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식민화에 대한 뼈아픈 후회 너머 – 기후 위기 속에서 『삼국유사』 「흥법」 ‘순도조려’ 읽어보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던 것을 일부라도 허물어 밖으로 내보내야 가능할 듯하다. 그 과정은 즐거울 것 같지만, 조금은 서글플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는 무엇인가를 ‘여분의 것들’, 더 이상은 쓸모가 없게 된 것들‘ 달리 말하자면 ‘쓰레기’로 낙인찍어야 하는 것 같다. 이 쓰레기는 어떤 쓰레기보다도 크고 넓지만, 발생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 쓰레기를 어찌할 것인가?

자기 식민화

『삼국유사(三國遺事)』 「흥법(興法)」편은 한국 역사 속의 삼국시대에 불교가 삼국에서 중요한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였던 사건 그리고 그러한 계기를 만들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다. 가야 불교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의 「탑상(塔像)」편에 아주 조금 들어있고, 발해 불교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 속에 없다.

이 책은 삼국과 가야 발해에서 불교가 중요한 종교로 자리 잡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쓰여진 것 같다. 그런데, 세르주 라투슈가 쓴 「상상계의 탈식민화」1라는 글을 이 책과 엇갈리며 읽고 나니, 그 결과가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은 ‘자기 식민화’ 과정이라고 표현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유사』 「흥법」편에 들어있는 ‘순도가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하다[순도조려(順道肇麗)]’를 보면, 서기 372년 소수림왕 2년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苻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보냈고, 서기 374년에는 아도(阿道)가 진(晉)나라에서 왔으며, 서기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고 순도(順道)를 있게 하였으며,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고 아도를 있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작이다.2 위·진 남북조 시대, 북조[전진(前秦)]의 왕이 불상·불경·승려를 보내고 남조[동진(東晉)]로부터 승려가 왔으며, 고구려에서는 아마도 왕실이 그들 각각을 위하여 절을 지어준 셈이다. 이러한 기록 끝에, 일연은 다음과 같은 찬양의 시를 적어 놓았다.

“압록강에 봄이 깊어 물풀은 곱고
백사장 갈매기는 한가로이 졸고 있네.
멀리서 노 젓는 소리에 갑자기 놀랐으니
어느 곳 고깃배인지 길손은 안개 속에 이르렀네.”3

찬양의 시라고는 하지만, 이 시에는 고구려가 좀 더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관한 일연의 아쉬움이 담겨있는 듯하다. 세계사 속에서 일어났던 종교들 사이의 충돌·학살·순교 등과 비교하여보면, 초문사와 이불란사가 지어지기까지 일어난 일들은 평화롭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일연의 아쉬움은 지나쳐 보이고, 자기 식민화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1988년 세르지 그루진스키는 『상상계의 식민화』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책의 내용은 이른바 ‘서구화 과정’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병사들이 북미 인디언들을 상대로 벌인 악행.  
사진출처 : wikimediacommons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병사들이 북미 인디언들을 상대로 벌인 악행.
사진출처 : wikimediacommons

“그러나 그루진스키가 상상계의 식민화를 다룰 때, 이는 여전히 일반적으로 역사에서 언급되는 식민화의 연속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선교사들의 원주민 개종에 관한 것이었다. 개종은 정신의 ‘탈문화화’이자 제국주의 프로젝트에 의해 기독교와 서구 문명으로 동화되는 과정이다. 이는 단순히 상징적 수단이 아닌, 상상계 억압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종교 재판 때 널리 썼던 장작더미를 생각해 보라.”4

라투슈는 그루진스키가, ‘상상계의 식민화’라는 말을 만들어 냈음에도, 그 식민화에 수반하는 성장과 개발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데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지적한 듯하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라투슈는 ‘자발적 노예상태’인 ‘자기 식민화’라는 말을 내놓았다.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식민화한 서구인들이 자신들의 의식 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성장과 개발의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이다.5 라투슈는,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가 2010년에 쓴 글을 인용하여, 자기식민화를 “삶의 유일한 목표가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6이라는 상상계에 빠져있는 상태로 설명하는 것 같다.

뼈아픈 후회

『삼국유사』 「흥법」 ‘순도조려’와 라트슈의 「상상계의 탈식민화」를 오며가며 읽다가 황지우의 시 「뼈아픈 후회」7가 떠올랐다.


뼈아픈 후회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알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20세기 말,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시인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 넘쳐 흐르는 자기 연민을 쏟아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가 세기말이었던지라, 그때의 분위기 속에서 이 시를 이해했다치고 지나쳐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 나오는 과정에서 이 시는 몇 차례 처음과는 달리 읽혔다.

기후 환경 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권하는 글을 읽고 나서, 세계가 달리 보였고, 나 자신의 일상에 대한 자기평가도 변하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지나온 곳을 모두 폐허로 만들면서 살아 나온 거네?’ 라고 생각했다. 나는 끊임없이 소비하며 살아왔으며, 어느새 아주 먼 땅을 식민지화시킨 결과 딸 수 있었던 값싼 바나나를 먹고 있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 모두 폐허다” 라고 읊은 시인도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운전면허를 받고 그것을 장롱 속 넣어둔 지 15년쯤 지났을 때, ‘그동안 화석연료를 남보다 덜 소비했어, 각자에게 할당된 화석연료가 있다면, 나에게는 안 쓰고 남아있는 화석연료의 양이 엄청날걸?’ 하면서 ‘이제라도 차를 살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을 때도 「뼈아픈 후회」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삼국유사』 「흥법」 ‘순도조려’, 특히 이 이야기 끝에 실려 있는 찬양의 시를 읽고, 나는 다시 「뼈아픈 후회」를 떠올렸다.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가면서 그 이전에 고구려 내에서 영향력을 가졌던 종교와 종교문화는 불교와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찬양의 시에, 불교가 들어가기 이전의 고구려의 종교와 종교문화에 대한 배려는 없다. 내가 해 온 일은 그 시와 무엇이 다른가? 끊임없이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여 이른바 ‘진보’에 기여하는 일을 해온 것 아닌가? 이에 비하면 ‘순도조려’ 속 순도는 태어나 자란 곳을 떠나 먼 미지의 땅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였고,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일연은, 순도에게 혹은 고구려 사람들에게 ‘왜 그 정도로밖에 못하셨나요’ 라고 투정하는 듯한 찬양의 시를 지었을 정도로, 불교가 고구려도 들어와서 그 이전의 종교와 종교문화를 대신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를 서슴없이 보여주었다 할 수 있다. 일연은 당대의 문화 전반을 섭렵하였으면서도 하나의 문화 즉 불교를 깊이 파고든 사람이었으며, 후대에 문화를 전한 위업을 이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순도를 찬양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순도가 어떤 면에서는 ‘문화 파괴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면에는 눈을 감고 있었던 듯하다. 잘라 말해서, 순도나 일연은 문화 전달자이면서 문화 파괴자이기도 한데, 별로 한 일이 없는 나의 내면에도 전달자와 파괴자의 두 얼굴이 모두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미학을 전공하고 진보적 운동에 줄곧 관여하였던 황지우는 어떠하였을까?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그는 누구보다 열심이었을 것이다. 진보에 관한 신념도 강하였을 것이다. 낡은 것을 청산하려는 의지도 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황지우가 일연과 다른 점은, 시에서 뿐이라 할지라도,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 모두 폐허다” 라고 읊었다는 점이다. 황지우는 자신이 진보를 위하여 한 일들이 뭔가를 무자비하게 파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였다는 것을 고백하였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폐허’ 위에 새로 세운 것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대개 ‘밖’으로부터 들여온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황지우는 어느 순간 자신이 지식 수입업자이며 전통 파괴자였으며 어느 곳에도 머물 수 없었던 존재였음을, 끊임없이 ‘자기 식민화’를 거듭하며 자기 안에 문화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파괴하였다 하며 살아 나왔음을 「뼈아픈 후회」에 토로하였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자기 식민화에 대한 뼈아픈 후회 너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있던 것을 일부라도 허물어 밖으로 내보내야 가능할 듯하다. 순도와 아도가 불교를 전하였을 때 그것을 받아들인 고구려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를 덜어내 버려야 하였을 것이다. 버려진 것은 결국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 덜어내는 과정을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할 때,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은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할 듯하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이나마 그 과정이 조금은 서글플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덜어낸 것을 쓰레기로 낙인찍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여 주어야 할 듯하다. 신명나는 진보 너머에는 각자의 죽음이 있겠으나, 그 와중에서 누군가 쓰레기의 재생을 생각하고 간다면, 멸망의 시간은 그만큼 늦춰지지 않을까?

【인용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일연, 신태영)


  1. 세르주 라투슈, 「상상계의 탈식민화」,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외(지음), 강이현(옮김), 『탈성장 개념어 사전』, 충남 홍성군 : 그물코, 2018, 213~218쪽.

  2. 『삼국유사』 「흥법」 ‘순도가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하다’ 참조.

  3. 『삼국유사』 「흥법」 ‘순도가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하다’. “鴨淥春深渚草鮮 白沙鷗鷺等閑眠 忽驚柔櫓一聲遠 何處漁舟客到烟”

  4. 세르주 라투슈, 「상상계의 탈식민화」,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외(지음), 강이현(옮김), 『탈성장 개념어 사전』, 충남 홍성군 : 그물코, 2018, 216~217쪽.

  5. 세르주 라투슈, 「상상계의 탈식민화」,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외(지음), 강이현(옮김), 『탈성장 개념어 사전』, 충남 홍성군 : 그물코, 2018, 217쪽 참조.

  6. 세르주 라투슈, 「상상계의 탈식민화」, 자코모 달리사, 페데리코 데마리아, 요르고스 칼리스 외(지음), 강이현(옮김), 『탈성장 개념어 사전』, 충남 홍성군 : 그물코, 2018, 215쪽.

  7. 황지우, 「뼈아픈 후회」,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지금은 시집을 가지고 있지 않아, 인터넷에 올라온 시를 복사 붙이기 하였는데, 컨텐츠에 따라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와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사이가 붙어있기도 했고 떨어져있기도 했다. 마지막 줄인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다음에 마침표(.)가 찍혀있는 컨텐츠도 있고, 마침표가 찍혀있지 않은 컨텐츠도 있어서, 시인께 엄청난 실례를 무릅쓰고, 글쓰는 나의 자에 따라 ‘붙이고’ ‘찍었다’. 한때 이 시집을 가지고 있었으나, 누구에겐가 선물하였다는 것을 밝혀둔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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