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세계를 분리시키는 ‘편리함’

편리함과 죄책감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자 시작한 글은, 맺고 나니 세계와 나의 연결에 대한 글이 되었다.

편리함은 우리 선택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거주지로 대도시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묻는다면 십중팔구는 생활의 편리를 꼽을 것이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까지 걸어서 몇 분 걸리는지’, ‘새벽 배송이 닿는 동네인지’가 살 집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 지 오래다. 새벽배송은 커녕 버스가 하루에 열 대도 다니지 않는 촌 동네에 살던 나는 서울에 온 뒤로 편리하다는 말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편리하다는 것은 편안하고 이롭다는 뜻이다. 편안하고 이로운 생활이란 무엇인가.

편리함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 광고가 있다. 사진출처 : Pexels
편리함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 광고가 있다.
사진출처 : Pexels

얼마 전 SNS에서 어떤 광고 영상을 보았다. 광고 속 남자는 네모난 박스에 배달음식을 먹으며 생긴 쓰레기들을 모조리 집어넣은 뒤 후련하다는 듯 손을 턴다. 플라스틱 용기에 달라붙은 기름기를 애써 헹궈낼 필요도, 입가를 닦느라 사용한 휴지를 따로 버릴 필요도 없다는 자막이 알록달록한 색깔로 강조된다. 제공된 박스에 쓰레기를 넣어 현관문 앞에 가져다 두기만 하면 세척과 분리배출을 대신 해준다는 쓰레기 배출 대행 서비스 광고다. 약간의 비용으로 지저분하고 귀찮은 것들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효율’과 ‘편리’를 계속해서 강조하는 광고를 보고 나니 동시에 여러 질문들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가끔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뒤 항상 죄책감에 시달렸다. 음식을 다 먹고 플라스틱 용기를 씻어서 분리수거할 때면 죄책감은 한층 더 짙어졌다. 〈자원 재활용에 기여하는 친환경적인 서비스〉라는 광고문구는 그 감정까지 말끔히 치울 수 있다는 유혹처럼 보인다. 재활용 배출을 전문 업체에 맡기면 정말 이런 스트레스가 줄어들까? 생활 속 자잘한 노동이나 노력에서 벗어나면 그 시간을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덕분에 편안하고 이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죄책감 때문에 다회용기를, 텀블러를, 장바구니를 챙겨 다니게 되었다. 다회용기에 포장해온 음식을 먹고 설거지를 할 때는 배달음식을 먹고 분리수거를 할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안했다. 그편이 내게 이롭게 느껴진다. 이는 세계와 내가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믿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나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들은 대부분 무언가에 대한 분리와 해방이 아닌 관계와 연결감에서 생겨났다.

까치밥의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도 삶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사진 출처 : manseok_Kim
까치밥의 의미를 아는 것만으로도 삶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사진 출처 : manseok_Kim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서울에서 살았던 나의 엄마는 서울에 산 지 15년 되던 해에 귀농하기로 마음먹었다. 엄마의 제안에 동의한 아빠는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었고, 엄마도 오래 근무한 지역아동센터 선생님 자리를 정리했다. 왜 도시에서의 익숙한 생활을 뒤로하고 귀농이라는 모험을 택했느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땅과 더 가까이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답했다.

덕분에 나와 동생들은 작은 시골 동네를 구석구석 쏘다니며 열심히도 놀았다. 매일같이 맨발로 나무에 오르고 어디서나 달리기 경주를 했다. 어떤 날에는 알록달록한 열매들과 나뭇가지를 주워 마당 한 켠에 소꿉장난을 벌였다. 옥상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떨어지는 별똥별을 구경하는 일은 여름방학의 하이라이트였고, 뒷산에 올라가 썰매를 타고 늦은 저녁까지 눈밭에서 뒹굴고 나면 긴 겨울이 야속하지 않았다. 빌라 앞 좁은 놀이터에서는 불가능했을 경험들이었다.

서울을 떠나 처음 살게 된 집은 대청마루가 있는 옛날식 주택이었다. 화장실이 바깥에 있어 볼일을 보려면 마당을 가로질러야 하는 낡고 오래된 집이었다. 유기농업을 시작한 엄마와 아빠는 분변을 거름으로 활용해본다며 푸세식 변소를 수리해 생태화장실이라고 이름 붙였다. 당시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나는 온갖 벌레들과 함께 냄새나는 곳에서 쭈그리고 볼일을 보는 게 무섭고 싫었다. 집 안에 번듯한 양변기를 둔 지금 생태화장실은 가족들과 가끔 이야기하는 우스운 에피소드가 되었지만, 그렇게 모인 분변이 감자밭, 고구마밭, 콩밭에 뿌려져 식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언제나 놀랍다. 세계와 내가 연결되어있다는 감각은 이런 과정을 거쳐 느릿하고 선명하게 몸속에 남았다.

엊그저께에는 길을 걷다가 우연히 감나무를 보았다. 가지마다 탐스럽게 매달려있는 열매가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잠깐 그 모양을 쳐다보고 있자니 장을 보러 대형마트에 갔을 때가 생각났다. 흠집 하나 없이 잘 익은 감들이 종이 상자 속에 줄지어 전시되어 있었다.

본가의 마당에도 감나무가 있다. 단 며칠만 그 나무를 지켜보면 열매가 익는 정도에 따라 향과 모양과 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 수 있다. 감의 맛이 떫음에서 달콤함으로 넘어가는 절묘한 순간을 목격할 수도, 열매뿐만 아니라 잎을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해 볼 수도 있다. 감을 쇼핑할 때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되고, 식물 사전을 뒤적거리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값진 지식을 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높은 가지에 달린 열매들을 모두 수확하려 애쓰지 않고 까치밥으로 남겨두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의 삶이 그 이전보다 훨씬 풍요로울 것이라고 확신한다.

잘 익은 감을 먹고 싶다는 마음으로 열매의 색을 살피고, 향기를 맡아보고, 손으로 만져보며 며칠을 기다리는 일과 마트에서 포장된 감을 고르는 일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경험일 것이다. ‘편리하다’는 말은 후자의 경우에 더 적합해 보이지만 나는 이것이 큰 착시이자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감이 익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편이 훨씬 편안하고 이롭다. 수렵과 채집으로 생존했던 과거로 회귀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여러 선택지 중 무엇이 진정으로 편리한지에 대한 고민을 놓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는 감나무와, 플라스틱 쓰레기와, 푸세식 변소의 벌레들과 내가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란다.

동하

‘해 뜨는 동쪽 하늘’이라는 뜻의 제 이름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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