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ID-19 이후] 포스트 코로나,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 -코비드19와 포스트 코로나에 관한 또 하나의 시선

‘포스트 코로나’가 주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는 있는 지금, 전환과 역설을 키워드로 코로나 이후를 탐색한다. 특히 ‘누가 이야기의 주인공인가’가 아니라, ‘누가 이야기의 작가인가’를 묻는다. 코로나 사태에 대해 해석하고 정의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앞서서 사람들이 자신의 느낌을 알아차림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경험을 나눔으로써 스스로 작가가 되어 코로나 이후의 이야기, 새로운 세계관과 생활양식, 그리고 주체성을 다시 함께 만들어가기를 기대한다. 지금 여기 현재진행형의 삶의 전환, 사회적 전환을 위한 과정기획을 제안한다.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생겨난다.

1. 전환은 이미 시작되었다

새로운 인간과 문명을 지칭하는 ‘코로나 뉴 노멀’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우리는 그야말로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는 중이다. by Gustavo Fring 출처: https://www.pexels.com/ko-kr/photo/3983428/
새로운 인간과 문명을 지칭하는 ‘코로나 뉴 노멀’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우리는 그야말로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하는 중이다.
사진 출처 : Gustavo Fring

‘이후’가 아니다. 이미 전환은 시작되었다. 현재진행형이다. 포스트 코로나 얘기다. 신체적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비대면 소통 같은 낯선 일들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공원을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집안의 반려동물과 더욱 친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이 맑아졌다. 재택근무와 온라인강의가 노동과 교육을 바꾸고 있다. 실업과 폐업이 늘어나며 서민들이 경제적 고통에 빠지는 사이, 기본소득이나 탈성장과 같은 단어가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다. 대전환을 예고하는 경고와 예언이 넘쳐난다. 말 그대로 ‘이구동성’. 입은 다른데 목소리는 하나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코로나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세계질서를 영원히 바꿔 놓을 것이다.”, “우리가 알던 세상은 끝났다.”, “인류의 역사는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나누어질 것이다.” 등등.

이렇게 새로운 삶과 사회, 그리고 새로운 인간과 문명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코로나 뉴 노멀’이 상식처럼 말해진다. ‘코로나19, 신인류 시대’를 논하는 국내 미디어의 대담 시리즈가 방송되기도 했다. 대공황 때보다 더욱 치명적인 경제사회적 붕괴를 예언하는 가운데, 발 빠르게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을 촉구하기도 한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오히려 한가한 말로 느껴질 정도다.

요컨대, 코로나 사태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의 측면에서도, 의료, 교육, 경제 등 국가 및 글로벌 시스템 측면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디지털 인공지능과 연동해 대전환의 양상은 더욱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가히 ‘문명전환’을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TV 등 전통적인 매체와 유튜브와 페이스북 등 디지털 매체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구적 변화를 목격하고 느끼며 생각을 거듭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문명전환의 관찰자이면서 경험자이고, 동시에 참여자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연속적 변화의 결정적 현장은 그 무엇보다 ‘마음’이다. 초유의 낯선 현실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코로나 사태의 한복판에서 마음 상태와 마음의 패턴과 마음의 구조가 흔들리고 또 재구성되고 있다. 공포와 불안감은 생존본능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돌아보기를 강제한다. 자기와 타자를 성찰케 한다. 코로나의 충격은 문득 하나의 깨달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바이러스와 인터넷이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두 매개체를 통해 ‘지구적 연결’을 몸으로 깨닫는다. 이윽고,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면서 마음의 전환을 실감한다. 변화된 자기에 대한 자각이다.

개인도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도 그러하다. “우리나라가 이런 나라였어?”, “역시 가족뿐인가?” “진정한 종교생활이란 뭘까?” 식으로 스스로 묻고 답하게 된다. 그리고 미디어와 지식인들과 종교가, 그리고 정부가 멈춤과 돌아보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사회의 자기성찰이다. 사회적 전환의 시작이다.

2. 역설

전환과 이행은 이미 현실이지만, 이에 대응하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 속에서 어떤 패턴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 키워드 중 하나가 ‘역설’이다. ‘안정의 역설’이란 이미지도 떠오르고, 예의 ‘위기의 역설’이라고 말도 생각난다.

첫째. 안정의 역설이다. 같은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왜 미국과 유럽은 대혼란에 빠지고, (물론 아직 끝을 알 수는 없지만) 한국은 모범이 되었을까? 그에 대한 대답 중 하나는, 이를테면 ‘태평성대의 역설’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은 75년 동안 그야말로 태평성대였다. 여기엔 일찍이 탈아시아를 선언하며 서구의 일원임을 자부하고 있는 일본도 포함된다. 이들 이른바 선진국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지난 75년 동안,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전반적으로 안정적이었다. 68혁명, 석유위기, 베를린 장벽 붕괴 등 고비는 있었지만, 체제를 위협할 만한 결정적인 외부의 도전은 없었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세상엔 ‘공짜가 없다‘. 지나친 안정의 결과는 치명적인 불안정을 낳는다. 과도한 균형의 결과는 파괴적 불균형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한반도는 150여년 전 조선말 서구열강의 침략과 전염병의 창궐과 일상화된 굶주림이라는 3대 생존 위기 이래로 일제 식민지와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그리고 20세기 말에는 IMF 경제위기를 겪으며, 그리고 최근 메르스와 사스의 공포와 세월호의 참혹한 죽음과 맞서며 혹독한 생존투쟁을 벌여왔다. 산업화와 민주화도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배고픔과 신체적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생존투쟁이었다. 생물학적 생명만이 아니다. 사회적 생명을 지키고 또 확장하기 위한 전투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19세기 말 성리학적 질서의 붕괴와 열강의 침략에 맞서 척사와 개화, 그리고 다시개벽의 길을 제시하며 치열하게 싸웠고, 일제 하에서는 제각각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와 아나키즘 등의 전략으로,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의 극단적인 대립 속에서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며 살길을 찾아왔다. 그렇다. 하나의 결론은 이것, 근현대 150여년 간의 치열한 생존투쟁과 극심한 내부갈등이 역설적으로 오늘의 한국 모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둘째. ‘위기의 역설’이다. 사실은 모두 아는 상식이다. 역사에서 확인하곤 했듯이, 역시 위기는 곧 기회다. 천지인 삼재론으로 말하면, 위기(危機)란 세 기틀의 위태로움이요, 기회(機會)란 세 기틀의 다시 모임, 즉 재구성이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르네상스, 즉 근대 유럽의 계기가 되었고, 20세기 초 대공황이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으며, 1, 2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파괴와 죽음과 트라우마가 오늘의 유럽을 만들었다. 코로나 사태로 모두가 한 번쯤 들은 이야기들이다. 오늘 전 인류가 겪고 있는 초유의 경험은 또 어떤 ‘기회’를 만들어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은 코로나19로 인하여 대부분 온라인으로 개학을 해야 했다. 사진출처: by Feliphe Schiarolli   https://unsplash.com/photos/hes6nUC1MVc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은 코로나19로 인하여 대부분 온라인으로 개학을 해야 했다.
사진출처 : Feliphe Schiarolli

그렇다. 어느 복잡계 연구자의 말처럼,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 지금 우리는 개인적 생활과 사회적 시스템이 동시에 붕괴하는 지구적 대혼돈을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비대면 소통’과 같은 새로운 질서의 자기 조직화를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의 충격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성찰하게 한다. 사회와 문명을 질문하게 한다. 또한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슈들을 우리 곁으로 다시 불러들이기도 한다. 기후변화와 불평등에 대한 재인식도 그중 하나이다. 코로나의 역설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이미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절감하고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생명의 측면에서도 사회적 측면에서도 상상을 불허하는 초복잡계다. 하나의 모델로 모든 문제에 응답할 수 없다. 서구형 모델의 실패와 동양적 모델의 성공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 모델이 있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다. 생명에는 ‘대안(alternative)’ 모델이 없다. ‘양자택일’로 보일 수도 하지만, 실제로는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더 이상 한국이 따라갈 모델이 없다는 말은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 스스로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 고독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점은 온 세계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글로벌 연대와 협력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각 나라와 대륙이 자기의 방식으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그런 점에서 서유럽의 실패가 ‘오리엔탈리즘의 종말’이라는 진단도 일리는 있지만, ‘이제 동양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흔히 하는 말로 ‘정답은 없다’.)

하나의 결론은 이것이다. 새로운 삶과 사회, 그리고 새로운 문명의 역설적 자기조직화. 근대화 모델이든 서구 모델이든, 모델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현실에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옛 질서의 붕괴 속에서,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 새로운 생활양식, 새로운 문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사회만이 아니다. 유럽도, 미국도, 일본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탐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중국의 경우 당장은 예외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더욱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3. 이 이야기의 작가는 누구일까?

우리에겐 가끔 특별한 느낌은 일어날 때가 있다. 어느 날 아침 문득 새로운 기분과 새로운 느낌이 일어나고, 새로운 세계로 이끌리는 극적인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전의 삶을 포함해 인생 전체 이야기를 새롭게 쓰게 된다. 이후 ‘나’의 삶은 새로운 삶의 트랙으로 도약한다. 자기 인생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과거와는 다른 특별한 느낌이 일어난다. 불안감과 공포감은 물론이거니와,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든다. 전혀 새로운 감각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느낌들을 고백하고 또 공유한다. 공감이라도 해도 좋고 공명이라고 해도 좋다.

6년 전 우리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를 경험했듯이, 만약 인류사, 혹은 지구의 역사가 코로나 이전과 이후를 나누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세계를 살게 될까? 어떤 느낌과 생각으로 살아가게 될까.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또 전개될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무엇보다 새로운 주인공의 등장이었다. 그 주인공이 군주였던 때가 있었고, 국가와 민족이었던 경우도 있었고, 민중 혹은 계급이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 다양한 모습의 ‘나’들로 확장되고 다채로워졌다. 그리고 21세기 빅히스토리의 시대, 인간/비인간, 생명/비생명의 모든 존재가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있다. 이렇듯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뀌어 왔고 그것을 역사의 진보라고 믿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난다. 그 수 많은 이야기들의 작가는 누구일까? 스토리텔러는 누구일까? 코로나 이후, 새로운 문명 이야기는 누가 만들고 변주하게 될까?

그렇다. 지금껏 어떤 사태를 해석하고, 정의하고, 규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니었다. 새로운 개념, 새로운 이론, 새로운 이야기(story)는 극소수의 위대한 성인이나 절대 권력자의 책임이었다. 넓게 말하면 엘리트들의 몫이었다. 그것을 그냥 역사(history)라고 말하든, 혹은 인간의 역사(human-story)라고 말하든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방식의 이야기 쓰기라고 할 수 있는 탈가부장적 역사(her-story)나 생명이야기(life-story), 그리고 지구이야기(earth-story)와 우주이야기(universal story)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오늘 이글의 핵심이다.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하는 이는 누구일까. 새로운 문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 이야기의 창작자를 묻는다. 새로운 감성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들, 혹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몽상가들, 새로운 문명을 발명하는 창조자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새로운 질서 역시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 질서 역시 하나의 세계관이거나 하나의 의미론이라면, 관건은 결국 누가 어떻게 그 이야기를 만들어 가느냐일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잠재적 작가들인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이 이미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다.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다. 물론 바이러스도 사회시스템도 함께 바뀌고 있다. 동시생성이고, 동시전환이다. ‘우리가 이야기 쓰기의 작가’라는 자각은 생성과 전환의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이다. 우리는 관찰자이면서 경험자이면서 참여자이며, 그리고 창작자이다.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가 아니다. 배우이면서, 조명기사이면서, 무대기술자이면서, 작가이면서, 감독이면서, 제작자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다면적 자아를 경험한다. 생명 자아, 성적 자아, 가족적 자아, 직업적 자아를 비롯해 다양한 자아를 경험한다. 넷플릭스를 볼 때의 자아, 친구를 만날 때의 자아, 호텔에 들어갈 때의 자아, 막걸리를 마실 때의 자아가 그때그때 다름을 경험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또 다른 자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스토리텔러로서의 자아일지도 모른다. 의미를 구성하고 가치를 생산하는 자아, 이 세계에 대한 은유를 만들고, 새로운 지각과 개념을 발명하는 자아 말이다.

촛불광장에서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작은 새로움을 만나고 또 창조하며 기쁨을 만끽한다. 우리는 이미 크리에이터다. 유튜브에서만 아니다. 90%든 10%든 1%든 상관없다. 신의 속성 중 하나가 조물주이고 인간이 신을 닮았다면 우리는 곧 창조자다. 우리는 이미 아즉천(我卽天)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만인성인의 시대, 만인진인 시대, 만인작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코로나가 이를 활짝 열어줄 수도 있다. “사람은 하늘을 떠날 수 없으나, 동시에 하늘도 사람을 떠나서는 이룰 수 없다.”

새로운 문명 시대엔 인간/비인간, 생명/비생명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주인공이며, 동시에 작가다. 물론 메인 작가는 이 시대를 호흡하는 인류가 될 것이다. 오늘의 자기와 세계를 스스로 이야기하고 스스로 행한다. 인간과 사회와 문명을 재창조한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사회의 출발점인 150년 동학혁명의 꿈, 다시개벽 아닐까?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한국사회는 이미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4. 새로운 이야기 다시 함께 만들기

새로운 이야기 만들기와 새로운 문명으로의 이행은 새로운 삶의 척도, 다시 말해 새로운 세계관과 생활양식의 재창조 등으로 구체화된다. 예컨대 원격교육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자가격리로 인해 비인간 생명과의 함께 살기는 또 다른 단계로 진화한다. 코로나 사태는 종일제 노동, 정규직 중심의 노동양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적 실업사태와 기업활동 중단사태는 GDP 중심의 성장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물론 정치시스템도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운동사에서 처음으로 문명전환 이야기를 써내려온 한살림은 30여 년 전 생명의 세계관의 확립과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를 사회운동적 과제로 제시했다. 생명의 세계관은 생태환경 이슈의 사회적 확산과 더불어, 사상적으로 실체적·존재적 사유에서 관계적·생성적 사유로의 전환을 촉진하였다. 또한 한살림은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를 위해, ‘매장/나눔터’라는 호혜/매매의 융합적 교환양식을 발명하고, ‘살림노동’이라는 개념으로 새로운 노동양식을 탐색했다.(여기서 사용하는 ‘생활양식’ 개념은 소비, 생산, 노동, 소유양식 등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인간의 생명활동/생활 형식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한살림의 새로운 이야기 만들기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소수의 지식인에 의해 ‘한살림’이 ‘선언’되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한계로 여겨지는 것은 생명의 세계관도 ‘하나의’ 세계관이라는 자각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생명살림도 ‘하나의’ 의미론이라는 자각이 충분치 않았던 점이다. 아마도 객관주의 진리관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세계관’과 ‘생명의 생활양식’은 객관적 진리로 ‘발견’되고 ‘선언’되었던 것이다.

2020년 오늘,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이야기 만들기는 한 마디로 ‘함께, 다시, 만들기’이다. 첫째 새로운 이야기는 ‘만들기’이다. 이야기는 ‘구성(構成/construct)’된다. 누군가에서 의해 제시되거나 숨겨진 보물처럼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발명’된다. 둘째, 이야기는 ‘다시’ 만들어진다. 시작도 끝도 없다. 이야기는 늘 ‘다시 또 다시’ 만들어졌고 만들어왔다. 셋째, 이야기는 ‘함께’ 만든다. 그런데 여기 ‘함께’는 이중적이다. 스토리텔러들의 공동작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이러스를 비롯한 뭇 생명과 물질세계와의 공동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이야기도 하나의 ‘형식(form)’이라는 점이다. 생명이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고유한 운동의 패턴과 구조, 그리고 경계(막)로 구성되는 생명형식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야기에는 보통 기승전결이 있고 주인공과 무대가 있고 1막 2막 3막 식의 순서가 있는, ‘하나의 형식’이다. 형식이 없이는 작품이 될 수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명’이라는 새로운 이야기에도 새로운 사유의 형식(세계관), 새로운 삶의 형식(생활양식), 새로운 주인공의 형식(주체성)이 요구된다. 새로운 느낌(지각)과 새로운 개념(언어)이 필요하다.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자기 조직화를 통해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질서를 재생산하는 구조화된 운동의 체계(system)가 없이는 새로움은 유지될 수 없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면, 새로운 질서의 잠재력은 기존의 시스템에 의해 해체되거나 흡수되어 버린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결국 ‘자각하는 사회’의 자각적 에너지에 의해 새로운 이야기는 만들어져왔고 또 만들어질 것이다.

이 또한 역설이다. 폼생폼사(form生form死), 폼이 나면 살고 폼이 사라지면 죽는 게 생명이다(네이버 국어사전). 형식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 그러나 형식은 우리를 구속한다. 생명형식은 생명의 새로운 전개를 억압한다. 그런 점에서 형식은, 역설적으로, 잠정적이다.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형식은 또한 가상적이다. 물론 지금은 폼(form)을 구성할 때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함께 다시 만들어야 할 때이다.

앞서 말했듯이 함께 다시 만들어갈 새로운 이야기는 일단 3가지이다. 첫째, 새로운 세계관, 둘째, 새로운 생활양식, 셋째, 새로운 주체성. 물론 정답은 없다. 다시 함께 만들어야 할 공동과제일 뿐이다.


<인식론적 허들 넘기와 질문의 전환>

그런데, ‘이야기 다시 함께 만들기’의 전제 조건이 있다. 인식론적 허들(장애물) 넘기가 그것이다. 만약 새로운 이야기 역시 ‘객관적 진리’라기보다 ‘공동의 열망’이라면, 함께 재구성할 세계관 역시 ‘하나의’ 세계관이라면, 이런 태도에 대한 상호이해, 다시 말해 인식론적 공통기반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이 ‘탈무명(脫無明)’이라고 말했고, 예수님이 ‘눈뜸’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어떤 자각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탈무명과 눈뜸은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인 맥락이다. 한 마디로 ‘맹점의 자각’과 ‘구별의 자각’이다. ‘볼 수 없음’에 대한 자각, ‘구별해서 볼 수밖에 없다’는 자각이 그것이다.

좀 더 확장하면, 예컨대 이런 자기 질문과 자기 답변들이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 ‘갈등을 없앨 수 있을까?’, ‘상대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인간의 잠재성은 어떻게 경험될 수 있을까?’ 등이 그것이다. 역시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인식론적 허들을 넘지 않고서는 ‘함께’ 이야기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허들 넘기’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핵심적인 사회적인 과제 중 하나가 될 것 수도 있다.

허들 넘기의 방법 중 하나가 ‘질문의 전환’이다. ‘무엇-질문’에서 ‘어떻게-질문’으로서의 전환이 그것이다. ‘무엇-질문’이 사물과 사태의 객관적 실체와 본질을 탐구하는 질문이라면, ‘어떻게-질문’은 자신의 체험과 관찰, 즉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탐구하는 질문이다. 무엇-질문도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어떻게-질문으로부터 시작해본다.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초유의 사태 속에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나누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기치유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이야기 만들기의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을 것이다.


5. 모든 길은 새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미래를 계획할 수도 있고 예측을 해볼 수 있지만, 예단할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사실은 삶 자체가 늘 그렇지만, 코로나 이후는 더욱 그러하다. 이를테면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이다. 코로나에 대응하는 한국사회가 오늘 그러하듯이, 길을 만들며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는 바이러스라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어떤 존재와 함께 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존재와 함께 살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불확실성과 함께 살기’, ‘복잡성과 함께 살기’, ‘예측불가능성과 함께 살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이끈다. 그런데 이를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또 다른 삶의 트랙으로 올라선 셈이다. 불확실성의 자각과 수용 자체가 전환의 도래인지도 모른다. 불확실성과 함께 살기를 다르게 말하면, 신비함과 함께 살기, 무궁함과 함께 살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미지의 세계, 불확실성, 신비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 우리에게 다른 무엇보다 절실한 일은 ‘마음 나누기’이다. 두렵고 놀랍고 알 수 없는, 낯선 경험을 나누는 일이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의 시간이다. 공감과 공유를 위한 안전한 공간이다. 섣불리 코로나 사태를 분석하거나 정의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보편적 가치로 재단하는 것은 더욱 위험해 보인다. 자기와 타자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우선이다. 그리고 대면/비대면의 새로운 사회적 소통형식을 통해 서로 느낌과 생각을 나누고, 자신의 관찰과 경험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음 나누기’와 ‘경험 나누기’는 곧, ‘배움 나누기’이며 나름의 ‘깨달음 나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사태를 정의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함께 만드는 날도 금세 올 것이다.

미래는 열려있다. 미결정의 진동상태다. 나눔도 필요하지만, 새로운 형식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의 기획도 필요하다. 오래전 어느 과학자는 ‘구조기획’에 대해 ‘과정기획’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야기 다시 함께 만들기’는 다시 말하면, 공동의 과정기획인 셈이다. 물론 필요하면 이와 관련된 새로운 조직형식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과정이 곧 결과’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코로나 이후의 새길은, 역시 길을 내며 길을 가는 길이다. 전환은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 덧붙임: 물론, 이 모든 이야기의 전제는 코비드19로 인해 고통받는 인류의 안전과 건강이다. 사람들에게 안전한 공간과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보장하는 일이다. 그리고 서로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다. 무엇보다 코비드19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수 있고, 불안한 마음과 허약한 몸을 돌볼 수 있으며, 기본적인 생활을 가능케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환의 출발점 될 것이다.

사발지몽

오랫동안 생명과 전환을 화두로 한살림 등에서 활동해왔으며, 최근에는 사회와 마음을 키워드로 탐구와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전환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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