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가족의 신화를 부수다 – 〈삼태성 삼형제〉 독후기

사회에서 정상가족이 더이상 예전처럼 재생산되지 않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정상가족을 벗어난 상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 관성이다. 이 관성을 깨고 다양한 인간 결합 방식을 접해본 존재는 더 다양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상상력은 보다 나은 공동체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삼태성 삼형제〉 신화를 통해, 고대로부터 내려온 색다른 가족 유형에 대한 상상력을 만나보자.

아버지를 모르는 세 형제가 별이 되는 이야기

세 형제의 모험과 성장을 담은 이야기들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내용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도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낫설지 않다. 한국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세 형제 이야기들도 있다. 한 예로 중국 연변 일대의 재중교포[조선족]에 의해 이런 유형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어서, 연길현의 박정희(朴正姬)가 구술한 것을 1962년 김명한(金明漢)이 채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1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볼 수 있는 〈삼태성 삼형제(삼태성)〉2은 이런 채록을 정리하여 놓은 것이다. 이를 다시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보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유난히 빛나는 세 개의 별이 동쪽 하늘에서 서쪽 하늘로 천천히 흘러가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태양을 지키고 있는 삼형제 별, 삼태성이다. 사진출처 : atiabii

‘백두산 흑룡담 아래 아버지 없는 쌍둥이 삼형제가 살고 있었다. 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어머니는 그들을 각기 다른 길로 떠나보내며 재주를 배우게 했다. 그리하여 첫째는 방석에 앉아 구만 리를 날아갈 수 있는 재주를, 둘째는 구만 리 밖을 볼 수 있는 재주를, 셋째는 칼과 활을 쓰는 재주를 배워 귀향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태양이 사라져 버렸다. 노인들은 하늘개가 해를 삼킨 것이라 하면서 곧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뱉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해를 찾던 세 아들은 향산의 노스승으로부터 흑룡담의 암룡이 해를 삼키고서 하늘 끝으로 날아올랐다는 답을 듣는다. 세 형제가 첫째의 재주로 하늘 위로 날아올라, 둘째의 재주로 흑룡 두 마리를 찾아내, 셋째의 재주로 암룡의 허리에 화살을 박으니, 암룡이 삼켰던 해를 토해냈다. 용 한 마리는 흑룡담 속으로 내리박혔고, 다른 용 한 마리는 늪 기슭에 떨어져 죽었다. 세 형제는 영원히 해를 지키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유난히 빛나는 세 개의 별이 동쪽 하늘에서 서쪽 하늘로 천천히 흘러가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태양을 지키고 있는 삼형제 별, 삼태성(三台星)3이다.’

오늘날까지 흔적이 남아 전하고 있는 칠성님 신앙에서 볼 수 있듯, 고대 한국인은 별을 추앙하였다고 한다. 별을 추앙하는 것은 고대 동북아시아 여러 집단의 종교 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고,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져 있는 점들이 북두칠성과 삼태성이라고 역사가들은 판단하였다. 박종성에 따르면, 삼태성이 된 세 형제 이야기는 삼태성의 생성 내력과 유행 경로를 전하고 있어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삼태성 위치와 연관 지을 수 있다고 한다.4

한편 이 이야기는 재해·암흑·혹한을 주는 흑룡으로부터 광명·생명·태양을 보호하는 영웅적 인간의 활약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에는 백두산 주변에서 악천후를 극복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강인한 투쟁5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6

이야기 속에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가 없는 것은 단군·주몽·제석삼불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박종성은 이를 ‘사라진 부신(父神)의 양상’7이라고 하였다. 이 지적은 보다 깊고 넓은 신화 비교 연구의 실마리라 할 수 있지만, 그런 연구로 나가기 이전에 단순 소박하게 생각하여 보면, 세 형제 이야기는 모계 사회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건국 초기에 주몽과 더불어 주몽의 어머니를 국가의 기원으로 숭배하였던 것도 모계 사회의 분위기가 그때까지 남아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몽의 경우 어려서는 아버지를 몰랐다. 지금 누군가 아버지를 모른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예외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지금은, 아버지를 모르는 상태를 비난하거나 신기해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는 사회가 오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가족의 형태에 관한 생각의 변화를 강요받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시대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이 이야기에서 어머니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보인다. 세 형제는 고대 동북 아시아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의 길잡이이자 추앙의 대상이었던 삼태성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중요한 고비 때마다 어머니가 나서서 그들을 등 떠민 것 같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이른바 ‘마마보이’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삼태성의 반열에 오르는 과정에서 세 형제는 과연 자율적이었다고 할 수 있나?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세 형제가 별이 된 이야기는 오늘날 학부모가 대학생 자녀의 수강신청을 도와주는 ‘예외적인’ 행태의 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듯하다.

한편, 세 형제는 아버지를 알거나 찾지 않고 잘 살아간 것 같지만, 이 형제들의 후배 격인 고구려의 주몽은 아버지를 알고자 한다. 그리고 주몽의 아들 유리도 그렇다. 유리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고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다. 이 이야기가 정말일까? 고구려에서 아버지가 있는 것은 중요했을까? 기록을 보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들들은 괴로워한다. 다름 아닌 타자의 시선 때문에 그렇다. 지금 누군가에게 아버지가 없다면 꽤나 괴로울 것이다. 누가 아버지인지 모른다면 괴로움은 더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렇다고 해서, 그리고 주몽과 유리의 이야기가 기록으로 정착되었던 고려시대에 그랬다고 해서, 고구려에서도 그랬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고구려 사회의 가족의 모습은 지금의 이른바 ‘정상가족’의 모습과 같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니까 삼태성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시대의 가족의 모습과 지금의 정상가족의 모습 사이의 거리는 더 멀었을 것이다.

지금의 이른바 정상가족 관념은 수백 수천년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이제 그 정상가족의 지속가능성은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저런 사정들을 생각하다 보니 옛날에는 감동적으로 보였던 주몽과 유리 부자간의 이야기가 좀 달리 보이기도 한다. 하긴 이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본 나 자신이 지극히 단순한 것이 분명하다. 주몽과 유리의 사이에 일어난 일은 아버지가 아들을 책임지지 않은 것 아닌가? 아들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존재를 알 가능성이 꽤 크지 않은가?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곧바로 이 또한 단순한 생각이었음을 자인하게 된다. 삼태성의 아버지는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도 그러하다. 강력한 어머니가 있는데 아버지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버지 죽이기

앞에서 옛 이야기 하나를 아버지 모름이나 아버지 찾기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이 이야기를 아버지 죽이기[부친살해/Patroktonia/patricide]를 중심으로 재조명하여 보겠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가 아버지를 죽인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살인을 자신의 세계를 연 것으로 본다. 그런 사람들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아들 스스로 주체적 삶을 시작하는 행위의 은유(隱喩 metaphor)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한 아버지가 아들을 통제하는 사회의 기존 질서이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기존 질서 극복의 은유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아들]가 기성세대[아버지]를 극복하여야 미래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이런 신화를 후대에 전한 것은 후대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한국 문화에서는 아버지 죽이기 이야기를 찾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김영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부친살해’는 전 세계 신화(神話)와 동화(童話)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보편적 주제다. 또한 인류 역사의 단절면을 만든 무수한 혁명적 사건들이 ‘부친살해’에 은유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서사적 전통에서 ‘부친살해’는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운 주제다. 오히려 수많은 효자와 효녀의 이야기에서, 또 비극적으로 죽어가야 했던 어린 장수들의 이야기에서 더 자주 발견되는 것은 ‘자식살해’의 모티브다. 자식은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야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딸과 아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아들이나 딸이 이와 같은 ‘부친살해’를 단행하지 못할 때 그들은 분리되지 못한 채 강박적으로 부모의 세계를 수호하고 부모의 질서에 순응하는 데 자신을 내던진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부친살해’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심리적인 독립과 분리가 지연된다면, 사회적인 차원에서 ‘부친살해’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역사는 다음 세대가 주도하는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고착된다. 만약 특정 사회가 ‘부친살해’가 아닌 ‘자식살해’나 그에 버금가는 주제를 서사 전통의 핵심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그 사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사회의 ‘아들들’은 어떤 신경증을 안고 살아가게 될까.”8

정상가족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비하면 정상가족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사진출처 : Kelly Sikkema

김영희의 주장 속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볼 수 있는 아버지 죽이기의 의의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 김영희는 한 사회가 미래지향적이려면 ‘부친살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도 그래야 한다고 보았다. 김영희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하였다; “자식은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야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딸과 아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세계에서 벗어나 그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김영희는 ‘부모’라는 낱말도 썼고 ‘어머니나 아버지의 세계를 벗어나’라는 말도 썼다. 김영희가 말하는 ‘부친살해’에서 부친에는 어머니도 포함되는 것이다. 삼태성이 된 세 형제의 어머니는 김영희가 말하는 ‘부친’에 부합되는 예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세 형제는 그 어머니를 ‘살해’하지 않았다. 김영희의 주장에 따르면 어머니를 ‘살해’하지 않은 세 형제는 어떤 신경증을 안고 살다 갔을 수도 있다.

아버지를 모르는 상태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를 새삼 생각하다

다 읽고 나서 보니, ‘아버지를 모르는 세 형제가 별이 되는 이야기’는 고대의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별을 추앙하고 숭배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였다. 이야기 속에서는 사람이 별이 되었지만, 고대인의 실제 생활 속에서 별은 계절의 변화와 방향을 알아내려 할 때 기준이 되어주는 것이었을 것 같다. 강력한 어머니의 지도에 충실하게 따른 아들 세 형제가 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별이 추앙과 숭배의 대상이 될만한 소중한 존재임을 주장하는 고대인의 방식의 하나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모계 사회에서 생성되었을 것이고, 아버지를 특정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는 그 사회에서 어머니는 부계 사회에서 아버지가 가지는 힘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면서도 나름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야기 속에서 아들 세 형제는 꼬박꼬박 어머니의 지도를 따른다. 그렇게 해서 세 형제는 삼태성이 된다. 앞서 언급한 김영희의 논리에 따르면, 세 별들은 전혀 주체적이지 못한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를 모르는 세 형제가 별이 되는 이야기’는 한국 고대 사회가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는 탄력성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사회였던 것 같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이 이야기를 ‘재해·암흑·혹한을 주는 흑룡으로부터 광명·생명·태양을 보호하는 영웅적 인간의 활약’으로 본다든가, 이 이야기에 ‘백두산 주변에서 악천후를 극복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강인한 투쟁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고 소개한 바 있다. 이러한 긍정적 평가는 ‘부친살해’를 키워드로 하면서 김영희가 설파(說破)한 비평 즉 이 이야기는 한국 고대 사회가 새로운 시대가 열릴 수 있는 탄력성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사회였던 것 같다는 추정에 비하면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이나 가치 혹은 변화의 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 못지않게 주목할만한 것이 하나 더 있는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를 모르는 상태의 삶이 일단 불가능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지금 여기에서 보다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앞에는 많은 장애물과 선결과제들이 놓여있다. 그들 가운데 하나로 정상가족을 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 정상가족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비하면 정상가족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동체와 정치에 관하여 사고할 때 정상가족 관념은 꽤 강력한 기본값[default] 같은 느낌을 준다. 복지, 돌봄, 더 구체적으로는 노인 요양이나 학교 급식의 개선을 구상한다고 할 때, 지금으로서는 정상가족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 정상가족이 더이상 예전처럼 재생산되지 않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정상가족을 벗어난 상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 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정상가족 이외의 인간 관계양상이나 인간 결합방식이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서서히 올라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사고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기존의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듯하다. 만약 사람들이 정상가족 아닌 인간 관계양상이나 인간 결합방식을 많이 접하게 된다면, 보다 다양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상상력은 보다 나은 공동체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 삼태성이 되는, 아버지를 모르는, 세 형제로 이루어진 가족은, 정상가족이 아닌 관계양상이나 결합방식의 하나의 사례라는 점에서, 정상가족을 벗어난 상상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볼만한 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옛 이야기들이나 역사책 속에는 이런 사례들이 꽤 많았던 듯하다. 그런 것들을 접할 때 ‘뭐 이런 막장 드라마가 다 있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의 기준으로 이야기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판단’한 결과일 것이다. 일단 그러한 판단의 과정을 피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이 과정을 지난 후에라도 이야기나 역사적 사실들을 다양한 인간 관계양상이나 인간 결합방식의 사례로 볼 수 있게 된 사람은 보다 다양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 [네이버 지식백과] ‘삼태성 설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2. [네이버 지식백과] ‘삼태성 삼형제(삼태성)’ (문화원형백과 새롭게 펼쳐지는 신화의 나라, 2004.,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3. 삼태성(三台星)은 큰곰자리에 딸린 자미성(紫微星)을 지키는 별자리로, 밤하늘에서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삼 형제 별이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태성’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집필: 박종성] 참조.

  4. [네이버 지식백과] ‘삼태성’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집필: 박종성] 참조.

  5. [네이버 지식백과] ‘삼태성’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집필: 박종성] 참조.

  6. [네이버 지식백과] ‘삼태성 설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7. [네이버 지식백과] ‘삼태성’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집필: 박종성] 참조.

  8. 김영희, 《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 월인, 2013,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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