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기대고 살 수 있으면 그게 가족이지요

돌봄의 핵심은 관계이고, 제도는 그걸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 이를 두고 가족이라 명명할 것인가 아닌가는 별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건 이 변화하는 시대에 서로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서로를 돌보고 기대는 관계가 꼭 피를 나눠야 할 필요는 없다.

언제 들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아하’ 하면서 무릎을 쳤던 기억은 있다.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가 그랬단다.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고. 나는 왜 무릎을 쳤을까? 혹시 나도?

아내와 둘이 여행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연인이나 친구들끼리 여행 온 사람들이라는 것. 아이가 있거나 아이에 부모까지 3대가 섞여 있는 집단에서는 항상 큰소리가 나거나 왠지 무표정하다는 것.

연말을 맞아 집에 다녀왔다. 문득 부모님이랑 송년파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 생신 때나 찾아뵀지 지난 십수 년 동안 한번도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이다. 이제 여든인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런 호사를 몇 번이나 더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좋다고. 올라오는 길, 누나와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부모님 연세가 있으니 자연스레 돌봄 얘기도 나왔다. 누나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나는 그런 계획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얘길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떤 계획 같은 게 새어 나왔다. 역시 미우나 고우나 가족밖에 없는 건가? 근데 가족이 뭐지?

현실과 제도

가족을 논하기란 쉽지 않다. 어느 영화에서 ‘밥을 같이 먹으면 식구’라고 했지만 식구와 가족은 또 다르다. 이 쉽지 않은 주제를 법은 명료하게 정리한다. 건강가정기본법에서는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정의한다. 민법에서는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형제자매’로 규정한다. 한마디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길러야 가족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현실은 법과 크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2021년 여성가족부가 진행한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중 7명은 가족 형태와 구성원의 다양화를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2021년 여성가족부 주최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 1
2021년 여성가족부 주최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 1

가족 개념에 대한 구체적 인식 변화를 살펴보면 ‘법적 혼인・혈연관계’가 가족이라는 인식은 2019년 67.5%에서 2021년 51.1%로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같은 기간 ‘생계와 주거 공유 관계’도 가족이라는 인식은 67.3%에서 61.7%로 소폭 감소했으나, ‘정서적 유대를 가진 친밀한 관계’도 가족으로 보는 입장은 38.2%에서 45.3%로 증가했다. 새로운 가족 유형 중에서도 더 느슨한 형태까지 가족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늘어난 것이다.

2021년 여성가족부 주최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 2
2021년 여성가족부 주최 ‘가족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 2

‘전통적 가족’의 전형인 부부+자녀 가구와 1인 가구의 비율도 2019년을 기점으로 역전되어 그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인식은 물론 현실에서도 전통적 가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정부도 이런 변화를 감지했는지 새로운 제도를 꺼냈으나 그마저도 정권이 바뀌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2021년 4월 여성가족부는 ‘2025 세상모든가족함께’라는 이름의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1~2025)」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모든 가족,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는 사회’ 구현을 비전으로 삼고 있으며, ‘가족 다양성 인정’, ‘평등하게 돌보는 사회’를 목표로 내걸었다. 이를 위한 정책과제로 세상 모든 가족을 포용하는 사회기반 구축, 모든 가족의 안정적 생활여건 보장, 가족다양성에 대응하는 사회적 돌봄 체계 강화, 함께 일하고 돌보는 사회 환경 조성을 제시했다.

여전히 가족과 돌봄을 묶어서 생각하는 게 거슬렸지만 비전과 목표, 정책과제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고, 이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돌봄 체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없던 것이 되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생활동반자와 돌봄

서로를 돌보고 기대는 관계가 꼭 피를 나눠야 할 필요는 없다. 사진출처 : Pixabay
서로를 돌보고 기대는 관계가 꼭 피를 나눠야 할 필요는 없다.
사진출처 : Pixabay

의료사협에서 돌봄은 중요한 화두다. 돌봄은 흔히 아픈 어르신에게만 필요한 것처럼 오해되지만 사람이 살면서 생애주기별로 각기 다른 방식의 돌봄이 필요하다. 어쩌면 아프기 때문에 돌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아프지 않기 위해서 돌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의료사협에서는 돌봄의 핵심을 관계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건강리더’를 양성하여 지역 관계망을 촘촘하게 만든 후 이 리더들이 어르신들을 찾아간다. 어르신들은 사람이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는다. 관계를 맺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찾는다.

하여, 잘 돌본다는 건 관계를 잘 만들어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전통적 개념의 가족이 그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족에 대한 인식과 현실이 모두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 가족만을 고집하는 건 관계를 더 꼬이게 만든다.

이제 제도도 변화하는 사회를 반영하여 다양한 관계방식이 서로를 돌볼 수 있도록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다행히 최근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의외로 생활동반자법은 8년 전인 2014년에 입법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이 해체될 수 있다는 둥의 반대에 부딪혀 발의조차 되지 못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돌봄의 핵심은 관계이고 제도는 그걸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 이를 두고 가족이라 명명할 것인가 아닌가는 별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건 이 변화하는 시대에 서로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서로를 돌보고 기대는 관계가 꼭 피를 나눠야 할 필요는 없다.

김종필

의료사협을 중심으로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다. 한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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