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와 남생이 이야기에서 반복의 힘을 찾다

이 글은, 한국의 옛이야기를 통해 그 속에서 탈성장·저성장 시대가 요청하는 대안적 공동체를 지탱하여줄 수 있는 행동방식·가치·규범을 찾아보려는 시도이다. 한국의 옛이야기 속에는, 옛 맥락 속에서 떼어내서, 새삼스럽게 자리매김하여, 지금 여기에 재맥락화해 볼 만한 것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는데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은 문화자원의 낭비가 될 듯하여, 짐짓 옛이야기를 읽고 글을 써본다.

숙영랑과 앵연랑의 두 아들 거북이와 남생이가 어린이의 아픔을 낫게 하는 신이 되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거북이와 남생이’1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있다. 그것을, 내용에 따라 나눠 번호를 붙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열다섯 살 숙영 선비와 열네 살 앵연 각시가 양가와 이웃의 축복 속에 결혼하였다. 이들이 20년이 넘도록 부족할 것이 없는 살림을 살며 나이가 마흔 줄에 이르렀을 때, 점쟁이의 조언에 따라 안애산 금상사를 찾아가 생불성인께 석 달 열흘을 기도하였고, 앵연은 아이를 하나 낳았다. 남자아이였다. 그로부터 3년 후, 앵연은 아이를 하나 더 낳았다. 남자아이였다. (2) 첫째 아이는 처음 태어났을 때 어찌나 잘 생겼는지 한옆에 해와 달이 돋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곧 소경임이 밝혀지자, 부부는 아이 이름을 거북이라고 하고 유모를 두어서 내맡겼다. 둘째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부부는 아이 눈부터 살펴보았는데, 샛별 같은 두 눈이 초랑초랑 빛이 났다. 하지만 향물에 목욕을 시키려고 아기의 등을 만져보니 등 굽은 곱추요 다리를 만져보니 앉은뱅이였다. 깊은 탄식 끝에 숙영과 앵연은 아이 이름을 남생이라 짓고 유모에게 맡기었다. (3) 그렇게 소경 아기와 곱추 앉은뱅이 아기를 얻은 숙영과 앵연은 깊은 시름에 빠져 한탄하다가 화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를 잃은 두 아이가 앉아서 재물을 쓰기만 하니 그 많던 재산이 어느새 다 사라지고 빈털터리 가난뱅이가 되고 말았다. 거북이와 남생이가 손을 잡고 밥을 빌러 나갔으나 사람들이 병신 둘을 어찌 그냥 먹이느냐며 다시는 오지 말라 박대를 했다. (4) 소경인 형 거북이가 곱추 앉은뱅이인 동생 남생이를 업고서 동생의 안내에 따라 길을 걸어 금상사 입구에 이르니, 연꽃이 피어난 연못이 있는데, 남생이가 살펴보니 그 속에 솥뚜껑 같은 생금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형님, 이 연못에 솥뚜껑 같은 생금이 떠다니니 건집시다.” “우리한테 어찌 그런 복이 있을까. 본체 말고 그냥 들어가자꾸나.” (5) 거북이와 남생이가 절에 들어가자 부처님은 “그 아이들이 생기느라 우리 절이 많은 공덕을 입었으니 남쪽 초당에 맞아들이고 공부를 시켜라. 밥은 하루에 세 번씩 흰 쌀밥을 지어 먹여라”라고 계시하였다. (5)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맞아들였지만, 두 아이 때문에 하던 일이 늘어나 성화가 난 불목하니는, 부처님 몰래 아이들을 두들겨주곤 했다.

『조선신가유편』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의 이야기는 왠지 결말이 잘려나간 듯하다. 한편 같은 네이버 지식백과에 실려있는 ‘병막이신 거북이와 남생이’2라는 제목의 글은, 앞서 소개한 글과 비슷하면서, 결말이라고 할만한 부분이 뚜렷하다. ‘병막이신 거북이와 남생이’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 그러나 부부는 이래도 저래도 우리 아들이니 거북이처럼 튼튼하게 오래 살라고 이름을 거북이라 지어주었다. …… 남생이처럼 단단하게 오래 살라고 이름을 남생이라 지어주었다.” ‘거북이와 남생이’에 이름을 짓게 된 연유가 밝혀져 있지 않은 것과 대비되는 내용이다.

또한 ‘병막이신 거북이와 남생이’에는 형제가 연못 속의 금덩어리를 보고도 “임자가 있으면 얼마나 애타게 찾을까 싶어 생금덩이를 그대로 두고 절로 올라갔다”고 되어있다. 그랬다가 불목하니는 금덩어리를 보지 못하는 것을 알고서 “다른 사람들 눈에는 구렁이로 보이고 우리 눈에는 금덩이로 보인다면 부처님이 내려주신 게 틀림없다”고 하면서 금덩어리를 부처님께 바쳤다고 되어있다. 이후 형제는 꿈에서 “이 세상에는 몸이 성하고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많은데, 너희들은 몸은 불편하나 마음이 거울같이 깨끗하여 복을 받을 만하다. 내 이제 너희 몸도 성하게 하리라”라는 부처의 말을 들은 후 “거북이 눈이 번쩍 떠지고, 남생이 등과 다리도 펴졌다”고 되어있다.

‘병막이신 거북이와 남생이’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거북이와 남생이는 그 뒤로도 욕심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살다가, 나중에는 아기들에게 드는 병을 막아주는 병막이신이 되었다.” ‘거북이와 남생이’와 ‘병막이신 거북이와 남생이’ 는 1930년에 출판된 손진태(孫晋泰)의 저서 『조선신가유편(朝鮮神歌遺篇)』에 실려있는 서사무가 ‘숙영랑 앵련랑 신가’를 원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원본에는 앞서 결말이라 했던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 서사무가는 함경남도 함흥지역 병굿에서 구연되던 노래라고 한다. 1926년, 당시 함경남도 함흥군 운전면 본궁리에서 무녀 김쌍돌이가 구송한 것을 손진태가 채록하여 『조선신가유편』에 실었던 것이다.3 이 무가는 어린이가 아플 때 하는 굿에서 무당이 구연한다. 거북이와 남생이가 어린이의 병을 관장하는 신격(神格)이 되는 과정을 그리는 것이 내용이다. 손진태가 평북 강계의 무격 전명수에게서 채록하여 『청구학총(靑丘學叢)』 23호에 수록한 무가 〈제석님청배〉에는, 거북이와 남생이가 등장하지만, 그들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곡물이 풍요롭게 한다고 한다.4

희망의 바탕이 되는 서로 살림·서로 믿음, 그리고 사소한 서로 도움

걷지는 못하지만 눈이 보이는 동생이 눈먼 형의 등에 업혀 형의 막대기로 탁탁 소리를 내며 길을 짚어주고, 그 소리에 따라 눈먼 형이 걷지 못하는 동생을 업고 길을 간다. 이런 모습을 두고 사람들은, 둘 다 부족한데도 서로 도우면서 앞길을 헤쳐나갈 수 있었으니, 이 이야기는 희망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설득력 있는 평이다. 희망은 중요하다. 여기에 조금 더 보태자면, 형제가 서로 도왔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면 좋을 듯하다. 서로 돕지 않았다면, 형제는 그저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서로 도울 수 있었을까? 둘 사이에 믿음이 있어서였을까? 믿음이 먼저였을까? 사소하게라도 서로 돕는 행동이 먼저였을까? 선후를 정하기 쉽지 않다.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살았으며, 더 나아졌으며, 대단히 훌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북이와 남생이는 희망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함께 살아남기 즉 서로 살림은 서로 믿을 때 가능할 것 같다.” 사진 출처 : CDD20

서로 살림 달리 말하자면 함께 살아남기는 흔한 듯하지만 드물고 귀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함께 살아남기는 ‘드문 지향점’이다. 각자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을 통해서 세계는 팽창하여 왔다. 그러다가 지금은, 계속 팽창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모든 것이 정지되고 곧바로 자폭하여버릴 듯한 상황이 된 듯하다. 이제는 뭔가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지만, 누구도 사고의 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서의 사고의 관성 가운데 하나가 개체의 독립성 존중 같다. 세계가 개체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개체들은 여러 욕망을 최대한 충족시키려 각각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것을 더 쉽게 생산하고, 각자 그것을 더 값싸게 사서 소비하는 삶이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전형인 듯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세계에서, 함께 살아남기는 ‘드문 지향점’이라 할만하다.

함께 살아남기 즉 서로 살림은 서로 믿을 때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서로 돕는 것도 서로 믿는 것 못지않게 중요할 듯하다. 어찌 보면 서로 돕는 것은 특별한 도덕적 결단이 없이도 가능한 듯하다. 누가 좀 도움이 필요하여 보일 때, 그냥 슬쩍 도와주는 일이 일상적으로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인 숙고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돕는 것은 불완전한 행위일 수 있으며, 위선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위선적이라는 비아냥을 받을지라도, 사소하게나마 돕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 반사회적인 이중성이나 의식의 분열을 각인시킨다는 증거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사소하게나마 돕는 행위를 반복하다가 갑자기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를 하거나 남 보기에 민망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가 사소하게나마 돕는 행위를 했던 것을 부득부득 지워버리는 사회를 도덕의 왕국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반복의 힘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자장(子張)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다섯 가지를 천하에 행할 수 있으면 인(仁)이라 할 것이다. 자장이 그 내용을 물으니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공손함[恭]과 너그러움[寬]과 믿음[信]과 민첩함[敏]과 은혜로움[惠]이다. 공손하면 남이 업신여기지 않고, 너그러우면 민심을 얻게 되고, 미더우면 남들이 의지하게 되고, 민첩하면 공(功)이 있게 되고, 은혜로우면 남들을 부릴 수 있게 된다.”“5 공손함이나 너그러움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면, 이것은 타인에 대한 사소한 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앞서 말한 ‘사소하게나마 돕는 행위’라고 할 수도 있다. 가게나 식당에서 손님이 거기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손님이 노동자를 공손하고 너그럽게 대한다면, 그런데 그때 하필 노동자가 무척 피곤한 상태라면, 손님의 행위가 그냥 관성에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사소하나마 노동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논어』에는 앞서 인용한 「양화」에 보이는 설명보다 더 고차적으로 인을 설명하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논어(論語)』 「안연(顏淵)」에 보이는 설명도 그중 하나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의 욕심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 인을 행하는 것이니, 하루 동안 극기복례를 하면 천하가 인해질 것이다. 인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하는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구체적인 조목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6 여기에 “자신의 욕심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이라는 행동방침이 보이는데, 이것은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보이는 ‘용서[서(恕)]’라는 사고지침과 “내가 원치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행동방침과 아울러 인(仁)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행동방침과 사고지침을 지키며 사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유교에서는 예제(禮制) 즉 예를 제도화한 것을 바탕으로 삶을 이루려고 한 듯하다. 예가 제도화된 정치체 속에서는 예를 반복해서 행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다가 예를 행하는 일을 놓치는 경우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네가 여태 한 건 다 가식이었구나!”하며 준엄하게 질타하는 척하면서 비아냥거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고, 다음에는 또 잘 하라고 다독여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더 많으냐 어떤 성향이 더 지배적이냐에 따라 정치체의 미래의 모습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떻든 내적 갈등과 실수 속에서도 ‘공손함’이나 ‘너그러움’ 또는 세계가 요청하는 어떤 다른 태도를 사소하게 타인에게 베푸는 삶이 지속 가능한 사회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바람직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질없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뭔가가 ‘불연속 속에서도 연속적으로’ 반복이 되다 보면 그것이 어떤 성향이나 흐름을 형성한다고는 한번 말해 볼 수 있을 듯싶다. 아직도 강력하게 성장을 지향하는 사회 속에서 탈성장·저성장을 향하는 사소한 행위를 하는 것은 ‘환영받는’ 행위가 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모든 것의 출발은 사소한 행위일는지도 모른다. 특히 사소한 도움은 성장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더더욱 사소하게 다뤄지는 듯싶다. 그런 만큼 그 사소한 것이 기존의 체계에 끼치는 영향이 클 듯하다.

거북이와 남생이가 서로 도운 것에 관하여 이야기에서는 굳이 그 연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이것이 너무 당연한 형제간의 일이라 그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사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처럼, 세상을 크게 변화시키는 바탕은 그런 것일 수 있겠다.


  1. [네이버 지식백과] 거북이와 남생이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 [네이버 지식백과] 병막이신 거북이와 남생이 (문화원형백과 한국설화 인물유형)

  3. [네이버 지식백과] 숙영랑앵련랑신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네이버 지식백과] 숙영랑앵연랑신가 [집필자: 권태효] (한국민속신앙사전 무속신앙 편)

  5. 『논어(論語)』 「양화(陽貨)」 : 子張問仁於孔子 孔子曰 能行五者於天下 爲仁矣 請問之 曰 恭寬信敏惠 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6. 『논어(論語)』 「안연(顏淵)」 : 顏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 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 歸仁焉 爲仁 由己而由人乎哉 顏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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