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움 특집] ② 이 글이야말로 횡단-신체의 한 사례 아닌가 -『말, 살, 흙』 4-6장 읽기

스테이시 앨러이모가 『말, 살, 흙』에서 말하는 횡단-신체성의 개념 안에서, 말은 단지 구성된 담론, 텍스트가 아니라 물질적(살, 흙) 얽힘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이 글 또한 필자의 이름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수한 물질, 비물질 신체들이 반영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만의-’ 것이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말, 살, 흙』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그린비, 2018)

작년 가을, 생태적지혜연구소 ‘신유물론 세미나’에서 스테이시 앨러이모의 『말, 살, 흙』(윤준·김종갑 옮김, 그린비, 2022)을 함께 읽은 일이 있다. 콜로키움 준비를 위해 이번에 다시 읽고 쓰면서, 지금 나의(것이라고 말해지곤 하는) 읽기-쓰기 행위에, 그때 함께 주고받은 이야기와 정동들이 자연스레 스며있다는 것을 강하게 알아차렸다. 당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공유한 문제의식뿐 아니라 서로 달랐던 의견과 차이 등도 이 글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어 있다. 즉, 이 발제문은 김미정이라는 고유명사로 환원될 수 없는, 아니 그 이름에 스며있는 무수한 물질·비물질적 신체들의 산물이라고 확신한다. ‘자기만의 사고’ ‘ 자기만의 감정’ ‘자기만의 글쓰기’ 같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미리 적어두자면 이것이 『말, 살, 흙』의 핵심 메시지의 하나이기도 하다.

1. 이 책의 방법 : 재현·표상 체계를 경유해서 말한다는 것

저자 스테이시 앨러이모의 저술 베이스(영문학)와 본문 내용(재현, 서사물들 대상 분석)의 특수성이 있지만 이를 다소 희미하게 하면서 한국에서의 생태, 페미니즘 관심 독자 전반에 어필할 수 있는 제목을 잘 선정했다고 생각한다. 번역자들이 이 책의 문제의식을 핵심 키워드(말, 살, 흙) 속에 직관적으로 잘 담았고, 한국어권에서의 생태, 페미니즘, 신유물론 등에 대한 담론×활동적 관심에 잘 부응하는 모양새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원제에 있던 ‘과학(science)’과 ‘물질적 자아(material self)’란 말이 이 저자의 입장을 특히 변별되게 해준다고 여겨지는데 그것은 좀 지워진 것 같다. 아쉽다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한국어판 제목이 좀더 폭넓은 독자층에게 어필하기 쉬웠을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 이런 이유에서 가독성 있는 번역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렇게 읽기 쉽지만은 않았다. 각 장은 모두 재현·표상(representation) 체계로서의 텍스트(ex. 사진집, SF, 회고록, 소설)를 경유해서 전개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대상으로 다뤄지는 텍스트가 한국어 독자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좀더 근본적으로는 근대적 리프리젠테이션 체계에 비판적인 감각 속에서는 이러한 텍스트를 경유하는 것 자체가 또 다시 그러한 체계를 반복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 아닐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저자의 작업에 다소 투사되어 읽힐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Stacy Alaimo, Bodity Natures : Science, Environment, and the Material Self, Indian University Press, 2010.

하지만 저자가 출발했을 제도 내 문학 연구 상황에서야말로 그러한 재현·표상 체계에 대한 비판을 꽤 오랫동안 진행해왔고, 또한 최근 어펙트, 신유물론 등의 문제의식이 본격 수용되면서 이 재현·표상 비판(critic)은 훨씬 고도화하고 있으며, 또한 비판을 넘어 재현·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운동성에 대해 강하게 주목하며 그 방법을 발견하려는 작업들의 흐름이 있다. 즉, 기존 특정 연구장(를 둘러싼 이미지까지 포함하여)의 갱신 사례로서 우선 이 저자의 작업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실제 말이 단지 구성된 담론, 텍스트가 아니라 물질적(살, 흙) 얽힘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입장은 한국어판 제목에서도 잘 암시되고 있다. 즉, 이 세계의 재현·표상 체계와 그 산물(역사적인 것을 포함하여)이 그저 어떤 구조에 의한 기계적 산물이 아니라 어떤 물질적이고 역동적인 운동성 속에서 생성된 것인지 등을 시야에 두는 것에서 출발할 때,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고 써나가는 것도 좀더 실행성을 지닐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재현물(서사, 이미지)을 다룬다는 것은 어떤 대상에 어떤 이론을 적용하거나 해석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선 재현물, 표상 등은 원리적으로 늘 특정 세계마다의 인식-정동 체계를 구조화하고 있다.(ex. 소설을 분석하는 이유는 단지 어떤 작가의 특징, 미학을 다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근대적 인식론의 체계가 구조화된 근대적 이야기 양식(novel) 속에서 그 세계의 특질을 추출하고 비판적으로/ 때로는 실천적으로 거기에 개입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저자가 대상으로 취하고 있는 텍스트들은 이 세계의 인식-정동적 특징을 구조화하고 있는 양식일 뿐 아니라, 거기에서 이 세계의 구조를 이탈하거나 돌파하는 인식-정동까지 읽어낼 수 있는 유용한 매개다.(예컨대 4, 5장의 몸 회고록, 6장의 SF에 대해 다룰 때) 이 작업에는 지금 내 발밑의 지층도 시야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간을 구조화하고 읽는 작업이(이른바 역사라 불리는) 병행되는 것도 이러한 작업에 필수다.

2. 문제의식과 핵심개념 : 내부작용, 횡단신체성

저자는 유물론적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에 포지셔닝하고 있지만 이처럼 문학(재현, 서사물) 베이스의 작업을 해오던 사람이다. 즉, 이론이나 개념도구를 창발적으로 갱신, 고안, 제공하는 철학 베이스의 연구자는 아니다. 또한 이 세계의 구체적 현장에 직접 개입하고자 하는 인류학자도 아니다. 하지만 다른 입구를 통해 동시대 많은 이들이 함께 고민하는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데 말이 많을수록 좋고 입구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며, 이 풍요로움이 좀더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에 접근하고 길을 만들어가는 상상력에 의미가 있으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몸, 자연, 과학, 환경, 물질 같은 키워드는 자연스레 오늘날 생태의 문제 나아가 이 세계 존재 양태를 주제화하는데, 이른바 신유물론 계열의(거의 모든 장에서 예외없이 등장하는 캐런 버라드의 이름) 논의의 흔적이 특히 강하다. 특히 내부-작용(intra-action) 개념의 아이디어가 이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호작용(interaction)과 구분되는 이 개념은 미리 전제된 어떤 항들의 소통이 아니라는 점, 그러한 개체적 분화 이전의 얽힘(entanglement)을 이 세계 존재의 기본 양태로 본다는 점에서 이 세계의 기본 전제를 달리 사유하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저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 개념도 이 맥락에 놓인다.

저자는 이것을 존재론의 양태를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하나의 윤리, 정의의 문제로까지 위치시키고자 하는데 그것도 캐런 버라드의 관점에 거의 상응한다. 예컨대 얽힘의 세계와 존재론에 대해 거의 유사한 논의를 펼치는 엘리자베스 그로스와 캐런 버라드의 차이를 언급하는 대목(380-381)은 단지 그 두 사람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전반적으로 비슷한 지점을 공유하는 듯 보이나 좁혀지지 않는 결정적 차이들을 엿보게 하니 흥미롭다. 실제 오늘날 저자나 캐런 바라드가 아니어도 “상호연결된 물질적 역동성”(381)을 강조하는 논의는 꽤 다양하다. 그런데 거기에서 ‘윤리’나 ‘정치’ 같은 말들에 대한 입장 차이도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인간종의 특권성을 후퇴시키고 평평한 존재론을 논하는 ‘어떤’ 이들 사이 예컨대 ‘윤리’는 여전히 인본주의의 흔적이다. 그것이 예컨대 “어떤 특정한 종의 멸종을 애도하지 않고, 멸종의 장소에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를 놀라움 속에서 기다리며 관찰”하며 “미래에 대한 급진적인 예측 불가능성을 애도와 도덕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여기는 입장으로 도출되기도 할 것이다.(이 책에서는 엘리자베스 그로스, 그런데 한편 레비 브라이언트, 그레이엄 하먼도 이런 계열에서 이야기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한다) 탈인간중심적 사고의 극단에서 이런 입장을 보게 되는 것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캐런 버라드 등을 따라 “상호연결된 물질적 역동성”은 “인간은 물질의 내부-작용들의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며 따라서 반드시 해명할 의무를 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윤리’를 “급진적으로 외부/화된exterior/ized 타자에 대한 정당한 응답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의 일부인 생기 넘치는 생성의 관계맺음들에 대한 응답 의무와 해명 의무에 대한 것”(381)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윤리’를 주/객, 동일자/타자 식의 전제 위에서 파악하지 않고 “우리가 누비고 지나가 얽힌 그물망들을 풀어내는 것”(382)으로 정의하고자 할 때, 저자가 말하는 윤리는 곧 존재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이때의 윤리는 곧 구체적 “행위들에 대해 해명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저자는 정치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말이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환경윤리’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야 할 것이다. 그 윤리는 ‘나’와 구획된 외부의 원인에 기반하는 실천의 당위이기 이전에 내 존재의 부정할 수 없는 조건이다. 윤리는 선악이나 도덕의 문제 이전이라는 저자의 인식은(물론 그 오랜 서구 철학의 유산이 있었지만) 선언이 아니라 분석 결과라는 점에서 오늘날 개개인을 설득하기 용이한 부분이 있다. 어떤 존재나 사건이 어떻게 성립하고 존재하고 있는지 ‘알게’되면 될수록 그 앎을 회피하며 살 도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 이 윤리가 개체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생기는 딜레마 상황들이 본격적으로 이야기되는 중이기도 한 것 같다.(ex. 미디어와 혐오, 플랫폼과 노동, 생태위기 등의 문제) 즉, 기존의 책임소지를 개체에 일임하여 가리는 방식이(ex. 가해vs.피해, 능동vs.수동 구도) 점점 더 유효하지 않아 보인다. 공동의, 연루된 책임 소지를 묻는 일이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세계가 기본적으로 개체를 단위로 구성된 세계이다보니 공동의 책임을 질문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언어, 법, 철학 등이 근본적으로 문제의식을 공론화하여 이야기나누기 시작할 시점 아닐까 생각한다.

3.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 : 원제에서 지워진 물질적 자아개념을 중심으로

이 책을 관통하는 내용은 이미 내부-작용, 횡단-신체성 같은 개념을 통해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환경(environment)과 인간을 분리된 것처럼 여겨온 오랜 전통(정복과 관리의 대상으로서의 자연, 사물 vs. 인간, 문명 식의 구도를 포함하여)을 거절하고, 환경과 몸들이 ‘내부-작용’하면서 “공동-구성”(382)된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그런 아이디어가 단적으로, 그리고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 특히 4장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회고록(material memoirs)’이라는 제목의 4장은 ‘회고록’이라는 오랜 서사 형식의 문제를 논하면서 다양한 최근 회고록들을 분석한다. 루소의 고백록에서부터 기원을 찾곤 하던 근대적 ‘회고록’의 의미는 저자의 작업 속에서 아주 쉽게 역전된다. 즉, 이 장은 내부-작용, 횡단-신체성 등의 개념의 가장 극단에 놓일 ‘자아’ 개념을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이 개념과 논의들의 새로운 함의를 부각시킨다. (이 논의는 창작이나 문학 등에서 꽤 중요한 갱신일뿐 아니라, 최근 수년간 예컨대 ‘당사자(성)’를 둘러싼 곤경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이야기될 대목이라고도 생각한다.)

예컨대 근대문학(literature)의 원형질처럼 놓이는 회고, 고백 등의 형식이야말로 근대적 자아(self)를 더없이 확고한 전제로 놓고 출발해왔다. 오늘날 문학은 물론이고 모든 창작, 모든 글쓰기, 모든 행위의 출발점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는 그것은 바로 어떤 견고한 이미지의 자아(self)일 것이다. 이 자아를 둘러싼 오해는 꽤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예컨대 근대문학에서 ‘풍경’과 ‘자아’는 동시적으로 발견되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도 그것을 상기시키듯, 자아는 자아와 구획되는 풍경이 존재해야 성립하는 것이었고 풍경 역시 그 반대로 마찬가지 방식으로 성립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달리 말해 자아든 풍경이든 사실은 처음에는 서로를 요청하는(반드시 필요로 하는) 개념으로 발견되었으나 그 기원은 점차 망각되고 점점 마치 진공상태에서 오롯하게 솟아난 자아와 같은 방식으로 상상되게 된다. 즉, 자아는 일종의 내적 표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본래부터 거기에 놓여 있다고 가정된 어떤 진원지처럼 여겨져온 것이다. 그리고 회고록(모든 류의 창작, 사고, 감정, 행위 등)이야말로 그러한 선험적 자아의 완고함이 전제된, 그리고 그 자아의 ‘소유자’인 ‘개인’ 작가로 환원되는 장르였다.

그런데 이 장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회고록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몸”에 대한 것들이다. 이것을 주목하는 것은 “몸의 회고록은 몸과 자아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214)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회고록들을 “횡단-신체적 자서전은 자아가 생물학적이며 정치적이고 또한 경제적인 물질의 작용능력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214)한다. 그녀가 다루는 회고록은 예찬의 대상이 아니다. 결점 혹은 보완할 점 등도 함께 이야기된다. 그녀는 독아적 자아로부터 시작하여 한 개인 작가로 환원되는 행위성을 거절한다. 그렇기에 또한 이것은 회고록이나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통제적 기능”(214), 즉 비전문가와 전문가, 대중과 지식인 사이의 구별에 의해 성립되어온 장르적 특징과도 결별한다. 물론 그럼에도 저자는 이러한 몸의 회고록의 어려움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몸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요인들(그것을 질병이라고 표상시키는)을 추적하는 것은 분명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몸의 회고록’은 “인정받지 못함을 감수하는 자기-질문”(220)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 자아들을 식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들은 그것들이 규범과 원칙, 계보학에 대한 조사뿐만 아니라 자신의 물질성, 빈번하게 과학 지식을 경유하여 이해해야만 하는 물질성에 대한 조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220)

저자는 몸의 회고록이 위험사회 환경보건의 횡단-신체적 상황(이미 전유된)과 ‘일상의 전문가들’의 지식 실천으로부터 발달(233)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늘날 몸을 둘러싼 인식론적 절박함을 반영하고, 자신의 일상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수행하려는 결의를 보여준다. 몸의 회고록은 전문 담론에 대한 대안이라기보다 “과학 지식을 어느 정도 활용하는 새로운 전문지식의 형태”(233)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이는 ‘대항-기억’의 한 형식이다. 대항-기억은 공인된 진리로부터 탈출하여 원점에서 새로운 사유를 시작하게 한다. 또한 이는 의미의 대안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재료로서 권력과 지식의 대안적 모체를 구성하는 물질이다.(234)

저자는 몸-환경의 구분을 거절하지만 이러한 논의를 좇아 읽다보면 다시 몸/환경 분리를 이야기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실제 저자는 몸의 개체적 구획의 환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지, 실재하는 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듯하다. 자아가 내적표상에 불과하다고 해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듯, 저자가 말하는 몸-환경의 관계는 그것이 ‘내부-작용’으로 서로를 생성시키는 운동 속에 놓여 있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지 법적, 제도적으로 실재하게 되어 버린 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이라고 보인다. 이것은 인종, 젠더, 장애 여부 등과 같은 일종의 정체성 분석에 있어서도 비슷하게 존재하는 딜레마적 상황이라고 여겨진다. 저자의 이러한 몸-환경 이해와 그 입장의 모호함처럼 보이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제이슨 무어 식의 문제의식과 방법에 유비해서 이해하려는 편이다. 예컨대 제이슨 W. 무어가 자연과 인간의 구획을 지우며 서로를 공동생산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도, 자신의 전제(구획 불가능) 속 자연과 현실적으로 지칭될 수밖에 없는 자연을 대문자, 소문자 식으로 구분하여 쓰는 것 등을(『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갈무리, 2020) 참조해보자. 즉, 앨러이모가 취하는 ‘내부-작용’ 개념을 생각하더라도,, 어떤 비판의 구조 속에 이미 스스로가 들어와 있는 상태임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바깥의 관찰자인 양 비판하기는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또한 저자의 이런 몸의 회고록에 대한 기술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은 (관점 속에 이미 내포된 것이니 당연하겠지만) 이른바 ‘적대’에 기반한 정치와 거리를 두는 듯 보이고, 또한 ‘과학’에 친연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몸의 회고록들은 젠더 적대를 주장하는 정체성 정치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사회의 불확실성과 상호연결성의 불길한 분위기를 극적으로 보여준다.”(235)고 말할 때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비판은 적대적 입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개입을 요구하는 횡단-신체적 공간으로부터 나온다. 몸과 장소의 교차로에서 과학 지식이 매우 중요해졌기 때문”(235-236)이라고 할 때 저자의 횡단-신체성은 확실히 과거의 적대에 기반한 비판이론이나 정치 등의 사유와 결별하고 있고, 또한 인문학 전반에서의 과학에서의 태도와도 거리가 있다. 물론 덧붙일 것은 이러한 논의가 실재하는, 그리고 실천적으로 개입해야 할 적대의 조건이나 상황을 무화시킨다는 말이 아니다. “생태와 몸을 파괴하고 생태계를 자연화하면서 무효화하는 자본주의적·남성적·인종차별적 참조 틀”이 망치고 있는(238) 과학에 대한 논의도 아니다. 여기에서 기존 비판 이론의 전제들, 그 효과들도 질문에 부쳐진다. ‘몸의 회고록’을 주목하는 맥락에서 저자는 텍스트나 담론 등을 강화시키는 이론과도 거리를 두는 것도(248-258) 이 맥락에 놓여 있다.

이때 몸이나 생명의 기본 단위로 간주되어온 유전자 물신주의 비판도 자연스럽다. “기계론적이며, 작용능력을 지니는 개체로 상상되는 유전자에 생명 그 자체의 힘이 부여”(260)된다는 것은 이미 해러웨이 등으로부터 강하게 “세속적인 기독교적 플라톤주의”(260)의 비판을 받은 바 있는데, 저자 역시 유전자 물신숭배에 대한 비판을 4장 6장 등에서 강하게 이어간다. 또한 저자는 오늘날 몸의 회고록의 특질을 다양한 매체들이 전유하는 상황도 비판적으로 살피는듯하다. 즉, 오늘날 인간 몸을 가로지르는 복잡한 요인과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대체로 많이 알려진 편이다. 그렇기에 대중매체 등은 과잉된 정보를 전시하고(268-269) 그때의 (재현의) 폭력성은 어떤 폭로 자체가 목적인 미디어로 기능할 뿐이다. 또는 ‘오염 지도그리기’(271) 혹은 최근 한국에서 문제된 지역별 출산지도 같은 식으로 생명정치의 새로운 판본으로 작동하기도 쉽다.

즉 이 장을 읽을 때, 다루어지는 몸 회고록 텍스트들은 단지 찬사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 제각각 의미를 지닌다. 그 차이들을 짚어가면서 저자는 오늘날 몸 자체가 하나의 전장이 된 양상까지 환기시킨다. 즉, 몸을 둘러싼 오늘날 ‘내부-작용’ ‘횡단-신체성’의 인식이 이미 횡령(전유)되고 있는 상황까지 시야에 둔다면 여기에서 단지 개념의 인식에 머무르지 않는 재전유, 실천의 아이디어가 중요함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이렇듯 같은 가치를 둘러싼 지배측의 횡령과 그에 대한 재전유의 싸움은 아주 빈번하다고 여겨지는데, 그것은 오늘날 시대에 더 두드러지는 조건, 즉 일종의 ‘내재성의 평면’(들뢰즈, 과타리) 위에서의 싸움, 또는 이 저자(와 캐런 버라드) 식으로 말하자면 “‘바깥’이 이미 언제나 내부에 있으며, 지속적인 내부-작용들을 통해 여전히 ‘인간’으로 불릴 수도, 불리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무엇에 거주하고, 어떤 무엇을 변형시키는 감쌈enfolding이라는 의식을 함양”(374)하는 가운데에서의 일일 것이다.

4. 기타, ‘얽힘을 상상하는 방법 혹은 분석 사례

동시적이고 공존재적인 상황이 나와 이 세계의 조건임을 인정하는 것, 거기에서부터 다시 다른 패러다임의 사고, 말을 고안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 필요하지 않을까. 사진출처 : rosario janza

사실 4장은 5-6장의 문제의식과 내용까지 충분히 포괄한다고 여겨졌기에 5-6장은 소략하는 바지만, 5장은 ‘이탈적 작용물들 : 과학, 문화, 그리고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여기에서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이라는 말은 “몸은 환경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몸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의학 모델들은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을 결코 이치에 맞게 설명하지 못”함에도 “공간과 유동성에 초점을 맞추는 이동성accessibility에 대한 장애 모델들은 더욱 생산적인 접근 방법을 제공할 것”(300)이라고 하는 대목은, 앞서 4장 “거의 인지가 불가능한 자아 unrecognizable self”(219)라는 말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보통 예민하다고 무심하게 내뱉게 되는 그런 상태들, 어떤 질병코드로 환원되지 않지만 분명히 감각되는 어떤 상태들, 그것에 저자는 ‘이탈적이지만’ 작동, 작용하는 행위성을 부여한다.

실제 저자가 지칭하는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의 치료법은 “건강상태가 인간의 횡단-신체성의 실례가 되는지” 암시하고 또한 “그것은 어떻게 몸과 환경 사이의 흐름과 상호교환에 대한 관심이 창발적인 물질세계 안에서 사유와 존재의 새로운 양태들을 촉발하는지 보여 준다”(279)고 한다. 이때에도 화학물질 에 반응하는 몸(앞에서 논한 물질적 자아의 극단적인 예)은 “19세기 의학의 투과적 신체성들과 더 많은 공통점”(279)을 지닌다고 한다. 또한 저자는 수잔 손택이 질병을 현실로 가정하고 거기에서 “은유라는 문화의 껍질을 벗겨 내”기를 바랐던 것과 달리 “우리가 환유적 미끄러짐, 즉 의미화의 물질적 연쇄에 대한 가능성을 곰곰이 따져 볼 것”을 제안(281)한다. 이 장에서도 캐런 버라드의 논의가 주요 레퍼런스로 놓여 있다.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은 저자가 ‘횡단-신체성’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의 “전형적인 예”(283)로 분석된다. 화학물질에 예민한 사람들의 몸은 “내부-활동적인 생성”이라는 의식을 체현하고 “인간은 내부-작용의 역동적인 구조화 과정에 있는 세계-몸 공간의 일부”(314)인 것이다.

6장의 제목은 ‘과학소설에 나타나는 유전학, 물질의 작용능력, 그리고 포스트휴먼 환경윤리의 진화’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SF소설을 대상으로 분석하는 이 장은 그렉 베어의 ‘다윈 시리즈’ 소설들을 읽으며 거기에서 “포스트휴먼 환경윤리”(343)를 말하고자 한다. 저자가 말하는 포스트휴먼 환경윤리는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한 인간의 형상을 자연이라는 배경과 구별되는 것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하고, 대신에 접촉면, 상호교환, 그리고 변형을 일으키는 물질적/담론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내부-활동적인 생성으로서의 물질” 개념(343)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렉 베어의 소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충분히 논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이 장이 앞서 언급한 개념들 이외에도 ‘감쌈(enfolding)’ ‘내부-거주(in-habitation)’(345) 등의 개념이 이 포스트휴먼 환경윤리의 술어들로 다뤄진다. 또한 이때의 ‘횡단-신체성’은 “긍정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인식론적 반성과 사전주의 원칙을 위한 장소”(348)다. 이때 ‘사물들’은 관계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관계항은 관계에 앞서 존재하지 않고, “현상-안의 관계항”은 “특정한 내부-작용들을 통해 출현”(352)한다. 캐런 버라드와의 공명 흔적이 강한 장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읽어내는 이 세계 ‘얽힘’의 다양한 양상과 방법을 다시 환경, 생태의 현장(지극히 부분적인 것이지만)으로 집중시켜보며 마무리할까 한다. 4장 끄트머리에서 소개되는 최근 환경단체의 문제의식이라고 하는데, 예컨대 이런 것이다. “오염된 해양 먹이사슬이 인간과 해양 동물의 건강을 똑같이 위협한다.” “돌고래와 인간의 최근 이뤄진 체내 축적의 상호연관성을 밝히려고 진행 중”이다. “골수종이 발병할 위험에 대한 확률 산출이 해양 환경의 오염과 독성물질에 대한 인간의 노출 양자를 줄이려는 개입들을 지지할 것이다.” “이 물들이 흘러가는 강둑과 해변가에 모여 밀접하게 연관된 생명들에 대해 배려하는 집단 회의”를 수행하기 위해 “암을 지닌 사람들이 암을 가진 동물들이 산다고 알려진 다양한 물의 몸으로 이동하”는 스테인 그레버가 상상하는 “성지순례”를 따라 이동할 것이다.(274-275)

저자 앨러이모가 말하는 횡단-신체성 개념을 이처럼 인간-비인간, 이른바 사물 세계 속에서 다시 생각해본다. 인간 세계가 무수한 다른 존재와의 공존재적 상황임을 인정하더라도, 이렇듯 인간-비인간 동등한 존재론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무언가가 이야기될 때 그것에 대한 저항감은 여전히 큰 것 같다. 여전히 결정적일 때 인간 중심성은 다시 돌아오고, 다른 존재의 문제는 후경으로 밀려나곤 한다. 하지만 이 동시적이고 공존재적인 상황이 나와 이 세계의 조건임을 인정하는 것, 거기에서부터 다시 다른 패러다임의 사고, 말을 고안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 필요하지 않을까. 저자의 작업에서 그런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 글은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개최한 제16회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수정한 것입니다.

김미정

문학을 경유해서 글을 쓸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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