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사상가] ‘침묵의 봄’이 환경운동의 침묵을 깨다-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의 출간은 1960년대 DDT 사용 금지를 외치는 사회운동의 분기점이 된다. 이 책은 세계의 권력균형을 뒤흔들었으며, 환경오염을 사회진보가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는 기존 통념과 다른 패러다임을 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저자 레이첼 카슨의 작업은 심층생태운동과 민중적 환경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에코페미니즘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대표적인 생태사상가 중 하나인 레이첼 카슨의 생애를 짚어보자.

광활한 바다를 꿈꾸던 여학생

1907년 5월 27일 펜실베니아 스프링게일 부근 작은 농장에서 ‘레이첼 카슨’이라는 작은 아이가 태어났다. 가난한 집이었지만, 아이는 아무 걱정도 없이 커나갔다. 레이첼 카슨은 많은 책 속에서 세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키우며 자라났다. 특히 가족이 운영하는 농장을 탐험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말과 개, 송아지 등의 동물들과 나무, 풀, 약초 등의 식물들, 새와 곤충 같은 것들이 이 꼬마숙녀에게는 일일이 인사하고 대화하고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는 8살이 되던 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가 가장 관심을 갖고 쓰고 싶었던 주제는 바다에 대한 것이었다. 책에서 바다이야기가 나올라치면 메모를 하면서 꼼꼼히 보았다. 그녀에게 있어 바다는, 어린 시절 들었던 우주이야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레이첼 카슨(Rachel Louise Carson)
사진 출처 : U.S. Fish and Wildlife Service

그녀는 스프링게일 작은 학교에서 10학년을 다녔고, 1925년에 펜실바니아 파르나서스 근방의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은 그녀에게 매우 힘든 시절이었다. 그녀는 늘 외톨이였고 친구들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1928년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입학을 허가한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여자대학을 선택해야 했다. 펜실베니아 여자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전공을 영문학을 선택하였지만 자신의 관심사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바다와 생명체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생물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학생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문학에 대한 그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후 1929년 결국 꿈꾸던 존스 홉킨스 대학에 들어가 동물학과 유전학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원을 1년 마치고 그녀에게 새로운 난관이 다가왔다. 생활비가 전혀 없었으며, 등록금을 벌어야 했던 것이다. 그녀의 지도교수는 레이먼드 펄(Raymond Pearl’s laboratory)에 연구보조원 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그녀는 연구실에서 쥐와 초파리실험을 하면서 뜨거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전화연락을 받은 레이첼 카슨은 숨이 막힐 듯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의 부친이 사망한 것이었다. 농장에서 어릴 적 뛰어놀던 그녀의 기억에는 부친의 가난하면서도 따뜻한 노동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는 노모를 돌봐야 했으며, 가장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연구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단한 몸을 겨우 뉘일 때가 오면 그녀는 지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멀리에 있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던 지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학부시절 교수는 미국수산청에 임시직 자리를 알아봐주었으며, 거기에서 레이첼 카슨은 ‘바다 밑의 로맨스’라는 주간 라디오 교육 방송 시리즈 대본을 쓰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와 함께 지역신문과 잡지에 해양 생물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레이첼 카슨은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밤이면 그녀의 집에는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녀의 노력은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람들은 이 해양생물에 대한 방송에서 신비감과 경외심을 갖게 되었으며, 지역 사람들과 학생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프로그램이 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수산청을 소개하는 팸플릿 소책자의 안내문을 쓰는 일을 맡게 된다. 얼마 후 그녀는 수산청에서 정규직으로 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입사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였는데, 수산청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게 된 두 번째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신입 해양 생물학자로 일하게 된다.

해양 과학자에서 작가로

수산청에서 그녀의 직장생활은 그녀의 적성에 매우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류분포를 분석보고하고 대중 홍보용 소책자를 만드는 일을 하였고 스스로의 연구와 해양 생물학자의 연구를 모아서 신문에 정기적으로 기고도 하였다. 1937년 언니가 사망하였고, 그녀는 노모와 조카 2명을 돌봐야 했다. 그녀는 안정되었지만 직장생활과 가정을 꾸리는 일로 인해서 누군가와 오붓하게 데이트 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갔다. 바로 그 해 ‘Atlantic Monthly’는 그녀가 처음 입사해서 썼던 수산청 팸플릿 “The World of Waters”의 개정판을 ‘바다 밑(Undersea)’이라는 이름으로 내자고 제안한다. 이 책은 바다 밑에 대한 생생한 탐험기로 그녀의 작가 인생에도 큰 영향을 준 책이었다. 이 수필집은 작가로서의 레이첼 카슨의 존재를 알렸으며, 한 출판사가 그녀의 수필을 책으로 출간하자고 제안하여 몇 년을 작업하여 『Under the Sea Wind』(1941)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그녀의 글은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학자로서, 작가로서 활동하기를 원했지만 과학기금이 기술 분야로 집중된 탓에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도 없었고 수산청을 떠날 수도 없었다.

1945년 카슨은 DDT 문제를 처음 접하게 되는데, 당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였다. 당시 미국은 벌레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를 벌레가 옮긴다는 식의 위생개념이 미국에서 생기던 때였다. DDT는 이런 벌레를 퇴치하게 딱 좋은 ‘벌레폭탄’이었다. 그녀는 DDT에 대한 글을 잡지나 신문에 기고하면서 안전성과 환경 영향 평가가 아직 덜된 DDT의 위험성에 대해서 알렸지만 그녀의 글은 주목받지도 출간되지도 못했다.

수산청에도 변화가 있었다. 물고기와 야생생물 서비스(Fish and Wildlife Service)라는 이름으로 수산청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몇몇 직원을 두게 되었고 출간 편집장이 되었다. 이를 통해 현장 연구나 프로젝트의 기회가 많아졌다. 물론 자잘한 행정업무도 그녀를 괴롭혔다. Oxford University Press는 그녀가 프로젝트로 제안한 해양생물사에 관한 책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1950년 초 『우리를 둘러싼 바다(The Sea Around Us)』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여러 과학상을 받았고,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86주간 등록되었으며, 1952년 그녀는 National Book Award, Burroughs Medal을 수상했고, 그녀는 2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책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갖게 된 레이첼 카슨은 『Under the Sea Wind』를 다시 출간하여,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계속된 성공으로 겨우 경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레이첼 카슨은 1952년에야 일을 그만두고 저술에 전념하게 된다. 카슨의 『Under the Sea Wind』는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는데, 그녀는 작가 겸 감독인 Irwin Allen이 수정한 최종대본이 과학적으로 엉망이고, 책과 맞지 않을뿐더러 한마디로 믿거나 말거나 식의 가벼운 여행담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카슨의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앨런은 다큐멘터리 작업을 추진해 1953년 다큐멘터리 부분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인 영상물을 판매할 수 없다는 저작권 규정을 알게 되었고 다시 한번 화를 내야 했다.

도로시 프리먼과의 로맨틱한 우정

카슨이 노모와 함께 1953년 메인 주의 사우스포트 아일랜드로 이사갔을 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생겼다. 그해 7월 도로시 프리먼(Dorothy Freeman, 1898–1978)을 만났고, 그녀와 극히 절친한 사이가 되어 평생 동안 우정을 같이 하게 된 것이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로맨틱한 우정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카슨과 그녀 사이에는 서로의 삶과 사랑, 애정을 함께 한 가장 중요한 우정의 관계가 싹텄다. 카슨의 집은 프리먼의 여름 별장과 가까웠고, 거기서 그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프리먼은 아들에게 선물해 준 카슨의 작품 ‘우리 주변의 바다’를 읽었고, 뛰어난 작가가 자신의 이웃이라는 것에 매우 흥분하였다. 카슨의 전기 작가 린다 리어(Linda Lear)에 따르면 카슨이 원하던 친구는,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옆에 있어주며 자신을 인간이자 한 여성으로 받아들여 줄 수 있는 헌신적이고 다정한 친구였다고 한다. 프리먼은 바로 그런 친구였다.

이 두 사람의 공통된 관심사도 굉장히 많았다. 카슨과 프리먼은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편지를 서로에게 보내며, 서로의 관심사나 어려운 점, 힘든 일, 즐거운 일들을 같이 나누었다. 그 두 사람은 프리먼이 잃어버린 숲이라고 불렀던 메인 주의 한 계발 구역을 보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 두 사람은 여름이면 같이 시간을 보냈으며, 시간이 날 때마다 만나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두 사람의 사이에서 오가는 편지는 동성애자라는 추측의 근거가 되기도 했는데, 전기 작가 린다는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애정관계였다기보다는 아주 가끔 작별 키스를 하거나 손을 잡는 정도였다고 기술한다. 프리먼은 카슨이 보내온 편지들 중 일부를 남편도 읽게 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편지는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였으며, 카슨이 사망하기 직전 두 사람은 자신들의 편지를 많은 부분을 불태워버렸다. 그중 일부는 1995년에 출간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그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랑이든 우정이든 두 사람 모두에게 그녀들의 만남은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으며, 공적 분야에서 두 사람 모두 열정적으로 활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이다.

침묵의 봄을 쓰다

카슨은 1940년대부터 이미 살충제의 유해성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었다. 이 살충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군사자금으로 계발된 것으로서, 1957년에 와서는 불개미퇴치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DDT를 비롯한 살충제를 공중에서 살포하고 사유지에도 무단으로 살포하기 시작했다. 롱아일랜드 토지 소유자들은 살충제 살포를 멈추라고 소송했으나 기각되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환경피해에 대해서 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인정하였고, 이것은 향후 환경행동의 기반이 되었다. 카슨은 DDT피해 사례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언론인과 과학자들과 접촉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수행했는데, 뉴스워크의 담당기자 에드윈 다이아몬드(Edwin Diamond)와 함께 ‘침묵의 봄’을 쓰려고 계획했다. (나중에 다이아몬드는 『침묵에 봄』에 대해서 비난했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카슨은 살충제의 물리적, 환경적 영향에 대해서 경고했던 과학자그룹들과 만나게 된다. 과학자들 중에는 살충제의 위험을 무시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대안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정부기관 소속 과학자들은 비밀정보들을 그녀에게 제공하였다. 1959년 카슨과 연구자들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불개미 심판’이라는 다소 허황된 홍보영화를 만들었다. 카슨은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을 통해 살충제 과다 사용으로 인해 새의 숫자가 줄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1957~1959년 사이의 덩굴월귤(cranberry)의 열매에 아미노트리아졸이라는 쥐실험에서 암을 유발한 살충제 성분이 고농도로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 덩굴윌귤 제품의 판매가 금지되었다. 카슨은 국립약물 연구소 도서관에서 암 유발화학물질 연구자들과 접촉하였고, 특히 국립암센터 연구원 빌헬름 휘퍼(Wilhelm Hueper)의 연구에 주목하였는데, 그는 많은 살충제가 발암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충제와 암의 연관성에 대한 증거를 확보했다. 1960년대 카슨은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저술 작업을 상당히 진행하여 살충제 노출이 갖게 되는 인간질병과의 유관성과 환경적 피해사례를 조사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과도한 격무에 시달렸던 그녀에게 나쁜 소식이 들려 왔다. 그녀의 왼쪽 가슴의 포낭이 암이라는 사실이었다. 암은 이미 몸속 전체에 퍼져 있었으며, 그녀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저술 작업은 1960년 가을에 완료되었는데, 책 제목에 대해서 고민하던 차에 저술을 돕던 마리 로델(Marie Rodel)이 새를 다룬 장에서 힌트를 얻어 ‘침묵의 봄’을 제안했다. 새들도 지저귀지 않는 봄이라는 의미에서 어두운 미래세계상을 담은 이 제목을 카슨은 받아들인다.

침묵의 봄속으로

살충제는 그저 벌레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생물을 파괴할 수 있으므로 ‘생물 파괴제’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사진출처 : freepik

카슨은 미국문화가 갖고 있는 과학발전 패러다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침묵의 봄은 인간이 자연세계에 미치는 강력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다루고 있는 책이며, 이 책의 핵심요지는 살충제가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살충제는 그저 벌레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생물을 파괴할 수 있으므로 ‘생물 파괴제’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DDT를 비롯한 합성 살충제들은 체내에 축적되는 것으로서 오도된 정보를 퍼뜨리는 화학업계의 주장과 행정당국의 입장과 달리 생물계 내부 혹은 종간에 누적적으로 농축되는 것이다. 이 책은 살충제가 자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주로 다루는데, 인간의 살충제 중독, 암, 살충제로 인한 질병들을 다루고 있다. 특히 논쟁이 많이 되었던 암과의 유관성의 측면에서 동물실험의 결과는 DDT가 간암을 의심할 증상을 일으켰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휘퍼(Hueper)박사는 DDT를 발암물질로 규정하고 있었다. 카슨은 오히려 해충들이 살충제에 내성이나 저항력을 갖게 되고, 생태계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종의 공격으로 파괴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화학살충제의 대안으로 생물학적 해충통제 모델을 제시하면서 마무리되고 있다.

이 책이 나왔을 때 카슨은 심한 비난을 예상하고 있었고, 소송에 대해서 우려했다. 특히 저자인 카슨이 암투병 중이라 그것에 대응할 에너지가 거의 없었다. 이 책이 나오자 화학업계와 로비스트, 미국대중들은 관심을 표명했다. 『침묵의 봄』은 서점 구경도 하지 못했던 시골마을 사람들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탈리도마이드에 의한 기형아 사건이 터졌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DDT제조사인 듀퐁은 여론전에서 자신들이 승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 – 팸플릿 제작, 위협, 법적 대응 시사 -을 취하기 시작했다. 특히 살충제약회사 소속 생화학자들은 카슨의 주장대로라면 해충과 질병으로 가득한 중세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녀가 생화학이 전공이 아니라 해양 생물학이 전공이라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개인적인 성격 등에 대한 루머도 퍼졌으며, 심지어 일부에서 광적인 자연 보호론자이거나 매력적임에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공산주의자가 분명하다는 비난들이 쏟아졌다. 카슨은 그녀에 대한 비난처럼 살충제를 모조리 금지하자는 주장을 한 적이 없었으며, 전체생태계를 고려하고 해충들의 내성을 억제하면서 최소한으로 사용하자고 권고하였다.

여론은 그녀의 편이었다. 살충제 문제는 TV공중파를 통해서 보도되었으며, 국회와 대통령 자문위원회도 이 문제에 대해서 고려하기 시작했다. 케네디의 과학자문단은 1963년 5월 15일 보고서를 통해서 카슨의 과학적 주장을 지지했으며, 정책 권고안을 작성했다. 그녀는 초청강연과 TV프로그램의 요청이 쏟아지는 가운데도 건강의 악화로 인해 거기에 참석할 수 없었다. 카슨은 결국 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1964년 4월 14일 사망하였다.

사후의 명예

침묵의 봄의 출간은 1960년 사회운동의 분기점이 된다. 침묵의 봄은 세계의 권력균형을 뒤흔들었으며, 환경오염을 사회진보가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는 기존 통념과 다른 패러다임을 등장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슨의 작업은 심층생태운동과 민중적 환경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에코페미니즘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DDT사용을 금지하자는 환경운동이었다. 환경 보호 재단(Environmental Defense Fund)의 창설은 이 DDT반대운동의 이정표였으며, 정부에게 시민들을 위해 깨끗한 환경을 구축할 것을 청원하였는데 카슨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1972년 미국정부의 DDT사용 단계적 폐지 조치를 이끌어냈다. 1970년대 환경보호청이 창설되었는데, 살충제 규제나 농업 산업 촉진을 위한 정부기관이었으나 야생동물에 대한 영향이나 환경문제는 새로운 영역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고 있었다. 1972년 연방살충살균살서제법(Federal Insecticide, Fungicide and Rodenticide Act; FIFRA/EPA법)은 카슨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법안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살충제 규제가 농업에 주는 피해와 경제적 자유에 대한 침해 등을 주장하면서 공격했고, 보수 잡지 휴먼이벤트(Human Events)는 19~20세기 가장 위험한 책 10권의 책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선 레이건 정부는 카슨의 영향을 받은 많은 환경정책을 취소해버렸으며, 정치학자 찰스 루벵(Charles Rubin)과 같은 사람은 카슨을 광신도로 몰아붙이면서 말라리아로 수백만 명이 죽은 것은 DDT사용 금지 때문이었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수많은 정부 기관과 단체들은 카슨의 업적을 기렸고, 1980년 6월 9일 미국시민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자유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카슨에게 수여했다. 카슨의 출생지는 국가유적지가 되었으며, 1975년 비영리단체 레이첼 카슨 협회가 만들어져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노르웨이에서 창설된 레이첼 카슨 상은 환경보호에 기여한 여성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2007년 4월 22일 레이첼 카슨 탄생 100주년 행사에 많은 기고문이 제출되었으며, 레이첼 카슨 협회 총회 및 행사가 있었다.

이 원고는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 [생태사상가 책 만들기 모임]의 결과물이며, 신승철 님의 초안을 토대로 배선우(마카야) 님의 교정.교열 과정으로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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