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19 이후] 다가온 탈성장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 COVID-19 이후의 사회재편

COVID-19 이후의 사회는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상황에서 관계의 빈곤이 아니라, 더불어 가난을 통해 사회를 재건하는 결사항전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전환의 전망은 그린뉴딜, 기후금융, 기본소득, 에너지전환 등의 가속주의 전망과 탈성장, 더불어 가난, 살림과 협동의 사회, 순환사회, 적정기술 등의 감속주의 전망이 교차한다. 우리는 전환을 가속하면서도 생활양식을 감속하는 배리(背理)의 원리 속에서 새로운 전환의 에너지를 찾는다.

서론 : 문명이라는 비행기는 분명 떨어지고 있다

한때 문명은 4차 산업혁명, AI, 로보틱스, 유전자기술 등을 바탕으로 불사의 몸을 장착한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명백한 문명의 쇠퇴와 붕괴, 몰락의 증후 앞에 서게 된다. 이것은 COVID-19 바이러스와 같은 작은 미생물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는 허약한 신체를 드러낸 것이다. 과연 인간의 의지와 뜻대로 지구가 움직여 왔는지도 의심스럽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허둥지둥 대는 서구문명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과연 선진국 담론이 아직까지 유효한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비행기는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비행기 안에 있는 승객들은 향후 방황, 좌절, 멘붕을 겪을 것이다. 문제는 비행기가 떨어지는 상황이 명백한 경착륙의 상황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은 최대한 충돌의 충격을 줄이는 연착륙으로 향하면서 모든 사람이 다시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COVID-19 이전과 이후는 많이 다를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감염병 질환의 확산은 기후위기와 긴밀한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향후 더욱 가속화될 예정이기 때문에, 문명을 위협하는 제 3의, 제 4의 감염병은 끊임없이 인류문명을 위협할 것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COVID-19 이전과 이후는 문명의 갈림길을 의미할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졌을 당시 사람들은 문명의 세기를 가르는 사건이라고 했지만, 정작 삶의 형태는 거의 변화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COVID-19의 경우에는 거시적인 면과 미시적인 면 모두에서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COVID-19로 인한 피로도로 인해서, 하루 빨리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 이전의 삶을 동경한다. 이 역시 낭만적인 향수의 발호에 불과하다. 앞으로의 경제, 사회, 문화, 삶의 수준은 COVID-19 사태 이전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이 기후위기의 작은 하나의 매듭이라는 점에서, 향후 기후위기가 가속화될 것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이제 위기와 붕괴는 시작된 것이지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완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는 놀랍게도 작동하지 않거나 기능 정지 상태에 빠졌다. 경제의 기능 정지는 자영업자들에게는 가게의 손님들이 사라지는 순간이고, 노동자들에게는 실업의 공포가 엄습하는 순간이다.  by john cameron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IEeqknvHRKQ
경제는 놀랍게도 작동하지 않거나 기능 정지 상태에 빠졌다. 경제의 기능 정지는 자영업자들에게는 가게의 손님들이 사라지는 순간이고, 노동자들에게는 실업의 공포가 엄습하는 순간이다.
사진 출처 : john cameron

드미트리 오를로프는 『붕괴의 다섯 단계』(2018, 궁리출판)에서 붕괴 순서를 금융의 붕괴, 상업의 붕괴, 정치의 붕괴, 사회의 붕괴, 문화의 붕괴라고 본다. 우리는 이미 금융의 붕괴의 경우는 IMF사태나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경험했다. 여기서 상업의 붕괴나 정치의 붕괴는 경제와 정치의 기능 정지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저자는 사회의 붕괴에 맞서 결사 항전해야 할 것이라고 못 박는다. 사회라는 판과 배치가 있어야 비로소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함께 협동할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COVID-19 사태에서의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색다른 대처법 앞에서 사회적 연대를 맺지 못하게 되는 물리적인 현실과 마주치게 되었다. 자가 격리자라고 지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외로운 자가 격리의 긴 시간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듯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사항전하고 있는 동료들과 이웃들의 모습을 여전히 목도하게 된다. 온라인 공간에서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회를 재건하기 위한 무수한 노력과 마주치게 된다. 물론 좋았던 옛날로서의 대면접촉의 시간은 간헐적으로 국지적으로만 허용되는 상황이 지속됨에도 말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당연시했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가를 목도하고 있다. 도시에서는 물, 가스, 전기 등 라이프라인의 연결이 기본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인 사회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는 당연히 미리 주어져 있는 전제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결사항전을 통해서 재건하고 구성하고 만들어야 할 과제가 되었다. 사회는 소모하거나 소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호하고 양육하고 보살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런 점에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미셀 푸코의 발언도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여기서 사회 중에서도 소비주의 사회, 성장주의 사회 등은 기능 정지에 빠졌고 좀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에게 비로소 작동하는 사회는 가난의 사회, 탈성장의 사회이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문명이라는 비행기의 추락으로 인해, 탈성장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색다른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감축, 검소, 절제, 순수, 겸양, 양육, 돌봄, 정동 등 탈성장 사회의 덕목들은 이제 윤리적인 가치를 넘어서 삶의 방식을 이끌 새로운 명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현실의 변화를 직시하게 된다. 탈성장 사회로의 이행을 가속화하고 있는 COVID-19사태를 통해 어떻게 우리의 소비와 향유의 문화에 대한 대대적인 감속을 전개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우리는 전환사회를 COVID-19사태를 맞이해서 문명이라는 비행기의 경착륙을 통해 경험하고 있지만, 이 속에서도 삶이 지속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꽃은 필 것이고, 파도는 계속 칠 것이며, 아이들은 뛰어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재난기본소득 이후의 기본소득

COVID-19 사태는 경제생활과 일상에 엄습한 새로운 국면이었다. 경제는 놀랍게도 작동하지 않거나 기능 정지 상태에 빠졌다. 경제의 기능 정지는 자영업자들에게는 가게의 손님들이 사라지는 순간이고, 노동자들에게는 실업의 공포가 엄습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어떤 쪽에서 소득을 얻을 것이며, 소비를 할 것이며, 생산을 할 것인가? 이 모든 사안들에게 기능 경색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재난기본소득의 논의가 비로소 실현되었다. 1~2년 전까지만 하다더라도 기본소득 논의는 사실상 경제생활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COVID-19 사태는 기본소득이 아니고서는 작동할 수 없는 경제의 상황을 드러내보였다. 놀랍게도 기본소득 논의는 이제 꿈이나 이상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현실의 분명한 작동과 구현의 몸을 갖게 된다. 비상한 상황에서의 비상한 노력은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짧은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 이 역시도 담론이나 이념이 아닌 두말할 필요가 없는 현실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득기준 하위 70%에 한해 시행할 것인가, 보편적 기본소득처럼 따지지 않고 줄 것인가의 여부가 그것이다. 또한 한 번으로 만족할 것인가, 지속적으로 할 것인가의 여부도 그것이다. 이제 장기비상사태의 초입에 들어선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상시화되어야 할 시점에 와있다는 점도 드러난다. 소득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제 할 수 있는 일거리 등도 거의 소멸직전에 와있다. COVID-19 사태를 즈음하여 대량해고의 상황과 일거리의 축소, AI로의 대체 등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과 소득을 연결하는 고리는 더욱 약해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창업지원이나 프로젝트지원 등은 부차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제 직접적으로 기본소득을 통해서 소득보전을 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COVID-19 사태 이전을 향수하게 되면, 기업에 대해서 양적 완화와 금융세재 지원을 통해서 지원하는 정책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업을 통해 일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시장이 기능 정지가 되는 상황은 공공영역의 역할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장기비상사태의 초입에서 기본소득은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삶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항목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때 기본소득의 재원마련에 대해서 고민된다는 식자층이 많았다. 그러나 막대한 공적 자금을 기업회생에 쓰지 않고, 기업을 거치지 않는 직접적인 소득의 차원으로 쥐어준다면, 문제는 매우 간단해지고 즉각적이게 된다. 선별과 분류를 위한 행정력도 그렇게 필요치 않다. 여기서 재난기본소득은 향후 기본소득 논의의 시작점에 불과하지, 단지 하나의 이례적인 현상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살림 없는 경제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수경제의 차원이라고 여겨지는 살림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경제가 잘 작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물, 공기, 바람, 태양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바람은 불 것이고, 태양은 내리 쬘 것이고, 기본소득은 계속 지급되어야 할 것이다.

사재기를 넘어 식량위기의 대안은?

자본주의는 지난 200여 년 동안 오로지 성장과 풍요를 향해 달려왔다. 기존 사회주의 사상 또한 미래에 도래할 공산주의사회를 모두가 부자가 되는 방향으로 생각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견한 미래인 지금, 모두가 가난한 자급자족의 사회로 명백히 향하고 있음을 COVID-19 사태는 알려주고 있다. 사재기가 각국에서 극성을 부린다. 즉, 먹고 사는 문제에서 대처할 수 있는 선택지나 경우의 수가 거의 없다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급자족으로 향하지 않고 소비와 소모로 이루어진 도시생활이, 오히려 선택지가 없으며 소비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음을 드러낸다. 참으로 사재기의 상황은 나 혼자라도 일단 살고 보자는 아수라장을 연출하는 상황이다. 시장에 빵이 없고, 밀가루가 없고, 쌀이 없다. 배고파서 에너지바를 먹고 근근이 버티는 상황이 도래한다. 영양의 문제가 되니 면역은 더욱 약해진다. 그리고 전염병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악순환의 양성 피드백이 등장한다.

최근 러시아와 베트남에서 곡물에 대한 수출 금지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식량위기가 아주 근래에 도래할 것이며, 이미 현실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세계사에서 16세기 절정을 이룬 소빙하기로 인해 엄청난 전염병과 식량위기를 겪은 적이 있다. 한국역사에서도 경신대기근 시기 전 인구의 1/5이 죽는 초유의 상황이 있었다. 21세기 초를 강타한 COVID-19 사태는 일종의 다가올 기후위기의 작은 삽화와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나마 먹을 것이 있고, 사재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자조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식량위기의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인류문명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적다. 특히 도시에서 소비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선택지는 극도로 적다.

21세기 초를 강타한 COVID-19 사태는 일종의 다가올 기후위기의 작은 삽화와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pxfuel(https://www.pxfuel.com/en/free-photo-xszxm)
21세기 초를 강타한 COVID-19 사태는 일종의 다가올 기후위기의 작은 삽화와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pxfuel

식량위기에 대한 대처법은 일단 더불어 가난을 맞이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가난하고 자급자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유한성에 대한 응시가 필요하다. 기후위기 상황이 더욱 가속화된다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섬광과 같은 깨달음이 찾아올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굶주림, 궁핍, 빈곤의 대명사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이 감내하는 빈곤보다 모두 함께 가난한 소농공동체를 선택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소농의 자급자족의 삶으로 가려면 함께 가난해지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살 정도 이외에는 잉여가 나오지 않는다. 돈이 없으며, 향유할 자원이 없고, 문화적인 삶의 방식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여기서 자급자족은 시장에 내다팔 정도의 수준도 안 되는 경작물을 의미한다. 겨우 자신의 가족과 자신만이 먹고 사는 정도가 그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급자족에 익숙하지 않다. 남는 돈이 있어야 하고, 남는 자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곧바로 사재기를 감행했던 사람들의 생각과 동일선상에 선다.

식량위기의 대안은 소농의 자급자족의 삶인 ‘살림의 문명’이다. 소농의 살림은 토지를 양육하고 돌보고 살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토지에서 무언가를 약탈하고 뺏고 갈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토지에서 생명력을 고무하고 부추기고 양육하는 것이 전통적인 유기농 방식의 살림의 문명이 갖고 있는 먹거리 생산의 비밀이다. 이러한 소농이 보여주는 살림의 섬세한 손길이 COVID-19 사태가 살짝 드러내고 있는 식량위기의 상황, 즉 장기비상사태의 시대의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문명의 달콤함은 소농의 살림문명으로의 이행을 가로막고 있다.

가정 내의 살림의 복원

COVID-19 사태는 학교의 개학을 연기시켰고, 회사를 재택근무로 전환시켰다. 자영업은 마비되어서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상황은 자연스럽게 가정에 머무르는 사람들을 늘게 했다. 이 속에서 돌봄과 살림에 대한 색다른 시각들이 제출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가정생활의 외부에 있던 사람들이 가정 내부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돌봄과 살림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가정의 가치의 복원은 큰 의미를 갖는다. 가정은 마음의 집이자, 몸의 거주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정 외부에서의 삶의 비중이 너무도 큰 상황에서 움직이고 이동하는 것에 익숙한 삶을 살아 왔다. 머무른다는 것은 발견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머물러서 계속 같은 환경 속에 살다보면, 전에는 보이지 않던 돌봄과 살림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가족을 유지시켜 주고 지속가능하게 만들었던 살림의 전반적인 과정과 마주치면서 한층 성숙하고 겸양해질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출발점은 살림(Oikos)과 경제(Economy)의 분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까지 살림은 경제에 종속된 그림자 노동의 취급을 받아왔다. 그러나 COVID-19 사태는 경제를 작동 정지시키고 살림만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드러냈다. 경제는 고장 났고 기능 정지되었고 작동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삶과 생명을 반복시키는 살림만이 강건하게 작동하였다. COVID-19 이후의 상황은 살림이 경제를 주도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과거의 성장주의 시대에서는 자원이 있어야 활력(=살림)이 있는 삶이었다면, 탈성장 사회는 활력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자원이 뒤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살림은 삶과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임무뿐만 아니라, 경제 자체도 작동시킬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 지금까지 경제에 의해 살림이 이끌려 가는 것처럼 느껴져 왔다면, 이제부터는 경제는 아마도 살림에 기생하거나 겨우 생명만 유지할 것이다. 반면 살림의 전면에 나서서 삶 자체와 사회적 관계의 재건을 위해서 힘 쓸 것이다. 사실상 살림은 향후 문명 자체의 존립근거가 될 것이 예상된다.

물론 보육, 육아, 교육, 돌봄 등에서 가정 내 불화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계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몸, 생각을 자기생산하는 살림의 가치와 비중에 대해서 새삼 깨닫게 되는 하나의 특이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COVID-19 이후에는 이전의 성장주의 방식의 삶은 많이 퇴색될 것이다. 반면 살림의 영역은 보다 깊은 잠재력과 심원한 가치와 능력을 넓히게 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마음의 고향이자 몸의 거주지인 가정생활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것의 색다른 면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성장주의 시대의 가족이기주의와는 완벽히 다른 생활세계와 삶의 내재성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장기비상 시대는 요행을 바라는 것보다 살림을 통한 강건한 대응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살림의 지혜는 알파이며, 오메가인 가난의 오래된 약속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다가온 탈성장, 더불어 가난의 시대

맑스는 “빈곤은 어떠한 경우에도 찬양될 수 없다”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즉, 개인적인 차원에서 직면하는 빈곤은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하고 끝장내야 하는 과제이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이나 공공일자리 등의 노력이 계속 요구되며 분배를 통해 빈곤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모두가 부자가 되는 방향성으로서의 성장주의가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가난해지는 그런 상태일 수 있다. 즉, 빈곤과 가난은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빈곤은 개인에 점착된 결여와 부족의 상태라면, 가난은 공동체와 살림에 수반되는 관계의 풍요와 충만함과 함께 하는 상태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살림은 늘 가난할 수밖에 없다. 물론 COVID-19 사태는 개인적인 빈곤의 여지와 더불어 관계의 빈곤의 문제를 노정했다. 그러나 점차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더불어 가난의 거대한 판이 설립되었다는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가난을 유통하고 가난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풍부해지고 다양해지는 탈성장사회로 이행한 것이다. 이를 통해 향유하고 소비하고 소모하는 자원이 아닌 가난을 공유하고 유통하는 자원으로 우리의 관심이 이행했다. 그런 점에서 탈성장 사회는 부지불식간에 찾아왔다. 우리는 COVID-19 사태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외로움, 고독, 관계의 절실함 등의 마음의 가난으로 향하게 하는지도 깨달았다. 관계의 빈곤에서 오는 절절한 외로움은 함께 더불어 가난해지지 않고 요행히 혼자서만 성공하고 승리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성장주의의 망상이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COVID-19 사태가 탈성장사회의 현실을 깨닫게 해준 측면은 ‘제한’에 있었다. 자원과 부와 화폐의 제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의 제한이 먼저 다가왔다. 이제 자기 사업을 해서 성공을 하겠다고 꿈꾸는 무한한 가능성의 여지를 두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다. 우리는 제한된 가능성과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한된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 자가 격리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체험했다. 제한은 유한성을 깨닫고 유일무이성을 깨닫게 한다.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그 사람에게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등 관계에 대한 아쉬움은 우리 자신의 제한에서 나온 능력이었다. 성장주의 시대에는 미래는 가능성의 천지이고 가능한 것은 무한하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기능 정지된 성장의 신화 앞에서 모든 가능성과 기회, 선택지의 제한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관계의 소중함을 아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더불어 가난, 함께 가난을 아는 사람이며, 더욱이 가난을 공유하고 유통하기 위해서 선물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탈성장 사회가 함께 가난해질 수 있는 실천적인 행위양식에 눈뜨게 되는 것이다.

탈성장 사회에 대한 전환의 사유는 사실상 이율배반적이다. 가속주의와 감속주의가 함께 동반되기 때문이다. 먼저 가속주의 전략을 통해서 MMT(Modern Monetary Theory), 그린뉴딜, 기후금융, 기본소득, 녹색기술, 에너지전환 등을 통한 전환사회를 꿈꿀 때 사람들은 흔히 여전히 대규모 자원과 부, 화폐를 동원하여 전환을 가속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막대한 기후위기 앞에서 더 빨리, 효율적이고, 더 합리적으로, 더 신속히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다급함의 발로일 수 있다. 자본의 속도에 맞선 활동가(=전쟁기계)의 속도가 여기서 등장한다. 반면 탈성장 사회는 감속주의 전략을 통해서 문명의 전환, 더불어 가난, 정동경제, 적정기술, 협동과 살림의 경제, 순환사회, 느림과 여백을 통해서 삶의 방식의 전환을 추구하는 방향성을 함께 갖고 있다. 이 속에서 굉장히 느리고 여백이 숭숭 뚫려 있고, 살림의 활력을 통해서 구성되는 삶의 내재성의 평면이 등장한다. COVID-19 사태는 늘 빠르게 살던 우리에게 돌연 감속주의적인 생활방식을 선물했다. 더 가난하고 느리고 여백이 많은 삶이 주어졌다. 물론 녹색당의 경우처럼 그린뉴딜이라는 가속주의와 탈성장이라는 감속주의를 동시적으로 사고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 있는 배리(背理)의 논리가 갖는 분열생성론에 따라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전환의 속도를 빠르게, 일상의 가난한 살림의 속도는 더욱 느리게 변화시키는 것이 전환사회의 이중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론 :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COVID-19 사태가 초래한 탈성장 논의는 이제 엄청난 감속, 감축, 검소, 가난 등으로 생활양식을 전환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감속 속에서 따분하고 지루하고 외롭고 지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리듬과 화음을 다시 조율할 필요가 있다. 속도전을 하듯 빠르게 이동하던 모빌리티 사회는 이제 낭만적인 과거의 명제가 되었다. 우리는 머무르는 시간, 여백이 많아 순간의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국지적인 시간대 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더욱 함께 가난해져야 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가난을 유통하고 가난을 선물해야 할 것이다. 함께 더불어 가난해지는 삶이 익숙지 않은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우리는 빈곤을 몰아내고 더불어 가난해질 때까지 감속과 가속의 양 갈래의 투 트랙 전략의 고삐를 놓을 수 없다. 누군가는 COVID-19 사태가 조성한 탈성장 국면에서 이제 빈곤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번 사태가 더불어 함께 가난의 시대가 드디어 도래를 했음을 선언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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