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장으로의 문명의 전환, 생태민주주의와 협동조합의 전략지도] ④역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

이 글은 바야흐로 저성장, 역성장, 탈성장 국면으로 접어든 협동조합이 어떤 대응과 적응의 지도를 그릴 수 있는지 그 전략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성장을 몰적인 것으로, 저성장을 분자적인 것으로, 제로성장을 원자적인 것으로, 역성장을 양자적인 것으로 보는 초극미세전략의 일부이다. 여기서 몰은 집중성으로, 분자는 유한성으로, 원자는 순환성으로, 양자는 확률성에 대당(對當)된다는 이론적 가추법(abduction)을 적용해 보았다. 이 글은 한살림 ‘모심과살림연구소’ 주관으로 2019년도에 수행된 연구과제 결과물이며, 총 4회에 걸친 연재 중 이번이 마지막 회이다.

❮글 싣는 순서❯

  1. 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성장의 블랙홀(몰mole : 집중과 수렴의 단계)
  2. 저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지속가능한 발전전략(분자molecular : 유한성과 특이성의 단계)
  3. 제로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내발적 발전전략(원자atom : 순환성의 단계)
  4. 역성장 시기의 생태민주주의_질서 있는 감축전략(양자quantum : 경우의 수의 초미세전략)

(4) 역성장 시기의 민주주의_질서 있는 감축전략(양자quantum : 경우의 수의 초미세전략)

외부, 우발성, 사건성의 소멸

자본이 외부 – 생명, 자연, 제 3세계와 같이 약탈하고, 탐험하고, 모험하고, 착취할 영역이 없어질 때 어디로 눈을 돌릴까? 가장 일차적인 자본의 반응은 내부에 있는 공동체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by Carlos Pernalete Tua  출처 : www.pexels.com/ko-kr/photo/730647/
자본이 외부 – 생명, 자연, 제 3세계와 같이 약탈하고, 탐험하고, 모험하고, 착취할 영역이 없어질 때 어디로 눈을 돌릴까? 가장 일차적인 자본의 반응은 내부에 있는 공동체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사진 출처 : Carlos Pernalete Tua

역성장의 증후는 도처에 있다. 역성장은 ‘질서 있는 감축’이라는 문명의 전환의 노력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현존 문명이 처해 있는 외부로부터의 우발성은 최소화된 상황에서도 기인한다. 시민들의 삶과 생활양식 속에서 “아파트 가격이 올랐다”거나 “벤처열풍으로 대박이 났다‘거나 하는 등의 획기적인 사건이 없고 뉴스가 없는 상황이 도래했음을 직감한다. 자본이 외부 – 생명, 자연, 제 3세계와 같이 약탈하고, 탐험하고, 모험하고, 착취할 영역이 없어질 때 어디로 눈을 돌릴까? 예를 들어 해외 수출길이 막힌다면? 가장 일차적인 자본의 반응은 내부에 있는 공동체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골목상권에 대한 대기업 진출, 임대료 수익을 높이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공동체의 집단지성과 생태적 지혜에 대한 약탈, 제 3세계에 대한 분리차별 등 이러한 질적 착취 양상을 ’코드의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다른 방법으로는 갑질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권력의 잉여가치‘가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방법으로 정동과 사랑, 욕망의 시너지효과를 탐색하는 ‘흐름의 잉여가치’가 있을 수 있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퇴출시킨 채 로봇이 로봇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향하는 ‘기계적 잉여가치’가 있을 수 있다. 외부의 소멸 상황은 사회문화적인 변화도 초래하는데, 혁명이 문화상품이 되어 팔리는 현상, 여가의 디즈니랜드화, 야생버라이어티를 통해 외부가 실존한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미디어, 우주개발과 과학열풍, 사회의 심리학화, 1인 가구의 확산과 관계에 대한 소비와 향유, 유튜브 등에서의 먹방과 푸드포르노 등이 나타난다.

프랑스 철학자 쥘 들뢰즈와 심리치료사 펠릭스 가타리는 두 사람의 책 『천개의 고원』(2002, 새물결)에서 동물되기라는 하나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 두 사람에게 외부는 야성성과 자율성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문명의 외부로 탈주선을 그려내는 절대적 탈영토화나 유목하는 노마드는 생명과 자연이라는 영토와의 접속을 향한 문명의 탈주로를 의미한다. 그러나 외부의 소멸로 인해 성장의 동력을 상실한 역성장 시대의 도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동물되기라는 개념을 심각하게 무력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문명의 내부는 자기계발, 심리치료, 정신분석, 미디어, 사회조사 등으로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그 외부는 한 해 600만 명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사망하고 있는 제 3세계의 상황이 있다. 여기에 더해 2100년까지 가스, 수도, 전기 등 라이프라인의 해택을 입을 사람이 전 세계 인구의 10%도 채 안될 것이라는 전망이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생명과 자연, 제 3세계 등의 외부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간주하여 철저히 내부로 포섭하거나 배제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급기야 외부를 소멸시키는 상황을 연출하게 되었다. 이를 테면 나노기술, 유전자기술, 사이버네틱스, 인공지능 등은 생명과 자연을 더 이상 외부로 놓아두지 않고 철저히 문명 내부로 포섭한다. 과연 ‘외부=야성성=자율성’의 공식이 오늘날 성립될 수 있을까?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한 정동과 욕망의 자율주의 노선을 어떻게 다시 오늘날 적용될 수 있을까?

외부소멸테제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리바이어던』으로 잘 알려진 토마스 홉스이다. 홉스는 그의 책 『물체론』(1655, De Corpore)에서, 진공과 여백은 불가능하며 외부는 소멸되어 있다는 가설을 주장하였다. 그 당시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어떻게 외부가 소멸할 수 있는가?”, “어떻게 여백, 여가, 여유가 없는 신체가 가능한가?”. “진공이 없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최근의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상황에 이르러서야 외부가 소멸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도시의 모습은 이 문명의 외부가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며, 여가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하는 사회적 신체의 상황 등을 볼 때 홉스의 가설이 완전한 환상이자 망상인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21세기 들어 외부소멸테제를 다시 말한 사람은 이탈리아 자율주의자 안토니오 네그리였다. 네그리는 『제국』(2001, 이학사)에서 가타리의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개념을 차용하여 외부소멸테제를 주장한다. 여기서 네그리는 1세계 내에서 3세계(=내부식민지)가 존재하며, 3세계 내에서 1세계(=내부제국주의)가 존재하는 구도로 양극화의 상황을 통해 외부소멸테제를 적용해 보았다. 이런 점에서 제국이라는 네트워크형 지배질서 내에서는 외부로서의 식민지나 제 3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외부소멸 테제가 적용되는 상황은 일상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여기 한 퇴직자가 있다. 그는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있지만, 자영업이나 개인 사업을 하기에는 모두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다. 부동산이나 주식도 이제 큰 이윤을 남기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 그는 한정된 돈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투자할 외부가 없다. 그 순간 그는 외부소멸테제의 이미지 중 하나인 쪼그라들고 초라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자본은 반생산으로 향하며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상실한다. 마찬가지로 수출길이 막혀 있거나, 투자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해외로 도주할 데가 없는 자본의 각각의 모습들은 외부소멸테제의 몇 가지 사례를 제공해 준다. 외부로부터 우발적인 사건이 생기지 않는 상황이 바로 역성장의 시대이다. 우발적으로 가게에 손님이 찾아오지 않고,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구매도 없다. 갑자기 투자천사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행운이 없으며, 요행이 없으며, 돈 되는 것도 없다. 이러한 외부소멸단계는 자율성을 완벽히 마비시킬까? 앞으로 살펴볼 펠릭스 가타리의 욕망의 자율주의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하나의 아이디어와 영감, 단서를 제공해준다.

양자의 단계 : 경우의 수의 설립전략

양자(quantum)는 물질과 에너지의 중간상태의 가장 작은 입자단위라고도 일컬어진다. 양자역학에 위하면, 양자는 확률론적 경우의 수에 따라 움직인다. 양자 단위에서는 관찰조차도 개입이 된다. 내가 “본다”라는 행위를 하는 것은 양자에게 광자를 쏘이게 하는 것이고, 결국 양자단위의 변화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가설이 적용되는 결과를 낳는다. 슈뢰딩거의 역설은 상자 속 고양이가 죽었는지 확인할 수도, 확인 안 할 수도 없는 역설적 상황을 연출한다. 양자역학의 확률론은 중력이나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의 함수론과 궤도를 달리한다. 이를 테면 100+10이 110이 되는 것은 함수론에서는 받아들여지지만, 110이 다시 100+10이 되려면 확률론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확률론은 경우의 수, 주사위던지기, 제비뽑기를 통해 드러나는 수학의 영역이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죽음이 하나의 세계의 소멸과도 같다”라고 했던 들뢰즈의 비실재론, 혹은 구성주의가 적용되는 공간이다. 객관적 진리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진리라고 느끼는 것이 모두 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양자역학을 내쫓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왜냐하면 양적 척도에 의한 계산 가능성을 허물어뜨리는 경향에 의해 자본주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에서의 딥 러닝(Deep Learning)의 경우 다시 확률론이 재등장하며, 포스트휴먼 담론의 영향권 하에서 자본주의는 다시 확률론을 받아들일지에 대해서 저울질하고 있는 상황이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문명은 동질발생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비슷비슷한 시설물, 백화점, 편의점, 마트, 호텔, 모델, 게스트하우스 등을 세계 곳곳에 이식한다. 결국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문화생활과 미디어, 소비 향유, 인터넷 등이 존재한다. 동질적이라는 점은 점점 선택할 경우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만약 갑자기 기후변화 상황이 악화되어 식량위기가 도래한다면, 다양한 문화적 기반 위에 구축된 문명의 경우 다양한 대응방식을 구사할 특이점들이 있다면 어느 한 쪽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한 쪽이 버팀으로써 회복탄력성에 따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하면 비슷비슷한 형태의 문명은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을 갖지 못하고 일거에 무너질 것이다. 자본주의 문명 자체가 우발성, 외부, 사건성에 따라 설계되어 있지만, 사실상 성장을 통해 외부를 정립하고 동질화하는 방향으로 향해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외부의 소멸 국면은 문명의 동질적인 발생이 극단으로 이르렀을 때 우발성의 여지를 극도로 줄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성장의 동력이 급격히 상실되고 의고주의, 근본주의, 분리주의로 향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오히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과격한 극우분리주의가 융성하게 된다. 문명이 선택할 경우의 수는 외부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우의 수를 만들 것인가?

공동체에서는 내부 관계망 속에 정동, 사랑, 돌봄, 욕망 등이 작동한다. 정동과 욕망이 반복을 설립할 때 그것을 특이점(singularity)이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욕망과 정동의 반복의 지점은 구조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이하며 유일무이하다. 물리학에서 특이점은 에너지가 물질이 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욕망이 반복되어 현실이 되는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이점은 외부로부터의 우발성을 대체할 내부의 반복을 설립시켜 선택가능하게 되는 경우의 수가 된다. 이러한 논리구조에 대해서 반발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여기 거리에 나앉은 가상의 노숙인이 있다. 노숙인은 맨몸뚱아리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역이나 광장이나 거리에서 잘 수 있는 선택지도 극도로 줄어들어 있다. 그런 선택의 경우의 수의 축소는 더 더욱이 노숙인을 위축시킬 것이다. 그러나 노숙인이 선택할 경우의 수를 제공하기 위해서 활동가와 시민단체, 봉사단체의 사랑과 정동의 반복은 밥차를 만들어내고, 노숙인 잡지를 만들어내고, 샤워시설, 쉼터, 사회적 기업, 제도 창안을 통한 임대아파트에 들어갈 권리 등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서 노숙인은 외부에서 온 어떤 천사와 같은 자선사업가로부터 거금을 받지도 못했고, 로또가 당첨되는 우발적인 행운을 거머쥐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사랑, 욕망, 정동의 반복이 특이점을 만들어 선택의 경우의 수를 늘린다. 그렇게 되면 노숙인의 자율성은 확대될 것이다. 이것이 가타리가 제시한 외부소멸테제에 맞선 욕망의 자율주의의 전모이다. 결국 ‘경우의 수의 경우의 수’를 만들고, ‘모델링의 메타모델링’을 만드는 것이 특이점의 설립인 셈이다.

우발적 소비의 종말과 내부자 거래의 확장

외부로부터의 경우의 수를 기다리거나 헛된 희망으로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가까이의 삶과 일상의 재건에 나서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통해 새로운 욕망의 특이점을 창안해내고 반복을 통해 강건해짐으로써,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려나갈 수 있다. by Henry & Co.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yL2nYt3Eu8k
외부로부터의 경우의 수를 기다리거나 헛된 희망으로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가까이의 삶과 일상의 재건에 나서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통해 새로운 욕망의 특이점을 창안해내고 반복을 통해 강건해짐으로써,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려나갈 수 있다.
사진 출처 : Henry & Co.

우발적 소비는 가게나 시설물, 은행 등 다양한 자본주의 영업활동의 기반이 되어 왔다. 그러나 우발적인 소비가 사라진 상황은 어두운 디스토피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국 외부가 아닌 내부를 통한 점진적인 범위의 확산을 추구하는 방향성이 필요한다. 생활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는 우발성에 기반한 여지를 최소화하고, 스스로 판을 짜고 호혜와 증여의 선물을 주고받음으로써 관계를 성숙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즉, 관계망의 프랙탈 유형의 확산과 점진적인 전염효과를 통해서 내부의 외부를 만드는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외부로부터의 자원-에너지-부의 유입이 극소화되었던 인류의 경험에는 나치 집권하의 유태인들의 집단거주지인 게토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다. 당시 게토는 나치에 의해 고립되어 외부로부터 어떤 물자도 유입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으나 공동체 구성원끼리 소시지 하나, 담배 한 개비 등의 자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여지를 극대화했다고 한다. 보다 더 연구가 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내부자 거래가 극도로 이루어질 때 어떤 현상들이 벌어질지 아직 역사적 사료와 현장 연구는 적은 상황이다. 내부자 거래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을 때, 내부에서의 경우의 수를 확대하는 방향성 즉 사랑, 정동, 욕망의 특이점을 늘려나가는 방향성을 갖는다. 외부로부터의 경우의 수를 기다리거나 헛된 희망으로 소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가까이의 삶과 일상의 재건에 나서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통해 새로운 욕망의 특이점을 창안해내고 반복을 통해 강건해짐으로써,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려나갈 수 있다. 20~30년 전에는 아이디어가 막대한 부를 남긴다는 벤처붐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이디어가 특이점을 설립함으로써 소득의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차원으로 이행해 있다.

발전전략이 남긴 역사적 교훈은 관계의 성숙을 통해서 시너지효과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발전전략조차도 외부의 소멸 국면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전략이다. 외부로부터의 소비자들의 자발적인 구매와 우발적인 소비의 부재는 외부 의존도를 극도로 약해지게 만들 것이다. 협동조합의 결사체와 사업체의 이중성 속에서 결사체 즉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의 비중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결사체 방식의 조직화로는 역성장 시대의 외부 소멸에는 무기력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의지와 결사로 특이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동과 욕망이 일상이라는 배치 속에서 특이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 책임주체 유형의 조직화 방식이 아닌 탈구조주의에서의 주체성 유형의 조직화 방식이 전면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활력, 생명에너지,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활동, 비물질적인 활동, 정동, 욕망 등이 구성해 낼 일상과 삶의 내재성에 기반한 매우 유연하고 느슨한 조직들의 연합일 가능성이 있다. 외부의존도가 낮기 때문에, 전문가 유형의 현란한 의미모델이 아닌 아마추어리즘의 영구적인 혁명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는 일들은 대부분 실패할 것이지만, 그것의 진행과정에서 그 일을 해낼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져 특이점이 설립되는 것에 긍정성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 3섹터는 간(間)공동체적인 사회구성의 매개자이자 촉진자로 나서게 될 것이다.

내부자 거래의 유형들에 대한 증후는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 자본은 블록체인(Block chain)과 같은 플랫폼의 조합주의 유형의 조직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메타네트워크이며, 메타네트워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을 자본 역시도 직시하는 것이다. 제 3섹터의 하나의 몸체는 다양한 기계부품을 기능적으로 작동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특이점들을 작동시키고 그 특이점들 각각이 모듈로서 완결되는 방식으로 이행해야 한다. 물론 플랫폼과 같이 메타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한 ‘협동조합 간 협동’이나 ‘협동조합을 만드는 협동조합’의 방향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방향성은 똑같은 조직들이 이름만 달리하는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선택의 경우의 수를 구성할 수 있도록 사랑, 정동, 욕망의 반복의 설립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에 달려 있다. 즉 “우리는 사랑할수록 달라져야 한다”는 명제 따라 사랑과 연대, 협동이 더 다채로운 특이점들의 설립으로 작동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상수에 얽매이지 않는 변수 즉 절대적 변주로서의 리토르넬로(ritornello)라고 설명한다. 즉, 사보텍 인디언의 휘파람 언어처럼 “삐삐삐”라고 하던지 “삐리리”라고 하던지 적이 왔다는 신호로 감응되는 절대적 변주의 과정이고, 북미인디언처럼 밤에 문을 두드리며 “저는 어둠입니다”라고 하든 “저는 바람입니다”라고 하든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는 절대적 변주의 과정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적 변주의 과정 속에서 몸은 하나지만, 다양한 얼굴과 리듬, 화음, 특이점 등을 갖는 메타네트워크로서의 제 3섹터를 상상할 수 있다.

초극 미세사회에서의 특이성 생산의 전면화

이제 문명이 선택할 경우의 수를 늘리기 위해서 사랑과 돌봄, 정동의 흐름이 만드는 특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문명이 선택할 경우의 수에 대한 덧셈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신체와 사회의 표면 위로 드러나는 잠재성의 흐름과 관련된 초미세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비처럼 날아다니는 청년과 율동에 춤을 추는 아이, 판을 부드럽게 만드는 소수자들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잠재성의 흐름을 욕망과 정동의 반복으로 설립해낼 것인가”라는 점이다. 여기서 사회적 경제의 사회적 역할이 있다. 아직 무정형이고, 구체적인 반복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어수선하여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것에 지도를 그려내고 패턴화의 반복을 설립하는 것에서 바로 사회적 경제의 예술적이고 심미적이고 실천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이것을 한 마디로 ‘특이성 생산’의 과제라고 펠릭스 가타리는 요약하는데, 그는 개념화는 성공했지만 특이성 생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모델화=의미화=표상화=자본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에 대한 엄청나게 여러 개의 지도그리기를 통해서 설명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향한다. 물론 “~은 ~이다”라고 본질을 적시할 수 없는 특이성 생산과 같은 개념의 구도는 설명력을 높임으로써 점차적으로 곁과 가장자리, 주변을 그려나가며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베이트슨에 의해서 ‘영토화’가 아닌 ‘지도화’라고 언급되었던 개념은 ‘지도제작(cartography)의 방법론’으로 가타리에게 재전유되었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역할을 하면서 결국 단조로운 상품소비로 외양만 바꾸고 현란한 이미지를 부여하여 팔아낸다는 점에서 동질발생적이다. 반면 특이성 생산은 상품소비라는 귀결점을 반드시 갖고 있지 않으며, 미지의 영토를 향해 여행하듯 절대적 변주로 향한다. 동질발생적인 문명은 결국 생명위기 시대를 대비하기에는 매우 취약한 구조임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문명 자체가 선택할 경우의 수조차도 변변히 없는 상황이 초래된 것은 동질발생으로 귀결되는 문명 전체의 작동방식을 제고해야 할 상황임을 의미한다. 외부의 소멸의 국면에서 사회적 경제는 특이성 생산 즉, 경우의 수로서의 특이점 설립의 가능성에 나서야 한다. 이를 통해 차이와 다양성의 판과 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차이를 낳는 차이’를 설립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차이와 다양성의 생태계의 조성이 2차적 차이를 낳는다”라는 전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생태계 조성은 말이 쉽지 특이성 생산이 수 천 개가 이루어지는 메타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생태계가 만들어질 때까지 시간과 진화의 과정을 진득하게 기다린다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리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다.

초극 미세사회에서 특이성 생산은 정보, 지식, 인간, 사물, 생명의 생태계를 통해서 일차적인 판과 구도를 깔면서 기대해 볼 수도 있다. 특이성 생산은 고도로 자유로우면서도 고도로 조직된 도표(=diagram)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이는 와해되고 해체된 개인들의 고정관념들(=기표)이 아무리 모여도 형성될 수 없다. 여기서 도표의 네 가지 정의를 살펴본다면, ① 냄새,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맛 등의 비기표적 기호계 ② 생태계의 윤곽과 곁, 가장자리를 그려내는 지도제작법 ③ 고도로 자유로우면서도 고도로 조직된 기호작용 ④ 돌발흔적과도 같이 출현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발전전략은 “~은 ~이다”라는 의미화하고 기획하는 전문가들의 논리가 아니라, 특이성 생산을 가능케 할 도표에 따라 작동된다. 다시 말해 관계의 성숙을 통해 생태적 다양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도로 자유로우면서도 고도로 조직된 활동이, 냄새, 음향, 색채, 몸짓의 향연이, 서로의 관계가 만든 생각, 행위, 언어 등의 지도를 그려내면서 관계망을 성숙시켜내는 공감대화가, 돌발적으로 출현하는 것을 사랑하며 그것의 전개를 따라가는 관계망이 필요한 셈이다.

물론 특이성 생산이 이루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자원 유입이 최소한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들이 도처에서 제기되고 있는 상황인 것도 사실이다. 활동가들 사이에서의 번 아웃과 소진된 인간, 멘탈붕괴 등과 같은 상황의 등장은 외부로부터의 자원 유입이나 기회의 상실 등이 초래한 외부소멸의 상황이 얼마나 막대한가를 드러낸다. 결국 특이성 생산을 통한 경우의 수의 설립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라는 ‘경우의 수의 경우의 수’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도달 할 수 없는 실험과 실천이 될 것이라는 점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정동, 사랑, 욕망의 특이점을 통한 영구적인 재배치

현존 문명의 특징은 이민자, 소수자, 생명 등을 정동이 관통할 특이점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실상 소수자라는 하나의 특이점이 등장하면 그것에 대한 접근과 태도를 결정할 다양한 방법 등이 동원되고 표면에 흐르는 다양성과 차이가 더 미세해진다. 사랑할수록 미세한 다름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공통성(common)이 아닌 화음(chord)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울림통과 편자가 서로에게 공명할 때 같은 음일 수 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무수한 편위음과 변주음, 화음이 발생한다. 이것을 소음이나 잉여로 간주해 왔던 것이 주류문명이었고, 일방적으로 같음을 전제로 한 공통음의 평면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현존 문명은 소수자가 공동체에서 갖는 촉매자, 효모, 감초와 같은 특이점으로서의 역할의 비밀을 배제해 버리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논리를 통해 소수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 공리주의를 주춧돌로 삼는다. 이러한 논리의 귀결은 전도된 이미지로서의 ‘소수 1%에 의한 다수 99%에 대한 지배’를 용인하고 공모하게끔 만드는 것으로, 더 나아가 미시파시즘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공리주의적인 문명은 특이성 생산이라는 경우의 수의 덧셈이 아니라, 경우의 수의 뺄셈으로 나타나는 문명의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날 것이다. 유럽과 북미, 각국에서 등장하고 있는 극우파시즘의 분리주의, 폐쇄경제, 고립주의 등의 경향의 대두는 성장주의 패러다임을 버리지 않겠다는 반동적인 움직임의 발호이며, 동시에 공리주의의 논리구조에 따랐던 문명의 극단화된 모습에 일부이다.

결국 소수자에 대한 사랑이 만드는 특이점은, 특이성 생산이 가진 비밀 중 하나를 잘 보여준다. 성장주의와 같이 성공주의, 승리주의, 처세술, 자기계발이 아니라, 낮은 곳을 향해 자신의 자취와 이름을 남기지 않는 지각 불가능한 영역을 향해 사랑을 투과시키고 반복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동과 사랑의 양상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수자되기’라고 개념화한다. 소수자되기는 정동의 양상들인 살림, 돌봄, 보살핌, 섬김, 모심 등으로 개념화할 수도 있지만, 미세한 차이를 드러내면서 무수히 많은 작은 특이점들을 설립한다는 점에서 화음이 갖는 절대적 변주의 과정으로 그려볼 수도 있다. 소수자되기는 자신의 배치를 끊임없이 재배치하는 미시정치로 드러날 것이다. 어떤 하나의 반복의 설립이 만든 배치로 완결될 수 없는 반복의 배치와 재배치의 영구적인 과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동은 소수자의 몸짓, 표정, 색채, 음향, 맛 등에 감응하여 무언의 춤으로 표현하는 공동체의 흐름과도 같을 것이다. 이를 테면 공동체에서 소수자들은 구성원들을 춤꾼으로 만들고, 이야기꾼으로 만들고, 가수로 만드는 등 특이점 설립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 사람들은 소수자라는 특이점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편차와 낙차 속에서 만들어지는 놀이와 흥, 율동, 리듬, 화음 속에서 2차적 특이점을 설립한다. 결국 고도로 자유로우면서 고도로 조직된 도표로써 작동하는 공동체 활동의 비밀에는 바로 소수자되기가 있다.

역성장 시대의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은 욕망과 정동의 반복을 통한 특이점 설립과 배치의 재배치와 관련된 미시정치가들의 연합을 지칭할 것이다. 발전전략이 거대계획, 거대프로그램 등으로 얇게 스케치했던 부분을 채우는 부분이 바로 생활정치, 미시정치의 영역이다. 사회적 경제가 더 촘촘하고 미세해지고 유연해진다는 점에서 네트워크를 훨씬 더 넘어선 비기표적 기호작용에 대한 감응판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각각의 특이점들 간의 교직과 교차, 연결과정에서의 다양한 가상성과 잠재성이 동원될 것이며,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적 특이점뿐만 아니라, 무차별사회, 간(間)공동체적 사회, 국제질서, 지역단위, 로컬의 모듈단위, 1인 가구라는 공간적 특이점까지도 포괄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가 등장할 수 있는 메타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된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경우의 수들이 정동과 욕망의 반복을 통해 특이점 설립으로 나아가도록 촉매하고 고무하고 양육해야 하는 것이 미시정치가들의 실험이자 실천이다. 수많은 값진 실패와 시행착오가 역성장 시대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생태적 다양성과 추첨제 민주주의의 확산

생태적 다양성에 입각한 미시정치와 거시정치에서 참고할 만한 역사적 사례가 바로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추첨제 민주주의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대표와 관료를 제비뽑기와 같은 추첨을 통해서 선발하였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가 미리 전제되어 있다는 점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대표와 관료를 대의제 민주주의 방식에서 권력자로 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배치와 관계망의 시중꾼으로 규정하게 된다. 물론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리가 전문가들의 논증과 추론능력의 결과물일 뿐이라고 보고, 그 결과 고대이집트의 파라오의 철인정치를 흠모했던 플라톤과 같은 반동적인 사상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현존 아카데미는 플라톤의 후예들이며, 바로 그런 점에서 역성장 시대는 대학의 기능상실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도자기 조각에 공동체에서 내쫓을 만한 인물을 적어서 비밀투표를 하는 도편추방제도를 운영하였다. 여기에 적힌 인물은 나쁜 일을 한 사람이거나 악명 높은 사람의 경우도 있지만, 심지어 덕망이 높고 인기가 많은 사람도 있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사실상 독재자나 참주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혼합정 유형의 정치를 구사했다. 위기 시에는 독재를 선택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귀족정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추첨제 민주주의의 판 위에서만 가능했다.

여기서 우리는 역성장의 시대에 정부형태나 각 공동체 단위에서 추첨제 민주주의를 도입하여 경우의 수를 만들어나갈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대표나 관료가 된 사람에게만 권력과 책임을 할당하여 로또 복권과 같이 느끼게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철저히 공동체와 제 3섹터의 배치와 관계망이 책임과 구성-권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 배치의 맥락과 탈맥락을 읽을 수 있는 주체성들을 양성하는 과정으로서의 미시정치를 기획하는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와 전문가들에게 미시정치를 맡길 수는 없다. 욕망과 정동의 흐름이 차라리 잘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배치와 관계망이 책임을 지는 미시정치의 유효성을 말할 수 있다. 추첨제민주주의의 실험은 직접민주주의의 제도화과정에서 참여자치예산위원이나 주민자치위원들의 선발과정 등 한국사회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것이 제 3섹터에서 실험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특히 역성장 시대는 작은 모듈단위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추첨제민주주의 실험을 시행해야 할 중요한 전기를 맞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 위기 상황에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미시정치의 공백이 우려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바로 후쿠시마 핵 위기 상황에서 일본의 정치권이 보여준 행태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숙의민주주의의 한 형태인 탈핵 공론조사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추첨제민주주의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전제되어 있다는 급진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의 형태가 아니라, 전문가를 다시 등장시켜 숙려과 숙의의 과정만 대행한 것은 그것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근대는 ‘사회의 실험실화’를 급격히 진행해 왔다. 그 이유는 플라톤주의가 내걸고 있는 이상적이고 원형에 가까우며 완결된 진리의 공간이 바로 실험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학교, 감옥, 공장, 병원, 정신병원, 시설 등은 사회의 실험실화의 과정에 따라 디자인되었다. 이를 미셸 푸코는 통제사회 즉 판옵티콘 모델로 설명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황우석 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실험실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폐쇄환경에서 실험윤리, 생명윤리, 동물윤리, 연구윤리 등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는 유사파시즘의 역사적 경험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실험실의 사회화’라는 과정이 거대한 맥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동물실험실윤리위원회와 생명윤리위원회 등이 구성되었고, 연구윤리에 대한 시민사회의 철저한 개입이 이루어졌다. 이는 전문가주의의 배경이 된 사회의 실험실화에 반대하는 실험실의 사회화라는 그 역의 과정을 의미한다. 결국 탈핵 공론조사의 방향성은 ‘사회의 실험실화’와 ‘실험실의 사회화’ 과정이 교차하는 매우 긴장감 높은 과정일 수밖에 없지만, 직접민주주의에 따라 ‘실험실의 사회화’의 경향에 손을 들었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역성장 시대에 전문가들의 본질을 적시하면 정의(definition)할 수 있기 때문에 진리를 알고 있다는 실재론이 아닌, 다양한 의견과 수많은 진리모델이 가능하다는 구성주의가 전면화될 것이다. 이것이 추첨제 민주주의가 조성하는 생태다양성의 메타모델화이다.

위기에 강한 협치 : 자연의 우발성을 협치 안으로

역성장 시대의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은 욕망과 정동의 반복을 통한 특이점 설립과 배치의 재배치와 관련된 미시정치가들의 연합을 지칭할 것이다. by Micheile Henderson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SoT4-mZhyhE
역성장 시대의 사회적 경제와 협동조합은 욕망과 정동의 반복을 통한 특이점 설립과 배치의 재배치와 관련된 미시정치가들의 연합을 지칭할 것이다. 사진 출처 : Micheile Henderson

역성장 시대에 환경재난과 생태계위기 등의 우발성을 내부의 경우의 수로 만들어 특이점을 설립하는 협치가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이에 대한 스케치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공통체』(2014, 사월의 책)에 단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는 생명과 자연의 경우의 수까지 특이점으로 설립한다는 점에서 거대한 협치, 위기에 강한 협치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일련의 과정은 모든 경우의 수를 포섭해 오면서 외부를 상실한 현존 문명의 방향성과도 충돌하지 않으며, 더불어 특이점을 설립하여 경우의 수를 늘리는 방향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위기에 강한 협치의 기본구도는 자연과 생명, 인간, 사물, 기계 등의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면서 이를 인간의 대리인을 통해 이의 최대치를 상상하고 사유하게끔 만든다는 점에서 드디어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68년 혁명이 제출했던 슬로건의 현현으로도 보인다. 이제 문명이 선택할 경우의 수의 설립에 중요한 것은 상상력, 예술적인 감수성, 정동, 욕망과 같은 비물질적인 것이 된다. 이 시기 협치는 기획 단위이자 실행 단위로도 확대될 것이다. 그 자체가 생명민회의 한 섹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성장 시대는 바로 기후변화와 생물 종 대량멸종의 시대와 함께 진행될 것이라는 점에서 암울한 증후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생명 위기 상황에서는 중앙의 대응센터가 해야 할 역할만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즉흥행동 등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센터와 현장이 반응속도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직관력, 관찰력, 영감, 느낌. 감각 등의 일상에서는 비합리적이라고 간주되지만, 생명위기 현장에서 동원되는 행동방식은, 기능주의, 전문가주의, 자동주의를 주축으로 한 관료제 지층의 대응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이점에서 생명민회의 구성과 생태민주주의의 작동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생명민회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을 우리는 세월호 유가족에게서 볼 수 있었다. 보통 생명위기의 현장 풍경이라고 하면 무참한 상황과 대비되어 대피소에서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주민들의 형상을 상상하기 쉬운데, 세월호 유가족의 경우에는 용감하고 강건한 행동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생명 위기 상황에서 생명민회와 생태민주주의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행동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성장 시대와 함께 시작된 생명 위기 상황에서 세월호 유가족의 실천은 한국사회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한국사회에서 생명민회가 상상했던 영구적인 혁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생명민회에 대해서 개념화하지 않더라도 도처에 생명민회가 내재하게 된 시대가 되었다.

역성장 시대이자 생명 위기 시대에 우리는 주저앉을 수 없으며, 전망상실과 우울, 소진, 번아웃, 불안 등에 고립될 수도 없다. 우리는 사랑과 욕망, 정동의 힘에 기반하여 그것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특이점의 능력에 따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려가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가 초연결사회이기 때문에 국지적인 한 영역에서 만들어낸 특이성 생산의 지혜와 경험은 금방 다른 영역과 지역으로 전달될 것이다. 하나의 특이점이 눈덩이 효과를 갖는다는 분자혁명의 구도도 참고해 볼 수 있지만, 수많은 특이점들의 경험과 노하우, 지혜, 파급효과가 복잡계를 이루면서 ‘경우의 수의 경우의 수’가 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역성장 시대를 놀라운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와 다양성의 생태계에 희망을 건다. 사회적 경제의 미래는 우리가 사랑과 정동, 욕망에 따라 재건하고 구성해낼 미래진행형적인 과제들이다. 우리는 미래로 향해 미지의 여행을 떠났으며, 늘 미래이고 과정이고 진행형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상상하고 꿈꾸고 실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침-

이 글은 모심과 살림연구소 『생명을 살리는 전환』 연구과제의 결과물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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