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없다’에 대한 색다른 해석 – 대안적 공동체 꾸리는 〈제석본풀이〉 ‘삼신할미’ 이야기

한국 무교의 노래 가운데 〈제석본풀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줄거리는 당금애기라는 여성의 험난한 인생 역정이어서, 이는 당금애기가 곧 한국의 어머니이며, 수 많은 여성들의 지킴이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노래 속에는 제석삼불도 등장한다. 이 글에서는 제석삼불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보고, 재수굿이라는 것도 살펴보고자 한다.

당금애기, 제석삼불의 어머니이자 삼신할미

당금애기는 무당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기 몸에 모시는 신격인 제석삼불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삼신할미’이기도 한 신격이다. 제석삼불을 모신 무당이 굿을 할 때 자기가 모시는 신격을 설명하는 사설(辭說)이 있는데, 그 사설의 대부분이 당금애기가 제석삼불을 낳고 삼신할미가 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금 이 이야기는 별도의 이야기로 다듬어져 있고 쉽게 찾아볼 수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있는 ‘당금애기(제석본풀이)’1는 다음과 같이 8개 부분으로 글이 나눠져 있다.

(01) 시준님, 개비랑국에서 태어나다.

(02) 당금애기, 시준님에게 시주하다.

(03) 당금애기,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다.

(04) 당금애기, 집에서 쫓겨나다.

(05) 당금애기, 아들 삼형제를 낳다.

(06) 당금애기의 아들 삼형제, 아버지를 찾아 떠나다.

(07) 당금애기의 아들 삼형제, 아버지를 만나다.

(08) 당금애기와 아들 삼형제, 신이 되다.

‘(01)’은 당금애기와 잠자리를 하여 아들 삼형제가 태어나게 한 남성인 ‘시준님’에 대한 설명이다. 시준은 세존(世尊) 즉 석가모니 부처이다. ‘개비랑국’은 석가모니 부처의 아버지가 통치자였던 도시국가 카필라 성[Kapila-vastu]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설을 굿에서 노래하는 무당은 자신이 모시는 신격인 삼불제석[당금애기의 아들 삼형제]이 고대 인도의 왕족일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의 아들들이니, 그 신격을 모시고 있는 자기도 믿을 만한 무당이라고 하고 있는 셈이다. ‘(02)’에서는, 시준님이 어느 날 밥그릇 문제 해결을 어디엔가 의탁[탁발(托鉢)]하러 다니다가 하필 아버지 어머니와 남자 형제들이 모두 집을 비운 채 당금애기 혼자 지키고 있는 부자집을 시주(施主) 삼으려고 하였다고 설명한다. ‘(03)’은 이야기의 전개상 흥미진진한 부분이기도 하고, 독자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한 듯하다. ‘(04)’에서 당금애기는 혼전임신 때문에 전 가족의 비난을 받고 집에서 쫓겨난다. ‘(07)’에는 시준님이 아들 삼형제의 ‘능력’을 시험하는 이야기가 포함되어있다. ‘(08)’에서, 아들 삼형제는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고 복을 나누어주는” 신인 삼불제석이 되며, 당금애기는 “집집마다 아이를 점지하여 순산하도록 도와주고 병 없이 자라게 돌보아주는” 신인 삼신할미가 된다.

재수는 재물이 생길 운수일까?

이 이야기는 당금애기의 험난한 인생 역정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아들 삼형제의 인생 역정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시준님의 인생 속에서 다소 이채로울 수 있는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금애기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고 아들 삼형제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아들 삼형제[삼불제석]를 자기 몸에 모시고 재수(財數)굿이라고 분류되는 굿을 주관하는 무당이 굿 참여자들에게 자기의 권능의 원천을 과시하는 차원에서 노래 부르는 사설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당금애기의 이야기인 동시에 삼불제석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삼불제석은 재수굿의 주인공이다.

재수라는 말을 그저 재물이 생길 운수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관성적인 듯하다.
사진출처 : master1305

재수는 “재물이 생길 운수”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어떤 한국 사람이 ‘재수 없다’는 말을 잘 쓴다면, 그런 사람은 여러모로 한국 사람들로부터 점차 고립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재물이 생길 운수가 있기를 바라고 ‘재수 없다’면서 재물이 생길 운수가 없음을 한탄하는 사람은 자주적인 의지가 없고 ‘남탓’을 일삼을 듯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남 탓을 일삼는 사람 옆에 붙어있으려 하지 않을 듯하다. 재수 없는 사람 곁에 있으면 재수 옴 붙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재수는 자원이 순환하는 법칙일까?

그런데, 재수라는 말을 그저 재물이 생길 운수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관성적인 듯하다. 한국 사람들이 재(財)를 곧 돈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여있기는 하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재(財)는 콕 짚어 돈이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의 재화 그러니까 삶에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었을 듯하다. 재수에서 수(數)는 운수(運數)라고 한다. 운수는 ‘재수 없다’라고 할 때의 재수와 마찬가지로 행운[luck]이라는 뜻으로 쓰일 때가 많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천운(天運)과 기수(氣數)”라는 사전적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 운수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바꿀 수 없을 듯한 이치 혹은 세계 변화 법칙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재수는 삶에 필요한 자원이 순환하는 법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법칙은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우며 바꿀 수 없을 듯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옛 사람들을 생각하였을 수 있다. 그 법칙이 쉽게 이해하고 나아가 바꿀 수 있었던 것이라면 굳이 굿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아무래도 지금 한국에서, 재수라는 말은 행운을 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재수 없다’라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은, 재물이 생길 운수가 없음을 한탄하는 사람, 자주적인 의지가 없고 ‘남 탓’을 일삼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재수 없다’는 말에 다른 뜻이나 느낌이 실릴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이런 말을 사용할 때 나름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기에, 이런 말을 쓰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바로잡으려 드는 것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재수 없다’라는 말은 남발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지만, 사람들이 그런 말을 쓴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낮잡아볼 현실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적어도 한국 무교 속 중요한 신격인 제석삼불의 권능을 말할 때 등장하는 재수라는 말의 뜻을 ‘재물이 생길 운수’로만 새겨야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재(財)는 콕 찝어 돈이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의 재화 그러니까 삶에 반드시 필요한 자원이었을 듯하다. 이런 짐작에 따른다면, “집집마다 아이를 점지하여 순산하도록 도와주고 병 없이 자라게 돌보아주는” 역할을 하는 신격인 삼신할미[당금애기]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탄생-성장-죽음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거치게 됨을 사람들이 때로 돌아볼 수 있게 하여주는 신격이라 할 수 있는 데 비하여,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고 복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는 신격인 삼불제석[아들 삼형제]은 삶에 필요한 자원이라는 것이 여러 사람이 대를 이어가며 나누어야 하는 한정된 것임을 사람들이 잊지 않게 하여주는 신격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듯하다.

굿은 사람이 아픈 것을 그 사람에게 붙은 귀신의 짓으로 보면서 그 귀신보다 힘이 센 귀신을 불러 사람을 아프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라고 한다. 이런 것이기 때문에 굿은 무조건적 힘 숭배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무당이 문제해결을 위해서 부르는 귀신은 힘만 세면 되는 것이지 그의 도덕적 정당성 여부는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무교에 이러한 맹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와 같이 계속 무조건적 힘 숭배만을 되풀이한다면, 한국 무교는 한국 사회를 도덕적 무정부상태로 반 발자국 정도 들여놓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무교가 변화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종교들을 보아도, 스스로 자신을 구성하는 주요 교리와 상징들을 재정의하는 것은, 그 종교들의 ‘본 모습’을 퇴색시키면서도, 그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주는 듯하다. 불교나 기독교의 교리의 역사를 보면 그러한 생각이 더 강해진다.

오늘까지 재수굿을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비는 일로 해왔다고 해서, 앞으로 재수굿을 삶에 필요한 자원이라는 것이 여러 사람이 대를 이어가며 나누어야 하는 한정된 것임을 사람들이 잊지 않게 하여주는 의례로 자리매김해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일부터 재수라는 말을 자원이 순환하는 법칙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1.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문화원형백과’라는 가지를 찾아 선택하면 거기에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라는 가지가 있다. 그 가지에 이 이야기가 ‘당금애기(제석본풀이)’라는 이름으로 실려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당금애기(제석본풀이)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볼 수 있는 ‘당금애기(제석본풀이)’는 다양한 경로로 전승되고있는 당금애기 이야기를 잘 정리해 놓은 것이기도 하고, 무당들이 굿을 할 때 푸는 사설들을 보통 사람들이 글로 읽을 수 있게 잘 정리해 놓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금씩 다른 모습을 띠면서 여러 경로로 전하고 있는 다양한 당금애기 이야기들도 각각 나름의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네이버 지식백과〉에만 기대어 ‘당금애기(제석본풀이)’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특히 제주도의 삼신할미 격인 ‘삼승할망’ 이야기는 여타의 당금애기 이야기와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 차이는 의미있는 것인 듯하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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