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조각모음] ㉗ 자급자족과 과실상규(過失相規)

전통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전통을 현실의 문제상황과 접목하는 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현실의 변화를 퇴행의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며, 전통을 언젠가 다시 되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오염시켜버릴 수도 있는 것 같다. 탈성장사회를 자급자족의 사회로 상상하는 과정에 한국 전통 속의 자급자족적 사회상을 그러한 상상과 연관시킬 때 유의해야 할 점을 검토하여 본다.

성장 vs. 자급자족

2023년, 〈탈성장 전환시대의 자급자족 사회 전망〉1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상우는 자급자족이2 탈성장 사회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상우는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근본)적인 요소인 식량과 에너지만을 자급자족하기에도 현대 우리나라의 인구는 너무 많다”3고 주장하였다. 세상 사람 거의 모두가 인구 감소 때문에 공포에 빠져있다시피 한 와중에, 조상우는 인구가 너무 많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주장에는 ‘자급자족하기에’라는 단서가 달려있다. 조상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하였다.

“우리 인구정책은 국토가 자급자족할 수 있고 현재의 인구 구조로 부담할 수 있는 만큼 인구를 줄여 나가야 한다. 내수만으로도 경제성장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인구가 1억 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자급자족을 위해서 우리나라의 국토상황으로는 많아도 현재 인구의 1/2은 넘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4

조상우는 ‘자급자족을 위해서’ 한국의 인구가 지금의 1/2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셈이다. 조상우는 이러한 주장을 ‘내수만으로 경제성장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인구가 1억 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대비시켜 놓기도 하였다. 이 대비는 자급자족과 경제성장이 모순관계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더 과격하게 말하면, 인구가 1억 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구를 구매력으로만 보는 자본가적 발상에 포획되어있음을 자인하는 꼴일 뿐인 것이다.

지금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개 경제는 계속 성장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의식화되어 있는 듯하다. 조상우는 그러한 생각을 성장중독이라고 말한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우려가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성장주의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5

그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한때 경제성장이 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든 때가 있었다. 최소한 3%, 은행 이자만큼은 성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성장 신화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깨졌다. 많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직원을 줄이고 폐업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라가 망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거나 세계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는 일은 없었다.”6

조상우는 역병의 대유행을 자본주의의 취약성이 드러난 계기로 보기보다는 성장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본 듯하다. 역병의 대유행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른바 ‘AI 산업 혁명’까지를 연결시킨 상태에서 검토하여 보면, 조상우의 인식은 단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선을 미래가 아닌 과거의 역사로 돌려놓고 보면, 이른바 경제학이 아주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역사 속에서도 과학의 사명인 예측에 수도 없이 실패하여 왔으며, 오히려 역사까지 갈 것도 없이 남겨져 있는 기록만 보더라도, 불과 100여년 전인 1920년대 중반 서울(당시 경성부)의 인구는 약 25만 명에서 30만 명 선이었으며,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속 1930년대 경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몰아쳐서 뒷골목의 쓰레기처리가 버거웠다. 이를 보면 ‘최소 인구 1억’이 오히려 비현실적 인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고, 조상우의 인구 ‘감축’론과 자급자족론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자유무역 vs. 자급자족

한국의 경제는 무역, 특히 수출에 의존하여 왔고, 농업 자급자족을 희생하고 값싼 농산물과 공산물을 쓰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정혜수

조상우는 경제성장이 대량소비와 표리관계임을 시사한다. 그는 산업혁명이 인간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물건들을 계속 쏟아내 왔음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여기에서, 예를 하나 들자면, 사람들이 추구한 편리함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다 쉽게 얻는 것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예는 후추·커피·바나나 등의 국제무역을 이해할 수 있게 하여준다. “우리는 성장과 풍요의 달콤함에 빠져들었고, 이를 제대로 즐겼다”7고 조상우는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편리함과 소비강박에 중독되기 시작했다”8고 조상우는 주장한다. 실크로드나 대항해 이야기가 나올 때 후추로 대표되는 향신료가 빠지지 않는다. 한때 미국은 바나나 등 열대과일을 사고파는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남아메리카에 해병대를 파병하였고, 이는 지금에 이르는 남아메리카 정치경제의 형성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근의 미국의 베네주엘라 침공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과일에 대한 욕망이 짜 놓은 틀을 기름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악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극단적인 소비중독이 빚어낸 반인간 정치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의 본질은 약탈이라 할 수 있다.

자유무역은 미국의 베네주엘라 침공과 유사한 전쟁·약탈·식민지배 등의 대안으로 오래 전부터 제시되어왔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전지구적인 자유무역이 평화의 대안으로 추구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렇다할 자원을 가지지 못한 한국과 같은 경우, 자유무역 이전에 일반 무역, 특히 수출이 생존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였다. “‘수출만이 살길’이었다. 상품은 물론 사람도 수출해야 했다.”9 한국은 장기간 수출을 통하여 생존하고 성장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여러 단위들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공존하면서 성장하려 하여왔다. 조상우는 이러한 과정이 한국사회에 드리우게 된 그늘을 지적하였다.

“우리는 또 돈이 되는 산업을 위해 돈이 되지 않는 농업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희생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는 부족한 에너지를 수입했고, 값싼 농산물과 공산물을 수입해 쓰면서, 풍요를 위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10

조상우는 농업 아니 식량과 에너지에 집중한다. 식량과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은 언제든 불가능해질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 여기 한국에서 사람들은 식량과 에너지가 외부로부터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 사태를 잘 상상하지 못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1945년 이후, 짧게 잡으면 1970년대 이후, 관료들과 역대 집권세력들을 포함한 한국 사람들이 그만큼 식량과 에너지 관리를 잘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주위를 돌아보면, 그리고 역사책을 몇 페이지 뒤적여보면, 사람들이 식량과 에너지 걱정을 하지 않는 상태는, 현실 속에서는 희귀한 성공사례에 불과하고, 역사 속에서는 짧았던 행운에 불과해 보인다. 한국사를 돌아보아도, 70년대의 혼분식 장려 · 한국전쟁 시기의 물자 부족 · 해방 직후의 식량 부족 등등이 식량난이 이어졌음을 보여주고, 이른바 ‘오일 쇼크’는 에너지 부족의 가능성이 상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자급자족과 과실상규(過失相規)

지금 여기 한국에서 식량과 에너지의 부족은 그러한 부족에 빠지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에 가려져서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조상우는 그것을 실감나게 이야기해 준 것일 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더하여 조상우는 식량과 에너지의 부족 문제를 인구와 직결시키고 인구가 줄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 시점 저출생이 위기라는 느낌을 거의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는 듯한 한국에서 이는 대단히 돌출적인 주장이다. 필자는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조상우의 주장에 공감한다. 21세기 초부터 이미, 필자는 인구 과잉이 노동시장에서 자본가들의 우위를 유지시켜주는 여러 요인들 가운데 주요한 하나인 듯 하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필자는 특정 시기의 ‘출산 장려’를 거의 자본가들의 음모처럼 보았다. 필자는 지금 자본가들이 인구 증가를 바란다고 추측한다. 지금 인구 증가는 노동시장에서 자본가들이 우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고, 과잉생산된 상품의 소비자의 증가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한국 역사에는 자급자족을 위한 전통들이 있다. 그 중 향약은 자급자족적 농촌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도의적 기준에 대한 지침이었다. 사진 출처: Jeffry Surianto

인구 감소를 조건으로 하는 자급자족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역사에서는 자급자족을 떠올리게 하는 사회적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역사 속에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이나 여러 가지 압박과 제재로부터 주권을 지키기 위한 자급자족이 없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의 물산장려운동이 그 예일 것이다. 어찌 보면 1990년대 IMF의 관리하에 벌어진 금 모으기 운동도 이런 자급자족의 일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 내내 벌어졌던 각종 국산품 애용 운동과 외제 불매 운동들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국내 산업 기술이 성장할 기회를 주기 위한 보호 활동이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외제차에 대한 거부의 느낌은 이러한 활동이 장기화됨에 따른 데 수반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침략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그에 대응하는 불가피한 자급자족의 사례도 침략과 전쟁 횟수만큼 많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한국 역사 속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자급자족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하나이면서 다소 독특한 것으로 향약(鄕約)을 꼽을 수 있다.

향약에 대하여 박경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향약은 원래 향촌규약(鄕村規約)의 준말이다. 향약은 원칙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 자치와 이를 통해 일반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리학적 기본 질서 확립이라는 전제 아래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 사회에 보급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아울러 각종 재난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는 규정을 두어 향촌 사회의 안정을 꾀하였다.”11

이 설명에서 볼 수 있는 향약의 기능 혹은 설립 목적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향촌에서 양반이 일반 백성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함.
(2) 향촌에 유교적 도의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함.
(3) 향촌에서 발생한 재난을 상호부조를 통하여 안정적으로 자체 해결할 수 있도록 함.

상황 변화에 따라, 어떤 때는 (1)이 은밀히 중시되고, 어떤 때는 (3)이 공공연히 내세워지는 가운데, (2)는 조선의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서원과 향교 그리고 오늘날에는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산하 유도회 지부에서의 예절교육 등등을 통하여 유교적 도의문화가 한국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하여온 듯하다.

최초의 향약인 여씨향약(呂氏鄕約)은 북송 시대인 1076년 중국 섬서성 남전(藍田)에서 여씨 형제에 의해 처음 시행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향촌 자치를 위한 상호부조 체제라 할 수 있고, 그 지침이 정리되어 있는 문서인 『여씨향약』을 주희가 증보하였고, 1518년에 조선에서는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이 문서의 번역인 『여씨향약언해』를 간행하였다. 1556년에는 지금의 경북 안동에 해당하는 예안에서 이황(李滉 1502~1571)에 의하여 예안향약(禮安鄕約)이 시행되었고, 1574년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당시 황해도 관찰사 이이(李珥 1536~ 1584)에 의하여 해주향약(海州鄕約)이 시행되었다. 조선 최초의 향약인 예안향약을 실시한 이황은 1550년에는 조선 최초로 서원을 국가 공인 사립 교육 기관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1542년 고려에 주자학을 최초로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을 기리며 사당을 세운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1543년 백운동서원을 세웠는데, 1550년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소수(紹修)[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음]라는 이름을 담은 소수서원 현판을 하사함에 따라 이 서원은 국가 공인 첫 서원이 되었다. 이황은, 주자학의 근간을 이루는 논리인 이기론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린 이론가인 동시에, 조선 사회의 기본 단위인 향촌 사회에서 모범이 되어줄 존재 즉 선비[사류(士類)]를 향촌단위에서 양성하는 사설 교육장인 서원의 권위에 대한 국가적 공인을 조선 최초로 끌어내기도 하였으며, 향촌사회에서 선비가 모범을 보이고 구성원들을 도의에 따라 이끌 때 기준이 되어줄 수 있는 지침인 향약을 예안 단위에서 최초로 실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황의 업적이 시사하듯, 철학이면서 정치사상인 주자학에서 이기론-서원-향약은 각각의 확고한 역할을 가지면서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하나인 향약은, 앞서 적은 바와 같이, 향촌사회에서 선비가 모범을 보이고 구성원들을 도의에 따라 이끌 때 기준이 되어줄 수 있는 지침이었다.

예안향약 단계에서, 향약의 내용은 양반이 유교적 도의문화를 준수하여 모법이 됨으로써 스스로 향촌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적어도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는, 곧이곧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약조들을, 그 향약 안에서 볼 수 있다.

“부모에게 불순한 자: 불효한 죄는 나라에서 정한 형벌이 있으므로 우선 그 다음 죄만 들었다.
형제가 서로 싸우는 자: 형이 잘못하고 아우가 옳으면 균등하게 벌하고, 형이 옳고 아우가 잘못하였으면 아우만 벌하며, 잘못과 옳음이 서로 비슷하면 형은 가볍고 아우는 중하게 처벌한다.
가도(家道)를 어지럽히는 자: 부처(夫妻)가 치고 싸우는 일, 정처(正妻)를 쫓아내는 일, 아내가 사납게 거역한 경우는 죄를 감등한다. 남녀 분별이 없는 일, 적첩(嫡妾)을 뒤바꾼 일, 첩으로 처를 삼은 일, 서얼[孼]로 적자[適]를 삼은 일, 적자가 서얼을 사랑하지 않는 일, 서얼이 도리어 적자를 능멸하는 일”12

위와 같이, 예안향약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이라고 할만한 ‘약조’에서 가장 강한 비난13의 대상으로 적시한 것들 가운데 부모에게 불순한 자 · 형제가 서로 싸우는 자 · 가도(家道)를 어지럽히는 자가 들어있는데,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적어도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는, 곧이곧대로 적용하기 어려운 약조로 보이는 것이 있다. 이는 오늘날 향약을 이해하는 데 그리고 특히 향약을 비롯한 ‘전통사회의 미풍양속’을 지금의 사회문제 해결책으로 잘 사용하여 보고자 할 때, 사전에 거듭 다각적으로 살펴보고, 이것을 현재의 현실에 적용하였을 때 빚어질 결과를 세심하게 예상하고 검토하여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규약을 정할 때 서원에 모인다. 【예를 행하는 의식은 뒤에 보인다.】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지방(紙榜)을 설치하고 향을 피우며 두 번 절하고는 직월이 맹세를 고하는 글을 가지고 【그 글은 미리 지어서 동약인에게 두루 보인다.】 도약정의 왼쪽에 꿇어앉고, ……”14

향약은 예안향약 단계에서 고착되지 않았다. 위에 인용한 해주향약의 입약범례의 일부분을 보면, 향약에 가입할 때 치르는 의식의 보여주는 모습이 일반 백성 보다는 양반들에게 어울렸을 듯하다. 이황의 예안향약도 그러하였지만 이이의 해주향약도 향촌의 양반사회를 도의적으로 고양시키는 것이 향촌전체의 안정화와 도의적 고양 그리고 경제적 안정을 위하여 먼저 하여야 할 일이라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예안향약에서 해주향약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1세기가 되지않는 사이에 향촌의 양반문화가 세련되어간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향약은 향촌의 양반사회를 도의적으로 고양시키는 것을 넘어 향촌사회 자체의 안정화를 지향하였다. 그런 지향 속에서 향약의 행동지침은 일반 백성을 포함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정비되어, 이른바 ‘강목’이 되었다. 흔히 그 자체로 향약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향약의 4대 강목은 다음과 같다.

덕업상권(德業相勸): 덕을 쌓는 일을 서로 권함
과실상규(過失相規): 허물을 서로 바로잡음
예속상교(禮俗相交): 양보하며 서로 사귐
환난상휼(患難相恤): 어려움을 겪을 때 서로 도움

이렇듯, 4대 강목은 도의문화에 기반한 공동체의 규약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향약은 경제적인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 조선 향촌의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자급자족적 농업 경제였으므로, 향촌의 규범인 향약에는 외부 교역이 적은 자급자족적 농업이라는 경제적 조건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향촌의 경제를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본다면, 환난상휼(患難相恤) 같은 덕목을 벼농사의 모내기나 가을걷이 같은 집약적 집단 노동의 필요성에 조응한 덕목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집약적 집단 노동에 필요한 노동력의 필요성은 4대 강목 전체를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하여 떠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의식화의 도구처럼 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런 면들을 고려하면, 향약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존해야 했던 조선의 자급자족적 농촌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적 안전망이라고 볼 수 있게 될 듯하다.

또한, 처음 시행될 때 그 취지가 어떠하였건, 향약은 점차 지배집단이 향촌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지배 도구가 되어갔다는 평가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기도 한다. 이러한 향약의 ‘도구적’ 특성은, 조선 향촌의 자급자족적 농업 경제가 짙게 반영되어있는 향약을 오늘날의 자급자족을 강화 확산하기 위하여 참고하여야 할 사례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눈 여겨 보아야 할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오늘날 향약을 잘못 모방하였다가는, 그 모방에 지역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써 향약이 가졌던 특성이 수반할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과실상규(過失相規) 즉 ‘허물을 서로 바로잡음’이라는 덕목인 듯하다. 이 덕목은 전 사회적인 상호 감시로 해석할 수도 있는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자급자족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향약에 이 덕목이 포함되어 있음으로 해서, 오늘날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사람 가운데 향약으로부터 자급자족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향촌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감시의 인습까지도 함께 이어받는 패착을 두게 될 수도 있다. 과실상규뿐만 아니라 예안향약이나 해주향약에서도, 지금의 현실과 어울리기 어려운 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음은, 앞서 제시한 예안향약과 해주향약로부터의 단편적 인용문에서도 누구나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의 역사 속에는 자급자족을 연상시키는 문화유산이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역 단위에서 작동하였던 자급자족적 정치경제의 체제와 관습이 어느 시점에 완전히 분절되고 소멸되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에서 누군가 자급자족을 이야기하면, 비교우위나 공급망 등등에 근거한 강력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겠지만, 한국 사람들 대다수는 특별한 저항감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자급자족을 정서적으로 수용할 듯하다. 그 바탕에는 계·두레·향약 등 중등 교과서에도 나오는 풍속들에 대한 학습 내용과 기억이 깔려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급자족은 한국인들에게 아주 쉽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런데, 향약 특히 과실상규에 대한 검토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전통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전통을 현실의 문제상황과 접목하는 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현실의 변화를 퇴행의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으며, 전통을 언젠가 다시 되돌아볼 수 없는 상태로 오염시켜버릴 수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은,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전통을 쌓아온 공통체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 듯싶다.


  1. 조상우, 「탈성장 전환시대의 자급자족 사회 전망」,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기획), 『탈성장을 상상하라: 성장 신화의 종말과 이후 시대』, 서울: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23, 152쪽. 이 글은 출판 전 2022년 8월 18일, 웹진 『생태적 지혜』에 게재되었다.

  2. 자급자족은 영어로 Self-sufficiency 혹은 Autarky(아우타르키)라고 하는데, 이런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와 이 글에서의 자급자족이 의미하는 바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많은 듯하다.

  3. 조상우, 「탈성장 전환시대의 자급자족 사회 전망」, 158쪽.

  4. 앞의 책, 158쪽.

  5. 앞의 책, 153쪽.

  6. 앞의 책, 152쪽.

  7. 앞의 책, 154쪽.

  8. 앞의 책, 154쪽.

  9. 앞의 책, 155쪽.

  10. 앞의 책, 155-156쪽.

  11. 박경하, “조선시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퇴계의 예안향립약조(禮安鄕立約條)”, 『더퍼블릭뉴스』, 2023.11.10.

  12. 李滉, ‘約條’, 「鄕立約條序」, 『退溪先生文集』 卷42. “父母不順者, 不孝之罪, 邦有常刑, 故姑擧其次. 兄弟相鬩者, 兄曲弟直, 均罰, 兄直弟曲, 止罰弟, 曲直相半, 兄輕弟重. 家道悖亂者, 夫妻敺罵, 黜其正妻, 妻悍逆者, 減等. 男女無別, 嫡妾倒置, 以妾爲妻, 以孼爲適, 適不撫孼, 孼反陵適.”

  13. 원문에는 극벌(極罰)이라고 쓰여 있으나, 내용은 처벌이라기보다는 향촌의 양반들 사이에서 집단적으로 행하는 강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14. 李珥, ‘立約凡例’, 「海州鄕約」, 『栗谷全書』, 卷16, “初立約時, 會于書院. 行禮之儀, 見後. 設先聖先師紙榜, 焚香再拜訖, 直月持誓告之文, 右文預撰, 徧示同約. 跪于都約正之左,”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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