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자습의 교재를 추천합니다 – 「이야기 귀신」을 읽고

「이야기 귀신」은 전래동화를 지금-여기에서 다시 읽을 수 있도록 다듬어 낸 책이다. 이 책을 읽은 어린이들은 재미나게 읽으며 대체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며 교훈을 얻을 것 같았다. 어린이 독자처럼 어른들도 충분히 읽고 배울 수 있는 게 많은 책으로 보여 여기에 소개해 본다. 특히 탈성장의 관점으로 해석할 여지를 가진 쓸모 많은 구석이 있다.

이야기 귀신이라는 이야기

아래의 글은 「이야기 귀신」이라는 제목의 동화를 14개 문장으로 요약하고 문장마다 번호를 붙인 것이다.

(1) 어느 집에 막내딸이 있었다.

(2) 막내딸은, 이야기를 듣고, 적고, 주머니에 넣어 모으기를 좋아했다.

(3) 막내딸은 13세에 결혼하게 되었다.

(4) 막내딸에게는 몸종이 있었다.

(5) 몸종은 이야기 듣고 퍼뜨리기를 좋아했다.

(6) 몸종은 막내딸의 결혼식 준비로 분주하던 중에 이야기를 하나 듣는데, 그것은 막내딸에 의하여 주머니에 갇힌 이야기들이 막내딸에게 앙갚음하기 위하여 나눈 이야기였다.

(7) 몸종이 들은 이야기에는, 이야기들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막내딸이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8) 몸종은 두꺼비에게 밥 한술을 주며 도움을 청했다.

(9) 결혼식 날, 몸종은 막내딸을 죽이려고 변신한 이야기들인 딸기와 모란을 없앤다.

(10) 결혼식 날 밤, 몸종은 신혼부부의 방을 두꺼비와 함께 지키다가, 막내딸을 죽이려고 변신한 이야기인 구렁이를 죽여 막내딸 부부를 보호한다.

(11) 몸종은 막내딸의 아버지에게서 집과 논밭을 받았다.

(12) 몸종은 글을 배웠다.

(13) 몸종은 막내딸에게서 이야기 주머니를 얻었다.

(14) 몸종은 이야기꾼이 되었다.

이 동화는 한 권의 그림책으로 꾸며져서 출판되어 있다.1 비룡소가 이 이야기를 전래동화로 분류하였기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구비문학대계]2를 검색하여 보았으나, 찾기 어려웠다. 한편 유튜브를 검색하여보니, 〈[초등 3학년 | 독서논술] 이야기 귀신 | 전래동화 | 이야기 주머니 | 말의 중요성〉3이라는 제목의 컨텐츠가 있었는데,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이야기 귀신」과 조금은 달랐지만 전하고자 하는 교훈은 유사한 듯하였다.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혹은 이야기는 자유롭게 멀리 퍼져야 한다

이상희 저자(글)・이승원 그림 『이야기 귀신』 (비룡소, 2012)

비룡소에서 출판한 그림책 「이야기 귀신」을 보면, 위의 요약과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원문 자체도 요약보다 많은 이야기거리를 품고 있으며, 그림 또한 원문 못지않게 많은 이야기거리와 정보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동화가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 혹은 ‘이야기는 자유롭게 멀리 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고, 그림책 「이야기 귀신」을 본 어린이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이 그림책은 그런 깨달음을 어린이 독자들이 체험하는 데 초점을 맞춰 만들어진 것 같다. 어린이 독자들은 이런 깨달음을 체험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몸종이 막내딸에게 선의를 베푸는 과정에서 발휘한 용기와 지혜로움을 높이 평가하는 데로 나아가기도 하고, 주머니에 갇혀있던 이야기들에게 공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깨달음과 평가의 과정을 보고 있자니, 어린이 독자들이 그림책을 보기 전에 이미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 혹은 ‘이야기는 자유롭게 널리 퍼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림책 보기도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펼쳐진 듯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어린이 독자들은 해방·자유·연대·소통 같은 가치를, 그것들이 관념화되기 이전의 상태로,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듯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주머니 속에 갇혀있는 이야기들은, 막내딸을 죽일 계획을 세울 정도로, 거친 존재들이었음에도, 주머니 속에 갇혀있다는 이유 때문에, 어린이 독자들로부터 동정을 강하게 얻고 있는 듯 싶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무엇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어린이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낀 듯하였다. 이런 어린이 독자들의 생각의 흐름은 대단히 자연스럽다고 할 수도 있겠고, 그림책 「이야기 귀신」은 이러한 생각의 흐름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이 많이 들어간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으기와 퍼뜨리기, 퍼뜨리기와 모으기

한편, 이야기 속에는 모으기도 나온다. 모으기는 막내딸도 주로 한 것이다. 그는 이야기를 모았다. 이야기 속에서 모으기는 마치 퍼뜨리기를 위해서 잠시 존재하는 것 같이 그려져 있다. 분량으로만 보아도, 이야기의 대부분은 퍼뜨리기라는 결말을 향해 가는 꽤나 험난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막내딸이 이야기를 모아놓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몸종은 신명나게 여기저기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이었지만 모으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막내딸은 들은 이야기를 글로 적어서 모았다. 이야기 끝에 가면 몸종도 글을 배운다. 그리고는 이야기 주머니를 막내딸로부터 넘겨받는다. 몸종과 막내딸은 위기일발의 결혼식 과정에서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독점하고 억압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힘과 제도를 인수인계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몸종은 이야기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고스란히 주머니 속에만 갇혀있는 상황과 비교하여보면, 주머니를 몸종이 가지게 된 것은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변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누구였을까? 막내딸과 몸종 이외의 사람들은 이야기주머니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막내딸은 이야기주머니를 아무 것도 아닌 듯 선뜻 몸종에게 주었을까? 집과 논밭을 받아 이미 풍족해진 몸종에게 이야기주머니나 이야기를 퍼뜨리는 일은 이제 더이상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면까지 생각해 보는 것이 어린이 독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모으기와 퍼뜨리기 가운데 뭐가 더 중요할까요?’라는 질문은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라는 질문만큼이나 실없거나 위험한 질문 같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퍼뜨리기 못지않게 모으기에도 관심을 가져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석연치 않지만 숭고한 해방, 감정자습의 계기가 되다

이 이야기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은 몸종이다.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그의 앞에 주어지는 일들과 용감히 맞서면서 지혜를 발휘하였다. 그는 보상도 많이 받았다. 글을 배웠다는 것을 보면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출발점은 이야기를 독점한 막내딸의 노예였다. 이야기의 절정 부분에서 몸종은 막내딸을 적극적으로 보호한다. 그는 자기를 지배하는 자에게 저항하지 않았고 헌신하거나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들은 잠시 적대자가 된다. 몸종은 이야기들의 화신(化身)[avatar]들인 딸기, 모란, 구렁이를 가차 없이 죽인다. 달리 말하자면 화신을 죽였을 뿐이기는 하다. 막판에 몸종은 막내딸로부터 이야기주머니를 얻고 이야기꾼이 된다. 이야기꾼이 되었으니 일상적으로 이야기를 주머니에서 꺼내서 사람들 앞에서 읽어 줌으로써 이야기를 퍼뜨리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자기 손에 움켜쥐고 있기도 한 것이다.

석연치 않은 숭고함. 이 두 단어의 결합은 몸종의 행적이 말해주듯 존재의 성장이 온실에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숭고함에 이르는 과정은 감정이 동요하는 분투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사진출처 : Pixabay
https://images.app.goo.gl/Uo2UPRFSsTuBTWof6

몸종의 행적은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분투하고 성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보여준 삶은 여러 억압과 제약을 하나하나 풀어헤친 해방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숭고(崇高)하다[sublime]고 평가하기도 한다. ‘숭고하다’를 ‘崇高’라는 한자어로서 보다는 ‘sublime’이라는 영어의 번역어에 국한시켜 보면, 이는 ‘그냥 그저그렇게 살아온 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에는 아득히 높은 곳에 도달한 존재’를 평가하거나 형용할 때 사용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 존재가 완전무결하다는 평가라기보다는 가 닿을 수 없을 만큼 아득하게 높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을 갈망했지만 안타깝게도 성장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는다. 그들은 분투와 성장의 과정을 거쳐서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위치에 가 버린 사람들에 대하여 질투심과 시기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 경지와 존재를 선망하기도 할 것인데 그런 선망에 수반하는 느낌이 숭고함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분투를 수반하지 않고서 숭고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분투의 과정은 많은 상처를 수반할 수 있다. 순백, 완벽, 완전무결해서는 그 자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숭고한’이라는 말 앞에 ‘석연치 않은’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가 바로 분투에 현실적으로 따로 붙을 수밖에 없는 군더더기 때문이다. 모든 숭고함은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라고 단언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멀리서’ 볼 때 그저 용감하고 지혜로운 소녀로만 보였던 몸종이, ‘가까이에서’ 보니 폭력을 휘두르고 타협하고 협상하는 ‘인간적인’ 모습에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몸종의 위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위선적이지만 선하고자 하나 의지를 평가해 줄 것인가? 아니면 위악일지라도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진솔함 혹은 노골적임을 지지할 것인가?

「이야기 귀신」이라는 이야기를 거듭 읽으면서, 탈성장도 함께 생각하여 보았다. 지금 사람들이 누리는 편리함은 그동안의 성장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지금 사람들이 딛고 서 있는 성장은 이야기 속 몸종의 성장보다 훨씬 많은 상처를 입으며 이루어낸 것이다. 그런데 그 성장이 일상을 편하게 하여 주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편안함 속에서도 성장에 새겨진 상처를 느끼며 불편해하고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자책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이야기 속 몸종의 성장에서도 상처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런 상처 때문에 몸종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성장이 이러한 것임을 아는 사람에게, 탈성장은 그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감정의 문제로 읽을 수 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감정에 걸린 부하를 되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때 사람들이 일종의 감정자습을 할 수 있는 교재로 책 「이야기 귀신」은 쓸모가 많을 것 같다.

그런데 두꺼비는 누구 혹은 무엇이었으며 뒷날 어떻게 되었을까? –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시면 「이야기 귀신」을 읽어 보시라.


  1. 이상희(글), 이승원(그림), 「이야기 귀신」 비룡소 전래동화 21, 비룡소, 2012. [정가 12,000원]

  2.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운영하는 온라인사이트〈한국구비문학대계〉https://gubi.aks.ac.kr/web/

  3. 밀크티타임의 youtube [초등 3학년 | 독서논술] 이야기 귀신 | 전래동화 | 이야기 주머니 | 말의 중요성 https://www.youtube.com/watch?v=vpv4P4JtMRg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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