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운동을 하다 감옥에 가다 – 기후불복종과 괜찮지 않은 감방생활

2021년 10월 6일, 포스코가 주최한 국제회의 회장에서 동료들과 ‘직접행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150만원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이에 필자는 ‘시민불복종’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벌금 납부를 거부하고 노역 입소를 결정하였으며, 2023년 4월 18일부터 5월 2일까지 15일간의 감방생활을 기록하여 이곳에 남긴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감방생활을 하게 된 것은 2년 전쯤 벌인 직접행동 때문이었다. 2021년 10월 6일, 나는 녹색당 기후정의위원회 소속 네 명의 동료들과 포스코가 주최한 국제회의 회장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등장해 ‘직접행동’을 벌였다. 이 행동에는 공동주거침입을 이유로 한 ‘폭력’ 행위라는 사유가 붙어 거액의 벌금이 선고되었다.

유엔기후변화당사국총회를 앞두고 전세계 국가들이 국가온실가스감축 목표를 수립하던 그 해엔 국내외로 온실가스감축목표 상향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온갖 직접행동들이 들끓었다. 국내 온실가스배출 1위 기업인 포스코 강남센터 앞은 두말할 것 없이 시위 인파로 붐볐다. 우리가 돌입한 현장은 포스코가 전세계에서 온라인으로 연결된 구매・투자자에게 탄소감축을 위한 기술적 해법을 설파하는 자리였다. 신규 석탄화력발전소 중단을 비롯해 당장 실현가능한 감축 계획 없이 미래의 불확실한 해법을 내세우며 책임을 미루는 그것을 우리는 그린워싱이라 불렀다. 기후위기를 불러온 그 기업들은 국가에서 온갖 호들갑스러운 상찬을 받으며 또다시 미래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호출되고 있었다.1

우리의 직접행동은 그 회의 자리에 대통령의 영상 축사에 이어 산업통상부 장관이 축사를 하러 연단에 나서는 시점을 노렸다. ㅊ가 연단으로 뛰쳐 올라가 마이크를 점해 연설을 하려다 경비직원들에게 끌려 나갔다. 그의 목소리가 페이드아웃 되어가자 나는 연단 앞으로 뛰쳐나가 연설을 시작했다. 그동안 ㅎ가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뿌렸다. ㄱ은 놓치지 않고 그 장면을 영상으로 기록했고 ㅅ는 행사장 문밖에서 피켓을 소지한 채 장내 돌입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우리의 소요는 행사장의 질서를 되찾으려는 진행요원들에게 곧바로 진압되었다. 붙들려 나오면서 나는 앞으로 이어질 ‘불복종’의 긴 여정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넓디넓은 회의장 와이드 스크린을 가득 채웠던 문재인 전대통령의 얼굴, 전세계에서 연결된 바이어들의 얼굴의 압도적인 기운을 여운으로 지닌 채, 이거 처벌받을 수 있겠다, 하는 막연한 예감이 엄습할 따름이었다.

직접행동에 참여한 4명의 활동가들에게 각 300만원씩, 총 1200만원의 벌금이 명령되었다. 불복했다. 정식재판을 청구한 우리의 투쟁에는 ‘기후재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재판으로 싸움을 이어가는 목적은 현재 우리에게 부여된 ‘유죄’를 머지않은 미래에, 마땅한 이들의 몫으로 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기후범죄를 고발하는 행위와 기후범죄를 저지르는 행위 중 대체 무엇이 폭력인가!) 그래서 현재와 미래를 뒤바꾸는 정치적 법적 싸움에 돌입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우리가 직접행동을 벌일 정도로 정부와 기업의 기후위기 대응이 충분치 않았음을 인정하는 판결문이 나왔다. 우리는 ‘기후정의의 승리’를 선언했다. 벌금도 크게 깎였다. 나는 150만원을 깎아줬다. 200만원 감액을 받은 두 동료보다 50만원이 더 나온 이유는 세월호 집회에 참여했다 연행되어 벌금을 선고(유예)받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 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정부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그 잘못된 구조와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거슬려 하지 않는 얌전한 방법만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마땅히 했어야 한다고 재판부가 제안하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피해도 영향도 주지 않는 점잖은 방식2은 정말이지 ‘비현실적’이었다. 작은 승리를 선언한 이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기후재판에서 결국 선고된 벌금으로 인해 직접행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이야기를 보다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내내 거역하면서 살아온 나의 성미대로, 벌금을 납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형편이 넉넉할 리 없는 시민들이 십시일반 보내주신 벌금 후원금은 너무나 소중했지만 소중한 그 돈을 ‘죗값’을 물기 위해 쓰고 싶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동료들은 나의 결심을 지지해주었고, 각자 상황에 맞게 자기가 싸워나갈 방식을 결정했다.

이상현 활동가 노역 입소 기자회견 홍보물. 출처 : 기후재판 시민불복종 연대모임

결심을 주변에 알리자 감사하게도 주변의 응원과 지지가 모였다. 인권운동가 친구 ㅇ이 발벗고 나서주었다. 풀뿌리 마을 기후운동가 ㄱ언니는 다른 기후재판들과 연결해 벌금납부 거부 노역의 의미를 확장하자고 제안했다. 나의 결심은 우리의 운동이 되어갔다. ㅁ활동가는 ‘옥바라지’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입소자를 곁에서 챙겨 주겠다고 자처했다. 어떤 친구는 선뜻 연락 총괄을 맡아 주었고 또 어떤 친구는 뚝딱 홍보물을 만들어 주었다. 노역 기간 동안 포스코나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펼치거나 기후불복종의 목소리를 언론 기고를 해주겠다는 이들도 모였다. 인생을 잘못 살진 않은 것 같았다. 한 줌의 모인 사람들은 꿈이 컸다. 우리는 이 시끄러운 한바탕이 세상을 바꿀 또 하나의 계기와 힘이 되기를 바랐다. ‘기후재판 시민불복종 연대모임’. 우리에게 스스로 붙인 이름이었다.

한 활동가의 일상이 멈췄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괜찮을 수 있을까. “괜찮지 않다” 그렇다면 괜찮은 것처럼 늘상의 일상을 하던대로 견디던 것을 멈춰 보자. 그래서 414기후정의파업에 참여하며 시민들에게 “함께 살기 위해 멈추자”고 요청하던 활동가는 자신의 일상을 한동안 멈추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이 동료들을 만나자 ‘시민불복종’의 형태로 확고해졌다.


안 괜찮다.

굳게 마음의 준비를 했던 입소였다. 그런데, 감방생활은 입소부터 정말이지 괜찮지 않았다. 우선 신체검사가 당혹스러웠다. 팬티를 벗은 채 스캐너 위에서 ‘쩍벌’을 해 밖에서 몰래 숨겨온 것이 없는지 검사를 받는 것은 불쾌했고, 입고 온 것을 모두 빼앗기고 지급받는 기본 물품 중 브래지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인권의 문제로 여겨졌다. 마치 새로 이사온 집 화장실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 여겼던) 세면대가 없는 것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이곳 생활을 무엇 하나 너의 취향과 너의 필요와 너의 의지대로 두지 않겠다는 강력한 국가의 의지가 느껴졌다.

더욱 황당하게 느껴졌던 것은 이곳은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의 기본 생활은 바깥에서 들여보내는 돈이 없다면 기초적인 인간적인 존엄과 필요를 충족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속옷, 스킨로션, 세제, 샴푸., 사람에 따라 추가로 필요한 화장지, 생리대까지… 들어올 땐 주변에 ‘영치금은 필요없다’, ‘안은 신경쓰지 말고 바깥에서 시끄럽게 행동을 펼쳐달라’고 했는데, 그곳에서 내가 처한 상태를 확인하자 두려움이 스멀스멀 엄습했다. 돈 없이 최소한의 생활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살갗에 스미는 감각을 여기서 느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피부였다. 워낙 건성이라 로션을 바르지 않으면 잘 트는 게 체질인데, 오이향 나는 기본 지급 비누로 세수를 하고 보풀이 붙는 기본 지급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면 수분이 금세 증발해 피부에도 허연 각질 보풀이 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피부가 따가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내 수중엔 한 통에 9000원 정도 하는 로션 물품을 구매할 돈이 없었다. 이게 입소하고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위기감이었다. 뭐 쉬러 가냐면서 동료들에게 영치금이 필요 없다고 공언했던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큰 고충은 이곳에서 배급되는 음식이 무지막지하게 기름지다는 점이었다. 거의 매일 국에는 좋지 않은 기름 냄새가 나는 고기조각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 방에서 먹을 분량을 한꺼번에 담아주는 흰색 플라스틱 통에는 항상 미끌거리고 비릿한 불그스름한 기름기가 얼룩덜룩하게 묻어 있었다. 수감생활의 도우미 역할인 ‘사소언니’들에게 사정하면 주는 세제-다 마신 발효유 플라스틱병에 조금씩 담아준다-는 물을 많이 타서 묽었고 성능이 영 좋지 못했다. 위생에 대한 강박이 있는 같은 방 수형자 하나는 항상 그 통 설거지를 자처해 그 자국을 박박 문질러 닦았는데도 그 자국은 놀라울 정도로 건재했다.

말라가는 피부와 기름기로 더부룩한 위장. 견디다 못해 같은 방 동료들로부터 ‘유난스럽고 까다로운’ ‘정치범’으로 눈 밖에 날 가능성3을 감수하고 교도관에게 요청서를 적었다. 채식 식단을 제공해달라는 요청서였다.

먹고 싸고 자는 단순한 일상에 산적한 각종 자잘한 애로사항과 고민, 수시로 밀려오는 동료 수형자들의 고민 상담, 자는 자리 선정과 방귀 등등 관련된 마찰과 갈등을 겪다 보니 15일이 금방 갔다. 벌금을 못 내서 들어오는 노역형이라 기본적으로 다들 사회경제적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 보니 얘기를 나누다 보면 한숨이 푹푹 나왔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번 꼬이면 경로 의존성이 생기고 범죄자가 되기 쉬운 사회적 위치에 사람들이 놓이기도 쉽다 싶었다. TV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시끌벅적한 미국방문 소식이 자주 나왔고, 갇혀서 맞은 5월 1일에는 건설노동자이자 노동조합운동가의 분신소식이 전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세상이 움직이는 것을 갇혀서 보고 있자니 내가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화면 속의 세상이 현실인지 헷갈렸다.

공책에 적어둔 구치소 방의 구조와 식사 기록. 이 공책 또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물품이다. 사진제공 : 상현

다시 감방에 가라고 하면 고민을 좀 해볼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갖가지 괜찮지 않은 고초에도 불구하고 15일간의 감방생활은 나의 생각을 ‘교정’시키지 못했다. 나는 앞으로 처벌이 동반될 수 있는 직접행동을 벌이지 않거나, 벌이지 말라고 내 동료시민들을 뜯어말릴 생각이 전혀 없다.

선을 훌쩍 넘자 선 안에 있던 때 두려워했던 일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벌어지는 상황이 괜찮거나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화하고 거역하면서 사는 이들에겐 기본적으로 수많은 스트레스와 피로한 상황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이 방향으로 살면서 감당할 수 있는 방법들을 터득해나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함께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길러낼 수 있도록 서로 연결해 공동체와 네트워크를 이루고 서로를 위한 지지기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관계들을 만들어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장 단절된 공간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 돌봄의 필요성이었다. 그리고 나를 돌보아주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바삐 살다보면 또 나를, 서로를 방치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넘어서고 또 바꾸어내는 과정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결코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겠다고, 내 곁의 이들이 그랬듯 나도 곁이 필요한 이들의 곁이 되겠다고 기왕 허락받은 지면을 빌려 공표해본다.


  1. 포스코는 지난해 ‘대한민국 지속가능상’을 수상했다며, 정의로운 전환을 이끌어가겠다고 포스코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은 상상도 못할 거금을 들여 도시 곳곳을 광고로 뒤덮었다. 그것은 수많은 활동가, 시민들에게 큰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였다.

  2. 집회신고를 하고 회장 밖에서 피켓팅을 하거나 회의에 참석등록을 해서 얌전하게 회의에 참석하다가 귀가하거나 등.

  3. 이곳에서 나는 정말이지 눈에 띄지 않게, 동료 수형자들과 원만하게 잘 생활하고 싶었다. (이곳에서마저 투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현

우리 모두의 혁명을 작당하고픈 동네 기후정의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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