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누구 혹은 무엇과 어떻게 친할 것인가? -기후 위기 속에서 『맹자』 「진심」편 上 다시 읽기

고전에 인류의 지혜가 담겨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고전들은 대부분 기후 위기가 발생하기 이전 저술이다. 따라서 고전에서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지혜를 바로 찾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기후 위기 속에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읽기 방법을 요구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자.

어버이를 친애함[親親]=인(仁) / 연장자를 공경함[敬長]=의(義)

모든 사람에게는 배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을 양능(良能)이라 한다.
생각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을 양지(良知)라 한다.
아이 가운데, 어버이를 사랑함을 모르는 이는 없다.
어른 가운데, 연장자를 공경함을 모르는 이는 없다.
어버이를 친애함은 인(仁)이다.
연장자를 공경함은 의(義)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이며 공통된 것이다.

위 인용문은 『맹자』, 「진심」편 상편의 15번째 장에 적혀있는 맹자의 말을 풀이한 것이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人之
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也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也
親親仁也 敬長義也
無他 達之天下也

『맹자』는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번역본을 내놓았다. 사진은 휴머니스트(2021)에서 출간한 책표지이다.
『맹자』는 여러 출판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번역본을 내놓았다. 사진은 휴머니스트(2021)에서 출간한 책표지이다.

원문을 보면, 문장들이 대칭을 이루고 있고, 중간중간 아는 글자도 많아서, 잠시 들여다보면 뜻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만약 원문이 붓글씨 등 모양새가 좋은 서체로 썼다면, 읽는 맛이 좋아 글에 담긴 뜻에 빠르게 동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유학자 정자는 이 글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양지와 양능은 모두 말미암는 바가 없는 것이니, 이는 바로 천연(天然)에서 나온 것이요, 인위(人爲)에 매인 것이 아니다.” 여기에 중국 송나라 시대의 유학자 주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양(良)은 본연(本然)의 선(善)이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함이 이른바 양지(良知)·양능(良能)이란 것이다.” 정자의 해설에 따르면, 양지양능은 타고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있는 세계(천:天)가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까닭(연:然)에 속하는 것이지, 사람이 일부러 만든(인위:人爲) 것이 아니다. 주자가 여기에 덧붙인 것은 ‘타고나는 것’의 속성에 관한 설명이다. 여기에서 선(善)은 악(惡)과 모순관계에 있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불선(不善)의 반대 개념으로 ‘옳음’이라기보다는 ‘주어진 것에 거스르지 않음’ 정도의 뜻이다.

맹자는 ‘어버이를 친애함(親親)’이 곧 ‘인(仁)’이고 ‘연장자를 공경함[敬長]’이 곧 의(義)라고 하였으며, 주자는 모든 사람이 인과 의를 타고 나서 거스르지 않는다고 해설한 것이다. 맹자는 모든 사람이 인의를 알고 행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고, 거기에, 모든 사람이 주어진 것을 거스르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을, 주자가 더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지금 여기의 사람들은 ‘주어진 것을 거스르지 않는’이라는 말에 약간 불편을 느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에서는 주어진 것에 거스르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주요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변화 속에서 뜨는 태도와 가라앉는 태도

양친(兩親)이라는 낱말이 있다.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을 뜻한다. 한 사람과 그의 부모는 서로 가까울(親)할 수밖에 없다. 만약 태어난 곳에서 가족의 확장판 같은 이웃들과 평생을 함께해야 했다면, 그런 사람에게 부모는 더더욱 가까이하고 먼저 챙겨야 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이웃들이 넓은 의미의 가족에 속하는 존재들이었을 것이기에, 모두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들이면서도, 모두와 똑같은 양상으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회의 사람들은 부모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사람답게 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부모에게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누군가가 형을 동생 대하듯 했고, 먼 친척을 친 형제보다 더 가까이 하였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불화의 실마리가 되었을 것이다.

맹자는 친의와 공경이 곧 인의라 하였다.
사진출처 : sasint  
https://pixabay.com/images/id-1822560/
맹자는 친의와 공경이 곧 인의라 하였다.
사진출처 : sasint

그런 사회에서는, 모두를 동등하게 챙기는(겸애:兼愛) 태도가 위험시되는 반면, 누구나 자기 가족 등 가까운 사람부터 챙기는(별애:別愛) 태도를 가져야 했을 것이다. 중국 고대에 이러한 태도는 지배집단 내에서 더 중시된 듯하다. 지배집단에 속하는 가족 내에서 권력이나 재력의 분배와 상속을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골육상쟁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완화하기 위하여, 종법제(宗法制)라는 제도에 수반하는 문화의 핵심으로서,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태도(별애:別愛)가 권장되었을 것이고, 이것은 지배집단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어느 정도 의식화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15세기부터, 효(孝)를 중시하는 데에서 엿볼 수 있듯 애친(愛親)과 경장(敬長)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주자학이 국교화되고, 주자학적 사회론을 바탕으로 사회 전체가 재편되면서, 자기 가족 등 가까운 사람부터 챙기는(별애:別愛) 태도가 점차 전 사회적으로 권장되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급격히 약화 되었으나, 아직도 한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으며 문화의 일부가 되어 남아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여러모로 평등이 중요한 가치가 된 지금은, 모두를 동등하게 챙기는 태도는 뜨고 있는 반면, 자기 가족 등 가까운 사람부터 챙기는 태도는 예전처럼 부담없이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세계의 변화 속에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지금 그것을 드러내면 가족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누구 혹은 무엇과 어떻게 친할 것인가?

기후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최첨단 사조뿐만 아니라 전통과 역사로부터도 지혜를 얻으려 하고 있다. 지금 《맹자》라는 고전을 읽는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구하기 위해 읽는 것이 가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버이를 친애함(親親]) 연장자를 공경함(敬長)은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것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친친(親親)은 인간 중심적 사고라는 점에서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데 도움되기보다 장애가 될 수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기후 위기가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를 거침없이 대상화, 수단화한 데 따른 부작용이라면, 인간 중심적 사고에 고착되어있는 것은 그 부작용을 더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사람들이 『맹자』의 「진심」편 상편 15번째 장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기후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지혜’라기보다는, 기후 위기의 해결을 가로막고 있는 고정관념인 인간 중심적 사고가, 어버이를 친애함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한국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잠재하여있다는 현실적 한계를 절감하는 것일 듯하다.

여기에서, “어버이를 친애함(親親)”을 맹자가 발화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탈맥락화(脫脈絡化:de-contextualisation)해보면 어떨까? 전국시대라는 맥락과 무관하게 친친(親親)이라는 말만 놓고 보면, 그것은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진정으로 친하게 지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서 대상과 우선순위 정하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 후 이 낱말이 가리키는 태도를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행동과 결합시켜보자.
이는 재맥락화(再脈絡化:re-contextualisation) 혹은 재전유(再專有:re-appropriat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이나 문화를, 기존 맥락에서 빼내어 전혀 다른 맥락에 끼워넣거나, 이전에 사용되거나 향유되던 바와는 다른 방식 혹은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방식으로 사용하거나 향유하는 행위는, 변화를 가속화 할 수 있으며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틈을 벌릴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맹자가 처음 그 말을 중시해서 사용하였을 때의 친친(親親)은 분명 인간 중심적 사고에 갇혀있다. 그러나, 맹자가 놓았던 맥락에서 끄집어낸 후 다른 맥락에 놓았을 때, 친친(親親)을,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진정으로 친하게 지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서 대상과 우선순위 정하기’라는 의미로 재규정함으로써, 기후 위기를 악화시켜 온 인간 중심적 사고를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사람과 모든 존재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맹자가 별 설명 없이 사용한 양지(良知)·양능(良能)이라는 개념과 거기에 포함된 양(良)이라는 글자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자가 보탠 “양(良)은 본연(本然)의 선(善)이다”라는 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맹자는 ‘모든 사람이 인의를 알고 행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고, 거기에 ‘모든 사람이 주어진 것을 거스르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을 주자가 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주자가 보탠 말속의 선(善)은 ‘옳음’이라기보다는 ‘주어진 것에 거스르지 않음’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비단 주자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에서 선(善)은 악(惡)과 모순관계에 있는 개념이라기보다는 불선(不善)과 반대 관계에 있는 개념으로 쓰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자의 해설에 따르면, 『맹자』 「진심」편 상편 15번째 장에서 맹자는, 주어진 것을 사람의 목적의식에 따라 ‘개발’하기보다는, 주어진 것에 따르는 세계관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처음 놓였던 사회역사적 맥락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 가운데에서도 어버이를 친애함에 지나치게 강조점을 찍게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갇히게 되기는 하였지만, 맹자가 친친(親親)조차도 주어진 것으로 보면서, 주어진 것에 거스르지 않는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친친이라는 태도 역시 견지하라고 사람들에게 권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맹자의 세계관은 기후 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개발 논리와 대척점에 서 있다. 맹자에게 ‘어버이를 친애함’은 어버이와 한 사람의 관계의 원천인 주어진 세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기후 위기 속에서 고전 다시보기

사람들은 흔히 고전에서 지혜를 구한다고 한다.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지혜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고전이란 그런 것을 담고 있기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전이 오래전의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점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세계의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한때의 지혜가 지금의 세계에는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고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 못지않게, 고전을 통하여 지금의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잠재하는 낡은 생각의 잔재를 확인함으로써, 그 잔재에 발목 잡혀 더 나은 세계로 나가지 못하는 오류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 또한 중요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고전 속에서 중요한 개념이나 가치를 끄집어내어 고전이 놓여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 놓아보기도 하는데, 때로는 그러한 시도가, 기우 위기 같은 난관을 돌파하는 계기가 되어주는, 창조적 사고와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틈을 벌리기도 한다. 아마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그러니까 그냥 주어진 것을 거스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탈맥락화-재맥락화-재전유-재규정 같은 작위들을 통하여 새로운 것이 비집고 나올 수 있는 틈을 끊임없이 벌리라는 격려의 말로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하다.

글 앞 부분에서, 『맹자』「진심」편 상편 15번째 장에 적혀있는 맹자의 말을 읽는 이들이 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소 심하게 의역하였으며, 원문을 소개할 때에도, 보기에 좋게 제시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제 글의 끝에 통용되는 표기방식에 의거하여 쓰여진 한문 원문과 직역에 가까운 번역문을 소개하겠다.

孟子曰 : 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也。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也。親親仁也。敬長義也。無他, 達之天下也。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은 양능(良能)이요,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은 양지(良知)이다. 어려서 손을 잡고 가는 아이가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으며, 그 장성함에 미쳐서는 그 형(兄)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어버이를 친애함은 인(仁)이요, 어른을 공경함은 의(義)이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온 천하에 공통되기 때문이다.”]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孟子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2, 서울 :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1, 386쪽.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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