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은 멈추지 못한다 – 『리추얼의 종말』을 읽고

『리추얼의 종말』의 저자 한병철은 ‘현대 사회는 리추얼과 공동체가 소멸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진정성이라는 투명한 관계보다 반복의 의례, 즉 리추얼을 통해 삶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며 리추얼의 재발견을 제안한다. 이 글의 필자는 한병철과 달리 가족과 친구와 같은 주변의 인간관계를 통해 리추얼을 유지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여전히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현재에 적합한 새로운 리추얼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본문에서 대부분 ‘리추얼’로 옮긴 독일어‘Rotual’은 ‘의례’. ‘의전’. ‘예전’, ‘의식’, ‘잔치’, ‘예식’, ‘축제’ 등의 의미를 두루 포괄하는 말로서,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 6쪽

한병철(지음), 전대호(옮김), 『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김영사, 2021)

『리추얼의 종말』은 책의 첫머리부터 ‘리추얼’을 어떻게 정의하고 읽을 것인가를 고민하게 했다. 글의 초반에 친절히 알려준 독일식 해석을 기억하며 들어가는 말을 시작으로 본문을 읽었다. 리추얼은 상징적 행위며 소리없는 공동체를 발생시킨다. 멈춤을 이야기하고 삶의 지속성을. 연극을, 축제를 이야기한다. 죽음을 건 놀이를, 시의 마술적 예식에 대해서. 놀이처럼 전해지는 지식에 대해 말한다. 오늘날 공동체의 침식과 더불어 나타나는 병적인 요인들인 집단적 나르시시즘. 노동과 성과에 갇힌 현실. 예술은 사라지고 이벤트만 남은 기호로 만들어진 사회. 기계적으로 표현되는 살인 등 현대 신자유주의에서 나타나는 여러 요인들을 저자 한병철은 과거와 현대를 비교해가며 이야기하고 있다.

의식에서 축제로, 의례로, 공동체로, 놀이로, 다양한 의미를 포괄한다는 의미답게 각 장마다 현실을 비교하며 생각을 펼치고 있다. 현대 사회를 신자유주의 체제라 말하며 우리가 알면서도 규정짓지 않은 사회 현상들을 비판하고, 저자 나름대로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고 있다. 그럼 저자가 아닌 우리는 지금 보여지는 사회 현상들에 대해 어떤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리추얼’은 정말 사라지고 있을까. 함께 고민해 볼 문제다.

리추얼은 소통 없는 공동체를 발생시킨다. 대조적으로 오늘날에는 공동체 없는 소통이 만연한다. 리추얼에서 본질적인 것은 ‘상징적인 지각’이다.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상징이 활용된다. 이것은 반복의 특수한 형태다. 다시 알아보기는 무언가를 한 번 더 보기가 아니다 다시 알아보기란 무언가를 본인이 이미 아는 그것으로서 알아본다는 뜻이다. 8~9쪽

리추얼은 같음을 통하여 반복을 통하여, 삶을 지속적이게 (멈춤 가능하게) 만든다. 11쪽

반복은 익숙함을 만든다. 억지로 기억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기억되고 알게 된다. 익숙함은 의미를 갖게 되고 새롭게 설명하거나 가르쳐주지 않아도 조금의 알림을 통해서 이해하고 공감하고 행하게 된다. 그렇게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것의 질서와 가치는 체험화되고 기억된다.

현대의 사람들은 각자 개별화되고 홀로 된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스스로를 드러내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성과를 만들어내고 온라인을 통한 일방향적인 소통이 만연하고 있다. 소위 양방향이라고 말하지만, 디지털 세계에서의 소통은 이야기가 없다. 화면이 꺼지면 상대방과 단절이 되고 세상과의 연결을 유지하고 싶으면 또 다른 형태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리추얼은 삶에 안정을 부여한다

디지털의 소통은 탈신체화된 소통이다. 감정이나 흥분과 달리 느낌은 공유 가능하다. 디지털 소통은 흥분의 즉각적 배출을 장려한다. 22쪽

공감은 개인을 감정적으로 물들이고 조종하는 데 기여한다. 23쪽

오늘날 도처에서 들먹여지는 이른바 ‘커뮤니티’는 공동체의 소멸단계. 공동체의 상품 형태이자. 소비형태에 불과하다. 커뮤니티에는 어떤 형태의 상징적 결합력도 없다. 24쪽

그럼 오늘날 말하는 공감과 디지털 커뮤니티가 어떤 결합력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을 바탕을 현실의 모임이 생기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형태의 공통체도 생길 수 있다. 리추얼에서 벗어난 시작이지만 그것이 다시 형태가 바뀐 리추얼로 갈 수 있다는 전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생산 강제는 성과 강제로 이어진다. 성과는 노동과 다르다. 성과에서는 자아가 특별히 자기 자신과 관련을 맺는다. 나르시시즘적 성과 주체는 자유의지와 열정으로 자기를 착취하여 결국 붕괴한다. 그 주체의 좌절을 우울 혹은 ‘번아웃’이라 한다. 26쪽

진정성 사회는 실행 사회다. 누구나 실행한다. 누구나 자기를 생산한다. 27쪽

사람들은 자기를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자기를 착취한다. 그렇게 인간 전체가 생산과정의 부품이 된다. 29쪽

진정성 강제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성찰을 자신의 심리에 대한 항구적인 몰두를 유발한다. 또한 소통도 심리적으로 조작된다. 진정성의 사회는 친밀함과 노출의 사회다. 30쪽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그 결과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내기 위해 더 열심히 활동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를 공동체라 여기며 그 안에서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개인들의 삶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바뀌고 있고 함께 하는 것을, 서로를 존중하는 것을 잃고 있다. 보여지기만 하는 친밀함이 있고 그 안의 진실에 다가가기는 어렵다. 리추얼적 사회에서는 외면화된 상호작용 형식들이 행위를 규정한다고 하는데, 서로 마주보고 존중하며 대화하는 행위가 서로에 대한 형식적인 의례를 포함하고 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인간다워질 수 있다. 외면으로 나타나는 예가 진정성을 보여주는 모든 것은 아니라고 해도 함께 사는 사회에서 최소한의 의식적인 행위임은 분명하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맺음형식들과 종결형식들을 없앤다. 오늘날 우리는 자아들로 분열하고 그 자아들은 자신의 경영자로서 자기 의지로 자기를 착취한다. 결속의 가차없는 파괴를 통해 유연성이 강제된다. 유연할 때 자기를 가장 잘 착취한다. 40쪽

지구화는 세계를 경계와 장소에서 해방된 전 지구적 시장으로 만든다. 장소는 하나의 맺음 형식이다. 전 지구적 시장은 반反장소다. 디지털 연결망도 장소를 없앤다. 41쪽

문화는 하나의 맺음형식이다. 따라서 문화는 동일성을 창출한다. 그러나 그 동일성은 배제하는 동일성이 아니라 포함하는 동일성이다. 따라서 문화는 이방인을 기꺼이 수용한다. 46쪽

맺음과 종결은 무엇일까. 온전히 끝난 뒤에는 편안함과 충만이 여유와 함께 따라온다. 그 시간의 길고 짧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문턱 앞에서 우리는 새로운 단계에 대한 약간의 긴장감과 흥분을 느낀다. 그렇게 시작의 문턱을 넘으며 우리는 성숙해가고 사회에 적응해가는 시간을 갖는다. 여기서 말하는 성숙은 공동체와 함께 하는 과정 중에 느낄 수 있는 성숙이다. 혼자만의 세계에선 자신이 성숙하고 있는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우리가 접하는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성장하지 못하면 결국 나는 사라지고 정보의 물결에 휩쓸리기만 할 뿐이다. 휩쓸리고 흔들리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공동의 가치와 의식을 바탕으로 개인의 체험과 견해가 함께하고 탄탄히 서로를 엮어 지지해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노동은 시작과 끝이 있다. 따라서 노동의 기간 다음에는 휴식의 기간이 온다. 반면에 성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신자유주의적 명령으로써의 성과는 노동을 항구화한다. 리추얼적 사회에서 집단적 삶. 곧 축제는 때때로 과도한 형태에. 일종의 광란에 도달한다, 언제 그러냐 하면 노동의 기간. 곧 흩어짐의 기간이 너무 길고 흩어짐이 극단적일 때 그러하다. 그리하여 생산 강제는 공동체의 와해를 가져온다. 60쪽

현재의 학교는 올바른 사회 구성원을 교육하는 것이 아닌 생산의 도구를 만들어내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오로지 경쟁이 두드러지게 대두되고 있고, 경쟁은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맺음을 만들지 못하고 계속 연결된다. 하나의 과정이 마무리될 때 끝나고 벌어질 축제보다 과정 중 만들어지는 짧은 이벤트는 맺음의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벤트는 노동 중간에 있는 잠깐의 휴식일뿐, 우리의 생산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만 끝맺음의 여유는 없이 우리는 지치고 있다.

주권, 죽음을 향할 자유는 노동과 생산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건강의 생명 정치를 통하여 인적 자본을 늘리려 애쓰는 사회에서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자살은 생산시스템에 도전한다. 71쪽

우울한 자는 주권적인 자살을 행할 힘이 없다. 오히려 그는 자살하도록 강제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삶이 공허하고 무의미하고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 강제 죽음. 소진 죽임이다, 이 죽음은 오직 신자유주의적 생산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72쪽

공동체 밖, 개인은 쉬지 못한다

삶이 죽음과 함께 한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 속에 삶에 대한 열망이 숨어있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삶의 열정이 아닌 삶의 포기와 같다. 특히 우울증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살은 우리 사회의 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처음부터 죽음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의 무관심과 살아있는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삶은 그저 놀이로도 생각할 수 없다. 그럼 공동체적 삶은 우리에게 어떻게 강제적이지 않은 죽음을, 의미 있는 죽음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경험하지 못했으니 주권적인 자살이 어떤 것이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노동을 통한 창조적 인간 교육이 역사를, 곧 인간적 시간을 만들어낸다, 노동은 시간이다. 노동이 정신을 교육하고 역사를 진보시킨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 곧 자유롭고 역사적인 개인이 최종적으로 소멸하는 것은 실은 한마디로, 중요한 의미의 행동이 모두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다른 모든 것은 무한정 존속할 수 있다. 예술, 사람. 놀이 등등 한마디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무한정 존속할 수 있다. 78쪽

역사적 개인이 소멸하고 행동이 끝난다는 것. 즉 인간이 존속하지 않는데, 다른 것들이 의미가 있을까. 의미를 느끼는 자가 있으면 의미로 남지만, 그 의미를 느낄 사람이 없다면 의미가 없는 행위일 뿐이다. 의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생존해야 하고, 생존을 위해선 노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노동이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동은 연속되고, 또 다른 이들에 의해 소멸하고 남은 이들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이다. 노동과 생존은 우리 삶의 일부일 수밖엔 없다. 목숨을 건 놀이를 행하는 이들은 결국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존의 문제를 겪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목숨을 걸 만큼 삶을 윤택하게 하거나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보여지는 것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자본주의는 소망의 경제에 기초를 둔다, 공손함은 순수한 형식이다, 공손함은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는다. 리추얼적 형식으로써의 공손함은 어떤 도덕적 내용도 품고 있지 않다. 이 공손함은 기호 곧 기표다. 88쪽

신자유주의 성과사회는 시작도 끝도 없다. 경쟁과 자기 착취는 공동체의 축제가 끝난 뒤에 찾아오는 깊은 피로를 경험할 수 없게 만든다.
사진출처 : Timur Weber

다도(茶道)의 리추얼적 침묵이 소통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러나 소통 없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이 되는 형식을 만드는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의례로서 정착되기까지 끊임없이 소통하고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다. 그 과정을 배제한 소통 없는 공동체는 결국 공동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폭력 사회와 같다. 사회가 도덕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할 때는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사회에서 리추얼적 행위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통을 통해 다시 리추얼에 대한 재교육과 논의의 시간들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원시적 사회의 전쟁과 사냥의 놀이 규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은 정치며 일반적 살해와 폭력은 정치의 여지를 없앤다고 말한다. 지식의 전달도 놀이의 형식을 띠지만 지금은 기계적인 생산으로 말한다. 유혹은 친밀적 요소를 가미한 놀이로 보지만 섹스는 그렇지 않다. 포르노처럼 가리지 않는 투명한 사회. 지금의 사회는 의미를 포기하고 투명성을 강조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를 따라가기 위해 행하는 빠른 소비(지식. 대화 등)는 인간관계를 메마르게 하고 있다. 깊이 있는 생각이 사라지고 즉각적인 행위와 반응만을 남긴다. 서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과 교류의 영역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지금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과 성공이다. 생존과 성공이 중요한 사회는 죽음에 대한 자의도 상실시키고, 오직 경쟁과 성과를 부각시킨다. 성과 뒤엔 작은 성취와 또 다른 노동을 툭툭 던져줄 뿐이다.

‘리추얼의 소멸’은 현대 사회를 신자유주의 사회로 보고 비난하고 있다. 공동체가 사라지는 사회. 서로를 존중하고 여유와 예술을 잃어감을 한탄한다. 본문에서 나오는 놀이 같은 전쟁이나 소통 없는 공동체에 대한 나와 다른 의견에 편견을 가졌지만, 뒷부분에 나오는 ‘엘문도’와 ‘엘파이스’와의 대화를 보고 다시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오히려 본문보다 뒷장을 통해 저자의 생각을 더 분명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소통을 통하여 새롭게 리추얼을 만들어야

앞으로의 사회는 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겪었던 코비드-19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더 많은 고립과 우울을 맞게 될 것이며, 생명을 강제하는 생명정치를 통해 더 많은 감시와 공동체의 해체를 대면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결국 ‘리추얼의 종말’은 리추얼을 통해 다시 재건되어야 할 사회를 요구한다. 그러나 과거의 것만을 따라가기보다 현재에 맞는 리추얼을 만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분명 사회는 바뀌고 있고 우리의 생각이나 생활방식도 바뀌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왔던 것들을 바탕으로 현재에 맞는 리추얼을 재정립한다면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지금의 상상보다 나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다시 시작할 힘이 필요할 뿐이다.

리추얼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는 한병철 저자의 생각은 낙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아직 사람들은 관계를 말하고 있고. 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통해, 부부와 자식을 통해, 친구를 통해 아직 ‘리추얼’은 살아있다. 사라지고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은 오히려 우리의 면면을 통해 유전되고 있다. 사라진다고 생각한 순간 연결되고, 없다고 생각한 순간 나타난다. 물론 과거에 비교해 현재의 우리는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급속도로 성장하는 디지털 사회에서 개인으로 고립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려울 때 손을 잡고 아직은 힘든 이에게 손을 내밀 줄 안다. 사회가 변화한다면 변화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고 연속시켜나간다. 우리 주변에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아직 우리에게 ‘리추얼’은 남아있고 우리 사이에 유지되고 있다.

다랑

모두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으로 ‘다랑’이라 합니다.
혼자보다는 모두와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댓글 1

  1. 저도 리츄얼이 (전통적 형태가 아닌) 다른 형태로 계속 변화하며 이어진다는 데 동감합니다. 생태적 지혜 또한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이고, 공연예술계에서도 많은 작가들이 관객들과 함께 새로운 리츄얼을 만들기를 시도하고 있고요. : )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