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의 예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죄책감에서의 해방을 제공하는 것은 “싸구려 은총”, 죄로부터의 해방을 선사하는 것은 “값진 은총”이며 우리가 추구할 것은 “값진 은총”이라고 보았다. 임박한 기후 위기와 재앙 앞에서 ‘싸구려 은총’은 “그린 워시”에 해당한다. 성장의 욕망에 면책을 줌으로써 성장 담론과의 단절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사복사화의 설교”를 행한 예수는 탈성장 옹호자다. 성장 담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을 복 있는 자들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싸구려 은총(Billige Gnade), 값진 은총(Teure Gnade)

독일이 전 세계를 전쟁의 화마 속으로 밀어 넣었을 때, 자신의 조국 독일의 패망을 위해 기도했던 사람. 더 나아가 자신의 조국 독일의 패망을 앞당기기 위해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던 사람. 그러나 암살에 실패하여 체포된 후 39살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이 된 사람. 신학자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 속에 펼쳐지는 행과 불행의 역사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지 못했던 사람. 마치 칼날 위에 선 사람처럼 오롯이 깬 정신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징조를 읽고 시대의 죄악에 눌린 피조물의 탄식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자신의 책 『나를 따르라』에서 “‘싸구려 은총’은 교회의 철천지 원수이며 오늘 우리의 투쟁은 값진 은총을 얻기 위한 싸움”이라고 말했다.

본회퍼가 말하는 ‘싸구려 은총’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악을 담당하였으니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신의 삶을 무한정 즐겨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되어 교회 안에서 통용되고 있는 ‘은총의 개념’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이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은총인 것에 반하여 ‘싸구려 은총’은 ‘죄’를 의롭다고 선언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은총는 죄악 된 삶으로부터 돌아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용서, 즉 회개한 죄인에게 무한히 열려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말하는데, ‘싸구려 은총’은 자기의 죄를 뉘우치지도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는 사람에게 오직 그의 죄책감을 가려줄 덮개를 제공할 뿐이다.

이러한 ‘싸구려 은총’ 개념은 단지 그리스도인의 머릿속에서만 이해된 후 사라지는 덧없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개념은 그에 근거한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싸구려 은총’ 개념도 그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창조한다.

본회퍼는 회개 없이, 돌이킴 없이, 삶의 전환 없이 오직 사죄의 은총만을 원하는, 죄책감의 면책만을 바라는 ‘싸구려 은총’을 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차원에서의 배교이며 교회의 철천지원수라고 말한다. 
사진 출처: RODNAE Productions
본회퍼는 회개 없이, 돌이킴 없이, 삶의 전환 없이 오직 사죄의 은총만을 원하는, 죄책감의 면책만을 바라는 ‘싸구려 은총’을 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차원에서의 배교이며 교회의 철천지원수라고 말한다.
사진 출처: RODNAE Productions

‘싸구려 은총’ 개념이 창조하는 현실, 곧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만을 원하는 삶의 방식이다. 다시 말해 부활이란 이름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모든 가난과 비탄과 배척의 절정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현재와의 단절을 결행한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지 않고 오직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삶의 연장을 위한 방편으로서만 그리스도를 원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회개 없이, 돌이킴 없이, 삶의 전환 없이 오직 사죄의 은총만을 원하는, 죄책감의 면책만을 바라는 ‘싸구려 은총’을 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차원에서의 배교이며 교회의 철천지원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본회퍼는 ‘싸구려 은총’이 아닌 ‘값진 은총’을 추구하라고 촉구한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의 지속이 아닌 현재와의 단절이며 새로운 미래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본회퍼가 지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라는 것이다. 본회퍼가 따르라고 말하는 예수는 누구인가? 특별히 기후 위기, 기후재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는 누구인가?

사복사화 선언

예수의 설교 중 가장 유명한 텍스트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이다. 산 위에서 설교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팔복 선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선언과 비슷한 종류의 텍스트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평지설교’다. 평지에서 설교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는 ‘사복사화 선언’으로 알려졌는데, 복 있는 네 종류의 사람과 재앙을 받게 될 네 종류의 사람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3.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4.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5.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6.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7.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누가복음 6장 20~26)

평지설교, 곧 사복사화 설교에서 예수는 가난과 굶주림을 긍정한다. 절대적인 가난과 굶주림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결코, 긍정될 수 없다. 그러나 기후 위기와 재앙을 임박한 현실로 느낄 만큼 악화 된 현 상황에 대하여 지금 가난한 자들, 굶주리는 자들은 죄가 없다.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금 부유하고 배부른 이들은 지금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삶을 빚지고 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은 임박한 기후 위기와 재앙에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금 부유하고 배부른 자들의 삶을 지탱해 주며 덕을 끼치고 있으니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과 굶주림은 부유함과 배부름을 추구하는 세상에서는 슬픈 일이며 배척받을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슬픔과 배척받음을 긍정한다. 지금 부유한 자들이 스스로 자신이 곧 임박한 미래의 위기와 재앙을 예비하고 있는 자들임을 인식하고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게 될 때가 온다. 그리고 지금 배부른 자들이 자기의 부른 배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금식할 날이 온다.

그날이 오면 부유함과 배부름을 추구하던 자들은 어리석은 자로 판명될 것이며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는 자들은 지속 가능한 삶의 전형을 제공해 주는 사람, 슬픔과 배척의 대상이 아닌 누구나 따라야 할 지혜로운 사람으로 판명될 것이니 복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욕먹을 때 복이 있고 칭찬받을 때 재앙이 있다고 말한다. 옛날 예언자들의 운명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거부되고 거짓은 언제나 환영받는 것이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자들의 운명이었다고 말한다.

탈성장의 예수

본회퍼는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을 제공하여 죄악 된 현재를 고수하도록 하는 것은 ‘싸구려 은총’이라고, 죄로부터의 해방을 선사하여 죄악 된 현재와 단절하도록 하는 것이 ‘값진 은총’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생사를 건 교회의 싸움은 ‘싸구려 은총’을 버리고 ‘값진 은총’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걸어가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이라고 말한다.

현재와의 단절(십자가)을 통해서 지속 가능한 새로운 삶(부활)의 차원이 여는 것이 곧 본회퍼가 말하는 ‘값진 은총’이며 이는 곧 성장일변도로 설정된 현재의 욕망과 과감한 단절을 촉구하는 탈성장 담론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전하는 예수는 임박한 기후 위기와 재앙의 시대를 사는 오늘, ‘탈성장의 예수’라고 부를 만하다. 성장 담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가난하고 굶주리는 자들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장 담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추앙받는 부유하고 배부른 사람들이야말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김희룡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성문밖교회의 목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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