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가두는 우리를 허물고, 우리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복원을 상상하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인권과 재산권이 확립되기를 바래왔다. 〈마그나카르타〉는 그러한 바람의 근거가 되어주었다. 〈삼림헌장〉은 〈마그나카르타〉와 함께 만들어졌는데 거기에는 13세기 잉글랜드 사람들이 기본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숲, 즉 공유지, 혹은 공통재에서 얻는 것이 보장되어 있었다. 인권과 재산권은 자본주의의 전개와 함께하면서, 때로는 침해되었지만, 점차 신장되어왔다. 그것들은 사적 소유와 유기적으로 결합되기도 하였다. 반면 기본적인 삶의 보장은 인권과 재산권의 산장과는 양상을 달리하였다. 틈 날 때마다 무시되었다. 그럼에도 공유지에 기댄 살림의 기억에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은 듯하며, 오늘도 세계 어디에선가는 그곳이 공유지인지 모르면서도 거기에 꽤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부제 : 피터 라인보우 『마그나카르타 선언 ;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 독후기

【서언(緖言)】

2008년에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 1942~ )가 펴낸 책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은,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와 〈삼림헌장〉이 1215년에 잉글랜드에서 만들어지고 선포된 후 지금까지 세계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어 왔는지에 관한 설명과, 앞으로 더 나은 세계를 열어가기 위하여 사람들은 이 문서 둘 특히 〈삼림헌장〉이 역사 속을 굴러다니면서 여기저기에 뿌린 씨앗들을 어떻게 가꿔나가야 할 것인가에 관한 저자의 주장을 담고 있다.

피터 라인보우 저 『마그나카르타 선언』(갈무리, 2012)
피터 라인보우 저 『마그나카르타 선언』(갈무리, 2012)

라인보우는 자본주의 속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형성되기 이전에 그러한 삶의 방식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삶의 방식이 있었고, 〈삼림헌장〉은 ‘자본주의 속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으로 삼림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보장하는 문서라고 보는 것 같았다.

라인보우는 인클로저(Enclosure) 즉 종획운동(縱劃運動)이 〈삼림헌장〉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드는 결정적 타격이었다고 보았다. 라인보우는 이 타격 이후, 아니 헌장의 성립 시기부터, 〈삼림헌장〉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다양한 힘들이 계속 작용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삼림헌장〉이 보장하였던 ‘자본주의 속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삶의 방식’은 오늘날에도 소멸된 것이 아닐 뿐더러 앞으로도 이어지면서 풍성해져야 한다고 본다.

인용” / 요약 / 설명 / 비평

〈마그나카르타〉의 계약 당사자인 존 왕은, 좋은 문서에 서명한 만큼 좋은 왕으로 평가받을 만도 하건만, ‘나쁜 존 왕(Bad King John)’으로 불리고 있다. 유튜브에서 ‘Bad King John’을 검색해보면 존 왕을 희화화하거나 진지하게 설명하는 꽤 많은 컨텐츠를 볼 수 있다. ‘나쁜 존 왕’으로 검색해도 몇 가지 컨텐츠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존 왕의 나쁨을 돋보이게 하는 비교대상은 후드(hood) 즉 머리를 덮는 쓰개가 달린 방한복 겸 우비를 입은 사람들이고 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로빈이다.

로빈후드 이야기의 여러 변주들 가운데 아무거나 하나라도 본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라 가정하고 나면 〈삼림헌장〉을 설명하는 일이 좀 쉬워질 수 있다. 13세기 초 그러니까 1200년대 초 잉글랜드를 지배한 존 왕의 아빠와 엄마는 노르망디를 포함하는 프랑스를 근거지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애초 그 집안에게 잉글랜드는 말하자면 식민지였던 것 같다. 여기에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당시 잉글랜드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들에게 존 왕과 그의 아빠 엄마는 그냥 근본없는 지배자들이었을 것이다. 존 왕에게는 형인 리차드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은 그나마 좀 겉멋이 있어서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정서적 위안이 될 만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왕 노릇보다는 십자군 전쟁에 열광하였다고 하니, 미우나 고우나 잉글랜드의 왕은 나쁜 존 왕이었던 것이다.

존 왕은 정말 좀 여러모로 나쁘기도 하였고 형의 해외원정의 뒤치다꺼리도 하여야 하였으니,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존 왕은 주는 것 없이 착취하기만 하는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냥 잉글랜드 사람들 말고 잉글랜드의 권력자들이 힘을 모아, 자기들을 잡아가두는 일[인신구속]이나 자기들의 땅과 가축을 빼앗는 일[재산침해]을 왕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하는 것과 ‘기타 등등’의 계약에 서명할 것을 존 왕에게 요구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계약은 잉글랜드의 권력자들과 노르망디와 프랑스라는 비빌 언덕을 가지고 있었던 왕 사이의 계약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 사이의 계약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빌 언덕에 대한 미련과 환상 때문이었는지 존 왕과 그 후계자들은 이 계약을 너무 가볍게 여기기도 하였다.

숲이 있는 목초지는 나무들이 있고 동물들을 방목하는 땅이다. 숲이 있는 공유지는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나 다른 이들 즉 커머너(Commoner)들에 의해 사용되는 곳이다. by Amy Burgess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zr1z9l8STvc
숲이 있는 목초지는 나무들이 있고 동물들을 방목하는 땅이다. 숲이 있는 공유지는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나 다른 이들 즉 커머너(Commoner)들에 의해 사용되는 곳이다.
사진 출처 : Amy Burgess

사실 이것은 계약도 아니었다. 그냥 그럭저럭 위세를 갖춘 섬의 토착 권력자들과 아직은 프랑스에 비빌 언덕이 남아있다는 희망회로를 머릿속에서 돌리던 존 왕 사이에 이루어진 담합을 문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들은 사장되지 않고 훗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앞서 정리한 바와 같이 당시의 잉글랜드의 권력자들은 인신구속과 재산침해를 왕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하여’ 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내용을 문서에 담고 존 왕에게 서명하도록 하였다. 존 왕은 잉글랜드 권력자들의 인권과 재산권을 법을 기준으로 하는 재판에 의하지 않고서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셈이었다. 처음에 이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으나, 잉글랜드 사회가 입헌군주제를 향하여 가는 바탕이 되었고, 잉글랜드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권과 재산권을 법과 재판에 의하여 보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이 문서들에는 잉글랜드 권력자들의 인권과 재산권 이외의 것들에 대한 보장도 담겨있었다.

“숲이 있는 목초지는 나무들이 있고 동물들을 방목하는 땅이다. 숲이 있는 공유지는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나 다른 이들 즉 커머너들에 의해 사용되는 곳이다. 보통 토지 자체는 영주에게 속하지만 방목은 커머너들에게 속하며, 나무들은 둘 중 어느 한 쪽에게 – 즉 목재는 영주에게 속하고 땔나무는 커머너들에게 – 속했다. 읍 전체가 목재를 사용했다. 시골집의 버팀목과 대들보, 굽은 목재 서까래, 오크로 된 예배당의 긴 의자. 그 다음에 바퀴, 자루, 그릇, 탁자, 의자, 숟가락, 장난감 그리고 기타 도구들이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다. 나무가 바로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63~64쪽

이 문서들 특히 〈삼림헌장〉에는 영주 즉 잉글랜드의 권력자가 아닌 땔나무로 대표되는 임산물들은 당시의 잉글랜드 사람들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마그나카르타〉와 〈산림헌장〉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아닌 사람이 소유한 땅에서 생활필수품을 만들 재료와 에너지원을 가져가도 된다고 적혀있는 문서인 것이다.

“1215년과 1217년 사이에 일어난 변이들 중 하나로서 7조가 수정되어 “그 동안에 상부(喪婦)한 여성은 공유지에서 합당한 양의 에스토버스를 취한다”라는 대목이 추가된 일이 있다. 공유지의 에스토버스란 무엇인가? 코크는 이렇게 설명한다. “에스토버스가 숲에 한정될 때 그것은 집수리권, 산울타리권, 쟁기권을 의미한다.” 여기서 ‘권’은 일반적인 목재하고만 연관된 것이 아니다. 밭이나 산울타리에도 해당된다. 땔감권이나 산울타리권은 땔감 및 담 구축에 들어갈 몫이다. 집수리권과 마차권은 집을 짓고 도구를 만들 권리이다. 코크는 에스토버스가 생계자급, 영양섭취 및 섭생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말해서 에스토버스란 관습에 따라 숲에서 채취하는 것을 가리키며 종종은 생계자급 일반을 가리킨다.”

69~70쪽

처음에 문서가 만들어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남성 배우자가 죽은 여성은 공유지에서 합당한 양의 에스토버스를 취해도 된다는 대목이 문서에 추가되었다. 에스토버스란 특정인의 소유라기보다는 누구나 숲에서 얻었던 생활필수품이다. 홀로 된 여성이 에스토버스를 취해도 된다는 조항이 문서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런 여성들이 에스토버스를 취하는 것이 존 왕의 치세에 시나브로 어려워지고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로빈 후드 이야기는 그런 여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존 왕의 치세에 숲에서 생활필수품을 얻기 어려워진 것을 보여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로빈후드 이야기는 다양하게 변주되었는데, 그 이야기들 속에서 후드를 입고 숲속으로 들어가서 사는 삶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예컨대 1960년대 이전의 어린이용 로빈후드 이야기에서 그들은 존 왕이 숲을 사냥터로 만들어버리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로빈후드를 중심을 의적이 되었다. 1976년에 제작된 영화 《로빈과 마리안 Robin And Marian》에서 로빈은, 왕의 부하에게 쫒기다가, 수녀가 되어있던 연인 마리안과 동반자살한다. 아마도 이 영화 속 로빈의 처지가 13세기 초 권력자가 아닌 잉글랜드 사람들의 처지와 꽤 흡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의 인권과 재산권을 지키기 위하여 〈마그나카르타〉와 〈삼림헌장〉에 서명하였지만, 당시 잉글랜드의 기득권자들에게, 자신들과 함께 존 왕의 대척점에 서 준 잉글랜드의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에스토버스를 취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은 곧 자신들 소유의 땅이 공유지의 성격을 강하게 띄어가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토지시장을 창출하는 데서 종획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지만, 종획은 땅과의 정신적 유대를 파괴했고 커머너들을 다양한 노동규율에 종속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화의 예비작업을 했다. 케이크와 맥주의 축출, 스포츠의 축출, 춤의 회피, 축제의 폐지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신체에 대한 엄밀한 규율이 여기에 속한다. 땅과 신체는 그 마법적 힘을 잃었다. 노동계급은 범죄집단으로 간주되었으며 여성들의 힘은 해로운 것으로 비난받았다. 조지 페러스가 번역한 마그나카르타는, 상부한 여성이 “공유지에서 합당한 양의 에스토버스를 취한다”는 7조의 의미심장한 대목을 누락하였다.”

83쪽

먼저 〈마그나카르타〉에서 ‘상부한 여성이 공유지에서 합당한 양의 에스토버스를 취한다’라는 대목이 슬며시 빠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문서 변조와 함께 사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공유지의 색채를 퇴색시키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15~16세기에 이르면 종획운동(縱劃運動)이라고 번역되는 인클로저(Enclosure)가 널리 행하여졌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로 상징되는 이 운동은 잉글랜드 사람들이 방목을 하고 에스토버스를 취하던 땅에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삼가게 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에 따라 토지 소유주의 재산권은 더 확실하여졌으며 토지 소유주가 아닌 잉글랜드 사람들의 생활은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토지 소유주들은 소유지에서 양을 키웠다고 한다. 양에게서 깎아낸 양모는 방직공장으로 보내져서 모직물의 원료가 되었고, 생활이 나빠진 사람들은 방직공장에 가서 노동자가 되는 순환이 생겨난 것이다. 라인보우는 이 순환을 악순환이라고 단정하였다. 종획에 따른 결과에 대하여 라인보우가 하고있는 비평에 다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종획이 토지의 사유화를 그 이전보다 명확히 하고,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영국 사람들을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하였던 낮선 질서에 따라야 하는 노동자 집단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는 대략 동의할 것이다.

15~16세기에 이르면 영국에 인클로저(Enclosure)가 널리 행하여졌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로 상징되는 이 운동은 잉글랜드 사람들이 방목을 하고 에스토버스를 취하던 땅에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삼가게 하는 것이었다. 토지 소유주들은 그 땅에서 양을 키웠다.  by Chanita Sykes  출처 : www.pexels.com/ko-kr/photo/1094534/
15~16세기에 이르면 영국에 인클로저(Enclosure)가 널리 행하여졌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로 상징되는 이 운동은 잉글랜드 사람들이 방목을 하고 에스토버스를 취하던 땅에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삼가게 하는 것이었다. 토지 소유주들은 그 땅에서 양을 키웠다.
사진 출처 : Chanita Sykes

인권과 재산권이 중심의제인 〈마그나카르타〉는 에스토버스가 퇴색되는 방향으로 변조된 데 비하여, 에스토버스가 중심의제인 〈삼림헌장〉은 아예 무시되었다. 라인보우는 이러한 현상이 사유와 ‘커머닝’ 즉 공유 사이의 긴장관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으로 보았다. 라인보우는 이러한 긴장관계가 이후의 세계 속에서 계속 이어졌고, 공유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있는 세계에서는 기득권자들이 이러한 긴장관계를 애써 은폐하려 하고 공유를 희화화하거나 악마화하여왔다고 보는 것같다. 또한 라인보우는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도 공유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공유를 실천하고자 하였던 다양한 시도가 있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발제(發題)】

* 지은이 라인보우는 책의 제목을 ‘마그나카르타 선언’이라고 지었다. 이는 이 책이 마그나카르타에 관한 연구의 결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라인보우는 지금이라도 〈마그나카르타〉 특히 〈삼림헌장〉의 취지를 제대로 실현하여 세계가 참담한 곳이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결의를 책을 통하여 선언한 듯하다. 라인보우는 책 속에 〈삼림헌장〉을 현실화시키려는 노력의 예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이 출간된 2008년 이후, 기후환경 위기의 격화와 역병의 대유행 등 물리적 사회적 조건도 격변하면서, 자본주의도 격변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라인보우가 〈삼림헌장〉에서 발굴한 ‘커머닝’과 유사한 공유의 추구가 자본주의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대응방식으로 각광받을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높아진 듯하다. 예를 들어 ‘커머닝’에서 기본소득의 근거를 구하여 볼 수 있을 듯하다. 과연 그와 같은 시도는 해볼 만한 것인지? 지금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삼림헌장〉과 연관시켜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은 어떤 것들일까?

*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긴 정남영은 ‘모두를 위한 자유권들과 커먼즈’라는 부제를 붙였다. 커먼즈[공유지]는 공유지의 소유권을 가진 사람 만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지를 소유하지는 못하지만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하여주는 자원의 원천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정남영이 만든 부제는 적절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삼림헌장〉이 만들어지던 시기 잉글랜드에서 사람들이 공유지를 사용할 수 없었다면 그 사람들은 최소한의 생존 가능성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러므로 그때의 공유지는 최소한의 생존 가능성의 원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자면 〈삼림헌장〉은 자유라는 가치보다는 평등이라는 가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때 그 성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책에 따르면 〈마그나카르타〉와 〈삼림헌장〉은 각기 사유와 공유를 중시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혹시 〈마그나카르타〉와 〈삼림헌장〉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유를 각각 천명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마그나카르타〉는 인신구속으로부터의 해방과 재산침해로부터의 해방 즉 특정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유라고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삼림헌장〉은, 비록 제한 속에서지만, 각자가 자신의 삶의 자원을 필요한만큼 취할 수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 체제가 강고하여지면서, 사람들은 온갖 편의를 누리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금의 세계는 모든 것이 관리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특정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보다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로써의 자유를 더 깊고 넓게 상상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삼림헌장〉 속의 자유는, 특정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넘어서서 보다 적극적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지금의 사람들도 상상할 수 있도록 하여주는 것 아닐까? 비록 끝은 《로빈과 마리안》이 보여주는 비극일지언정, 어린이용 로빈후드 이야기 속의 숲속 사람들이 한때나마 무제한의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을 보면서 떠오른 물음들이었다.

* 나는 이 독후기의 제목을 ‘우리를 가두는 우리를 허물고, 우리의 우리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를 상상하다’라고 지었다. 인클로저로 인하여 잉글랜드의 농부들은 경작지를 떠나 도시의 임노동자 집단거주지라는 우리에 갇히게 되었다. 라인보우는 이런 우리를 허물고 커먼즈[공유지]를 보장함으로써 거기에서 나의 독립도 가능하고 서로 돕는 우리도 가능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 같다. 그 주장이 실현되려면, 재산의 사유를 고집하면서 모든 상황을 관리하려고 하는 자본주의로부터, 함께하는 우리의 공통체[commonwealth]룰 보호하기 위한 우리를 치는 것이, 한시적으로나마, 불가피하다. 나는 독자들이 그러한 상황을 상상해보길 바래서 독후기의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나쁜’ 우리 속에서 견디는 것이 사람들에게 힘겨운 일임이 분명함을 지금 우리는 체험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좋은’ 우리 속의 삶을 마냥 좋아하기는 할까? 라인보우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사람은 사유재산 및 자본주의와 무관한 삶을 상상하고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인 듯한데, 그런 사람은 대단히 희귀하며 독립적일 듯하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의 대세를 대차게 거스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좋은’ 우리 속의 삶을 영위한다 해도, 그 ‘좋은’ 우리 밖의 세계가 남아있다면 그 세계는 어쩔 것인가? 좋건 나쁘건 모든 우리를 허무는 것이 궁극의 목표일 듯한데 라인보우의 동조자들은 그런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어떤 전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여담(餘談) / 추기(追記)】

* 〈마그나카르타〉와 〈삼림헌장〉은 허술한 문서는 아니다. 그러나 처음 거기에 서명한 사람들의 숫자는 잉글랜드 사람 전체에 비하면 그야말로 한 줌도 안되었다. 게다가 존 왕과 그 이후의 왕들은 오랜 기간동안 이 문서들에 담긴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문서에 명시된 인권과 재산권과 공유지 향유의 가능성은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모든 잉글랜드 사람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또한 이 문서들은 점차 전 세계로 퍼져나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켰다. 지금 이 세상에서도 많은 약속과 전망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것들이, 불완전하거나, 좋은 내용을 가지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13세기 이후의 잉글랜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가 그 약속과 전망들에서 지켜나갈 만한 가치가 있는 면들을 찾고 그것을 중심으로 약속과 전망을 가꿔나간다면, 더 나은 세상이 좀더 빨리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잉글랜드의 자유대헌장 혹은 마그나카르타와 삼림헌장〉, 〈용어모음〉, 〈보충문헌〉 등이 책 뒷부분에 부록되어 있는데, 이것들을 잘 사용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생존하는 과정에서 공유의 의미를 차분히 검토하여볼 겨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균형잡힌 사고를 추구할 수 있는 사고 전환과 확장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듯 싶었다. 특히 〈잉글랜드의 자유대헌장 혹은 마그나카르타와 삼림헌장〉은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충분히 읽어볼 만하다. 나쁜 존 왕과 로빈 후드를 생각하며 읽으면 재미도 있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