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엔의 힐데가르트와 푸르름의 영성

독일의 첫 여성학자인 빙엔의 힐데가르트 수녀는 생태 영성과 대안의학, 사회정의에 대한 예언적이고 성평등적인 통찰을 통해, 오늘날 잃어가는 어머니 땅의 온전한 촉촉함과 충만한 푸르름을 되찾을 방법을 알려준다.

예수를 충실히 따르고 가난한 이들을 벗 삼은 가톨릭교회의 ‘생태학의 주보성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1181/2-1226)보다 더 먼저, 지구를 푸르고 풍요롭게 하는 초록 생명력의 역동적 흐름과 만물의 상호연관성을 전해준 여성이 있습니다. 독일 빙엔의 베네딕도수도회 수녀인 힐데가르트(1098-1179)입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베네딕토 16세 교종이 10여 년 전인 2012년 5월 10일에 빙엔의 힐데가르트를 가톨릭교회의 ‘성녀’로 선포하고, 같은 해 10월 7일 제13차 세계주교시노드 개막 미사 때 ‘교회 박사’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오늘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전합니다. 힐데가르트 성녀가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생명의 고리와 연결망을 직관적이고 과학적으로 파악하고, 이 진실을 남성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 밝힌 선각자요 예언자라고 말이지요.

힐데가르트의 생애

영적 경험을 한 힐데가르트 의 일화를 그린 작자미상의 그림.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영적 경험을 한 힐데가르트의 일화를 그린 작자미상의 그림.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독일 라인강 유역의 신비가요 ‘창조 영성의 어머니’로 일컬어지는 힐데가르트는 1098년 라인 헤센 지방 베르머스하임의 귀족 집안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세 살 때부터 특별한 ‘환시’를 보기 시작하고, 여덟 살 때 과부 우다(Uda)에게 교육과 양성을 받으며 봉헌된 삶을 살다가, 열다섯 살에 베네딕도회 수녀인 유타(Jutta)에게 맡겨져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당시 소녀들은 수녀원에서만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었기에, 힐데가르트도 유타 수녀에게 성서 읽기와 시편 기도와 성가를 배웠습니다. 교재가 터무니없이 부족했기에 온종일 성서와 시편을 암기하여 ‘입에 달고’ 살면서, 음을 붙여서 시편을 노래하고 성악극을 만들어 수녀원에서 동료 수녀들과 공연을 펼치기도 했답니다.

스승이던 유타 수녀가 죽은 해에 힐데가르트는 38세 나이로 급성장한 수도회의 장상이 되었습니다. 50세에는 빙엔의 루퍼스 산 위에 독일의 첫 여성수도회를 설립하고, 67세에는 수도원 지부를 아이빙엔에 세웠지요. 이처럼 대외적이고 행정적인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힐데가르트는 끊임없이 기도와 명상에 몰두했고, 43세 무렵부터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의 환시를 고백하고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그녀는 자연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합니다. 자기 영역을 지키고 새끼들을 낳아 키우는 동물의 세계를 분석한 후, 미루어 인간의 성과 생명을 바라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 선함이 깃들어 있고, 우주~자연 만물~인간은 서로 긴밀히 이어져 있으며, 인간의 몸과 영혼 역시 뗄 수 없이 결합해 있다고 강조합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는 43세에 “네가 보는 것을 글로 적고, 네가 듣는 것을 말하라!”는 극적인 부르심에 응답한 뒤 3권의 신학저술, 77편의 시와 노래, 36점의 그림, 보석치료와 자연치료 의학서들, 정치인과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 300여 통을 남겼습니다. 한동안 잊혔던 그녀는 수녀이자 예술가, 상담가, 언어학자, 자연학자, 철학자, 의사, 약초학자, 시인, 운동가, 예언자로 우리 곁에 와있습니다.

12세기 유럽과 교회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살았던 12세기 유럽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변화가 일었습니다. 교회와 사회는 날카롭게 대립하며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황제들과 교황이 권력을 다투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섰지요. 교회가 세속 권력과 돈에 종속되는 것에 반대하여 수도원과 평신도들이 교회 개혁운동을 일으켰고, 1-2차 십자군 전쟁이 터졌습니다.

먼저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서, 오랜 세월 교회와 제국들은 경쟁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우위에 서려고 권력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와중에 성직자들이 권력가의 심복 노릇을 하거나 성직을 매매하는 등, 비리와 부정이 난무했고요. 다른 편에서는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다스림을 받는 치외법권적 위상을 확보하고, 교회가 직접 통치하는 영토와 백성을 소유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힐데가르트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095년에는 십자군 운동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1071년 터키인들의 예루살렘 정복 후, 이곳을 성지 순례하던 유럽인들이 방해를 받고 어려움에 처한다는 소식이 유럽에 퍼졌습니다. 아울러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이슬람의 공격을 받고 유럽 쪽에 도움을 요청했지요. 이에 우르바노 2세 로마 교종이 교회지도자회의를 소집하고 팔레스티나 성지를 이교도들에게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이로써 유럽 전역에서 십자군이라는 큰 종교적 집단운동이 시작됩니다.

힐데가르트는 지구 어머니가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도 양육한다는 생태적 직관에 따라 지구의 풍요로움에 매료된다. 
사진출처 : sergio souza
힐데가르트는 지구 어머니가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도 양육한다는 생태적 직관에 따라 지구의 풍요로움에 매료된다.
사진출처 : sergio souza

1096~1099년의 1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유럽이 일단 승리하여 예루살렘 인근에 그리스도교 왕국들을 건설했지만, 그들이 귀국하자 이슬람의 새 지도자가 성지를 탈환했지요. 이에 2차 십자군 전쟁이 1147~1149년에 벌어졌지만 처절하게 패배한 데다가, 이 십자군들이 독일 중부의 유대인 8천 명을 죽이고 예루살렘에서 7만 명을 무차별 학살하는 비극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연유로 힐데가르트가 살던 시대의 교회 안팎에는 부패와 폭력이 난무했고,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교회를 불신했습니다. 혼란과 대립 속에서 기근으로 굶주리던 많은 이들은 천년왕국을 꿈꾸며, 현세를 멀리하고 철저한 금욕과 고난을 강조하는 종교운동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자 교회는 이들을 관용으로 대우하지 않고, 엄격한 종교재판에 붙여 이단으로 단죄하고 극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수도자들 중심으로 쇄신과 개혁이 힘차게 일었고, 교회 행정과 영성과 전례를 재정비하면서 고딕 교회 건축과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 새로운 예술이 꽃을 피웠지만, 교회와 세속 권력의 유착이 너무도 뿌리가 깊었기에, 쉽게 정화되거나 쇄신되지 못했지요. 이런 시대에 힐데가르트가 예언자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힐데가르트의 생태 영성

어린이-농노-일용노동자로 구성된 십자군들이 이슬람 문화와 접촉하면서, 유럽에서는 ‘종교 = 세계’라는 폐쇄적 세계관이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유럽에 전파되고 대학들이 설립되자, 수도원학교와 주교좌성당 운영학교들이 위축되고 성서 주해에 치중하던 학문연구에서 벗어납니다. 많은 이가 활발한 지적 교류로 폭넓은 학문을 접하고, 신비주의 영성이 활발히 퍼졌으며, 대규모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1) 이원론에서 벗어나 우주를 바라보다

당시 교회는 ‘타락과 구원’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이 학문적 주류였고 지금도 여전하지만, 힐데가르트는 이 틀에서 벗어나 ‘창조 중심’ 신학에 눈을 돌립니다. 그리고 ‘원죄와 지옥’이 아니라, 창조주가 주신 오감을 통해 그분의 선한 뜻이 깃든 우주를 바라보라고 조언합니다. 모든 창조물과 인간의 관계를 여성 고유의 경험과 상상과 창조 영성을 통해 통찰하고, 지상-천상, 영혼-육체, 남성-여성, 이성-자연을 가르는 차별적 이원론을 보완하려 하였지요. 이런 통찰은 당대 신학과 사상이 보지 못한 차원과 지평입니다.

2) 비리디타스 영성: 창조주의 초록 생명력에 눈뜨다

특별히 힐데가르트는 지구 어머니가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도 양육한다는 생태적 직관에 따라 지구의 풍요로움에 매료됩니다. 지구를 푸르게 하는 초록 생명력을 비리디타스(Viriditas)로 표현하고, 이 생명력이 만물의 중심에서 만물을 움직이고 생동하게 한다고 강조합니다. 비리디타스는 모든 유기체의 기본 구조와 창조물의 내적 자기 치유력을 의미하고, 하느님이 만드시고 하느님한테서 오는 힘, 생명을 낳고 키우고 열매 맺게 하는 온갖 힘을 가리킵니다. 힐데가르트는 사랑으로 감싸인 생명의 초록 창조력을 통하여 하느님이 세상을 초록빛으로 물들이셨다고 말합니다.

3) 인간 몸-영혼의 일치를 긍정하다

12-13세기 중세 수도회의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금욕생활 배후에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의 신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와 여성을 천시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몸으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인간의 원죄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가르침 때문에 수도원은 인간 몸을 영혼의 감옥으로 낙인찍고, 엄격한 고행과 편태를 통해 자기 성화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인간 몸을 긍정합니다.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하느님 창조에 맞는 삶이라 믿었고, 인간이 되신 분이 자기 몸을 사랑하셨으니, 우리 인간도 자기 몸을 사랑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몸을 긍정하도록 도와주는 절대적 근거이며, ‘최후심판 때 육신이 부활한다’는 복음 말씀 역시 몸을 긍정하는 토대라고 말합니다. “영혼은 육체를 통해 선하고 거룩한 일을 성취한다.” “이 땅이 공기 속에 있듯이, 벌집이 꿀 속에 있듯이, 영혼은 몸속에 있다.” “우리 몸은 영혼 없이는 빈껍데기이며, 영혼은 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1

4) 예술-과학-종교의 통합을 추구하다

힐데가르트는 예술-과학-종교의 삼위일체를 지향하였습니다. 자연과 사랑에 빠지고 창조를 통한 신성의 현현에 매료된 그녀는 당시 최고 학자들의 지식을 모아 백과사전을 만들고(이전에는 어떤 백과사전도 없었음) 과학적으로 우주 형태 및 구성요소를 탐구하여 기도와 영성과 예술에 통합시켰습니다. 특히 인간은 하느님의 악기이고 성령의 음악은 우리를 통해 연주된다고 확신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 표현하였지요.

힐데가르트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아름다움과 내적인 신성을 우리도 느끼고 맛보며 찬미하도록 초대하면서, 자기 문제에만 파고들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우주 안에 있고 우주는 우리 안에 있다는 소우주-대우주의 영성 심리학을 제시합니다. 특별히 힌두교의 우파니샤드 사상과 만다라 미술치료를 접목하여 영혼과 우주를 체험할 때,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시대보다 1000년도 더 먼저 살았던 힐데가르트 성녀가 직관하고 제안하는 생태 사상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높고도 넓고도 깊고도 풍성합니다. 이제 힐데가르트의 겸손한 기도로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올 하느님,
들판에 온갖 빛깔로 장미와 백합을 심으셨듯이
제 가슴에도 온갖 덕의 꽃을 심어주소서.
그 꽃에 거룩하신 당신 영의 물을 뿌려주소서.
어쩌다 가시덤불이나 독초가 돋아나거든 뿌리 뽑아주소서.
제 가슴에 심으신 온갖 덕의 꽃을 더 어여쁘게 하시려
가지를 치거나 잘라버리신대도 좋습니다.
마침내 꽃씨들이 다른 영혼들에 날아가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아름다움을 나누게 하소서.”


  1. 이 세 인용문은 모두 힐데가르트의 신학 저술 『세계와 인간』, 156, 176, 220쪽에서 인용

유정원

생태신학을 계속 공부하면서도 생태실천의 어려움을 통감하고 있는, 머리의 지식이 손과 발로 온전히 내려오지 못한 미숙한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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