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위기와 관계의 위기

구경꾼과 사건 사이에는 일정하게 왜곡된 거리(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사건과 구경꾼화된 대상 사이에 소외를 만들고 구경꾼이 계속 구경꾼인 한에서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관계에 대한 직시와 회복이 전지구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해서 마지노선에 이른 것이다.

루쉰의 구경꾼 의식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몸소 겪거나 적어도 바로 옆에서 목격해야만 비로소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피부에 와 닿지 않으면 나와 그다지 관련 없는 일이 되고, 그렇게 되면 구경꾼이 되게 마련이다. 중국 근대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은 많은 작품들 속에서 중국인이 무기력하게 된 원인을 ‘구경꾼 의식’이라고 꼬집었다. 그가 말하는 구경꾼이란 몰주체적 방관자로서 사고와 행동이 지연되는 수동적 인간을 말한다. 구경꾼과 사건 사이에는 일정하게 왜곡된 거리(관계)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사건과 구경꾼화된 대상 사이에 소외를 만들고 구경꾼이 계속 구경꾼인 한에서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문제에 대한 대응방식

오늘날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난민, 인종차별, 성소수자 등과 관련한 각종 사회 이슈들–‘정치’ 분야에 이르기까지-은 즉각적인 판단과 행동을 요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발 뒤에 물러서서 바라보기가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예외인지라 늘 사람들 사이에서 관련 정보와 이슈가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 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상이 비약적으로 심각해져 가는 것에 비해 관련 논의는 지체되어 있고 만성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기는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더러워지며, 물은 정수된 것이 아니면 먹지 못하게 된지 오래고, 재료의 께름칙함을 맛으로 덮어버리는 먹거리를 상식하는 가운데서도, 환경오염에 대해 국가나 기업 차원의 조치에 비해서 개인이 미치는 영향이 미약하다는 인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문제에 대해 구경꾼처럼, 조금 더 나아가더라도 수세적으로 반응하게 만들고 있다.

이슈는 관심을 낳고 관심은 정보를 불러 모으며 그러한 정보는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환경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회원수 수만에 달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관련한 각종 정보들이 넘쳐난다. 환경에 대해 일견 한 발 앞서 정보를 수집하며 행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대규모 커뮤니티에서의 논의는 ‘어렵고 갑갑한 환경 속에서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지키고 그러한 목표를 위한 정보를 교환하자’라는 개인주의, 가족주의, 편린화된 정보주의 이상을 벗어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정수기, 공기청정기, 가습기, 건조기, 미세먼지 측정기 등 이전까지 전혀 필요 없었던 가전제품들은 어느 브랜드의 제품을 써야 할지, 음식은 어느 회사 제품을 어떻게 가려 구입해야 할지, 천연재료가 포함된 생활용품들은 어떤 것이 좋은지… 정보는 자연스럽게 자본과 맞닿아 있고, 탄소 배출의 가중여부에서는 벗어나 있으며, 작동 범위는 가정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다.

미세먼지와 이산화탄소

일례로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문제에 관한 논의를 들 수 있다. 미세먼지에 대비해서 집안 환기구의 차폐를 철저히 하고 공기청정기를 가동시키면 실내 미세먼지 농도를 일정 수준 이하로 관리할 수 있다. 반면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및 각종 유기화합물 농도는 급속도로 증가한다. 이산화탄소의 경우 사람이 호흡하면서 내뿜는 양 때문에 밀폐된 공간에서 몇 시간만 지나도 금방 1,000ppm을 넘어가는데 1,000ppm은 다중이용시설의 이산화탄소 기준치에 해당하는 수치이고 가정 내 실내 공기의 기준치는 800ppm-참고로 우리나라 지옥철의 이산화탄소 수치는 6,000ppm에 달한다-이다. 같은 상태로 더 오래 시간이 지나면 수천ppm을 넘기게 되며 그렇게 되면 두통과 집중력 저하, 경미한 구토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

문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구속 속에서 과감히 용기 내어 환기를 하더라도 이산화탄소 수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도시지역의 이산화탄소농도는 가정에서 보통 30분 이상 환기했을 때 대개 550ppm 이하로 떨어지는데 이는 국제 기후변화 정보간 협의체(IPCC)에서 제시한 이산화탄소 마지노선인 400ppm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지난 60여 년간 90ppm이 증가한 이산화탄소 농도는 최근 10년 동안 매년 2,1ppm씩 증가했으며 400ppm을 넘은 지는 이미 수년이 지났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전세계 평균을 훨씬 웃도는 수치인 407ppm을 기록하고 있다.1

환경위기와 관계의 위기

그러나 수치로 드러나는 정보와 그 심각성이 커뮤니티에 공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공유자원 제 1호이자 지구온난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대기의 오염에 대한 우려는 가정 내 공기질, 혹은 이동 중 차 안의 공기질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었다. 미세먼지를 피해서 문을 닫으니 이산화탄소라는 또 하나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다고 개탄하면서도, 그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서 얼마나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지의 문제에는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개인의 생명 하나하나를 유지하게 해 주는 지구 생태계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무엇이 원인들인지, 거기에 나도 보탠 것은 없는지, 할 수 있다면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요새 같은 집 안에서 창밖으로 암울한 바깥을 바라보며 안도하는, 지식과 민첩성을 보유한 21세기형 구경꾼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집 안에서 철저하게 차폐시킨 것은 외부와의 공기 뿐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와의 관계 혹은 그 관계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그러한 불편부당한 관계 혹은 관계의 단절이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이어져 왔는지, 쉽게 단정된 관계의 실체가 얼마나 피상적이며 모순적인지에 대한 질문은 왜 그토록 쉽게 사장되는 것인지….

대개 피부에 와 닿으면 마음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게 마련이므로, 차라리 관련성을 최대한 줄여서 안온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인간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매끄럽고 위생적인 관계유지법으로서 부러움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바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루쉰이 말한 구경꾼이 아닌 주체, 당사자, 일원으로서의 관계 직시와 회복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 수치의 마지노선처럼 목전에 와 있는 듯하다. 환경문제는 인류가 봉착한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 중 하나가 아니라, 그동안 미루어 놓은 많은 문제들의 집약이며 핵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노마드

혼자 또는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소소하게 실천하는,
평범하게 살지만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색깔이 분명해 보이지만 무엇보다도 투명함을 지향하는,
분자적 노마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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