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⑪ 무한 속도를 즐기면 어떤 일이 생길까?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저성장을 넘어 탈성장을 바라보는 시대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찾고자 하는 이야기다.

무한 속도에 몸을 싣고

그때 아내가 몹시 아팠습니다. 전날 직장 회식 이후로 술병이 나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끙끙 앓고 있는 아내를 보고 있노라니 미안한 마음도 들고 측은한 마음도 들었지요. 당시 아내는 야근과 특근, 아침 7시 출근과 저녁 9시 퇴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은 마치 꾸르륵거리며 돌아가는 거대한 수레바퀴와도 같았습니다. 저와 아내는 매일 일과를 끝내면 녹초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대화도 줄어들었습니다. 겨우겨우 하루를 시작하고 끝냈지요. 아내는 5시 기상, 저는 6시 기상을 해서, 부리나케 회사에 달려가고, 일을 하고, 퇴근하고, 운이 좋으면 저녁 9시쯤에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았습니다.

그때 일상이 마치 총알 탄 사람의 순간과도 같았습니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또 다른 일을 처리하고 그렇게 속도를 내면서 달려갔죠. 그러나 끙끙 앓고 있는 아내를 보니, 이렇게 속도를 내고 달려가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다는 불안감이 밀려왔습니다. 특히 아내는 직장 스트레스를 동료들과의 술자리로 풀었고, 저는 점점 이러다가 아내가 암이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요. 술취한 목소리로 저에게 전화해서 데리러 와 달라고 전화하던 때도 많았습니다. “나 길을 잃었어, 영등포역 근처에서 찾아봐, 냐하하” 그래서 역 근방 술집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 골목에서 토악질하고 있는 아내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이러다가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날은 토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웬 새 한 마리가 저희 아파트 베란다 앞에 찾아와서 울고 있었고,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있었습니다. 간혹 길냥이들이 울어대곤 해서 정적을 깨기도 했습니다. 아내와 오랜만에 둘 다 일이 없어서 조용히 마테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색다른 시간의 지평선 위에 선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조용히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직장을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아내는 직장 내 트러블, 업무 스트레스 등에 대해서 종종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표를 찍을 시점이 다가왔다는 것을 둘 다 느꼈습니다. 더 속도를 내는 것을, 우리 두 사람의 역량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이지요.

주변 사람을 풍경으로 대하는 사람들

자동차는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만든다.
사진 출처 : Pexels

사실 성공하겠다고, 부자가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주위에 참 많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한 속도를 즐기는 사람들처럼 요행히도 혹은 주변 사람을 넘어서서 성공의 사다리 위로 달려갔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 사람들은 소식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는 하지만, 나중에 소문을 듣고 보면 비극적인 결말도 참 많았지요. 잘 생각해보면 무한 속도를 내던 그 사람들은 성공의 미래를 향해 가는데, 주변 사람들은 지나쳐야 할 풍경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대화할 여유도 찾지 못하고, 교류와 교감을 멀리하고 속도를 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일 년에 한번 만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왜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야 하는지 이유도 불명확하다는 점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무작정 줄달음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왜 그렇게 달려가고 있느냐 물어보면, 열의 아홉은 우물쭈물하면서 이유에 대해서 잘 얘기를 못했습니다. 그저 이유 없이 달려가는 셈이지요. 바로 그들,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옆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뻔하게 보거나, 성공한 미래 이후에나 만날 사람으로 치부하거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 다음에 만날 사람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무한 속도의 삶을 즐기는 것만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 속도에 몸을 싣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대화를 하는 등의 행동이 정말로 비효율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이 있다, 일이 있다, 바쁘다 하면서 만남을 미루다 보면 몇 년 후에나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한때는 속도를 내는 삶과 그리 멀지 않았지요. 직장에 다니면서 그 생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통속적인 삶의 양식에 불과하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스릴이나 쾌감은 상당한 것이겠지요. 속도 이외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점점 숨이 턱턱 막히는 속도의 상황을 거쳐서 속도가 주는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즐거움과 쾌락으로 향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일중독이 거기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자기 계발, 성공학, 심리학, 처세술의 논리들이 수식어구처럼 따라붙지요. 그러나 속도를 내는 삶은 의미와 무의미,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주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삶을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삶 자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속도 자체에서 찾는 경우도 많습니다.

효율적이고 속도감 있는 삶을 추구하다 보면 공동체와 이웃, 가족을 잉여현실이나 군더더기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혼자가 된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실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대부분 그런 비효율, 느림, 잉여현실과 군더더기에서 비롯됩니다. 답답하게도 공동체에서는 회의에서도 다수결이 아닌 전원 합의제 형태를 추구하기도 하고, 비판적이고 효율적인 대화보다는 공감적인 대화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느린 달팽이가 기어가듯 진행되는 공동체 회의에 참여하다 보면, 서로 딴 소리를 하면서도 묘한 공감대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배치와 관계망을 자신의 준거 좌표로 삼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해도 일관된 대화의 방향을 향하는 것이겠지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서로 딴소리를 하면서도 일관성을 갖고 진행되는 배치와 판을 일관성의 구도(plan of consistence)라고도 말합니다. 사실 이런 대화법은 속도와 효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느림과 여백의 판짜기

사실 제가 집에서 연구실까지 걸어서 가는 1시간은 저에게는 아주 익숙한 길이라서 10분 정도로 아주 짧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았지요. 익숙하고 뻔하다고 생각되면 시간은 굉장히 단축되며 의미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재촉하면서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요전 날 좀 다른 길로 연구실에 걸어와 보니 굉장히 시간이 길고 느리게만 느껴졌습니다. 익숙지 못하고 색다른 길은 시간을 느리게 만들고, 끊임없이 주변에 있는 것에 신경 쓰게 만들지요. 40대 중반 이후에 삶의 시간은 일 년이 마치 한 달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굉장히 빠르게 시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런 상황에서 만약 속도와 효율성을 추구한다고 한다면 시간은 더 빨라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게 두려웠습니다. 인생을 속도와 효율이라는 것으로 스쳐 지나가는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감속을 감행했지요.

엄청난 감속은 아침에 한번 아내와 커피를 마시는 시간 동안 도란도란 나누는 하루의 계획이나 사람 사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엄청난 감속은 저녁에 모든 일을 마치고 뒤풀이 겸 차가운 물이나 술, 차를 앞에 두고 나누는 대화 속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수많은 색다른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아내와 저는 우주와 원자, 지구생태계, 생명, 길냥이, 음식 등 여러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했고, 그때마다 색다른 이야기를 나누면서 색다른 시간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만 같았습니다. 실로 엄청난 이완과 느림, 여백이 발생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지요. 둘이 마치 여행을 떠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었지요. 작은 방에서 쉴 새 없이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끝낸다는 것은 늘 축제이며 파티인 삶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었지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 불을 끄고 누워 있으면 다음 날이 기다려지고 설레는 감정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속도와 효율을 넘어선 느림과 여백의 삶을 창안했습니다. 느림과 여백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이제 미시정치, 생활 정치로 감속의 순간을 만들고, 감속의 공간을 만들고, 감속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느림과 정지, 이야기, 음악이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실로 획기적인 효과를 낳습니다. 제가 하루 종일 읽었던 책 이야기며, 사람들과의 우여곡절 등을 화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끝없는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이 지나갑니다. 둘이 대화하다가 방문을 닫고 있어서 음식을 데우고 있었다는 것을 깜빡 잊고 냄비를 태웠던 적도 많습니다. 그래도 재미있기만 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미지의 영역에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지요. 사실 철학공방 별난이라는 저희 연구실 역시도 저희 부부가 만든 공동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이서 공동체에 희망을 갖게 되면서 많은 이야기들과 많은 사람들이 접속했던 셈이지요. 끝없는 이야기들, 끝없는 아이디어의 발생, 끝없는 상대방에 대한 재발견, 느림과 여백의 감속이 있는 시간, 그것이 철학공방 별난의 특징이지요.

자동차를 버리지 못한 삶

학교에 수업하러 갈 때, 특강을 하러 지방에 내려갈 때, 부모님 모시고 병원 다녀올 때, 아내 고향집에 내려갈 때 필요한 것이 자동차였습니다. 한때 저도 자동차를 폐차하고 걸어 다니거나 대중교통을 타고 다닐 때도 있었습니다. 걸어 다닐 때는 아내와 함께 여러 가지 얘기도 도란도란하면서 걸으니까 재미도 있고 운동도 되니까 좋았지요. 그러나 최근 우리가 자동차를 주로 타게 된 것은 미세먼지의 문제가 심각해진 이후였습니다. 도저히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미세먼지가 심각한 상황이 지속되자, 우리는 자동차를 다시 타기 시작했지요. 그런 이후 아내와의 대화도 무척 줄어들고, 운동량이 적어서 활력을 잃은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안개와도 같은 미세먼지 속에서 우리는 우울하고 침울하게 자동차를 탔습니다. 혹시 차선을 어기고 끼어드는 자동차라도 있으면 예민해져서 화를 내고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걸어 다니면서 얻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 중 하나는, 마트에 가지 않고 시장이나 생협에 들러서 장을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이따금 사주는 과자나 음료수에도 저는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같이 장을 본다는 것은 아내와 대화할 기회이기도 했지요. 장을 보면서 일주일 동안 우리가 먹고 마실 음식을 선택하고 고르고 따져보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전에 자동차를 몰고 마트로 갔을 때는 저는 계산대 밖에서 아내를 기다렸고, 아내가 무엇을 구입하는지 그리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이나 슈퍼에서 장을 보면서부터는 자연스럽게 같이 고른 음식 재료나 채소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마트에 가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서 쟁여놓게 되는데, 그러지 않으니 장을 보러 갈 기회는 더 많아졌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식재료를 고를 기회가 생기니 장을 보는 것이 꽤 재미있었지요. 그러나 자동차를 타고 나서부터 인터넷 주문이나 생산자 직거래를 많이 하게 되었고, 장 보러 가는 재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주장하며 떼를 쓰던 재미도 사라져서 퇴근길이 조금 무거워지고 침울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대안적인 속도에 대한 탐색, 자전거. 사진출처 : christoph_mschrd

자동차를 타면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관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속도를 내면서 내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에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운전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소에는 양보도 잘하던 사람이 자동차만 타면 어떤 양보도 없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앞의 차가 주춤하거나 흐름을 끊으면 경적을 울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어쩌면 인간관계를 치열한 속도 경쟁의 일부로 보게 되는 것이 자동차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린다는 것은 현존 문명의 통속적인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틀 전에도 앞차가 너무 천천히 달려서 경적소리를 빵 울리고 보니까, 연세 많은 분이 조심조심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운전면허가 없고, 아내가 운전을 합니다. 운전할 때의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신경이 날카롭고 예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침묵을 지키게 되고, 점점 말수가 많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단지 속도를 내기 위해서 아내와 저의 관계는 서먹해지는 감도 있습니다.

아련한 자전거의 기억과 따릉이

그때는 아내가 아직 직장을 다닐 때였지요. 아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무슨 할 얘기가 있는지 일찍 퇴근을 했습니다. “나 이거 타고 출근할 거야, 이거 뭔지 알지?”라고 보여주었던 것이 빨간 자전거였습니다. 사실 저는 사고위험이나 자전거도로도 없는 상황이 생각나서 몹시 걱정을 했습니다. 아내의 위험한 곡예는 다음날부터 시작됐습니다. 도로에서 뒤에 자동차들이 빨리 가고 싶어서 빵빵거려도 아내를 자기 페이스를 지키면서 자전거를 탔습니다. 위험한 로타리도 잘 지나쳤다고 합니다. 아내는 전 직원 중 유일하게 주차장에 자전거를 주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뒤로 직장 사람들이 아내에게 건네던 가장 흔한 인사가 “요즘도 자전거 타고 다니냐?”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자전거가 아내에게 색다른 자극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자전거를 타고 산책 다녀오겠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돌아왔습니다.

아내가 퇴직하자, 저희는 함께 연구실로 걸어서 출근하는 일상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자전거 한 대를 더 사서 둘이 같이 타고 다니자는 제안을 했지만, 저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기 때문에 아내가 걸어 다니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태풍이 부나 우리 두 사람은 걸어서 연구실에 출근을 했지요. 몇 년 후 어느 날인가 아파트 관리실에서 운행 안하는 자전거를 처분해야 한다는 방송을 했습니다. 저희 아파트 집 앞에 매어 놓았던 빨간 자전거는 몇 년 사이에 먼지를 흠뻑 덮어쓴 채 낡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분했지요. 아내는 자전거를 만지작거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눈치였습니다. 2년 정도를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자전거 생활은 우리와 멀어졌습니다.

연구실을 문래동으로 옮기고 몇 년이 지나서 이따금 출근하면서 걷다가 거리에서 마주친 자전거가 바로 ‘따릉이’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뭔가를 새로 시도하는 게 어려워져서 한 번도 타 본 적은 없지만, 젊은이들이 많이 타고 다니는 걸 유심히 보았죠. 아내와 저는 자전거 얘기를 하면서 갑자기 활력이 생겨서 이런저런 자전거의 추억을 얘기했지요. 자전거를 소유할 수는 없지만, 따릉이를 타고 산책을 해보자, 따릉이로 시장을 보자 등등의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사실 자전거에 대해서 저는 안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처음 탔던 기억 때문입니다. 분명 동네 형이 뒤를 잡아주겠다 하였는데, 한참 가다 보니 뒤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해서 와당탕 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무릎이 까졌는데, 그 형은 무엇이 재미있는지 시종일관 웃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가 탈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자전거를 타면 꼭 한 번씩 넘어지곤 했습니다. 따릉이를 보니 자전거와 저의 추억이 떠올라서 미소를 짓게 되더군요.

언젠가 아내와 한강공원 자전거길에 따릉이를 타고 가볼 생각입니다. 자전거가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전거의 발명은 자동차 발명보다 역사가 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전거의 철학-두 바퀴 인류학 보고서’라는 책을 기획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아직 아이디어로만 남아 있지만, 본격적인 자전거 철학을 써보고 싶습니다. 주로 목적합리성과 같이 출발지와 도착지 이외에는 과정과 경로를 무시하며 속도와 효율을 추구하는 자동차 생활이 아니라, 지나치는 골목이나 거리와 분리되지 않고 일체화되는 자전거의 속도에 대한 탐색입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자전거의 속도 이상의 속도에 대해서 한 번 의심해 봐야 할 시점인 것 같습니다. 동시에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하면서 인간에 대해서 회의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인력에너지, 인간공학, 인간이라는 특이점에 대한 재발견의 가능성이 자전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자전거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적정기술이기도 하지요. 또한 자전거의 페달의 반복운동이 갖고 있는 건강에 미치는 영향 등을 함께 쓰려고 합니다. 물론 쓴다고 해놓고 여전히 첫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도를 그리는 것처럼 도시를 횡단하는 자전거, 정말 상상과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르는 색다른 속도, 대안적인 속도에 대한 탐색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무한속도가 아닌 유한속도, 느림과 여백을 횡단하는 속도를 자전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무한속도는 폐허를 남기고 소외를 만들고 무의미를 만드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도 무제한의 문명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인간에게 어울리는 속도 즉 느림과 여백이 있는 속도가 생활세계를 재건할 것이라고 전망해 봅니다. 그것도 뚜벅이일 수도 있고, 자전거일 수도 있고, 대중교통일 수도 있겠지요. 우리에게는 아직 속도를 제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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