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빈곤, 도시의 이야기 – 헨리 조지 『진보와 빈곤』을 읽고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다. 그래서인지 클로이 자오의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사람들은 꽤나 떠돈다. 봉준호의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화성 형사 박두만은 그 점을 지적한다. 그 덕분에 남한의 관객들은 반도의 분단국가가 가지는 한계를 진하게 체감한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극단적 중앙집권국가의 수도이며 19세기말에 런던보다 많은 인구를 자랑했던 한양을 가진 나라의 후예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물을 스스로 정의하며 아이러니와 함께 살아가기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의 저서 『진보와 빈곤』1은 1879년에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저자 서문, ‘도입부 – 문제의 제기’, 제1권~제10권, ‘결론 – 개인의 삶의 문제’ 등이 서론-본론-결론 역할을 하도록 구성되어있다. 부의 증가/호황/진보와 빈곤이 함께하는 아이러니. 본론의 전반은 이 아이러니에 대한 설명, 후반은 이 아이러니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과 마음가짐에 관한 제안이다.

부와 특권의 불평등한 분배에서 발생하는 죄악과 비참함을 보면서 더 나은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이를 위해 노력하려는 독자에게 바친다.

샌프란시스코, 1879년 3월

제목 바로 다음에 나오는 헌사(獻辭)이다. 이 책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쓰여지고 마무리되었지만, 뉴욕에 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바쳐졌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죄악과 비참함이 발생하는 것이 더 선연히 보이는 곳은 뉴욕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뉴욕 시장에 두 번 출마하였다.

그대가 경험하는 사물의 본질과 본성과 참 모습을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사물을 스스로 정의하고 기술해 보라. 아울러 사물에 적절한 명칭을 붙이고 그와 연계되어 있거나 앞으로 연계될 다른 사물에도 명칭을 붙여 보라. 인생에서 경험하는 여러 대상을 체계적이고 진실하게 검토하는 것보다 인간 정신의 고양에 더 도움이 되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접할 때에는 동시에 우리의 우주가 어떤 것인지, 그 속에서 만물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그리고 인간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탐구하라. 인간은 우주 최고의 구성원이며 다른 모든 존재는 인간 사회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라. 각 사물이 무엇이며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런 본성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것인지를 생각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us)

헌사에 이어 실려있는 경구(警句)이다. 스스로 사물을 정의하고 사물에 명칭을 붙일 때 그 사물이 놓여있는 시공간도 함께 조망하라는 경구의 권유를, 저자는 충실히 따르려 한 것같다. 특히 그는 사물의 본성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것인지를 생각한 결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굳건하여 불멸일 것이라고 생각해 온 어떤 사물의 본성이 가변적임을 이 책에서 보여주려 한 듯하다. 그는 그 반대 사례 또한 이 책에서 보여주려 한 듯하다.

지대 vs. 임금 +이자

『진보와 빈곤』 헨리 조지(지음), 김윤상(옮김), 비봉출판사, 2016
『진보와 빈곤』 헨리 조지(지음), 김윤상(옮김), 비봉출판사, 2016

1880년 제4판 서문에 조지는 “생산력이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겨우 생존을 이어나갈 최저 수준으로 낮아지는 이유”(16p)에 대한 당대까지의 설명을 따져보겠다고 하고, “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노동에 의해 생산되고,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노동자의 수의 증가에 따라 임금도 같이 증가한다는 점을 입증한다”(16p)고 한다. 또한 조지는 “물질적 진보와 더불어 지대가 상승하기 때문에 임금과 이자가 상승하지 못한다”(17p)는 점을 밝히겠다고 한다. 조지는 “인구 증가는 경작의 한계를 낮출 뿐 아니라 인구 증가와 병행하여 나타나는 경제성과 힘이 토지와 결부되어 총생산물 중에서 지대로 돌아가는 부분을 크게 하고 임금과 이자로 돌아가는 부분을 작게 한다”(17p)는 점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물질적 진보로 인한 토지가치의 지속적 증가의 효과는 투기적 상승으로 나타나고, 토지사유제에서는 토지 가치의 투기적 상승이 – 이 원인 파생적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 가장 강력한 원인이 되어 지대를 증가시키고 임금을 하락시킴”(17~18p)을 논증하겠다고 한다. 조지는 “이 원인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주기적 산업불황이 발생한다는 점이 연역적으로 도출되며, 귀납적으로 보더라도 이 결론이 증명된다.”(18p)고 단언한다. 조지는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토지사유제에서 물질적 진보는, 인구 증가가 어느 정도이건 간에, 필연적으로 노동자의 임금이 생존을 겨우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하락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18p)고 단언한다.

토지 공유제의 당위성 vs. 토지 단일세라는 현실적 대안

“빈곤이 진보와 병행하게 되는 원인”(18p)을 밝힌 데 이어서, 조지는 진보하면서도 빈곤하지 않는 상태를 모색하다보면 “토지 공유화 이외의 어떤 방법도 영구적으로 빈곤을 제거하지 못하며 임금이 기아점(starvation point)으로 내려가는 경합을 막지 못한다”(18p)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조지는 윤리 측면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편다.

  • 노동 생산물에 대한 재산권과 토지에 대한 재산권 사이에는 근본적이고 타협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 자연적인 근거와 정당성이 앞의 재산권에는 있으나 뒤의 재산권에는 없다.
  • 토지에 대한 배타적 재산권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노동의 생산물에 대한 재산권을 부정하고 만다.
  • 토지 사유제는 언제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 계층의 노예화를 초래했고 또 반드시 초래하고 만다.
  • 사회가 토지 재산권을 환수하더라도 토지 소유자는 보상을 요구할 정당한 근거가 없다.
  • 토지사유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인식에 전혀 부합하지 않으며 미국에서도 이런 잘못된 파괴적 원리를 채택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이 감지되고 있다.(17~18p)

이어서 조지는 구체적인 실천 분야를 탐구하겠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탐구가 다음과 같은 결론들에 도달한다고 주장한다.

  • 토지사유제는 토지의 개량과 사용을 위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장애가 되며 생산력의 엄청난 낭비를 야기함
  • 충격을 주지도 않고 소유를 박탈하지도 않는 가운데 토지에 대한 공동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으며,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를 제외한 모든 조세를 철폐하는 단순하고도 쉬운 방법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음
  • 토지가치에 대한 조세가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한 조세임(19p)

조지는 토지공유제 대신 토지 단일세[single tax]로 “생산을 엄청나게 증가시키고 분배의 정의를 보장하고 모든 계층의 이익이 되고 더 높고 고상한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효과”(19p)를 유발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아이러니와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주의사항

조지는 자신이 제안하는 실천과 당대의 통념이 충돌해서 생기는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유념해야 할 점들을 정리한다.

  • 문명의 차이는 개인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사회조직의 차이에서 생긴다.
  • 진보는 언제나 어울림에 의해 촉발되었다가 언제나 커짐으로써 퇴보로 바뀐다.
  • 지금도 현대 문명 속에 과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했던 원인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 정치적 민주주의만으로는 무정부 상태와 전제정치로 빠지게 된다.
  • 사회생활의 법칙은 동시에 정의의 법칙이자 위대한 도덕법칙(19p)

조지는 이 책을 통하여 자신이 한 일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방임이 사회주의의 숭고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위대하고 고차원적인 인식을 흐리게 하는 여러 관념이 틀린 것임을 증명해 준다.

20p

조지는 이 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 인구가 생존물자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 인간의 힘이 낭비되고 인간이 커다란 고통을 겪는 원인은 자연법칙에 있지 않고 인간이 무지하고 이기적이어서 자연법칙에 순응하지 않는 데 있음
  • 인간의 진보는 인간 본성의 개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일반적으로 불변이라는 사실(559p)

조지가 말하는 ‘위대하고 고차원적인 인식’은 궁극적 실재를 믿는 것일 듯하다. 궁극적 실재를 믿는 것-자유방임-사회주의. 이 세 가지를 꼭지점들로 하는 삼각형을 조지는 자기 내면에 굳건히 구축했던 것 같다. 지금 여기의 사람들도 조지처럼 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하는데 하기 어렵다면? 아이러니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러한 의문을 해소시켜줄런지도 모른다.

헨리 조지의 시대에 유럽과 미국의 인구는 증가 속도가 이미 둔화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모르는 채, 조지는 인구가 생존물자보다 더 빨리 증가하는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품었던 셈이다.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조지의 사상을 모두가 저출생을 걱정하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하는 것일까?

한편 조지는 인간의 본성이 일반적으로 불변적이라고도 하였고, 인간이 이기적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자연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다”(342p)는 주장,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릴 때에만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510p)는 주장들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할 듯하다.

또한 그는 ‘현재 옹호되는 해결책의 불충분성’ 즉 당대 정치경제학 내지는 사회사상의 한계와 오류를 지적하면서 자신의 사상의 줄기도 보여주었다.

사실, 인간이 가진 동물 이상의 품성도 동물이 가지고 있는 품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인간이 지적·도덕적 품성을 배양하려면 동물적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동물적 생존에 소요되는 필수품을 얻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해야 한다면, 사람들은 기술 개선의 자극제라고 할 수 있는 근면의 의욕을 잃고, 의무적인 일만 하려 할 것이다. 인간이 더 이상 크게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그 상태를 개선할 희망이 없다고 하면 앞날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여가를 주지 않는다면 – 이 때의 여가는 일자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키고 어른에게 신문을 공급해 주더라도 지적 능력을 갖추게 할 수 없다.

어느 국민 또는 어느 계층의 물질적 생활이 개선된다고 해서 지적·도덕적 개선이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상승하면 처음에는 나태하고 낭비하는 버릇이 어느 기간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근면, 기술, 지적 능력, 절약이 나타난다. 서로 다른 국가, 국가의 다른 계층, 같은 민족의 다른 시대, 같은 민족의 이민 전후의 상태를 비교해 보아도 언제나 일관성 있는 결과를 보여 준다. 즉, 물질적 생활이 개선되면 위와 같은 인간적 품성이 나타나고, 물질적 생활이 약화되면 인간적 품성이 사라진다. 빈곤은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이 꿈에서 본 ‘절망의 수렁(Slough of despond)’이었고, 이 수렁에는 아무리 좋은 책을 던져 주어도 소용이 없다. 인간의 근면, 절제, 기술, 지적 능력이 향상되려면 궁핍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예에게서 자유인의 덕목을 기대하려면 우선 노예를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

316~317p

이 인용문은 존 언스트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Jr. 1902~1968)의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주유소 직원들이, 땅을 잃고 오클라호마를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농부 가족들을 보며, 그렇게 이동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다들 부랑자로 보이게 된다면서 씁쓸한 표정을 짓는 대목은 “물질적 생활이 약화되면 인간적 품성이 사라진다”는 조지의 주장을 별다른 논리 없이도 납득할 수 있게 하여 줄 듯하다. 얼핏 보면 조지는 종교성에 경도된 사상가 같지만, 조지는 오히려, 당대의 사회사상이 인간 사회에 구속된 존재라는 것은 적절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땅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는 사상가이다.

조지는 책의 서문에 책을 통해 자신이 전개한 논리를 잘 압축하여 놓았고, 본론은 그 논리가 충실히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지는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나름대로 소화할 만큼 소화한 후 그러한 결과를 양분 삼아 자신의 사상을 제안하였다. 출간으로부터 140년 가량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치경제학도 많은 변화를 겪어서, 조지가 검토했던 당대의 정치경제학과 그러한 정치경제학을 조망하는 조지의 세계 인식 가운데 이제는 되풀이하기 꺼려지는 것들도 많아졌다. 조지의 언행을 총체적으로 긍정하고 오늘날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상당수는 아래의 인용문을 소화하기를 버거워할 듯하다.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보이지도 바라볼 수도 없는 순수한 곳에 이르면, 하나님이 영혼의 지도자이자 왕이 된다. 그곳에서 영혼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의지하여 인간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끝없이 바라보면서 지극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565p) 이 문장들은 이 책의 끝부분에 나오는 것으로서, 조지는 이것이 플루타르크(Plutarch, 46?~120?)로부터 인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조지의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는 사이에 인류는 종교적 심성을 스스로 저버릴 만한 사건을 숱하게 겪어온 터라, 이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위의 인용문 같은 분위기의 글들을, 조지의 글을 읽으면서 건너뛰고 싶어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저러한 문장들을 건너뛰더라도 조지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말들 속의 도시 이야기

한편 지금도 조지의 언행을 추앙하고 지금이야말로 조지의 언행을 되돌아보아야 할 때라는 의견도 새삼 끓어오르는 듯하다.

토지투기의 영향으로 지대가 상승하는 현상은 진보하는 지역에서의 부의 분배 이론을 완성하는 데 무시해서는 안된다. 물질적 진보와 연관된 이 힘 때문에, 진보가 생산을 증가시키는 정도보다 더 큰 비율로 지대가 계속 상승한다. 따라서 물질적 진보에 따라 임금이, 상대적으로만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이 생긴다. 또 이와 같은 확장하는 힘 때문에, 기성 지역에 나타나는 사회적 병폐가 시기를 앞당겨 신생 지역에서도 나타나며, 처녀지에도 부랑자가 생기고 경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지역에도 거지가 출현한다.

268~269p

이 인용문은 ‘물질적 진보에 의해 생기는 기대의 효과’를 논하는 부분에 있다. 이 부분을 읽다보면, 도심 인근의 낙후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외부인과 돈이 유입되고, 임대료가 오르고, 활성화의 주역들과 원주민의 다수가 밀려나는 현상 즉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떠오른다. 이 인용문은 한 지역에서 일어난 젠트리피케이션이 도시 전체에 불안정을 퍼뜨리고, 도시 곳곳에 홈리스들이 거처를 꾸리게 만드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게 한다.

사진은 고대 로마의 도시 에베소.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요된다.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사회를 만들고 함께 어울릴 때 더 나은 목적을 만들 수 있다. 
사진 출처 : rhei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phesus_Ancient_City_-_2014.10_-_panoramio.jpg
사진은 고대 로마의 도시 에베소.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요된다.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사회를 만들고 함께 어울릴 때 더 나은 목적을 만들 수 있다.
사진 출처 : rheins

이 인용문은 또한 클로이 자오(Chloe Zhao, 趙婷, 1982~)의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2020)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에는 일정한 거처 없이 아마존이 제공하는 계절적 일자리를 따라 떠도는 미국인들이 나온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양극적이다. 한쪽 극단에는 자유로운 미국인을 그렸다는 평이 있다. 다른 한쪽 극단에는 뿌리뽑힘을 자유로움이라고 착각했다는 평이 있다. 미국처럼 넓은 땅덩이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었다면, 중국처럼 넓은 땅덩이에 세워진 나라 출신의 감독이 아니었다면, 이런 영화는 만들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나중에 슬그머니 양들이 사람을 몰아내는 울타리치기(인클로저_inclosure)가 벌어지고 말았지만, ‘나쁜 존왕’ 시대의 영국에서는, 잠깐이나마 왕의 독점적 사냥터가 과부가 땔감을 줍고 먹거리를 채취할 수 있는 공유지가 된 적이 있었다. 이에 비하면 조지를 포함한 미국인들은 공유지·공터·마당을 생각할 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면서도, 확장 불가능성을 상상하기 어려운 치명적 한계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조지의 글을 읽을 때 이 점을 고려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였다.

자연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 자연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자격이 있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자연은 노동의 결과 외에는 인정하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라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인정한다. …… 자연의 법칙은 창조주의 뜻이다. 자연법은 노동의 권리 외에 어떠한 권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법에는 모든 인간이 자연을 사용하고 향유할 권리, 노력을 자연에 투입할 권리, 자연으로부터의 대가를 수취하여 소유할 권리의 평등성이 폭넓게 그리고 명백히 규정되어 있다. 자연은 노동에게만 주므로 노동을 생산에 투입하는 것이 배타적 보유의 유일한 권원(權原, title)이다.

342p

이 인용문은 ‘토지사유제의 부정의성’을 논하는 부분에 있다. ‘자연’의 자리에 플랫폼(platform)을 대체하여보면 어떨까? 지금 플랫폼은 그냥 승강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연결과 교환의 지정학적 중심이다. 업주는 판을 벌이고 자릿세를 받아 문제이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에 발생한 것이 아닌 듯하다. 최초의 플랫폼은 기원전 아라비아 반도에 만들어진 도시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 의해 서울이라는 도시 특히 강남 동부에 도로 등의 기반시설이 깔리면서, 그곳을 선점한 사람은 이미 자릿세를 톡톡히 받아오고 있다. 영등포라고 불리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업단지 강남 서부를 선점한 사람들이나, 천당 아래 분당 옆 광주대단지라는 이름으로 이미 오래전에 생성된 경기 동부를 선점한 사람들이, 별다른 자릿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 강남 동부가 엄연한 플랫폼임이 확연해진다.

현대적 성장의 대표적 유형은 대도시이다. 대도시에는 최대의 부가 있고 최악의 빈곤도 있다. 미국의 모든 대도시에는 …… 분명한 지배계층이 있다. ……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 이들은 노름꾼이나 술집주인이나 정계의 한량이며, 심지어 투표를 조작하고 공직과 공무를 사고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들이다.

534p

이 인용문은 ‘현대문명의 쇠퇴’를 논하는 부분에 있다. 여기에서 도시의 정치는 마치 갱스터(gangster) 거버넌스(governance) 즉 잡놈들의 협잡처럼 그려져 있다. 용인군이 용인시가 되고, 군포읍이 군포시가 되고, 시흥군 과천면이 과천시가 되듯, 남한에서는 전국이 급속도로 도시화되어왔다. 그런 도시에서의 지방자치에서는 사회 내 다양한 기관이 자율성을 지니면서 함께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다양한 행위자가 통치에 참여·협력하는, 협치(協治)가 행하여지는데, 참여주체 중에는 토호(土豪)라 불리는 사람도 있어서, 그들이, 폭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협지는 지역 토호의 이익을 대대로 보전해주는 안전망으로 작동하기 딱 좋은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언젠가 협치는 모든 이들의 주체적 정치참여의 기틀이 되어줄 수도 있다. 양면적인 것이다. 물질적 생활이 개선되면 인간적 품성이 나타난다고 확신하였던 조지는 대도시의 미래를 어둡게만 보지 않았을 것이지만, 당대의 대도시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조지가 역설하는 진보와 빈곤이 양립하는 아이러니는 도시를 보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법칙을 찾아야 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 우리 문명의 한 가운데에서 여인들은 생기를 잃고 어린이들은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36p) 이런 신음을 들은 곳은 당대에 최고속도로 팽창하던 도시 뉴욕이었을 것이다. 그는 뉴욕 시장에 두 번 출마하였다. 조지가 밝힌 이 책의 저술 동기에도 도시문제가 언급되었다. “처음 이 작업을 시작했을 때 어떤 특정 이론을 지지하거나 특정 결론을 증명할 생각이 없었다. 단지, 대도시 속의 비참한 생활을 접했을 때 당혹스럽고 괴로웠으며, 그때부터 그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치유 방안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느라고 편안하게 지낼 수 없었을 뿐이다.”(557~558p)

다른 한편, 조지는 도시를 없애버리거나 떠나거나 피해야만 할 곳이라고 생각하지만은 않았던 듯싶다.

사람이 따로 떨어져 살면 개인의 모든 힘이 생존 유지에 다 소요된다. 정신력은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서로 어울릴 때에만 자유롭게 되어 고차적인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 어울림으로 인해 분업이 가능해지고 다수인의 협력에 의해 생기는 경제성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울림은(association) 진보의 첫째 요소이다. 개선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어울릴 때 이루어지며, 어울림이 넓고 긴밀할 수록 개선의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리고 인간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법칙이 무시되느냐 존중되느냐에 따라 정신력이 대립 속에 낭비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므로, 평등 또는 정의(equality of justice)는 진보의 둘째 요소이다.

이렇듯 평등 속의 어울림(association in equality)이 진보의 법칙이다. 어울림은 정신력을 자유롭게 하여 개선에 바칠 수 있도록 해주며 평등, 정의, 자유는 – 이 세 용어는 도덕법칙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 정신력이 쓸데없는 싸움에 소모되는 막아 준다.”

510p

이 인용문은 ‘인간 진보의 법칙’을 논하는 부분에 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평등 속의 어울림’이 가장 활발히 일어날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는 대도시일 것이다.

예컨대 최근 역병의 대유행은, 전염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을 각각 따로 흩뿌리다시피 고립시킬 듯하였으나, 검사·확진(Test) → 역학·추적(Trace) → 격리·치료(Treat)로 이어지는 방역모델은 도시에서 꽤 효율적으로 행하여졌다. 이러한 현실도 『진보와 빈곤』을 새삼 도시 이야기로 읽게 하는 동기 가운데 하나가 되어주었다.


  1. 부재는 ‘산업불황의 원인과, 부의 증가에 따라 빈곤도 증가하는 원인에 대한 탐구 및 그 해결책’ 이다.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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