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팡스

프랑스어 단어 dépense(데팡스)1 는 ‘지출’·‘경비’ 또는 돈을 ‘쓰는 행위’를 의미하는 명사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의 저서 『저주받은 몫: 일반경제 시론 – 소진/소모』2 에서 이 단어는 ‘낭비’·‘탕진’ 등의 뉘앙스로 사용되었다. 『저주받은 몫』에서 바타유는 생산과 축적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자본주의적 ‘제한경제’를 비판하고, 잉여 에너지의 소모와 낭비가 인간과 우주의 근본적인 경제 원리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보기에 기존 경제학은 자원의 희소성과 효용을 극대화하는 ‘제한경제’였다. 이에 대비되게 자신이 제시하는 ‘일반경제’는 태양으로부터 무한히 공급되는 잉여 에너지를 전제로 한다고 하였다. 그는 태양이 아무런 대가 없이 빛과 열을 뿜어내며 소진한다고 보면서, 대가가 없다는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반경제에 따르면, 생명체와 사회는 소화하고 소비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하는 잉여 에너지를 필연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이 잉여 에너지는 반드시, 어딘가에 유용하게 쓰이거나, 그리되지 못한다면, 파괴[소진]되어야 하는데, 이때 어딘가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는 잉여 에너지에, 바타유는 ‘저주받은 몫(La Part Maudite)’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바타유는 이 저주받은 몫 즉 잉여 에너지가 사치·축제·예술·전쟁 그리고 희생을 바치는 제의 등의 행위로 데팡스(소진/소모/탕진)되어왔다고 보았다. 그는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가 『증여론』3 에서 중요하게 거론한 포틀래치(Potlatch)를 데팡스의 하나로 보았다. 포틀래치는 북서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관습인데 추장들이 막대한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거나 파괴하는 대규모 축제라 할 수 있다. 이 축제는, 추장이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증명하는 행위의 장이기도 하지만, 선물을 받은 사람이 반드시 그에 상응하거나 더 큰 답례를 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만드는 제도이기도 한 측면이 있어서, 그 면에서 데팡스와 연결된다. 그는 피라미드·거대종교시설 등과 같은 거대 건축물 쌓기도 데팡스의 예로 들었다.
바타유는 잉여 에너지의 데팡스가 삶의 활력을 되찾고 인간을 경제적 도구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중요한 가치라고 보았다. 또한 바타유는 데팡스가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상실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주체성을 회복하는 행위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초과하는 잉여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며, 인간의 행위가 모조리 생산이나 재화의 보존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르면 데팡스는 ‘사회적으로 남는 잉여 에너지를 처리하는 공동체적 방식’에 다름 아니며, 생산과 축적 중심의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걸쳐서, 데팡스는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탈성장 지향의 근거로 호출되었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는 경제 성장과 소비를 통해 막대한 잉여 에너지를 발생시키는데, 이 에너지는, 자본 증식을 통하여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 되먹여지거나, 상품 소비 행위를 거쳐 되먹여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제의 전개는 과잉 생산을 거쳐 자원의 과소비와 고갈을 거쳐,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데팡스는 이러한 파괴와 위기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여주는 공동체적 행위이자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일탈적이며, 폭발성있으며, 비현실적인 데팡스
데팡스를 중심으로 하는 바타유의 정치경제론에 뒤따른 논란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기존의 세속적 가치를 기준으로 본다면 일탈적일 수밖에 없는 데팡스에서, 그러한 일탈성에 수반하는 폭력·배설·금기탐닉 같은 행위에 주목한 사람들은, 데팡스가 보편 공통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해 온 가치로부터 개인을 대책 없이 풀려나게 할 여지가 있다고 본 듯하며, 그렇게 풀려난 어떤 개인이 타자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있다고 크게 걱정한 듯하다. (2) 잉여 에너지의 분출이라고 할 수 있는 데팡스가 그 잠재적 폭발성으로 인하여 대중의 비이성적 열정과 폭력을 자극할 수 있다고 본 사람들은, 데팡스가 파시즘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우려하였다. (3) 잉여 에너지를 비생산적인 방식으로 데팡스하는 것은 현실 정치경제의 대안이 되기에는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서 현실 정치경제는 곧 자본주의라고 볼 수도 있지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관리에서 벗어나는 경우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모든 체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타유는 자본주의가 생산과 이윤 축적을 중시하면서 잉여 에너지마저 생산과 이윤 축적에 돌리려 하고, 인간도 생산과 이윤 축적의 ‘도구화’한다고 비판하였다. 바타유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도 결국 생산과 노동에 집중한다고 보면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라고 보았다. 이렇듯 바타유는 20세기 이후에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있는 체제들을 대표하는 두 경우 모두 인간을 생산의 쳇바퀴에 가둔다고 보고 그 대안으로 데팡스를 ‘상상’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은 성장주의에 의식화된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실현 가능하다는 공감을 충분히 얻기 어려웠던 듯하다. 이에 따라, 앞서 정리 제시한 논란들은 사람들에게 더 쉽게 받아들여지고, 데팡스에 회의적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현실 정치경제 혹은 자본주의 혹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관리에서 벗어나는 경우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모든 체제에 익숙해진, 그리고 기존의 보편 공통의 가치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대다수의 인류는, 데팡스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탈성·폭발성·비현실성을 관능적으로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많은 사람들에게 데팡스를 중심으로 하는 바타유의 정치경제론은 생경한 것을 넘어 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졌을 듯하다.
탈성장 사회는, 관계적 삶이 이어지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
2022년 3월 26일, 웹진 『생태적 지혜』에 공개된 글4 에 공규동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탈탄소 사회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5
공규동은 21세기의 현실이 탈탄소 탈성장 사회로의 전환을 피할 수 없게 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글을 다음과 같이 이어갔다.
“현재 규모의 경제는 탄소 감축 목표치와 사회 유지 사이에서 지속적인 감축의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6

이 글에서 공규동은 탈탄소 탈성장의 실천 방략을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공규동이 사용한 ‘감축’이라는 단어도 읽는 이들의 인식의 전환을 끌어내지는 못할 듯하다. 그렇지만 공규동이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에서 살 것을 권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21세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탈성장을 자신들이 지향해야 할 바로 생각하기 어려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성장을 중시하고, 당연시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들이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에서 사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공규동에게도 그러한 설득은 벅찬 과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규동은 남다르게도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미래상을, 자신의 글 속에 박아 넣었다.
바타유가 데팡스 개념이 들어있는 『저주받은 몫』을 펴냈을 때, 양차 대전에 걸쳐 벌어진 살육과 파괴로부터 불과 5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나, 그때 사람들은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가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바타유는 당시의 현실 정치경제 혹은 자본주의 혹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관리에서 벗어나는 경우의 최소화를 지향하는 모든 체제가 인류사회라는 생태계에 풍요 속의 빈곤을 심화시켜 결국은 인류사회가 내적 균형을 잃고 자폭할 수도 있음을 우려한 셈이고 데팡스의 재정의는 그러한 우려의 산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1949년에 이미 데팡스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여 위기의 진단과 대안 모색에 적용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소수자 같았을 것이다. 그 이후 로마클럽이 ‘성장의 한계’를 주장하였고, 21세기 들어서서는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는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현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양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당연시되던 진보(progress)에 대한 낙관이라는 독단의 잠(Dogmatic Slumber)에 관성적으로 빠져있는 듯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탈성장의 구체적 책략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공규동은 현실이 탈성장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왔음을,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하여 느낄 수 있게 하려 한 듯하다.
“분당의 어느 교사가 전하는 그곳 고등학생들의 꿈이란 ‘자기 아버지만큼 살기’라고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려온 물질적 조건을 유지하기조차 쉽지 않으며, 단지 지금 삶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는 시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십대 내내 학원에서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야 하고, 직장 다니며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7
이 글은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를 극적으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이 글은 탈성장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 글에 나타난 분당 고등학생의 꿈은 한국이 더 이상 고도성장을 하는 나라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런 현실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현실에서 괴로워하고 미래에 대하여 비관하며 두려워한다. 이 글은 저성장을 현실로 받아들인 상태에서의 삶을 예상하고 설계하여 보는 것은 전 사회적인 금기 가운데 하나가 된 듯한 풍경을 살짝 보여준다. 저성장과 탈성장은 크게 다르지만, 저성장을 현실로 받아들인 상태에서의 삶을 예상하고 마지못해서라도 설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탈성장을 미래로 선택하고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에서의 삶을 현실에서부터 살기 시작하는 것 또한 어려울 듯하다. 누군가가 빈곤한 사회에서의 삶을 실천할 때 그것이 이야기거리가 된다거나 그 사람의 친구와 이웃이 점점 줄어드는 결과가 빚어지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기 어려운 사회가 지금의 한국 사회라면, “탈탄소 사회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라고 공규동이 주장한 것은, 탈성장의 책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낮게 평가할 것은 아닌 듯하다. 탈성장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구체적인 책략도 중요하겠지만, 탈성장 더 구체적으로는 빈곤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결단하고 그 결단의 굳게 지키는 것도 중요한 듯하며, 공규동은 그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공규동은 지금의 현실 정치경제가 사람들을 ‘성장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자본주의 담론들은 잉여 에너지를 사적으로 처리하도록 함으로써 개인들은 술·카지노·과시성 쇼핑·개인파티 등 데팡스를 개인화한다. …… 개인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인류학적 환상이다. 혼자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탈성장의 주체는 사적으로 물건 축적을 열망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자기 자신 안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다. 성장의 신화 속에는, 결국 우리가 충분히 가진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들이 빠져있다. 데팡스의 부재가 성장에 매달리는 성과주체를 낳는다.”8
공규동은 ‘데팡스의 개인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이는 개인화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修辭)이지, 공규동이 데팡스를 개인화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말이 아니다. 겉보기에 소모/탕진인 데팡스는 사람들을 끝없는 상품생산과 소비에 묶어버리는 잉여 에너지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나눔이라는 것이, 공규동의 글 속에서는 거듭 강조되었다. 그러니까 공규동은 데팡스 나아가 탈성장이 개인화로부터 해방되어 관계적 삶이 이어나가는 것에 다름아님을 역설한 것이다. 공규동은 관계적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 공동체 회복에 다름아님을 다음과 같이 시사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사회의 물질적인 빈곤은 확실히 보인다. 어떻게 탈성장을 실현할 것인지 논의 해야 한다. 가속주의를 통해 신속한 전환을 설계하는 가운데, 공동체 회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공동체 없이는 탈성장을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9
고집(固執)
공규동에 의하면, 탈성장 사회는, 관계적 삶이 이어지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이다. 그리고 데팡스는 그런 탈성장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의 책략으로써 중요하게 생각해 볼만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전개되는 저성장조차 소화하기 버거워하는 집단적 의식을 보면, 한국에서 탈성장을 이야기하고 데팡스를 조직하는 것은 굳은 결심 달리 말하자면 고집(固執)을 필요로 하는 일 같아 보인다.
고집(固執)은 자기의 의견을 바꾸지 않고 굳게 버팀을 뜻한다. 이는, 긍정적 의미로는 신념을 지킴이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는 합리적 근거나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갈등을 유발할 정도로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함이라 할 수 있다. 변화나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감이 고집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을 듯하다. 정신의학에서는 타협 없이 고집을 부리는 행동을 기저에 있는 불안을 완화하기 위한 방어기제나 강박적 성향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는 듯하다. 이렇듯 고집은 지금 일상어로써 두루 쓰이고 있는데, 유교 경전 『중용』 제20장에서도 이 말을 찾아볼 수 있다.
“誠者는 天之道也요 誠之者는 人之道也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여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요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니라.
성실한 자는 하늘의 도(道)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사람의 도(道)이니, 성실한 자는 힘쓰지 않고 도(道)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고도 알아서 종용(從容)히 도(道)에 맞으니 성인(聖人)이요, 성실히 하려는 자는 선(善)을 택하여 굳게 잡는 자이다.”10
이 『중용』 제20장의 일부분을 보면, 고집은 택선고집(擇善固執)이라는 말의 일부로 보인다. 주희(朱熹, 1130~1200)는 이 택선고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선을 택함은 배워서 아는 것 이하의 일이고, 굳게 잡음은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 이하의 일이다.”11
여기에 보이는 배워서 아는 것[學而知之]은 알고 태어나는 것[生而知之]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노력한 결과로 아는 것이다. 알고자 하는 것을 선택[擇]이라고 본다면, 고대 중국에서는 선(善)이 천지자연의 이미 운행하는 질서를 따름이었으니, 두 글자가 합쳐져서 된 택선(擇善)은 ‘배움을 통하여 천지자연의 이미 운행하는 질서를 알아나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며, ‘천지자연의 이미 운행하는 질서를 따르기로 함’으로 볼 수도 있겠다. 주희는 택선의 보람이 ‘밝아짐[明]’이라고 하기도 하였다.12 한편 주희는 굳게 잡음 즉 고집(固執)을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이라고 해설하고 그렇게 한 보람이 ‘강해지는 것[强]’이라고 하기도 하였다.13 여대림(呂大臨, 1044~1091)이 말한 바에 따르면, “군자(君子)가 배우는 것은 능히 기질(氣質)을 변화(變化)하기 위할 뿐”14이다. 기질이 본래 타고난 밝은 덕[明德(명덕)]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면 배우는 것은 그 기질을 걷어내어 밝은 덕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목표 즉 밝은 덕이 드러나게 하는 것에 도달하면 그 상태를 굳게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일텐데, 주희는 그것이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행하면 강하여진다고 하였던 셈이 된다. 이렇듯, ‘택선고집’을 『중용』과 그에 대한 주자학적 해설로부터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하여, 그것을 철학적으로 차용(apropriation)하여 본 결과, 이제 고집은 기질을 변화시킴[바로잡음]은 아니지만 궁극적 이익을 추구하고 그 결과로 진정으로 강하여지진 자기를 견지(堅持) 즉 굳게 지키는 것이 되었다.
지금 통용되는 일상어인 고집은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이 고집이라는 말은 지금과 같은 정치경제적 상황 속에서 데팡스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와 어울리는 말인 듯하다. 지금 여기에서,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가 일상이 되었음에도, 데팡스에 관심을 가지고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에서 살아가기를 시작하는 것은, 사람들의 진지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태도가 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경계(警戒)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 대다수는 아직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체제 즉 자본주의의 운동은 자신의 운동에 반하는 태도가 약화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데팡스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아직은 소수자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나, 생태계 파괴와 기후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에, 데팡스 혹은 가난하게 살기를 누군가가 꽉 붙잡고 나아가야 더 안전한 인류의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가 관능적 쾌락을 수반하는 눈앞의 이익(hedonic interest)이라면 데팡스는 서로 관계를 맺고 돕는 것을 통해 궁극적 이익(enlightened self-interest]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비유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동시에 주희가 『중용』과 관련하여 고집(固執)을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이라고 해설하고 그렇게 한 보람이 ‘강해지는 것[强]’이라고 해설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데팡스와 관련하여 고집을 앞세우는 것은 책략의 부족이 아니라 궁극적 이익의 추구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공규동이 “탈탄소 사회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단언으로 데팡스와 탈성장의 관계를 설명한 것 또한 책략 내놓기를 미룬 것이 아니라 굳게 지켜야 할 원칙을 먼저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어 단어 dépense의 음을 한글로 쓸 때, 대개 ‘데팡스’라고 쓰는 듯하다. 그런데 ‘데팡스’라고 쓰는 것은, 방어·수비·국방을 뜻하는 프랑스어 단어 défense의 음을 한글로 쓰는 데 더 어울리는 듯하다. 프랑스어 단어 dépense의 음을 한글로 쓰는 것으로는 ‘데팡스’ 보다는 ‘데뻥스’가 조금 더 적절한 듯하나, 한국에서는 dépense가 ‘데팡스’로 통용되는 듯하여, 관련 의견을 각주로만 밝혀 두고, 통례를 따라 dépense를 데팡스로 읽고 쓰기로 한다. ↩
Georges Bataille, La Part maudite, Les Éditions de Minuit, 1949;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일반경제 시론 – 소진/소모』, 최정우 옮김, 문학동네, 2022.↩
마르셀 모스, 『증여론』, 박세진 옮김, 파이돈, 2025; 마르셀 모스, 『증여론』, 이상률 옮김, 한길사, 2002; Marcel Mauss, Essai sur le don: Forme et raison de l’échange dans les sociétés archaïques, 1925.↩
두더지, 「[기후위기 톺아보기] ⑥ 탈성장, 데팡스와 리추얼의 복원 이야기」, 『생태적지혜』, 2022년 3월 26일 발행. ↩
공규동, 「탈성장, 데팡스와 리추얼의 복원 이야기」, 생태적지혜연구소협동조합(기획), 『탈성장을 상상하라: 성장 신화의 종말과 이후 시대』,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23, 112쪽. ↩
위의 책, 112쪽.↩
위의 책, 116~117쪽.↩
위의 책, 118쪽.↩
위의 책, 122쪽.↩
朱熹[撰], 成百曉[譯註], 『懸吐完譯 大學·中庸集註』, 東洋古典國譯叢書 3, 社團法人 傳統文化硏究會, 1991, 93쪽.↩
“擇善은 學知以下之事요 固執은 利行以下之事也니라.” 『懸吐完譯 大學·中庸集註』, 94쪽.↩
“明者는 擇善之功이요” 『懸吐完譯 大學·中庸集註』, 95쪽.↩
“强者는 固執之效라” 『懸吐完譯 大學·中庸集註』, 95쪽.↩
“君子所以學者는 爲能變化氣質而已니” 『懸吐完譯 大學·中庸集註』, 9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