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가까이] ⑨ 소비를 줄이면 욕망도 줄어들까?

[지금 여기 가까이] 시리즈는 단행본 『저성장 시대의 행복사회』(삼인, 2017)의 내용을 나누어 연재하고 있다. ‘저성장을 넘어 탈성장을 바라보는 시대에,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지금, 여기, 가까이’에서 찾고자 하는 이야기다.

제로소비의 삶, 충만한 욕망

지난주에는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습기와 더위는 참기 어려웠지만, 이 책을 쓰는 것은 마치 발효된 빵을 만드는 과정처럼 기다려지고 설레기만 하는군요. 발효는 굼뜨고 천천히 진행되지만 그렇게 얻은 빵은 맛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봅니다.

저는 오늘 소비 없이도 욕망이 충만해질 수 있는 비결이나 노하우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버는 재미만큼 쓰는 재미도 쏠쏠하다는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인데, 웬 소비 없는 삶이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소비는 멈추는 것, 고정되는 것, 기득권의 영역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우리의 삶과 욕망, 정동은 흐르는 것, 순환하는 것, 도주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의 삶에서 소비 없는 삶, 멈추지 않고 도주하는 삶이 시작되었던 이유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볼까 합니다.

“단돈, 1만 9990원!” 텔레비전 홈쇼핑에서 거듭 가격을 말하자 저는 아이처럼 들떠서 주방에 있던 아내를 불렀습니다. 꼭 필요한 물건이 이렇게 저렴하게 사은품까지 곁들여서 홈쇼핑에서 판다고 말이지요. 아내는 뭔가 안다는 듯이 웃으면서 “저걸 꼭 사야 할지, 내일 얘기해보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저는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일상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몇 주 후 다시 그 홈쇼핑 광고를 보니까 사실 살 필요까지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제가 앞서 얘기했듯이 제로용돈의 삶을 살다보니, 제로소비의 삶도 같이 찾아왔습니다. 소비를 하려면 아내의 지갑을 열어야 하는 큰 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 물건이 나에게 꼭 필요하다는 어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몸에 좋지 않는 음료수를 사먹지 않게 되고, 제 3세계 민중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주류와 육류를 먹지 않게 되고, 집밥으로 삼시세끼를 채우다보니 밖에 나가 밥을 먹지 않게 되고, 살찌기 쉬운 인스턴트 음식이나 과자를 먹지 않게 되고, 결국 소비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유일한 낙은 간혹 홈쇼핑광고를 보게 되면 아내를 불러 꼭 사야 한다고 어필하고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늘 어김없이 아내 선에서 차단되어 버리지만요.

집이나 연구실에 필요한 물건들은 대부분 아내가 구입합니다. 자연스레 물건을 사는 소비행위와 동떨어지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저에게 다른 영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관심을 갖게 된 부분은 저의 욕망과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의 차이가 만드는 미묘한 영역이었지요. 서로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 욕망들이 배가되는 것이 기쁨의 정동을 유발한다고 스피노자가 말했다지요. 소비-욕망이 아닌 ‘기쁨으로 이를 욕망’이 한때 제 삶의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비와 무관한 욕망들이 저의 삶을 강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 떠는 것, 은사님들께 안부메일을 보내는 것, 책에서 읽은 문구를 세미나 때 적용해 보고 사람들의 기쁨의 시선을 느끼는 것, 가까운 사람들의 색다른 면을 발견하는 것, 밥 때를 기다리며 아내에게 메뉴를 묻고 설레어 하는 것, 연구실 고양이들의 일상사를 관찰하는 것, 아내와 아침저녁으로 수다를 떨기 위해서 다음 번 화젯거리를 준비하는 것 등등 미세한 욕망들이 생성되었습니다. 이렇듯 소비가 없는 대신, 일상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스토리들이 재발견되었지요. 마치 아이들이 느끼는 시간이 어른들이 느끼는 시간과 다르듯이, 소비가 없는 삶은 다시 아이들처럼 미세한 시간의 감각을 되살려냈지요. 그 욕망은 시간이 갈수록 강렬해지기만 했습니다.

음악욕망과 유치뽕 노래 만들기

청년 시절 저는 민중가요를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그냥 노래가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학생회실에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또 불렀지요. 카세트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면 그저 감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따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단박에 들었던 시절이었지요. 또한 학생회에서 통키타 하나를 구입해서 열심히 통키타를 치면서 민중가요를 불렀습니다. 안치환, 노래공장, 노찾사, 양희은, 김광석 등등의 노래는 마치 저의 몸과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당시 학생회에서는 교정에 둘러앉아서 노래를 함께 부를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술만 마시면 사람들이 목청껏 자신의 노래를 뽐내고 듣는 사람들은 그들의 음율과 선율에 감동하고 또 흥이 나서 저절로 따라 부르기도 했지요. 사람이 좋았고, 노래가 좋았습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노래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 시절에는 그저 사람이 좋았고, 노래가 좋았다.
사진출처 : Jacek Dylag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에 돌아와보니 학생회실에 통키타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술자리에 참석해보니 민중가요를 부르던 전통도 사라졌습니다. 친구들과 술 마시다가 처음으로 노래방으로 향했습니다. 1시간 노래 부르는 데 만원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떼창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노래 부르고 다른 친구들은 친구의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다음 차례 자신이 부를 노래를 열심히 찾고 있는 것에 놀랐습니다. 저의 노래에 대한 욕망은 이제 소비로 유도되었습니다. 밤새 불러도 단 한 푼도 필요하지 않았던 노래가 이제 돈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민중가요조차도 노래방의 번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민중가요를 부르려는 저의 욕망은 소비로 귀결되었고, 그래서 저는 부르는 음악보다는 듣고 소비하는 음악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흔이 넘어 어떤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참여한 사람들과 함께 행사를 마치고 잠시 쉬다가 거실에 놓인 통키타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조심스레 물었죠. “이거 쳐도 되나요?” 그러자 공동체 사람들은 “쳐도 돼요. 늘 함께 치는 걸요”라고 대답했지요. 저는 포크송 몇 개를 불렀는데, 공동체 사람들도 함께 불렀습니다. 갑자기 학생회실에서 함께 부르던 민중가요의 감수성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음악은 소비하기 위한 것이나 단지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음반을 사거나 노래방에 가거나 하는 것보다 직접 노래를 만들어서 아내에게 들려주는 능력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CM송을 개사해서 부르는 식으로 다소 유치하고 단조로웠지만, 청년 시절 음악을 소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음악이 삶이었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한 작은 행동의 시작이었습니다. 키우는 고양이들마다 캐릭터를 살린 주제가가 생겼고, 아내에 대한 노래가 생겼고, 상황에 따른 노래들이 생겼고 스토리마다 노래가 생겼습니다. 저는 자칭 싱어송라이터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제 유치한 노래를 들을 때마다 웃어대지요. 하지만 저의 음악에 대한 욕망은 삶 속에서 진행형입니다.

욕망을 유죄화하던 기존 운동들

“자본주의가 성장하게 된 것에는 너의 욕망도 책임이 있다”라는 어떤 선생님의 세미나에서의 발언은 저를 경직되게 만들고 죄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향했습니다. 갑자기 젊은 사람들이 세미나에서 슬금슬금 사라졌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요. 욕망을 유죄화하는 방식은 80~90년대 생태주의자들에게 유행처럼 번졌던 화두였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욕망=자본주의적 욕망’이라는 등식을 통해서 작동했습니다. 저는 당시 굉장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욕망을 유죄화하고 위기의 원인을 개인책임으로 만드는 방식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욕망은 절제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당시 제가 “욕망, 욕망, 그래도 욕망”이라고 말하고 다녀서 후배들은 저를 욕망주의자라고도 불렀습니다.

저에게 욕망은 라이히박사가 말했던 바대로 신체로부터 기원한 생명에너지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저는 절대 계몽적이고 금욕적인 생태주의자는 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요.

2007년도부터 공동체 활동을 시작하면서 저의 생각은 확고해졌습니다. 공동체에서 성소수자들이 함께 활동하면서, 욕망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게 했던 1세대 생태주의자들의 방식이 낡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공동체에도 낡은 1세대 생태주의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공동체 일원은 술자리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말인즉슨 “자연의 섭리에 따르면 성소수자가 있을 수 없고, 생태주의자가 피해야 할 욕망에 따르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지요. 바로 옆에서 활동하는 동료활동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듣고 저는 1세대 생태주의자들의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지요. 그들의 구도는 마치 우리 몸의 털이 그대로 놔두어도 저절로 자라듯이 생태문제도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자연주의와, 모든 욕망을 금기시하는 금욕주의로 요약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굉장히 낡은 것이라는 점은 생태운동, 생명운동, 녹색당운동이 발전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욕망과 소비, 자본주의의 딜레마

욕망은 도처에서 생성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욕망, 춤추고 싶은 욕망, 시를 짓고 싶은 욕망, 성-욕망,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욕망 등 무수한 욕망이 도처에서 발생합니다. 물론 그 욕망 중에는 자본주의가 추동한 욕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욕망은 필요와 욕구(need), 혹은 요구(demand)와 달리, 어느 하나에 고정되기보다 변덕이 심합니다. 자본주의는 무수한 욕망을 생산하면서도 변덕이 많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욕망을 소비로 집중시켜야 한다는 숙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광고이미지나 영상 등을 통해서 소비와 향유로 향하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의 놀이처럼 변덕스럽게 이행하고 횡단하는 욕망의 움직임을,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심리치료사 가타리는 분자적인 것(molecular)이라고 말한다.
사진출처 : Vitolda Klein

욕망이 변덕이 많은 이유가 뭘까요? 아무래도 욕망이 아이나 생명과 닮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10년 전 조카들과 놀았던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미취학 아동이던 조카들이 워낙 에너자이저들이고, 놀이를 시작하면 변덕스럽게도 시시때때로 놀이의 규칙이며 형태를 바꾸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서 저는 완전히 땀에 절은 양말과 같이 녹초가 되곤 했답니다. 저의 마지막 카드는 미장원놀이를 하자며 아이들에게 머리를 맡기고 잠에 드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한 번은 실제로 머리를 깎아 놓아서 한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렇듯 욕망이 보여주는 변덕은 아이들의 변덕스러운 놀이에도 나타납니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심리치료사 가타리는 변덕스럽게 이행하고 횡단하는 욕망의 움직임을 분자적인 것(molecular)이라고 말합니다. 분자적인 것은 여러 모델을 이행하고 횡단하고 변이되는 움직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조카들이 중학생이 되자, 조카와의 놀이는 다른 형태가 되었습니다. 당시 조카들은 삼촌이 알려준 놀이를 규칙이나 형태를 바꾸지 않고 계속 몇 시간 동안이나 몰두하고 집중했습니다. 특히 컴퓨터 게임을 하면 굉장히 집중하고 빨려 들듯이 수렴되었지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하나의 놀이에 집중하고 수렴되는 움직임을 몰(mole)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자적인 것이 재미와 놀이 모델이라고 한다면, 몰적인 것은 의미와 일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이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반면, 일과 의미 있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니까요.

문제는 자본주의가 분자적인 욕망을 몰적인 소비행위로 만들어야 한다는 모순된 상황에 봉착한다는 것이지요. 이를 테면 당신은 음악을 좋아한다면 자본주의는 음반을 사라고 권유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음반을 사지 않고 가수가 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자본주의는 가수 만드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권유하겠지요. 이번에는 당신이 다시 인디음악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요? 다시 자본주의는 인디음악 경연대회 등을 추천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욕망이 도망가고 변덕을 부리면 자본은 소비로 집중하도록 따라가서 포획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욕망과 소비는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쫓고 쫓기는 상황, 도주와 포획의 상황으로 나타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도주선에 주목합니다. 몰적인 것 다시 말해 소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매끄럽게 그리고 끊임없이 도주하는 분자적인 욕망에 주목했지요. 다소 얘기가 복잡해졌네요. 이럴 때는 단번에 이해가 가도록 쉽게 설명할 순 없나 하며 고민이 되곤 합니다.

우리 모두는 도주자

소비를 줄였는데 욕망은 충만해진 경험을 해 보셨나요? 저는 2007년도 피자매연대라는 단체를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안생리대를 만드는 활동가들과 대화를 나누었지요. 그 활동가는 대안생리대의 역사와 가치, 전망에 대해서 한 시간 반 동안이나 저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남의 얘기를 잘 듣지 않았던 제가 귀 기울여 듣고 있었던 이유는, 당시 동거하던 제 아내에게 대안생리대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저것 듣고 물어보고 생각하면서 대안생리대를 한 묶음 샀습니다. 당시 아내는 제가 여러 가지 주워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대안생리대를 내밀자 환히 웃으면서 받아들었지요.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데, 그때 이후로 제 아내는 일회용 생리대 소비를 전혀 하지 않고 대안생리대만 쓰게 되었습니다. 상품소비를 줄였는데, 스토리와 가치가 있는 선물이 생겼고, 건강에도 좋으니 일거다득인 셈이지요.

또 우연한 가회에 당시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이 만든 천 제품을 사게 됩니다. 참고로 그때는 제가 용돈을 두둑이 받던 시기였습니다. ‘케피예(Keffiyeh)’라고 불리는 이 천은 중동지역 남성들이 머리에 쓰는 용도로 만들어진 커다란 스카프 비슷한 물건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디자인이 취향에 맞지 않고 실용성이 없는 것 같아 장롱 속에 묵혀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몇 년 후 여름에 우연찮게 먼지를 털어 그걸 덥고 자는데, 그렇게 시원하고 편안한 여름용 담요는 처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이 얘기했던 여러 가지 얘기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입니다. 미사일 폭격과 아이들의 죽음, 끝나지 않는 전쟁, 평화의 요원함 속에서 평화를 꿈꾸며 아이들과 여성들이 짰던 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는데, 여름에 누워서 시원하게 잘 때마다 그런 이야기들이 잠깐씩 떠올랐습니다. 이런 경우는 욕망의 도주선이 소비를 만들어냈던 사례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소비 없는 욕망의 영역도 분명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유행이 되고 있는 미니멀리즘 역시도 소비 없이도 충만하고 풍부하게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모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소비를 하더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스토리가 있고, 대안적인 소비만을 채택한다면 그때는 말이 달라집니다. 욕망은 도주하면서 여러 가지 스토리를 만들어냅니다. 펠릭스 가타리는 “도주하는 자의 표현양식에 주목하자!”라고 했다지요. 욕망의 도주선은 생산적이고, 풍부하고 충만한 삶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원하던 분자적 욕망을 몰적인 소비로 환원하려는 책략을 넘어서 욕망은 생명과 자연, 우주를 향한 도주선을 만들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를 줄이면 욕망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욕망이 충만하고 다양하고 풍부해질 수 있는 셈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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