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공감’

우리들은 모두 파편화된 각자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한 개인의 세계들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부딪힌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기를 반복한다. ‘공감’뿐 아니라 ‘이해하기’도 어려워진 시대, 구조대신 배치로 현상을 설명하는 ‘구성주의’에 대해 다시 공부를 시작해볼까 다짐해본다.

“나는 ‘이해하다’와 ‘공감하다’를 잘 구분해서 쓰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모두 달라서 오랫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낸 가족, 친구, 연인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by natalya zaritskaya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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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달라서 오랫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낸 가족, 친구, 연인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진 출처 : natalya zaritskaya

친한 친구와 긴 대화를 하다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같은 언어로 말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면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살 줄 알았다. ‘같은 세상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사는데 ‘이해’와 ‘공감’이 왜 필요한 거지?’란 생각도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가족 혹은 친구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싫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달라서 오랫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낸 가족, 친구, 연인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사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당연하지’라고 말할 만한 ‘상식’ 같은 것이다. 내가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이 생각보다도 훨씬 ‘다르다’라는 것에 관해 이야기 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세계에서 내가 쓰는 단어 ‘이해’와 ‘공감’, 그리고 그것을 구분 짓는 나의 행위는 모두가 다른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만의 방식(무기)이란 생각을 한다.

*이해하다(理解하다)

[동사]
1. 깨달아 알다.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이다.
2.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다.
3.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하다.[유의어] 납득하다, 알다, 알아주다

*공감하다(共感하다)

[동사]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다.

장님이 코끼리의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며 자신이 느낀 코끼리가 맞다고 우기는 듯했다. 슬프게도 나도 그중 하나였다. 
by Jeremy Lishner
장님이 코끼리의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며 자신이 느낀 코끼리가 맞다고 우기는 듯했다. 슬프게도 나도 그중 하나였다.
사진 출처 : Jeremy Lishner

네이버 창을 열어 ‘이해하다’와 ‘공감하다’의 뜻을 찾아본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사건을 경험하면 ‘아, 저 사람이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 또는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이럴 때 나는 ‘그 사람을 이해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해가 되어도 공감이 되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동의가 되거나 그 사람의 편에 서고 싶은 순간들은 있었지만, 공감이 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공감은 마치 나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거의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로 느낀다. 나는 공감이 되지 않을 때 ‘이해한다’라는 표현을 쓴다(‘이해하겠다’란 생각을 한다). 이것은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행동이고 공감하지 못하지만(때로는 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나는 너의 적이 아니다’라는 태도를 보여주고 싶은 의도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다른 이에게 싫어하는 것일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반대 경우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라고 괜찮은 듯 넘겨버리고 싶지만 괜찮지가 않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쓰고 혼자에게 몰두했던 몇 년간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최근 2년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간 그렇게 찾던 동료도 생기고 나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른 이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몰랐던 나의 강점을 잘 알 수 있게 되고 생각지 않았던 능력들이 발전되었다. 그 덕에 하고 싶은 것은 더 분명해지고 마치 안개에 둘러싸여 있던 나의 ‘길’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든든한 지원군과 나의 길이 어디쯤임을 가늠할 수 있게 구분할 수 있는 대상들이 많아진 대신 신경 쓸 것들이 늘었다. 피곤하다. 나의 강점만큼 약점과 단점도 함께 발견하고 당연하게도 나의 틀린 점은 인정하기도 변화를 시도하기도 싫다. 단편적인 무언가를 바꾼다고 금세 약점이 강점이 되고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나는 나의 세계의 문을 닫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대로도 괜찮았는데’라고 자신을 이해하려 애쓴다. 각자의 세계에 균열이 나서 나의 세상과 타인의 세상이 포개지는 경험은 경이로우면서도 체력적, 감정적 소모가 크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일은 살면서 꼭 필요한 일은 아니란 생각도 든다.

이런 과정이 거듭되고 멀리 뛰지도 되돌아가지도 못하는 시기가 왔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목적을 향하자며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마치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잘 들어보니 하고 싶은 것도 하려고 하는 것도 모두 달랐다. 장님이 코끼리의 각기 다른 부분을 만지며 자신이 느낀 코끼리가 맞다고 우기는 듯했다. 슬프게도 나도 그중 하나였다. 코끼리는 이렇다고 이해시킬 수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코끼리도 ‘어떤’ 부분일 뿐이라서였다. 세계와 세계가 부딪히고 있었다. 각자의 세계에도 거리 두기가 필요한 시기일까. 각자의 특수성을 간직하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잊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이러한 나의 상태를 털어놓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을 받는 중 ‘구성주의’에 대해 알게 되었다. 구조보다는 배치로 현상을 설명하고, 공동체에서 각자는 각자의 의지에 따라 배치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변형, 파기될 수 있는 생태계로 본다고 이해했다. 유일한 진리나 한 가지로 향해가는 것이 아닌 자율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지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각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현상들은 그저 자연스러운 과정이나 상태일 뿐이고 이러다 파기되는 것도, 굳어지는 것도,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공동체에서 어떤 배치와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잘 이해되지 않는 책을 열고 이해해보고자 한다.

박현주

동양화, 판화를 전공하고 시각작업과 제작업을 하고 있는 박현주입니다. 실질적인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적절하고 적당한 영향을 주고받음을 목표로 합니다. 공동체, 비예술인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활동을 많이 합니다. 그러한 작업과 활동에 영향을 받아 창작작업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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