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내리던 날 뿔논병아리의 탱고

봄비 내리던 날 뿔논병아리 두 마리는 다른 개체보다 다소 늦게 사랑을 시작했다. 뿔논병아리의 구애의 춤을 일명 ‘탱고’라 한다. 이날 두 뿔논병아리가 보여준 탱고는 유독 느리고 슬프고 지혜롭게 느껴졌다.

번식기의 뿔논병아리를 보러 간 호숫가에는 차가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뿔논병아리는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가 늦은 걸까, 한편으론 못 볼 수 있겠다 여기고 기다렸다.

마침내 뿔논병아리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는 오른편에서 유유히 등장했다. 조금 후 왼편에서 다른 한 마리가 물길을 따라 흐르듯 왔다. 오른편에서 온 뿔논병아리는 잠수를 하더니 수초 하나를 물고 올라왔다. 그리곤 신중히 왼편에서 온 이에게 다가갔다. 오른편에서 온 개체는 수컷이었고 구애의 시작이었다.

암컷은 이리저리 거리를 두며 수컷을 살피는 듯했다. 수컷은 조용히 암컷 주위를 맴돌았다.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들은 돌연 마주 서더니 네 갈래 깃을 세우고 서로를 응시했다. 수컷은 먼저 고개를 위로 뻗어 머리를 흔드는 행위를 보였다. 뒤이어 암컷도 같은 행위를 하며 응답했다. 둘은 나름의 절도 있는 방식으로 고개를 돌리고 뒤로 구부리기도 하며 춤을 추었다.

이대로 분위기가 고조되어 듣기만 했던 배치기1 행위를 보는 걸까 했는데, 이내 암컷은 고민이 들었는지 휙 돌아서 버렸다. 수컷은 잠시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같은 방법을 거듭하며 성실히 구애 표현을 이어갔다.

수컷은 수초를 물어와 함께 춤출 것을 청하고 암컷은 춤을 추다 떠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호수에 뿔논병아리는 둘 뿐이었다. 그들은 다른 개체보다 열흘 정도 늦게 상대를 만나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불타는 사랑의 모습은 아니었다. 수면 위로 올라 배치기를 하고 춤을 추는, 격정적 동작보다는 유속에 몸을 맡기는 은은한 구애를 보였다.

암컷은 청혼을 받아들였다. 둘은 낮은 수풀로 들어갔고 암컷은 납작하게 엎드려 수컷이 자신의 몸 위로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이번엔 수컷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수컷은 암컷에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수풀 사이를 빠져나와 버렸다. 수컷의 방황은 생각보다 길었다. 암컷은 기다리다 못해 수컷을 따라 나왔고 둘은 몇 차례 다시 춤을 추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컷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도로 가만히 떠내려갈 것처럼 수면에 떠 있었다.

암컷은 실망한 내색 없이 주위를 돌며 기다렸다. 둘이 수풀 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을 나누기까지,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달래며 반나절을 보냈다. 조류의 세계에서도 사랑의 표현은 애타고 침착한 것이었다. 그들은 절정을 놓친 늦깎이 사랑 같았고 적극적으로 다가서기엔 어려움이 많은 것 같았다.

추적추적 비 내리던 그 날의 두 뿔논병아리를 떠올리면 한동안은 마음이 서늘해지곤 했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겁이 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들도 다른 개체보다 시기가 늦어지며 고민할 것이 많았던 걸까. 그럼에도 서둘지 않고 기다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침착함에서 얻는 지혜가 있는 것 같다.

뿔논병아리 구애의 춤을 일명 ‘탱고’라 한다. 탱고를 배우는 날이 온다면 화끈한 탱고의 춤보다 뿔논병아리들의 ‘늦깎이 사랑 탱고’를 배우고 싶다. 그러면 나도 차분히, 늦는다는 조바심 없이 사랑을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1. 뿔논병아리의 짝짓기 절정 행위 중 하나. 서로에게 달려가 수면을 박차고 일어서 서로의 배를 튕기는 행위를 일컫는다.

한승욱

회화를 중심으로 글쓰기, 사진, 영상, 도자, 등을 다루며 창작하고 있습니다. 예술강사 활동을 했고 동료 예술가들과 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종종 환경 활동을 하고, 탐조를 즐깁니다. 녹색서울시민위원회 간사로 일하며 창작과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댓글 8

  1. 한 편의 아름다운 멜로 영화인듯
    뿔논병아리의 러브스토리가 잔잔하게 울림을 주네요
    감동입니다

  2. 한 편의 아름다운 멜로 영화인듯
    뿔논병아리의 러브스토리가 잔잔하게 울림을 주네요
    감동입니다

  3. 서로를 이해하고 달래며…
    뿔논병아리의 사랑이 존엄하게 느껴져요.
    덕분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 하나를 또 만났네요.

  4. 뿔논병아리의 탱고를 너무나 문학적으로 표현을 잘 해주셨네요… 작가님의 글을 읽는 모두가 삶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때로는 서로를 기다릴 줄 아는 탱고를 추시기를 바라 봅니다~

  5. 글이 무척 따뜻합니다. 비 내리는 날 뿔논병아리의 탱고를 떠올리니 마음이 퍽 편안해지는군요

  6. 발레 공연을 보는 듯 눈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뿔논병아리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글이 한 편의 산문시 같아서 애잔하고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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