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의 사회상에 대한 역사적 시나리오적 접근

‘탈성장이 미래다’라는 말은 너무 쉽다. 그 미래를 어떻게 만들지를 말하지 않으면 루저나 별난 취향의 게토에서 벗어나기 어려울지 모른다. 탈성장은 도덕률이 아니며 경제 이론인 것만도 아니다. 탈성장은 규범이기도 하고 방법이기도 하고 느낌이기도 할 것이다. 미래를 그리는 시나리오에는 이런 요소들이 다 있어야 한다.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발전한 ‘전환관리’ 이론에는 ‘백캐스팅(backcasting)’이라는 기법이 있다. 예컨대 에너지, 식품, 교통 등의 부문이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전제와 방안을 탐구하는 것이다. 왜 백캐스팅을 사용하는지는 ‘포캐스팅(forecasting)’ 기법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포캐스팅, 즉 전방 예측은 과거와 현재의 주요 변수들의 추세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며 이에 기반하여 가능한 변화를 도출한다. 가령 2050년까지 인구와 GDP의 증가를 주요 변수로 하여 에너지 소비량을 예측하여 지금의 기술 조건이라면 발생할 온실가스 배출량을 계산하고, 이것을 기준선(베이스라인)으로 본다. 화석에너지를 재생가능에너지로, 즉 탄소배출이 적은 기술로 대체하면 온실가스 배출량을 얼마간 줄일 수 있다는 복수의 시나리오가 나온다.

이제까지 정부의 에너지 수급 계획이나 온실가스 감축 계획 수립에는 언제나 포캐스팅 기법이 쓰였다. 자원과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 증가가 불가피하니 발전소 증설이 필수적이고, 재생가능에너지 보급과 에너지 효율화의 발전으로 온실가스 배출 추세를 약간 완화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게 전부였다. 지난 십수 년간 왜 한국이 배출 감축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성장의 한계를 되돌아보면

Meadows, Donella H., and Jorgen Randers. The Limits to Growth. New York: Universe Books, 1972. (도넬라 H. 메도즈 외, 『성장의 한계』, 김병순 옮김, 갈라파고스, 2021.)
Meadows, Donella H., and Jorgen Randers. The Limits to Growth. New York: Universe Books, 1972. (도넬라 H. 메도즈 외, 『성장의 한계』, 김병순 옮김, 갈라파고스, 2021.)

백캐스팅은 지금의 기술과 조건이 아니라 바람직한 미래상이 기준이 된다. 2050년까지 탄소배출제로 또는 생태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면 그것을 가능케 할 다양한 방법과 경로들이 탐색된다. 미래의 시점에서 예측의 타임라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현재의 조건과 전제를 적극적으로 바꿀 수 없는지 논의한다. 자연스럽게 더욱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도출되며, 토론을 통해 여러 창의적인 가능성들이 떠오르게 된다. 따라서 백캐스팅은 규범적인 방법론이고 다중의 시민이 참여하는 개방적인 시나리오 개발 사례들을 만들어냈다.

따지고 보면 포캐스팅 역시 실은 규범적이다. 경제의 양적 성장과 물질 총량 증가를 규범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포캐스팅과 백캐스팅 자체가 어느 것을 선과 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 1972년에 발표된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는 포캐스팅에 해당할 것이다. 천연자원, 식량 생산, 인구, 환경오염 등의 변수를 투입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인간 사회의 미래가 위태롭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연구자들의 지식과 양심은 지구와 경제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하게 했다. 그들은 미래의 예측에 머물지 않고 결론에서 ‘지속가능성 혁명’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들은 지속가능해진 경제와 사회를 이룬 미래에서 1972년을 되돌아볼 수 있기를 원했다.

미래의 지구를 위한 백캐스팅

『성장의 한계』의 저자들의 논의는 주류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로부터 외면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혜안은 정확했고 절실한 호소는 여전히 울림을 갖는다. 성장의 한계라는 개념은 요한 록스트롬의 ‘지구행성적 경계(planetary boundaries)’ 개념으로,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의 탈성장 제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 큰 간극이 존재한다. 기후위기는 대규모 멸종 사태를 암시하고 사람들은 겁에 질린다. 탈성장이라는 대안은 그럴듯하지만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이상은 멀고 코앞의 전기요금 인상과 벌어들일 이윤은 구체적이다.

여기서 다시 백캐스팅의 시나리오 접근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을까? 탈성장 대안이 단지 규범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나리오들로, 주연과 조연 배우들이 지문과 대사를 갖고 연출자가 1막과 2막을 지휘하는 한편 아니 수많은 편의 드라마로서 제출된다면 어떨까? 다행히도 그런 시도들이 시나브로 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기자 에릭 홀트하우스의 『미래의 지구』(교유서가, 2021)를 보자. 이 책의 부제는 온난화하는 시대에서 무엇이 가능한지에 관한 급진적 비전이다. 그는 1부에서 ‘지속적 비상사태’를 묘사하고 나서 2부에서는 2020-30년 사이에 극적인 에너지와 경제 전환에 성공을 거두고 2030-40년에 획기적 관리가 진행되며, 2040-50년에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영성이 지배적인 모습이 되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등장하는 장치들은 지금도 존재하거나 제안된 제도와 운동들의 응용이다. 무작위로 선발된 100명의 사람들이 시민의회를 구성하고 그들 각자가 원하는 2050년의 모습을 통해 하나의 희망적인 비전을 만들어내고, 모든 사람이 지지할 수 있는 실행방안을 마련했다. 에너지의 100% 무탄소 전환, 모든 가스와 전기회사의 국유화, 시골 지역과 재생농업 투자, 포괄적인 도시 재설계 법안, 주4일제 근무, 보편적 서비스 보장 등은 현재의 경제 시스템을 2050년까지 완전한 순환 경제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다. 끝으로 그들은 원주민의 주권 인정과 기후 배상금 지급을 위한 영구기금 설립을 요구하고, 비용 마련을 위해 억만장자에게 부유세를 걷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서 정치 체제를 바꾸고 새로운 사회계약을 상상하며 그린뉴딜의 글로벌화가 진행된다.

2부에 서술되는 획기적인 관리 속에서, 저자는 이런 변화는 자본주의를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끝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모델은 지구가 급변하는 시대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학’과 순환 경제 이론을 언급한 후, 탈성장 경제로의 전환은 어떤 ‘느낌’일지를 묻는다. 왜냐하면 기후 재앙의 악화 속에서 모든 사람을 돌보는 사회로의 급속한 이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현재의 시스템보다 훨씬 매력적인 대안을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농업과 여행은 지금보다 수고롭지만 더 즐거운 일이 된다. 지구공학 적용을 심각하게 논의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남긴 교훈은 사회운동이야말로 모든 분야에서 신속하고 광범한 탈탄소화를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시, 지구를 돌보는 일은 새로운 (오래된) 영성이다.

에릭 홀트하우스의 과감하지만 일부는 진부해 보이는 시나리오에서, 어쨌든 우리는 배우들과 감독이 미래의 다른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검토하고 실행하는 시퀀스를 만난다. 그는 책 뒤쪽에 이러한 ‘상상훈련’을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도 준비해놓고 있다.

한 세대 안에 누구든 할 수 있는 것

기후변화를 알려주는 추상적인 데이터와 멀리 떨어져있는 북극곰과 기후난민의 사진이 사람들을 기후행동으로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주장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폭로와 제안들은 사람의 구체적인 동기와 감정이 수반된 시나리오 또는 내러티브로 엮일 때 힘을 갖는다. ‘프로젝트 드로다운’을 이끌었던 환경경제학자 폴 호켄이 시도하는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누구든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떠올려보게 한다. 사진 출처 : Naja Bertolt Jensen
누구든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떠올려보게 한다. 사진 출처 : Naja Bertolt Jensen

그는 『한 세대 안에 기후위기 끝내기』(글항아리, 2022)라는 제목으로 드로다운, 즉 감축과 회복력 확보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플랜 드로다운이 100가지 탄소감축 솔루션에 대한 수학적 평가와 설명이었다면, 이 책은 그런 솔루션들을 내러티브로 엮은 것이다. 해양, 숲, 야생화, 토양, 사람, 도시, 식량, 에너지, 산업, 행동과 연결 등 10개의 범주로 나뉜 글들의 제목을 보면 내러티브의 집합적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방목지 생태학, 꽃가루 매개자들의 재야생화, 개개비의 울음소리, 숲이 농장이다, 깨끗한 조리용 가열 기구, 여자아이들에 대한 교육, 지구를 복원시키는 친절한 행동들, 도시에서의 이동성,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기, 모든 것을 먹기 등등. 각 솔루션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효과를 만들어낼지를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사례를 통해 풀어낸다. 그리고 각 영역에서 할 수 있는 펀치리스트를 만들고 연결하라고 제안한다. 누구든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탈성장이 미래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 미래를 어떻게 만들지를 말하지 않으면 루저나 별난 취향의 게토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탈성장은 도덕률이 아니며 경제 이론인 것만도 아니다. 탈성장은 규범이기도 하고 방법이기도 하고 느낌이기도 할 것이다. 미래를 그리는 시나리오에는 이런 요소들이 다 있어야 한다. 아무리 거칠고 소박한 시나리오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려보고 맡을 배역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우리는 더욱 잘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올바른 시나리오가 아니라 더욱 다양하고 논쟁적인 크고 작은 탈성장 시나리오를 각자 그리고 집단적으로 쓰기 시작해야 한다.

김현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에서 활동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10년간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에너지체제의 정의로운 전환과 에너지 민주주의를 연구했으며, 에너지 전환, 도시 정치, 대중교통, 거버넌스의 민주화 등에 관심을 갖고 글을 썼다. 지금은 탈핵신문 운영위원장으로 신문 발간을 돕고, 기후위기를 알리는 교육과 탈성장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안토니오 그람시』, 『정의로운 전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를 되찾자』, 『GDP의 정치학』, 『녹색 노동조합은 가능하다』, 『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공역) 등이 있다.

댓글 1

  1.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최근 다양한 글들에서 ‘자본주의와 탈탄소는 공존할 수 없다’는 표현을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탈성장이라는 경로에서도 빠지지 않고 언급되고 있네요. 저 표현은 핵심적이면서 더불어
    탈성장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자본주의를 버리고 가는 시나리오, 자본주의 살려두고 가는 시나리오, 과거로 가는 시나리오,
    미래로 치고 나가는 시나리오, 심지어 연해주 신도시 분양 까지….화성으로 가는 것을 제외한
    온갖 시나리오 들이 3~4년안에 나와 있어야…..정치인들이 정신차리는 순간 그 중 하나에 주목하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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