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시 – 사라진 사람들, 사라진 언어

얼마 전 광주에 다녀오면서,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에게 어떤 종류의 ‘언어’가 사라졌음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과 비대면에 너무나 익숙한 ‘나의 삶’을 곱씹으며 사라진 언어들을 되찾기 위해 어떤 돌봄이 필요한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키오스크 vs 사람

키오스크에 주문하고 번호표를 받아 번호가 불리면 음식을 받아 간다.
사진 출처: Onesix

얼마 전 워크숍 때문에 광주에 다녀와서 생경한 경험을 했다.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서 콩국수를 시켰는데 사장님이 “이제 막 삶았어. 오늘 개시했는디 맛있을랑가 모르것네.” 하고 말을 건넨다. 덕분에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저도 올해 콩국수 처음 먹네요. 고소한 냄새가 벌써 나는데요? 하하.” 그렇게 한참 대화가 이어졌다.

서울에서는 외식을 해도 사적인 언어를 내뱉을 일이 없다. 키오스크에 주문하고 번호표를 받아 번호가 불리면 음식을 받아간다. 말없이 스마트폰 유튜브를 보며 매장에서 ‘혼밥’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흡사 디스토피아물에 나오는 잿빛 미래의 모습만큼 어둡고 적막하다.

자본 vs 돌봄

나에게 사적인 대화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정신과 진료실이다. 2-3주에 한번, 그간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일상에 관한 질문들을 받고, 2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다.

“40,500원입니다.” 진료비를 결제하고 처방약을 받은 후 병원을 나선다.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친구나 가족이 아닌 내 정신과 주치의겠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네이버 지식인 vs 엄마

대학생 때 학교 행사 때문에 김장을 담글 일이 있었다. 네이버 지식인에 검색할까 하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배추를 절이는 소금 종류부터 자신만의 비밀 레시피까지 자랑스레 이야기하며 굉장히 신이 나 보였다. 내가 엄마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던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엄마에게 해먹지도 않을 어려운 반찬을 만드는 법을 물어보는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지식을 전수하는 기쁨’을 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 때 처음 보았기 때문에, 그런 엄마의 모습은 나에게도 행복이었다.

우리는 예전이라면 부모님에게 배웠을 생활의 지식이나 지혜들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취하고 있다. 덕분에 청소년과 청년들은 ‘어른’에게 질문할 필요가 없어졌고, ‘어른들’은 지식을 공유하는 기쁨을 박탈당했다. 그렇게 대화와 유대가 사라지며 세대간 간극은 더 커져 간다.

Chat GPT vs 어른

구글 문서나 슬랙 같은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도입되면 청년들에게 장년층이 업무 프로세스를 배우게 된다.
사진 출처: BoliviaInteligente

더 많은 질문들에 더 정확한 답변을 내놓는 Open AI와 함께 사는 지금, ‘어른’이 경험한 지식과 지혜는 ‘질문하는 다음 세대’를 잃었다. 스마트폰은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지식인, 위키백과, open ai 등을 활용하여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한다. 엄마의 비법 레시피를 요리 블로거의 레시피가 대체하고, 맥가이버 같은 철물점 어르신의 역할도 생활팁을 공유하는 유튜버가 대신한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지식 전수는 오랜 시간 인류에게 익숙했던 세대 간 역할을 붕괴시킨다. 구글 문서나 슬랙 같은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도입되면 청년들에게 장년층이 업무 프로세스를 배우게 된다. 자신이 경험했던 세계관에서 일어난 적 없던 일이었기에 장년층은 ‘나 때는…’ 으로 시작하는 과거의 경험이라도 공유하려 하지만 청년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이제 노인에게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노파’의 이미지는 없고, 그 이미지의 빈자리를 ‘무능한 노인’ 혹은 ‘꼰대’가 대신한다.

자본 vs 돌봄 2

“어머님 댁에 클로바 한 대 놔드려야겠어요.”

예전에 유행했던 보일러 CF의 카피를 패러디한 인공지능 스피커 광고 카피다.

실제로 지니, 클로바, 알렉사, 헤이구글 등 가상 비서(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에서는 노년층을 블루오션으로 보며, 치매예방을 위해 부모님 댁에 이런 ai들을 구매해줄 것을 권장하는 광고를 하고 있다. 육아를 대신하는 유튜브와 넷플릭스 키즈 컨텐츠 등은 이미 스마트폰 판매점마다 이용요금 할인 광고 포스터가 붙어있을 정도로 성행중이다.

소리 없이 존재하는 유령들의 도시

이제 사람들은 만나서 이야기하기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하고 싶은 말을 남기고, 만나서 소식을 전하기보다 인스타그램에 ‘필터’를 적용하여 찍은 일상을 게시한다.

나에게 인구감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어떤 ‘언어’의 감소이다. 우리는 더 이상 대면하여 말하기를 원치 않고, 온라인 플랫폼은 소통이 아닌 ‘일방적 말하기’를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스미디어는 ‘일방적 말하기’ 때문에 붕괴되었는데, 대안 플랫폼으로 인기를 얻은 소셜 미디어는 또 다른 방식의 ‘일방적 말하기’를 낳았다. 매스미디어가 권력과 권위를 가진 자들의 일방적인 무대였다면, 소셜 미디어는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송출한다.

사람들은 sns에 하고 싶은 말을 게시하면서도, 소통하기 싫은 대상을 언제든 ‘차단’한다. 대면했을 때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을 온라인에서는 너무나 쉽게 회피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온라인상에서 오직 자신의 관심사만 선별해서 ‘구독’하고,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모여 커뮤니티를 생성한다.

돌봄의 재정의(再定義), 난잡한 돌봄의 시대로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인 멸종반란에는 ‘돌봄팀’이 있다. 이 이야기를 하면 가장 많이 돌아오는 이야기는 “나도 좀 돌봐줘”이다. 농담이지만 돌봄이 일방적이라는 편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멸종반란에서의 ‘돌봄’은 상호작용하는 개념이다. 서로 연결되며 함께 따뜻해지고 일어서 버티게 하는 어떤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강화시키는 방법을 고민하는 곳이 멸종반란의 ‘돌봄팀’이다.

육아나 간병은 언뜻 일방적인 돌봄으로 보이지만, 마음과 마음이 만나 공명하는 순간에서 우리는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따뜻함과 설렘을 경험하게 된다. 반려동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돌봄은 절대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공생이다.

『돌봄선언: 상호의존의 정치학』(더 케어 컬렉티브 저, 2021)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지구적 차원의 난잡한 돌봄’을 제안한다. 돌봄에 대한 상상력을 친족을 넘어 공동체로, 국가를 넘어 지구의 가장 낯설고 먼 곳까지 확장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전지구적 난잡한 돌봄이 피어날 때 공동체의 위기도, 기후위기도, 존엄한 삶에 대한 위기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동물권, 기후정의 활동가.
지구공동체의 안녕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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