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움 특집] ① 어떻게 살(을 섞을) 것인가 – 『말, 살, 흙』 1-3장 읽기

‘신유물론 페미니즘’으로 분류될 수 있는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의 『말, 살, 흙』은 ‘횡단-신체성’의 사유를 전개한다. 본 글은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이러한 세계관의 윤리적 질문 즉 ‘어떻게 살을 섞을 것인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영양학, ‘바이오-모니터링’을 등을 통해 제시한다.

* 일러두기
 
· 제목: 스테이시 앨러이모(Stacy Alaimo)가 쓴 『말, 살, 흙』 의 영문 원제는 ‘몸된 자연: 과학, 환경, 물질적 자아(Bodily Natures: Science, Environment, and the Material Self)’이다. 한국어판 번역자가 저자에게 동의를 구하여 지금의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 근대의학에서 가정하듯 내/외부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폐쇄적 신체 모델에 반대하여, 다른 물질적 존재들에 의해 투과되고 변용되는 신체 모델. 이는 개체적 몸을 설명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 세계를 파악하는 은유(‘몸된 자연들’, ‘살된 존재’ 등)1로 쓰인다. 이 책을 관통하는 앨러이모의 핵심 개념이다.
 
· 환경: 앨러이모는 환경주의를 표방한다. 그는 파멜라 모스, 이사벨 반 다이크가 ‘환경’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의도에 공감한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인 ‘장소’ 개념보다 자연 세계를 상기시키며, 개인이 관여하는 다양한 관계를 광범위하게 포섭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환경’이란 용어는 ‘생태’보다 훨씬 자주 쓰이며, 앨러이모는 본인의 ‘횡단-신체성’ 이론을 적용하고 또 연대하고자 하는 세력으로 ‘환경보건운동’, ‘환경정의운동’을 지목한다.

만일 자연이 중요하다면 우리는 물질성을 더 강력하고, 더욱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p.17.)

1. 횡단하는 신체들의 세계

스테이시 앨러이모,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윤준․김종갑 옮김, 그린비, 2018.

스테이시 앨러이모는 『몸된 자연(Bodily Natures)』이라는 저서를 통해 신체와 환경 그리고 과학이 얽혀있는 사유를 전개한다. 『말, 살, 흙』으로 탁월하게 번역한 한국어판 제목처럼, 담론과 신체 그리고 환경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의 배치를 여러 쌍 혹은 조합으로 읽어낼 수 있다. 앨러이모가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로 분류되기는 하지만2, 책 전반을 통해 논의되는 것이 곧장 페미니즘의 맥락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이 책은 말, 살, 흙이라는 세 가지 층위로 ‘끈끈하게 결합한’ 세계를 여러 각도로 조망한다. 1장에서는 이 책의 핵심적 개념인 ‘횡단-신체성’을 통해 페미니즘 이론을 비롯한 환경 인문학, 과학 연구가 ‘유물론적 전회(material turn)’를 통해 나아갈 수 있는 지평을 제시한다. 2장에서는 살에 얽힌 말과 흙을 분석하는 ‘환경정의’에 대해서 다루고, 3장에서는 흙에 의한 살을 연구하는 말인 ‘환경정의의 과학’을 다룬다. 4장은 흙에 의한 살을 살로써 말하는 형식인 ‘몸의 회고록’에 대해 소개하고, 5장은 흙을 포착하여 살이 말하는 ‘화학물질복합과민증’을 다루며, 6장에서는 흙과 얽힌 살을 전망하는 말인 포스트휴먼 환경윤리를 제시한다.

실제로 몸들을 가로질러 사유하다 보면 비활성적이고 텅 빈 공간이나 인간이 사용할 자원으로만 여겨지는 환경이, 사실은 그들 자신의 필요, 요구, 행위를 지닌 살된 존재(fleshy beings)의 세계임을 인식하게 된다. 몸들을 가로지르는 운동. 즉 횡단-신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간에 다양한 몸된 자연들(bodily natures) 사이의 상호교환과 상호연결이 드러난다. (p.19-20.)

생태주의적 맥락에서 ‘몸’을 중심에 놓는 사유는 매우 큰 잠재력을 지닌 듯 보인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를 이 세계에 적절하게 위치시키는 관점인 동시에 다른 비인간 존재들을 존중하는 사고방식이다. 인간의 마음은 몸에서 비롯되며, 몸은 몸을 둘러싼 자연에서 비롯되었음이 명백하다. 또한 정신을 비롯한 신체적 활동은 여전히 물질에 의해 투과되어 좌지우지되는 물적인 것이다. 이는 비인간 생물을 몸을 가진 것들로, 생태계와 지구행성에 대해서는 몸들의 집합체로 연속되게 간주하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도록 유도한다. 그러면서도 생물과 비생물을 분리하지 않되 생명, 활기, 영혼을 띄는 존재들의 영역을 지우지 않는다. 따라서, 앨러이모의 말대로 인간은 내부-작용하는 세계의 일원인 동시에 그 특정한 작용(예컨대 생태학살, 지구가열 등)에 대해 해명해야 하는 책임을 잃지 않는다.

2. 신유물론을 수용한 페미니즘

Stacy Alaimo, Bodily Natures: Science, Environment, and the Material Self, Indiana university Press, 2010

오직 페미니즘에 관한 이론서는 아니지만, 이 책이 페미니즘을 다루는 비중,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에 공헌하는 바는 상당하다. 이 책이 기존의 페미니즘 이론에 대해 제언하는 바는 한마디로 ‘언어적 전회’에서 나아가 ‘물질적 전회’가 필요하다는 것. 성차별적 가부장제 역사에 저항하기 위해, 초기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게 씌워졌던 ‘자연’이란 이미지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경향은 ‘젠더’라는 혁명적 개념을 낳았고 사회문화가 가진 영향력과 그것의 허구성에 대해 밝혀냈다. 그러나 이는 ‘사회구성주의’로 강화되어 젠더 체계 너머에서 실재하는 몸들의 행위와 차이 그리고 역량을 배제하고 말았다. 앨러이모는 만약 페미니즘이 ‘물질적 세계에 대한 앎의 실천’으로서 생물학을 활용한다면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본성적으로 퀴어』에 따르면 인간 몸의 대다수 세포는 간성적(inter-sex)이고 버섯은 2만 8천 개 이상의 성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성애 중심주의를 매우 효과적으로 타파한다.

무엇보다 사회구성주의 페미니즘이 갖는 한계는 자연으로부터의 고립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쓰인, 자연을 수동적이고 열등하며 도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유에서 벗어나려면, ‘여성’을 자연적이지 않은 것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 더 철저하게 파고들어 그것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성차별을 지탱하는 구도인 자연/문화, 육체/정신, 남/녀 등의 이분법에서 풀려날 수 있다. 또한 그동안 여성으로 분류되었던 젠더에 갇히지 않고, 몸을 가진 존재들이 공생하는 것을 성공하고 활력 있는 만남이 창발하는 방향으로 이 세계를 배치할 수 있다. 또한 이미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출산과 양육, 돌봄과 재생산 노동을 여성에게 전담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그것들이 ‘몸을 살리고 살찌우는 몸의 움직임’이란 주목하여 그것들의 가치를 공적으로 극대화하는 것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몸’에 대한 페미니즘 이론과 문화연구가 엄청나게 쏟아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연구들은 대개 다양한 몸들이 어떻게 몸을 수동적이고 성형 가능한 물질로서 담론적으로 생산되는 지에만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 생물학적 몸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한 결과, 몸이 물질세계와 맺는 진화적이고, 역사적이며, 현재 진행 중인 상호연결들을 단절시키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이론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횡단-신체성은 이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p.21)

3. 흙과 살을 말하는 과학

‘물질적 전회’가 물질 세계의 현상을 기술하고 원리를 탐구하는 자연과학을 배척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연과학을 비평하고 재전유하는 방식으로 주목하는 시도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베스트셀러 루시 쿡의 『암컷들-방탕하고 쟁취하며 군림하는』은 수정주의적인 과학연구 실천으로,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은 버섯과 채집인 네트워크를 통해 글로벌 자본주의와 그 이후 세계를 상상하는 통섭적 연구의 훌륭한 예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앨러이모가 책 전반에서 전거로 삼는 울리히 벡의 ‘위험 사회(risk society)’ 이론은 위험을 인식하고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학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위험 사회(risk society)의 구성원들 대부분은 진정한 각성에 이르지 못했다. 울리히 벡은 근대화의 ‘위험’을 평범한 사람은, 과학기술이나 과학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해도 지극히 어렵다고 말했다. “위험의 이해는 가설과 실험, 측정 장치와 같은 감각 기관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기관을 통해서만이 “가시화되고, 또 위험요인으로 분류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서 다루는 환경보건과 환경정의의 횡단-신체성은, 정확하게 이러한 위험사회에 대한 감각에서 출현한다. 일반 개인들도 위험을 판단하기 위해, 또 자아의 정체를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 지식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 (p.60-61.)

그러나 과학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은 물론일 것이다. 이에 대한 고찰은 2장 ‘에로스와 X선’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몸은 환경과 밀착된 일부분이고 그 환경은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의해 일정 부분 조성된다. 말, 살, 흙은 언제나 긍정적으로 결합하지는 않는데, 해당 장에서 언급되는 호크스 네스트 터널(Hawk’s Nest Tunnel) 재해3는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호크스 네스트 터널 현장 모습. 사진 출처: 미국 내셔널 파크 홈페이지

이때 과학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자. 예컨대 X선은 이산화규소를 들이마시고 신음하는 노동자의 폐에 규폐증이 발생했음을 증명할 수 있다. ‘비위생적 생활방식’ 혹은 다른 어떤 요인들보다 선명하게 ‘이산화규소’와 그것을 채굴하여 들이마시게 한 회사의 행동을 노동자의 질병과 죽음에 연결시킬 수 있다. 하지만 과학 또한 인간의 활동이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다. 위의 사례에서 X선 검진은 노동자의 몸에 규폐증이 발생된 뒤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분진과 폐의 만남을 사전에 예방할 수 없다. 또한 서로 얽힌 사건의 요소들 중 ‘선천적 취약성’과 같이 책임을 편파적으로 전가하는 해석이 발생할 수 있다. 혹은 책임을 네트워크 안에 흩뜨려 분산하는 식으로 면피하는 사례도 있다.

지속되는 논란은 종종 불완전한 지식의 자연스런 결과가 아니라 충돌하는 이해관계와 구조적 무관심의 정치적 결과이다. 논란이 설계될 수도 있고, 무지와 불확실성이 제조되고 유지되며 확산될 수도 있다. (p.224.)

앨러이모는 위와 같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횡단-신체성’의 세계에 공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생화학물질 오염감시(biomonitoring)’는 환경과 신체가 마주치며 작용하는 과정을 추적하며 환경보건운동과 환경정의운동의 자원이 될 수 있다. 나아가 닫혀 있는 개체가 아닌 세계 안에서 투과되는 신체 모델 그리고 나아가 ‘횡단하는 신체’로서의 세계관을 뒷받침할 수 있다. 또한 위험사회에서 전문가가 전담할 수 없는 탐구 활동을 개인들이 수행하는 ‘대중역학’, 도시과학’을 조명한다. 이는 개개인이 세계와 직접 접촉하여 만나는 교차점이기 때문에 가능하며, 이러한 활동이 신체와 물질의 배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화학물질 오염감시(biomonitoring)라는 새로운 기술은 특정한 사람의 몸에 잔류하는 물질을 차트로 보이면서 인간의 몸에 주의를 돌린다. 환경 현장 과학이 역학과 생의학의 개념과 방법론과 만나듯이, 인간에 대한 생화학물질 오염감시는 사람과 장소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혼합한다. (p.202-203.)

4. 살과 뼈를 가진 윤리?

‘침투하는 몸들’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두 가지 영역의 존재에 살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는 환경을 ‘몸된 자연’으로서 변용능력을 갖춘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을 물질에 의해 구성되어 물질에 의해 변형되는 물질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로부터 윤리를 도출하기 위해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대상은 ‘화학물질 복합과민증’ 혹은 ‘환경질병’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선택되었다고 판단되는데, 이는 ‘환경정의’가 사람들 사이에 국한되는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또한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특정 계층에 편중되기는 하나 모든 이들에게 노출되는 특성을 지녔으므로 광범위한 경각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몸과 환경을 가로지르는 물질의 이동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초월성과 불침투성이라는 환상 속으로 도피할 수가 없다. 만일 환경윤리에 대해 우리가 “동물, 식물, [비인간] 종, 심지어 생태계와 지구에 대해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동심원의 확장으로 이해했다면, 횡단-신체성은 주권적이고 중심적인 존재로서 그러한 인간 이해를 거부한다. 대신 나는, 윤리적 배려와 실천이 ‘인간’이 언제나 이미 능동적이고 때로 예측 불가능한 물질세계의 일부분이었다는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생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p.54.)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횡단적 신체들로 세계를 바라보는 윤리가 가진 어려움에 대해서 고찰하고 싶다. 먼저 솔직하게는 저자의 윤리가 현 인류사회에 적용되기까지 걸릴 시간을 생각할 때 매우 암담해진다. 이를 ‘기후 우울’이란 개념 카테고리에 포함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러한 마음이 발생하게 된 환경의 물질적 조건, 즉 기후위기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지연하고 완화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함을 다시 자각하게 된다. ‘기후 암담함’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법한 신체적 반응은 즉 앨러이모의 윤리를 빠르게 확산시키고 강력한 행동주의로 연결시키는 과정에 대해 주목하게 한다.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의 비전을 상상한다. 앤드류 피커링이 표현하듯, 그것은 “인간 행위자가 여전히 거기에 있기는 하지만 이제 비인간과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 있고, 더 이상 행동과 지배의 중심에 있지 않는” 공간이다. “우리가 세계를 만드는 것과 같은 하나의 동일한 과정에서 세계는 우리를 만든다.”(p.116.)

즉, 횡단-신체적 주체들은 타자가 지배할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의 급격한 변화로부터 자신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지배권을 내려놓는 주체인 것이다. (p.55.)

‘횡단-신체성’의 윤리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고 정치적으로 기획하는 방식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기를 원한다. 여기서는 『말, 살, 흙』’의 세계관을 직관적이고 강렬하게 전달할 수 있는 다른 소재에 대한 아이디어를 적어보려고 한다. 먼저 ‘식사’에 대해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에 ‘생기’라는 개념을 부여하여 물질과 정신의 고전적인 이분법을 흔드는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은 ‘오메가3가 인간의 정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사례로 든다. 이는 물질의 작용능력, 마음의 물질성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는 다른 한편, 영양제를 구입하는 등의 즉각적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사유로 촉발된 행동이 없는 것을 보충하는 방향의 다른 한편으로 부정적인 것을 덜어내는 방향으로, 집단적인 운동으로 조직되게끔 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살에 대한 화학적·생물학적 언어인 ‘영양학’에 관심이 간다. 『영양의 미래』의 저자 콜린 캠벨은 자신의 연구 경력 전부를 암에 관한 국소론적 접근, 동물성 단백질 중심의 환원주의적 패러다임을 해체하는 것에 할애했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주류적인 영양학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인 이유로 동물의 살에 ‘필수 영양소’, ‘우월한 단백질’ 등의 이미지를 씌웠다. 오늘날 현대인의 식탁을 지배하는 공장식 축산은 그리하여 각종 성인병에 우리를 노출시키고 개인적·사회적으로 무수한 신체적·심리적·재정적 고통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외에도 현재의 육류 중심 식습관은 항생제 남용, 온실가스 배출, 자원 고갈 등의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이를 (비인간으로 범위를 넓힌) 신체와 과학의 얽힘을 확연하게 증명하는 사례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주류적인 영양학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인 이유로 동물의 살에 ‘필수 영양소’, ‘우월한 단백질’ 등의 이미지를 씌웠다. 사진: Victoria Shes

각자의 건강을 숭배하며 전체의 안녕을 해치는 ‘닫힌 몸’의 식습관은 한국에서도 별다름이 없다. 2023년 한 해의 식품 트렌드로 ‘트렌드코리아’ 팀은 ‘단백질’을 꼽았다. 체중을 조절하거나 근육을 키우는 운동을 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단백질은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콜린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영양학의 초기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며4, 동물성 단백질의 유해성과 발암성을 무시하는 기업과 기관의 패러다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5 그의 작업은 주류 담론으로부터의 ‘이탈’과 이를 통해 환경과 인간이 잘못 ‘살을 섞어온’ 얽힘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식물성 단백질 식품을 개발하는 특정한 방향 못지않게 우리가 섭취하는 것들(그리고 그것을 섭취하는 우리)의 정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하는 말의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연계하여 ‘생화학물질 오염감시(biomonitoring)’ 기술을 극적으로 확대․적용하는 방안에 대해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거창한 하이테크 기기로 구현되는 기술이 아닌, 4장에서 조명하는 ‘몸의 회고록’을 모두가 꾸준히 써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커피와 와인 같은 기호식품에 대한 ‘테이스팅 노트’를 작성하며 몸의 미각(그리고 촉각, 후각)으로 물질과의 만남을 분석하는 것처럼, 광범위한 식재료와 음식에 대한 일지를 쓴다거나 다큐멘터리 《슈퍼사이즈 미》처럼 유해하다고 의심이 가는 음식을 섭취했을 때 나타나는 몸의 증상을 브이로그로 만드는 것을 교육과정으로 다루는 것은? 나아가 생체에 대한 추적(바이오-모니터링)을 생생하게 현시하는 센서가 편재하는 미래는 어떨까. 미세먼지를 측정한 수치가 지도에 얹힌 그래픽을 넘어 가족들의 폐에 축적된 양을 ‘열어서’ 보여줄 수 있다면? 어제 과식한 음식이 오늘의 몸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혹은 기대와 달리 주지 못했는지) 알려주는 표지들이 우리 환경의 일부를 가득 채운다면 어떨까. ‘횡단하는 신체’들의 미래를 물질적으로도 상상해보자.

5. 참고 자료

· 김남이 외 7명, 『신유물론x페미니즘: 몸, 물질, 생명』, 여이연, 2023.

·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문성재 역, 현실문화, 2020.

· 콜린 캠밸, 『영양의 미래』, 김정은 역, 열린과학, 2020.

· 김난도 외 10명, 『트렌드 코리아 2024』, 미래의창, 2023.


  1. 수전 손택의 우려처럼,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질병에 대해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되는 문제는 앨러이모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 물질은 의미와의 연속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환경질병’은 화학물질에 의해 투과된 신체가 반응하는 어떤 것으로서, 이때 물질과 몸(마음), 현상과 언어는 분리될 수 없다.

  2. 이 책의 옮긴이(김종갑)는 후기에서 앨러이모를 페미니즘 이론의 계보에 위치시키고 있다. 한국에서 발간된 『신유물론X페미니즘』에서도 앨러이모는 신유물론 페미니스트의 일원으로 다뤄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앨러이모 본인이 『유물론적 페미니즘들』을 공동편집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3. 미국 최악의 산업 재해로 꼽히는 해당 사건은, 1930년 유니언카바이드 사의 하청사가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댐을 공사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회사는 공사 도중 바위에서 값비싼 이산화규소(silica)를 발견하여 이를 채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이산화규소 먼지가 규폐증(silicosis)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노동자들이 분진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물품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이루어진 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하였는데, 이에 대해 지역 신문사들은 18개월 동안 뉴스를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는 잇따른 죽음이 ‘검둥이’들의 ‘비위생적 생활방식’과 ‘선천적 취약성’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이 가능한 법적 행동을 모두 취한 후에야, 이 사건은 보도되기 시작했으며, 청문회 이후 기업가측은 ‘공개 위생 재단’ 설립과 건전한 캠페인을 통해 사건을 일단락했다.

  4. 단백질의 그리스 어원은 ‘가장 중요한’이란 뜻이며 초기 영양학자들은 단백질을 ‘유기물질에서 가장 중요한’ ‘생명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몇몇 이들은 단백질을 인종적 우월함과 남성성의 조건으로 연결 짓기도 했다.

  5. 참고로, 콜린은 자연식물성 식단으로 단백질을 전체 열량의 10%로 제한하는 것이 가장 ‘건강하다’고 주장한다. 다음 서평에서 해당 책을 더 자세하게 다룰 의향이 있다.

이 글은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개최한 제16회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발제문을 수정한 것입니다.

배선우

그동안 썼던 별명들은 한때의 나를 잘 설명해줬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또 다른 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격언을 실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의미를 추구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당분간은 지구를 횡단하며 ‘생활철학자’라는 직함으로, 살고 싶은 길, 살아가야 할 길을 궁리하려고 합니다. 잘 살기 위해 책을 읽고, 주로 서평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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