무로 6개월 간 일했다. 2023년 현재는 돌봄청년 커뮤니티 n인분 활동가로, 프리랜서 작가 및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 필명 ‘동그랑’은 강화도에 딸린, 동검도에 딸린, 무인도 동그랑섬에서 따왔다. 말하자면 섬 안의 섬 안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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