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장으로의 문명의 전환, 생태민주주의와 협동조합의 전략지도] ③제로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

이 글은 바야흐로 저성장, 역성장, 탈성장 국면으로 접어든 협동조합이 어떤 대응과 적응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지 그 전략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성장을 몰적인 것으로, 저성장을 분자적인 것으로, 제로성장을 원자적인 것으로, 역성장을 양자적인 것으로 보는 초극미세전략의 일부이다. 여기서 몰은 집중성으로, 분자는 유한성으로, 원자는 순환성으로, 양자는 확률성에 대당(對當)된다는 이론적 가추법(abduction)을 적용해 보았다. 이 글은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 주관으로 2019년도에 수행된 연구과제 결과물이며, 원문을 나누어 총 4회에 걸쳐 연재할 예정이다.

❮글 싣는 순서❯

  1. 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성장의 블랙홀(몰mole : 집중과 수렴의 단계)
  2. 저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지속가능한 발전전략(분자molecular : 유한성과 특이성의 단계)
  3. 제로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내발적 발전전략(원자atom : 순환성의 단계)
  4. 역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질서 있는 감축전략(양자quantum : 경우의 수의 초미세전략)

(3) 제로성장 시기의 민주주의_내발적 발전전략(원자atom : 순환성의 단계)

제로성장 시대의 제로회계

현재 협동조합에서는 수입과 지출이 딱 맞아떨어지는 제로회계가 낯설지만은 않다. 일단 영업이득과 조합원에 대한 배당, 활동가의 임금 등을 고려해 볼 때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주의를 기반으로 등장했던 기업의 입장에서, 제로회계는 일종의 비상사태라고 할 수 있다. 제로성장의 시대일수록 바로 협동조합과 같은 공동체기업 형태가 선호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이미 제로성장 시대가 도래했다는 증거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의 경우 기업 활동 과정을 나누어 먹기 형태로 사업주나 노동자가 태도를 취하는 상황이 그것이며, 현상유지만 해도 된다는 자영업자의 태도가 그것이다. 결국 제로성장 시기에는 수입과 지출이 제로상태인 제로회계가 일반화될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가 일을 게을리 해서도 아니고, 사업주가 경영을 잘못해서도 아니다. 단지 자원-부-에너지의 순환이 제로성장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최근 자영업자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을 해도 결국 유지밖에 안 된다는 점에 자괴감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제 제로성장의 시대에는 타자생산이 아닌 자기생산이 원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일중독사회는 제로성장의 시대에는 사실상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사회시스템이나 제도, 정책, 미디어, 서비스상품 등은 바로 그 일을 해낼 그 자신을 자기생산하는 방향으로 맞추어져야 한다. 그것은 점점 사회 속의 관계망들을 변형시켜 나갈 것이다.  by Thijs van der Weide  출처: www.pexels.com/ko-kr/photo/1094767
일중독사회는 제로성장의 시대에는 사실상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사회시스템이나 제도, 정책, 미디어, 서비스상품 등은 바로 그 일을 해낼 그 자신을 자기생산하는 방향으로 맞추어져야 한다. 그것은 점점 사회 속의 관계망들을 변형시켜 나갈 것이다.
사진 출처 : Thijs van der Weide

제로회계인 상황에서는 바로 그 일을 해는 바로 그 사람을 자기생산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자기생산은 활동의 목표와 동기가 바로 그 일을 하는 자기를 생산하는 데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적인 구도는 타자생산이다. 증식, 증대, 확장, 착취 등 외부를 정립하고 낯선 것들을 포섭해 들어와 잉여의 차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타자생산이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서비스와 노동, 상품, 화폐 등을 제공함으로써 소득을 얻는다는 설정이 바로 타자생산의 기본구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로성장의 시대는, 타자생산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해낸 바로 자신을 자기생산하는 것이 목표이자 결과이자 동기가 되는 시대다. 동시에 기존에 군더더기, 잔여이미지, 찌꺼기 등으로 비하되었던 잉여(redundancy)가 잉여(surplus)가 되는 상황이 도래한다. 즉,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와 여가, 여백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따라 부가적인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중독사회는 제로성장의 시대에는 사실상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국 모든 사회시스템이나 제도, 정책, 미디어, 서비스상품 등은 바로 그 일을 해낼 그 자신을 자기생산하는 방향으로 맞추어져야 한다. 그것은 점점 사회 속의 관계망들을 변형시켜 나갈 것이다.

성장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진보가 무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진보의 선형적인 확장은 지구, 생명, 자연의 유한성의 지점에 멈춰 서게 된다. 자기계발, 성공학, 처세술, 심리학 등으로 무장했던 성공주의/승리주의 계열의 담론들은, 제로성장 시대에는 개인의 태도와 마음, 관계방식 등에 대한 코칭 형태로 이행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콜콜한 잔여물조차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진보가 무한하지 않다면, 어떤 것 속에서 무한함이 깃들어 있을까? 그것은 순환의 무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생명순환, 유기물순환, 자원순환, 정동순환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사회는 고대 사물영혼론과 같이 자연과 생명, 사물, 기계 등이 순환과 재생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바에 대해서 주목하게 될 것이다. 진보사회의 흐름과 차이, 다양성과 더불어 순환사회의 원환과 반복, 중복, 재진입, 함입 등은 늘 비교되었지만 서로 분리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2004, 민음사)에서 언급된 ‘차이나는 반복’으로서의 흐름과 순환의 결합양상이 제로성장의 시대의 삶, 사회, 공동체의 화음과 리듬, 율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자의 단계 : 순환과 재생, 되살림

원자(Atom)는 물질의 최소 단위로 간주되어 왔으며, 순환을 통해서 사라지지 않는 가장 작은 물질로 사유되었다. 이를 테면 원자순환설에 따라 지금 내 안경테의 원자가 예전에 공룡의 뾰족한 코의 원자였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원자를 불변의 최소단위로 사유했던 바는 서구 형이상학의 원천이 된다. 즉, 우리의 신체, 생명, 사물 등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같다는 점에서 모든 것에 보편어법이 관철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즉, 원자순환설은 일부 원자론자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서구철학의 뿌리 깊은 지지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생명의 순환, 자연의 순환, 사물의 순환을 통해서 우리는 사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불변항으로 늘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서구의 형이상학은 곧바로 중세를 거쳐 기독교적 전통으로 이행하여 선형적인 종말론과 내세론 등으로 바뀐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동양의 불교 사상 등에서 원자순환설과 유사한 윤회사상에서 순환의 사상이 심도 있게 전개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보편적인 것으로 바라보았던 서구사상의 철학적 기반에는 불변항으로서의 원자론이 숨어 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곱씹을 필요가 있다.

원자순환설에 주목하는 이유는 제로성장의 시대가 되어 투입과 산출, 수입과 지출 등이 제로가 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도구로써 원자의 순환가설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한한 자원을 아바나다(아껴 쓰고 바꿔 쓰고 나눠 쓰고 다시 쓰는)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원의 순환, 재생, 되살림 등이 그것이다. 그저 자원이 소모되고 사라져버리고 폐기되어야 할 쓰레기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재생하고 되살려 새로운 자원으로 순환하는 것이 제로성장 사회의 작동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자연생태계에서는 쓰레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모두 순환되고 재생된다. 흙탕물이 모인 둠벙이 더럽다고 생각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식물, 동물, 이끼, 미생물이 천지이며 생명의 도가니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자연에서는 배설물은 버려야 할 비위생적인 쓰레기가 아니라, 자연을 살찌울 유기물순환의 재료가 된다. 그런 점에서 배설물과 벌레, 미생물, 위생 등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 주었던 성장주의 문명의 그늘을 벗어나 배설물과 쓰레기를 순환과 재생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즉, 순환사회의 기본구도는 유기물순환으로부터 출발하며, 나아가 유기농업, 유기축산, 되살림, 자원재생 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쓰레기 중에는 순환되지 않고 재생되지 않는 쓰레기도 있다. 바로 핵 쓰레기다. 핵 쓰레기는 플루토늄의 경우 반감기가 2억 5천만년에 달한다.

인류는 2만년 동안 순환사회를 살아왔으며, 자연과 돌, 바위, 사물, 그릇, 집 등이 살아 움직이고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다.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로 그 순환사회의 작동방식이 설명된다. 생(生)과 사(死)가 순환하다고 해서 무의미와 무위, 전망 상실에 빠진 삶이 결코 아니었다. 순환사회의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순환, 아침, 점심, 저녁이라는 하루의 순환, 들과 자연, 바다 등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순환에 경외감을 갖고, 생명을 살리고 자연을 돌보는 것을 업으로 삼던 시중꾼과 같은 삶을 살았다. 특히 순환의 절기마다 공동체의 축제와 리듬, 춤, 노래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들의 절기살이의 삶은 활력 있고 생명력이 넘쳤다. 이러한 순환의 과정에 몸을 실고 있던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은 순환의 일부였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사(不死)의 존재와 같이 느꼈다. 이를 테면 공동체의 정동의 순환이 죽음을 책임졌고, 자연의 순환의 생명의 리듬과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과정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순환사회에서는 부와 자원, 에너지를 독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계급사회였던 관계로 수탈과 착취도 다소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생산에 필요한 자원과 에너지까지도 지배 권력이 잉여로 축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순환사회의 오래된 지혜를 작금의 제로성장 시대에 어떻게 재건하여 장점을 살려낼 수 있을까?

순환경제의 등장

지난 정부에서 발간한 <2015 전국 폐기물 발생 및 처리현황>에 따르면, 한국의 자원재생 현황은 84%에 육박한다고 보고되고 있다. 더불어 서울시의 자원재활용 비율은 66%로, 세계 도시 중 2위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나 자원 재생, 순환, 되살림 등은 공공영역에서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룰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2018년 4월에 있었던 페트병, 비닐류 등 재활용품 수거거부 대란의 상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자원재생 산업 종사자들에게 폐지, 유리병, 고철류 등을 제외하고는 소득에 기여할 수 없는 영역이 많다는 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한국 정부는 2003부터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도입하여 생산을 했던 기업이 재활용도 책임지도록 제도화하였다. 이러한 제도가 자원재활용과 순환경제에 일정하게 기여를 했던 점은 분명하나, 공공의 영역을 뺀 채로 민간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은 상황이다. 자원의 재활용, 순환, 재생, 되살림 등에 대한 제도 생산이 답보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에는 다가올 순환사회의 전망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판단할 것인가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로성장과 제로회계 상황에 이미 도달한 기업이나 시민, 공동체 등이 있지만, 이것을 순환과 재생으로 풀어내는 다양한 사회제도와 프로그램 등은 미비한 상황이다. 여전히 타자생산 중심의 시장의 룰에 따라 순환과 재생을 디자인하고 있다는 점도 그러하고, 자기생산 중심의 협동의 경제를 순환사회를 작동시킬 판과 구도, 골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저 시장과 사회의 틈새, 공백, 이음새 정도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제로성장의 시대는 바로 거대한 전환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다.

순환사회의 가장 큰 토대가 바로 소농에게 있다. 소농은 유기물 순환을 바탕으로 한 농업을 통해서 재생과 순환에 따르는 가장 핵심적인 주체성이기 때문이다. 현재 다국적 농업기업의 무차별 공세에 따라 GMO농산물이 마트나 유통업계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소농들의 유기농업과 유기축산이 생활협동조합에 결집하여 꿈틀거리며 발전해 나가는 것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순환사회로의 진입을 위해서는 퇴직자, 은퇴자, 청년, 중장년층에 대한 귀농귀촌의 움직임을 하나의 도도한 흐름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농민에 대한 기본소득을 비롯한 공공영역의 보장이 가장 중요한 상황이다. 다시 말해 영농기업 등에 몰아주기 식의 농업정책이 아니라, 소농 육성책에 대한 전반적인 제고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특히 소농의 경우 빚내서 농사를 짓고 다시 빚내는 방식으로 이미 후불제 기본소득 유형의 금융질서로 이행해 있다. 하지만 빚의 형태는 소농의 자존감, 존립근거, 지지대를 허물어뜨리는 방식일 뿐이다. 오히려 순환사회로의 이행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는, 금융이나 시장질서에 따라 소득을 보전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농민에게 일정한 기본소득을 줌으로써 순환사회의 핵심적인 토대가 농업에 달려 있음을 선언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4차 산업혁명에 대처하는 일자리 문제의 핵심은 소농의 육성에 달려 있다. 현재 소농은 전 세계 농지의 1/4를 차지하고 있지만, 전 세계 인구의 70%를 먹여 살리고 있다. 앞으로 예견되고 있는 식량위기의 상황에 대한 해법 역시도 소농의 육성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성장주의 시대 때는 집약적이고 독점적인 에너지자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에너지 사용은 곧 권력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실상 개인주의가 성립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에너지에 대한 독점적인 사용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현재의 도시의 생활은, 과거에 말 20필과 종 20명을 거느린 권력자와 마찬가지의 에너지 사용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순환사회에서는 태양과 바람의 재생에너지 사용을 통해서 보다 분산되고 민주적인 에너지 사용으로 이행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개인주의와 각자도생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의 독점적인 사용의 여지는 점차 사라져 갈 것이며, 오히려 공동체를 통해서 에너지를 절약하여 살 수밖에 없는 사회형태로 이행해 가야할 것이다.

1인 가구의 확산으로 도시민들의 삶이 더 팍팍해지는 이유는 관계의 단절에도 문제가 있지만, 개인을 성립가능하게 만들었던 에너지 독점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고 있는 상황에도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순환사회의 도래는 공동체, 마을, 협동조합 등의 구성과 재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 되는 것이 없고 겨우 자기생산으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에서 길길이 돈을 벌겠다고 나서는 것은 분위기 파악을 못했거나, 에너지에 대한 독점적인 사용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바람에 따른 것이다. 순환사회의 도래는 바로 재생에너지의 사용과 생활화, 에너지 절약과 긴밀한 관련을 가질 것이다. 더불어 개인이 독점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게끔 만들었던 생활방식이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 등이 개인의 에너지에 대한 과도한 사용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방식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환사회는 재생에너지와 공동체가 함께 해야 성립될 수 있다.

내발적 발전전략의 대두

1976년 일본의 사회학자 츠루미 가즈코(鶴見和子)는 성장주의, 개발주의, 토건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내발적 발전(endogenous development)를 주창한다. 내발적 발전은 기존의 토건주의적인 마을 만들기의 방식이 아니라, 자원-부-에너지의 흐름을 정동, 돌봄, 사랑의 흐름에 실어 보내 제로회계의 상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기존 프로젝트 유형의 마을 공모사업을 했던 사람들 같은 경우에 기획하고 행위 하는 개인이 일정하게 소득을 남긴다는 것도 가능했던 상황이었지만, 최근의 마을 만들기 사업이 대부분 공동체를 자기 생산하는 것에서 자원이 모두 소모되도록 만드는 제로회계에 따라 설계되고 있는 것도 내발적 발전에 따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원-부-에너지의 흐름을 공동체의 돌봄과 정동의 흐름에 실어 보낸다는 것은 결국 소수자, 아이, 동물, 장애인 등의 특이점을 향해 흐름을 관통시켜 완전히 소모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내발적인 의미는 질적이고 내포적이 관여적인 발전의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무수한 활동을 통해 무엇이 생산된 것인가?”라는 근대적인 생산적 관점의 질문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자기생산되었다는 의미로 대답될 수 있다. 이러한 자기생산 개념을 창안한 사람은 칠레의 인지생물학자인 마투라나와 바렐라이다. 이 두 사람은 생명의 활동이 재귀적으로 반복되며, 자기생산에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외부의 낯선 타자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생산하는 것에 대부분의 자원과 물질, 에너지 모두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환사회는 자기생산에 따르는 내발적 발전전략이 아주 가시화된 상황을 연출한다.

“그 무수한 활동을 통해 무엇이 생산된 것인가?”라는 근대적인 관점의 질문에 대해,  공동체 사람들은 “우리 자신이 자기생산되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by Hillary Ungson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TdpSX7XAcKo
“그 무수한 활동을 통해 무엇이 생산된 것인가?”라는 근대적인 관점의 질문에 대해, 공동체 사람들은 “우리 자신이 자기생산되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Hillary Ungson

또한 내발적 발전전략은 지역에서 순환되는 자원-부-에너지의 흐름이 외부로의 유입이나 유출 없이 내부에서 순환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지역순환경제와 공명한다. 농촌의 경우에는 생명순환에 따라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도시의 경우에도 해당되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 집근처에서 미장원에 가서 만원을 썼다. 미장원 원장은 다시 이웃의 철물점에 가서 만원을 쓰고, 철물점 주인은 다시 안경점에서 만원을 쓰는 방식의 순환경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만원은 그저 만원이 아니라 순환의 시너지에 따라 승수효과(multiplier effect)를 갖게 된다. 이러한 골목상권의 경우 한정된 자원-부-에너지가 순환하면서 미시적인 모듈단위로 지역순환경제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도시생활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지역순환경제가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른바 3M(마트, 멀티플렉스, 몰)로 자원과 부, 화폐가 집중되고 수렴되면서 골목상권에서 순환해야 할 자원이 대부분 유통대기업에게 유출되어 버리는 것이 현실이 것이다. 이에 따라 도시의 회복탄력성과 지속가능성에는 적신호가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순환사회 모델은 바로 이러한 도시를 재건하는 사회적 경제와 생활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색다른 움직임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역순환경제의 모델이 또 다른 폐쇄경제 유형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문턱이 있는 유토피아’라는 혐의를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에게 두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정한 경계가 있다는 것은 자원-부-에너지가 외부로 유출될 수 없도록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에 따라 경계의 여부를 차별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순환과 재생의 시너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들락날락거리는 것이 자유롭게 가능하지만 내부역동성이 미치는 범위를 갖게 되는 최소한의 경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작업적 폐쇄성’이라는 부른다. 작업적 폐쇄성은 내부 역동성이 미치는 한계가 바로 외부에서 선택적으로 자원이 유입되거나 유출되는 경계이자 얇은 막이라는 것이다. 결국 공동체 내부의 사랑과 정동이라는 내부 역동성이 전개되어야 외부의 낯선 이에 대한 환대도 가능해진다.

지역순환경제를 통한 내발적 발전전략의 적용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마을이나 공동체 단위에서 자신의 매장이나 기업의 제품을 되도록 사줌으로써 연대소비, 결사소비 등을 이루고 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마트를 이용하지 않고 가까운 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하는 소비자들의 윤리적 소비 역시도 논의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역순환경제에서 특이한 지점은 지역화폐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화폐는 외부로 자원-부가 유출되지 않게끔 네트워크 잠금 작용을 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지역화폐는 순환의 시너지와 승수효과를 직접 정량화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더불어 최근에는 가상화폐의 방식을 차용함으로써, 순환의 시너지를 네트워크로 이식하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사실 기존 마을, 공동체, 협동조합 등이 판과 구도가 네트워크의 판과 구도와 교직함으로써 그 낙차효과에 따라 시너지를 추구하는 방식은 내발적 발전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동체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점차 1인 가구라는 개인주의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이 늘어가기 때문에, 네트워크가 이를 매개하고 공동체와 교섭함으로써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는 여지가 늘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는 간(間)공동체 방식의 접속이 아닌 ‘따로 또 같이’ 방식의 접속에 대한 적절한 대응일 수 있다.

탄소순환경제

그렇다면 순환사회는 기후변화라는 막대한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바로 탄소순환의 전략적 대응이 그것이다. 물론 탄소순환은 자연주의와 같은 것일 수 없다. 자연주의는 생명이 자라고 몸에 털이 자라듯이 내버려두면 저절로 치유될 것이라는 철학이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사상은 생태주의와 거리가 있다. 현재의 막대한 기후변화의 상황은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해결될 것이 아니라, 거대계획, 거대프로그램, 제도 생산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환경관리주의와 같은 제도주의의 양적이고 계측적인 접근 방식이 선호되기도 한다. 그러나 탄소순환은 현재부터 지속되어야 할 원칙이면서 복원점 이후부터는 전면화되어야 할 전략이다. 일단 탄소순환사회로의 진입이 전반적으로 이루어졌을 때라야 치유 가능성에 청신호가 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탄소순환사회로 이행의 마중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직접적으로 먼저 이행함으로써 오래된 미래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도적 노력을 포기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탄소로 쌓아올려진 이 완고한 문명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탄소순환사회만이 유일무이한 전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교직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도시는 점차 농촌의 탄소순환에 종속되거나 포섭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시농업과 텃밭, 도농직거래, 지렁이상자, 주말농장, 퇴직자의 귀농귀촌, 생활협동조합의 생활화 등을 통해서 도시의 미래가 바로 탄소순환임을 자각하도록 만드는 실천이 필요하다.

탄소순환은 바로 생명순환이다. 생명의 생애주기에 맞춘 삶의 방식은 탄소순환사회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일중독, 저녁이 없는 삶, 밤이 없는 삶 등이 생명의 리듬에 맞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순환사회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로회계의 진실에 수긍하지 못하고 일중독으로 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기생산에 머무를 수밖에 엄혹한 현실에 대해서 인정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생명순환의 리듬에 맞춘 사회적 삶이 바로 절기살이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기후변화의 엄혹한 위기가 찾아온 이유 중 하나가 절기살이에 맞지 않는 음식물, 삶의 방식, 생활방식, 죽음에 대한 인식 등에 이유가 있는 것도 하나의 사실이다. 동시에 생명순환은 바로 재진입, 함입, 반복, 중복의 삶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문명이 아주 색다른 것을 유행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반복에 대해서 평가절하하면서 늘 새로운 것을 찬양한다. 그러나 반복, 중복, 함입에 따르는 삶의 방식은 바로 생명살림의 방식이다. 제철채소와 제철과일을 먹는 것, 어제 했던 청소를 오늘 다시 하는 것, 어제 했던 이웃과의 만남을 반복하는 것 등 반복을 설립하는 것 자체가 순환사회에 핵심적인 과제이다. “내가 원하는 게 뭐냐?”라는 욕망의 질문은 바로 반복을 만들어내는 원천이기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기계(=반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결국 반복의 설립은 욕망, 사랑, 정동이 해내는 것이며, 이에 따라 생명은 반복되고 순환된다.

제르미 리프킨이 생명, 사물, 우주가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한다는 엔트로피 법칙을 주장할 때, 사람들은 재생불가능한 자원과 회복불가능한 에너지를 생각하며 비관과 전망 상실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생명은 순환하고 재생되면서 네겐트로피(Negentropy)를 형성한다. 즉,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이 재생불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한편에서는 재생가능한 것으로 순환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얘기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열효율이 극도로 낮은 전기에너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화목난로에서 목재를 태울 때 그 나무가 몇 년간 머금은 탄소량과 열을 발생시키면서 내뿜는 탄소량은 일치하므로 자연스럽게 탄소순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간에 엔트로피 법칙이 성립하기 위한 폐쇄계는 네겐트로피의 순환과 재생의 폐쇄계와 차이를 갖는다. 엔트로피는 재생불가능하고 무질서로 향하기 위해서 폐쇄계를 설정했지만, 생명순환 즉 탄소순환의 폐쇄계는 순환과 재생의 시너지와 승수효과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지구라는 생명권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감옥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살려내는 편안한 집일 수 있다.

제 3섹터의 역할과 정동의 경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 즉 제 3섹터의 역할은 활력, 생명력, 돌봄, 정동의 순환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정동(affect)은 돌봄, 모심, 살림, 보살핌, 섬김 등을 총괄하는 개념으로써 자기원인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돌발적이고 일시적인 감정(emotion)과 구분된다. 정동의 순환은 사실상 공동체의 살림살이와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자본주의는 살림과 경제를 분리시킴으로써, 정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자기생산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마치 경제적인 이유가 우선이며 그 때문에 지금 소득이 없으면 가난하게 보이게 만드는 착시효과를 갖게 만든다. 공동체에서의 정동의 순환은 앞서 말했듯이 자원-부-에너지를 소수자-되기에 모두 사용하고 제로상태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정동은 축적하지도, 자취를 남기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다. 전통적인 가족공동체에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빈털터리가 되는 부모의 모습에서 정동의 순환을 발견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정동의 소외 상태에 처한 현대 도시민들은 고독하고 외롭고 지치고 소진되어 있다. 그것은 공동체, 마을, 협동조합 등에서 돌보고 돌봄을 받는 등의 정동이 갖는 순환의 리듬과 화음을 일상에 배치시키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정동의 순환을 위해 공동체에 문을 두드리는 것이 하나의 해법일 수 있다.

공동체에서의 증여와 호혜의 경제는, 아낌없이 주는 자연에서와 같은 순수증여가 아니며 자본주의처럼 상품을 사고파는 계산적인 것도 아니다. 그 모호함이 공동체 경제가 가진 중요한 특징이다. by Elaine Casap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qgHGDbbSNm8
공동체에서의 증여와 호혜의 경제는, 아낌없이 주는 자연에서와 같은 순수증여가 아니며 자본주의처럼 상품을 사고파는 계산적인 것도 아니다. 그 모호함이 공동체 경제가 가진 중요한 특징이다.
사진 출처 : Elaine Casap

공동체의 정동의 순환은 증여와 호혜의 경제로도 해석되어 왔다. 다시 말해 증여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으로, 정동이 보이지 않는 데 비해 선물은 실물적으로 손에 잡힌다는 점에서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기 용이했다. 선물은 물건 주위에 뿌옇게 구름이 낀 것처럼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다. 그러나 경제의 범위는 구체적인 것이 오가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선물이 오가는 증여부터 경제활동이라고 간주한다. 여기서 상품은 사랑, 정동, 인격, 정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어서 물신주의를 유발하지만, 선물은 사랑, 정동, 인격, 정성과 결합되어 있어서 살아 있는 물건으로 간주된다. 모스의 『증여론』(2002, 한길사)에서의 포틀래치는 관혼상제에서 선물의 증여가 과시적인 축제와 같이 벌어진다고 묘사하고 있다. 모포 수 백 장과 동판, 술, 음식 등의 축제는 사실상 공동체에게 재분배 역할을 하는 선물의 향연이었다. 물론 자본주의 하에서도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와 같은 상품의 축제가 간혹 있지만, 이는 물신주의를 조장할 뿐 물건이 살아 움직이는 향연으로서의 포틀래치와는 궤를 달리 한다. 문제는 사회적 경제의 작동에 있어, 증여와 호혜의 경제가 가진 모호함에 있다. 아낌없이 주는 자연에서와 같은 순수증여가 아니며, 자본주의처럼 상품을 사고파는 계산적인 것도 아닌 것이 바로 호혜와 증여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회적 경제가 ‘호혜와 증여’와 더불어 ‘수익구조와 회계담론’이라는 블랙홀에 사로잡혀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더욱이 자원봉사와 기부처럼 순수증여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된다. 제 3섹터의 커뮤니티 기반의 정동의 순환 모델에서는 교환과 증여, 순수증여 간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내부 역동성의 비밀이다. 제 3섹터는 이러한 내부 역동성과 각 영역 간의 낙차효과를 순환사회의 다이내믹한 율동과 리듬, 화음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또한 제 3섹터에서 정동의 순환은 활동을 구성하는 원천이 된다. 주로 살림, 보살핌, 돌봄, 섬김, 모심의 과정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고 사회에서 잉여취급을 받는다 할지라도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보람이 있고, 이것은 공동체 내부의 배치에 의해 만들어지고 순환된다. 이처럼 활동의 목표와 과정, 동기는 다름 아닌 자기생산에 있다. 문제는 제 3섹터의 유지와 지속의 논리에 따라 노동이 매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노동과 활동의 이중성의 판이 깔리면,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활동은 긴장감 상실과 책임회피로 흐르고, 노동은 열정노동과 열정페이로 흐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공동체가 재미와 놀이로 시작했던 것이 의미가 생기면서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일이 되는 상황이 도처에 등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 3섹터의 경우 활동과 노동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전략적 지도제작을 할 필요가 있다. 유한성을 자각한 실존과 삶의 영역에서 출발하는 것이 활동이기 때문에 사실상 활동의 판 위에 노동을 배치하여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모든 활동과 노동은 정동의 순환에 따른 자기생산의 구도 위에 배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노동이라는 타자생산의 영역이 잠식해 들어오게 되고, 결국 회계담론이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정동의 순환에 입각한 자기생산의 구도는 활동에 기반하지만, 작은 선물과도 같은 소득이나 보상을 게을리 하지 않는 과정을 병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노동의 타자생산의 메너리즘과 자동주의를 극복하면서도, 활동의 자기생산의 과정을 잉여로 간주하는 문화로부터 분리될 필요가 있다.

협치의 확산 : 네트워크까지 확장

순환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협치는 지역사회, 마을, 공동체, 기업, 네트워크 등의 미시적인 단위까지도 포괄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순환사회 모델에서 중요한 협치의 전환점이 바로 네트워크를 포괄하도록 협치가 도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주의를 포괄하기 위한 조치로써 네트워크, 플랫폼, 커뮤니티, SNS, 파워블로거 등의 단위까지의 협치의 확장을 의미한다. 협치는 민주제, 공화제, 관료제, 자치제 등의 혼합정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영역의 특이점을 포괄하여 정동, 욕망, 사랑의 순환과 재생의 과정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협치는 정동의 순환과정이 이루어지는 물질적/비물질적 관계망에 대한 동시적 고려를 통해서 그 사이의 교직과 낙차효과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사회는 이에 대한 매우 훌륭한 사례를 갖고 있다. 바로 지난 2007년 태안 인근 연안에서 발생한 ‘삼성-허베이스피리트(Hebei Spirit)호’ 기름 유출 사고 때 네트워크의 특이점들이 움직였던 경험 말이다. 당시에 환경관리주의 맥락으로 간주되었던 막대한 환경오염의 사건에서 네트워크와 수많은 관계망을 역동적으로 대응한 사건이다. 특히 네트워크가 어떻게 현실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의 실례를 잘 보여주었다. 네트워크의 성립은 사실 포스트포디즘과 금융자본주의를 축으로 한 신자유주의 사회의 골간이었다. 또한 그것은 사실상 작은 분자단위에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한 지배질서의 변화양상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지배질서에 의한 포섭항 중 하나였던 네트워크가 사실상 순환사회로의 변화에 따라 민관협치와 자치행정이 더욱 미세해져야 한다는 과제를 부응할 수 있는 특이점이자 파트너가 될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는 심리치료에 있어 제도요법이라는 이론을 정립하는데, 이는 협치의 방법론을 정립할 수 있는 귀중한 전거가 된다. 그는 제도라는 발명품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관계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특히 협치의 문제에 있어서 특이한 관계망이 등장하면 이미 제도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순환사회를 위한 협치의 시대에 반드시 요구된다. 기존에는 관계망의 상향과정에 따라 제도화와 입법화라고 표현되는 지난한 관료행정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정치의 일련의 과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네트워크를 협치의 파트너로 삼아야 하는 순환사회의 도래는 바로 초연결사회의 성립에 따라 입법화과정과 제도화과정의 지난한 탁상행정, 입법과정, 칸막이 행정 등을 곧바로 소멸시킨다. 네트워크와의 협치는 정동의 순환을 협치에 개입시킴으로써 순환사회의 도래를 초래하는 기반이 된다. 제도는 네트워크 내에서 정동의 발생과 생성, 전개 즉 순환의 과정과 다르지 않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제도=관계망’이라는 가타리의 제도요법은 바로 관계망에서 정동이 순환되는 과정 자체가 제도의 발명과정과 일치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최근 청와대신문고를 통한 대통령청원제도에 시민들이 붐을 이루는 일련의 상황이 그것이다.

순환사회에서 정동의 순환이 제도 생산과 일치하는 협치의 도래는 결국 ‘도표적 가상’이 작동이 제도 내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했듯이 공동체는 자원-부-에너지의 흐름을 소수자를 향한 돌봄과 사랑의 흐름으로 완전히 소모하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미세한 가상성을 요구되게 된다. 그 가상성은 소수자되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채로운 기호작용이거나 스토리, 보이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즉, 생활밀착형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도표적 가상이 발생되는 것이다. 가타리에 따르면 도표적 가상은 기계와 기계, 반복과 반복, 제도와 제도, 기호와 기호 사이에서 이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방식에서 발생한다. 결국 관계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도표적 가상성은 ‘사랑할수록 더 달라지는 것’ 다시 말해 사랑과 정동이 미세한 차이와 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순환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의 연결방식이 관료적이고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정동이 순환할 수 있는 잠재적인 형태를 띨수록 다양한 기호, 제도 등의 생산과 창조가 풍부하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순환사회의 협치는 네트워크, 공동체, 지역사회 등의 관계망에서 미세한 영역을 더 풍요하고 다양하게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과제를 갖고 있다. 이러한 과제는 바로 정동의 순환과 제도의 생산이 일치하는 협치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이 글은 모심과 살림연구소 『생명을 살리는 전환』 연구과제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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