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마주보기] ⑦ 나는 한 그루 나무입니다

새미(솔빈)는 숲정이의 딸이다. 숲정이는 새미의 엄마이다. 엄마는 딸이 살아가는 세상을 자연답게 가꾸기 위해 시민운동을 하였다. 정성스럽게 ‘선과 정의’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좌절과 허탈은 점점 커져만 갔다. 의지를 잃은 엄마가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들을 딸에게 이야기한다. 숲정이와 새미의 딸이자 언니인 백진솔(파랑새)은 2023년 6월 19일 부산 백산초 스쿨존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이후 함께 세상을 바라본다.

얼마나 슬픈 여행인지

숲정이는 슬픈 여행을 떠났단다. 새미의 슬픔도 어미는 가슴이 미어진다.

언제 어디서나 슬픔이야 삶에서 당연한 만남이지. 그러나, 폭력적인 슬픔과의 만남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이다. 8월 24일, 오늘. 일본은 핵 오염수 해양 투기를 시작했구나.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열린 입으로 누구에게 고함치며 하소연을 해야 할까? 자본이란 이렇게 잔인하단다. 생명의 씨앗까지 무참히 짓밟는 자본의 본성이 끔찍하구나. 인간의 욕심과 무지는 생존의 길을 가로 막는구나. 만족스러운 욕심이 살아가는 즐거움이란 것을 알고 있다. 욕심이 타인을 향할 때, 폭력이 된단다. 세상을 향하면 폭정이 된단다. 욕심끼리의 갈등은 생명 사이 틈을 키우고 조화를 깬단다. 사랑을 잃어버리지.

후쿠시마 핵 오염수 투기는 지구별 탄생 이후 최악의 욕심 아닐까? 최고의 폭정 아닐까? 인간의 역사를 끝내자는 거지. 생명을 말살시키는 인간의 오만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가 일본의 결정에 힘이 되었다니, 엄마의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사표내고 싶다. 주어지는 고통을 감당하고 견디며 나의 자리를 간당간당 지키는 것이 엄마의 흔들릴 수 없는 사회적 자아이다. 하지만 엄마의 가치를 ‘아이고, 의미 없다.’ 부정하게 하는구나. 세상은 참 암울하다.

파랑새 언니의 교통사고 역시, 엄마에게는 인류 최대 충격이구나. 15살부터 파랑새의 꿈은 사서선생님이었지. 얼마나 성실하고 꾸준히 노력해 꿈을 이루었니? 퇴근길, 다녔던 학교 스쿨존에서 꺼져 있는 신호등, 횡단보도 가운데에서 트럭에 받쳐 비탈진 길 아래로 넘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친 파랑새. 차가운 생명에서 간신히 우리에게, 우리에게 온기로 다가왔지만… 왜, 스쿨존에서 생명은 안전하지 못할까? 왜, 신호등은 꺼져 있었을까? 왜, 횡단보도를 건너는 언니에게 트럭은 돌진 했을까? 왜, 언니는? 서이초 선생님 일기장을 보고 세상은 분노하고 있지. 엄마도 분노스럽다. 왜? 생명이 생명을 강압하고 결국 스스로 생명을 버리게 만들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누가 무엇을 무기로 사용했을까? 파랑새 사서 선생님의 일기장에 쏟아놓은 교육 현장에서 고통들은 또 무엇일까? 생명에겐 우열이 없다. 여남이 평등하고, 성적 선호는 개별 선택일 뿐이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평등하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사물의 가치는 생명과 비교 될 수가 없어. 달리는 차나 핵발전소는 단순한 사물일 뿐이다. 차들과 핵발전소가 생명을 공격하다니 어떻게 세상을 희망할 수 있겠니? 사물 스스로 생명을 공격할 수 있니? 더러운 자본에 휘둘리는 세상이 한탄스럽다.

6월 19일 언니, 파랑새 사서선생님 교통사고 이후. 제주도민으로서 숲정이의 삶이 강제적으로 끝났단다. 너와 아빠는 휴직을 할 수 밖에 없었지. 삶의 의미를 모르겠구나. 하지만 엄마, 아빠에게는 명랑쾌활 해야 할 새미의 내일이 있고, 파랑새가 선택한 생명의 길이 있잖아. 처음 언니가 엄마에게 왔을 때도 무척 아름다웠고 자라면서도 무척 아름다웠고, 지금도 무척 아름답단다. 아름다운 파랑새와 엄마는 변함없이 살아보련다. 강정평화대행진이 4년 만에 다시 진행된다 하니, 우애로운 제주 동무들과 마음도 나누고 다니던 병원 진료도 할 겸 바다가 핵오염수로 ’으악‘ 소리를 지르는 8월 24일. 섬으로 여행을 갔단다.

섬에서 바라보는 섬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범섬을 만났지. ‘범섬아, 아프다!’ 위로를 구해보았단다. 범섬은 여전히 해솔을 액자처럼 두르고 물 건너 듬직하게 앉아 있더구나. 범섬이 앉아 있는 법환 바다는 법환 해녀학교를 졸업한 새미에게 특별한 바당이지. 새미의 부탁대로 법환 바당에게 너의 안부을 전했다. “바다야, 품 넓은 바다야. 바당아, 미안하다. 이미 네가 견디고 있는 고통이 어마무시한데, 더하여 품 안 생명들을 잃어 가야 하는구나. 네 스스로 곪아서 터지겠구나. 네게 용서를 구할 수가 없구나. 바다야, 너라도 살아남아야 되지 않겠니? 네가 살아야 생명이 희망이지 않겠니? 세차게 분노하여 거세게 인간들을 쳐다오. 매우 거칠게 쳐다오. 네가 받은 고통 딱 그만큼 공평하게 인간에게 돌려다오.”

강정마을. 사진제공 : 솔빈

강정이다. 강정은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강정에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된단다. 평화를 구하는 마음이야 숲정이에게는 몇십 년 묵은 김치이지만 강정만한 맛집이 어디 있겠니? 평화의 숙성을 위해 올해 봄부터는 수요일마다 강정을 다니기로 했거든. 역시, 미래는 예측불허라 결심을 실천할 기회를 잃었구나. 엄마는 신의 존재를 글쎄? 믿지는 않는 것 같다. 신을 확신하기에는 신님이 게으르신 것 같아. 그래도 강정 천막 미사에 앉아 있으면 괜히 마음이 편하다. 천막이라는 공간이 주는 위안. 강정이라는 울타리. 뭐 이런 것들이 미사라는 제사를 더 숭고하게 하는 것 같더라. 어느 때와 똑같이 생명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구럼비의 안녕을 기원했단다. 우리의 파랑새, 너희 언니도 생명이니까 처음 주신 생명 그대로 엄마에게 돌려 달라고 큰소리 쳤다. 당신만큼 흠 없이 맑은 아이 아니냐며 따져 물었단다. 하느님이랑 절교하고 싶다. 숲정이가 고통이 부족해서 덤으로 고통을 끼얹어 주는 걸까? 숲정이는 꾸준히 노력하며 견디어 왔단다. 새미야, 너는 숲정이 편이지? 해군기지 앞으로 씩씩하게 나아가는 인간띠잇기는 강정 생명 평화 대행진 관계로 없더구나. 할망물 식당은 새단장으로 공사 진행이 한창이더구나. 그래도 춤꾼 테라랑 의협심이 강한 앙드랑, 이상한 이상씨를 만나서 눈빛으로 충분한 안녕을 얻었단다.

비자림로다. 나무 베어져 슬픈 자리, 비자림로를 갔단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니? 생명은 평등하단다. 피었다 지는 자연의 순서를 거역 할 수가 없지. 사람도 결국 자연이잖아. 끝없는 욕망은 도로를 넓히고, 차를 빠르게 달리게 하기 위해 숲을 파괴 하였단다. 숲에 깃들은 생명들을 죽였단다. 얼마나 천박하고 부끄러운 사람 생명이니? 새미가 심었던 나무들도 죽임당하고 엄마가 씨앗부터 키워 심은 나무도 죽임 당하였더구나. 휑한 공간 위로 여전히 슬픈 나무의 눈이 꺼이꺼이 울고 있는 것 같더구나. 가득한 슬픔들을 둘러보다 놀라운 모습을 보았단다. 생태 도로 복원은 숲을 박살내며 내밀었던 행정의 달콤한 유혹이었단다. 비자림로 숲을 죽이고 다시 심었던 나무들의 죽음을 보고야 말았단다. 아, 아, 아.

비자림로. 사진제공 : 솔빈

너희들이 죽였다. 죽이고 또 죽였다. 이 살생자들아. 자본아. 개발아. 권력아. 이 잘난 잡것들아! 너희들이 또 죽였다. 너희들이 비자림로 숲을 죽이고 야심만만하게 생태도로로 복원하겠다. 탕탕 고함치더니, 너희들이 자본으로 심은 팽나무 64번, 88번, 73번, 81번, 51번, 58번, 68번, 산뽕나무 76번, 160번1 외 다수 생명들을 또 죽였다. 생명을 죽이는 이 더러운 자본아. 이 구역질 개발아. 꼭 죽을 권력아! 이 살생자 잡것들아. 씽씽 달리는 차. 몇 분 앞당겨 달리게 한다고 떳떳하게 살생하더니, 살생은 살생으로 위선이 떳떳하느냐. 생명들을 살려내라.

나는 한 그루 나무입니다. 생명이 어떻게 불평등 할 수 있나요? 생명 대 생명으로 서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조화가 아름답습니다. 어떻게 생명이 생명을 욕심으로, 욕망으로 폭력하며 강압적으로 생명을 뺏었다, 죽였다 할 수 있나요? 자연이 아닌 것은 추악합니다. 생명은 평등합니다. 서로 자연스러운 조화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울 수 있는 생명인 우리들이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아름답게 살아 냅시다. 아름답게 죽어 갑시다. 생명으로서. 자연으로서.2

어땠을까.

2023년 6월 19일. 오늘도 알람이 울렸다. 기지개를 켜고 침대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 적어놓은 오늘 할 일을 체크하며 단장을 마친다. 길을 나선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백산초등학교로 향한다. 구석구석 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도서관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한다. 곧 있을 공개 수업을 단정히 준비한다.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꼬물거리며 몰려든다. 어린 풋생명들의 조잘거림에 미소 짓다보니 하루가 금방 갔다.

오후 4시 30분. 퇴근 시간이 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서관과 가장 가까운 후문으로 걸어간다. 만덕역으로 가기 위해 스쿨존 횡단보도를 건넌다. 오후 4시 36분 좌회전 하던 트럭이 나를 덮쳤다. 신호등은 꺼져있다. 여기까지가 언니의 하루였겠지. 여기까지가 그녀 삶의 일상이었겠지.

범섬이 보이는 제주의 바닷가. 사진제공 : 솔빈

언니는 그렇게 한 그루 나무가 됐네. 우리는 말했지. “책임지십시오. 책임지십시오. 책임져서 고치십시오. 살려내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편하게 눈 감게 해주십시오. 똑똑히 알고. 내 새끼, 언니 식어가는 거 똑똑히 보고 책임지십시오. 신호등 눈 뜨게 하고 내 새끼, 언니는 눈 감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아이들 지키십시오.” 그 결과 스쿨존에 온갖 노란색은 더해져 요란해졌지만, 신호등은 끝내 켜지지 않았지. 오히려 증거를 인멸하듯 신호등을 떼어가더라. 그곳 신호등은 차량 운행에 적절치 않다고 하네. 주민들이 신호등을 반대했다네. 자본은, 기름으로 굴러가는 바퀴 달린 차가, 피로 두 다리를 굴리는 사람보다 중요하다고 단락 지었네.

사회의 부재는 그렇게 개인의 책임이 됐다. 엄마, 우리가 뭘 어떻게 책임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슬플 틈도 없이 과학적으로 사고하며 외친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는 기본적인 요구가, 그저 피해자 가족의 답답함과 분노로 치부될 때. 안타깝지만 알 바 아닌 남의 일로 여겨질 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 우리 언니는 아무 잘못이 없잖아. 그날 내 언니는 그저 약속대로 횡단보도를 천천히 건넜잖아. 분명 아무것도 어기지 않았는데, 이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네. 병실과 온갖 의료기에 뿌리 내리고 햇살을 맞는 한 그루 나무가 됐네.

세상엔 무수한 아픔과 분노가 가득하다. 언니 또래 동료 서이초 교사의 죽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비자림로, 강정, 등등. 이 사회엔 셀 수조차 없는 엄청난 양의 고통이 내재한다. 고통이란 결과값엔 반드시 원인이 있을 테지. 다만, 자본과 권력이란 장치가 책임을 회피해 어지럽힌다. 폭력이 사람과 자연을 죽여 양분 삼아 커져나간다. 주민들이 언니 사고 지점 신호등을 반대했던 것처럼 그 사회 속 개인은 파편화 된다. 노예가 되지. 힘없는 개인은 노예가 되지. 끊임없이 종속되고 나약해지지. 꺾이고 끊기지. 심지어 삶도. 우리 언니야 인생도.

예전 같으면 이런 현실에서 정동, 연대, 변혁, 희망 따위의 말을 품었을 테다. 언니 영혼이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지금. 나는 그따위 말을 이해할 여력이 없다. 그냥 상상해본다. 언니의 퇴근길에 신호등이 켜져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길에 차가 다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시골 흙길처럼 고요히 풀벌레가 울었으면 어땠을까. 돈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였다면 어땠을까. 녹색. 녹색이 가득했다면 어땠을까.


  1. 심어진 나무에 붙인 이름표.

  2. 글을 끝맺은 숲정이는 파랑새의 급박한 소식에 다음 날 참여하려던 강정평화대행진에 참여하지 못했다.

숲정이

우리 동네를 낮게 아우르는 숲

솔빈

그 순간, 녹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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