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바람으로 쓰는 시골 일기

100여 일간의 시골에서의 좌충우돌 이야기. 30여 년간의 아파트 생활을 접고 도시 가까운 시골에서 살아가며 느낀 소회를 밝히고 있다. 조용하고 지루해 보이는 시골에서의 삶이 사실은 더욱더 역동적이고 바쁜 까닭은 무엇일까. 자연은 인간에게 ‘최고의 삶’을 제공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속에서 인간은 그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지 생각한다.

아침! 문득, 아침이 생생하다. 눈부신 아침 햇살을 머금은 새소리가 창으로 들어온다.

복잡한 도시를 등지고 포천의 시골로 이사를 온 지 넉 달쯤 되었다. 학교가 먼 아이의 등하교 차멀미 때문에 학교 근처로 강제 이사 결정을 했었다. 도시 생활의 편리함을 버리고 약간의 긴장감과 두려움으로 산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시골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의 절반은 아파트에서 살았고 서울에서도 거의 아파트에서 생활한 탓에 시골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와 남편이 학교와 직장으로 가고 나면 왠지 모를 적막감과 두려움이 엄습해오곤 했다. 아이가 하교하면 조막만 한 꼬마라도 있어 그나마 든든했다. 그것도 잠시, 낮에는 그나마 견딜 만한데 어둠이 스멀스멀 들이닥치는 밤이 되면 산과 어둠으로 둘러싸인 이 시골집은 사방이 다 뚫린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퇴근하는 밤 11시까지 우리 둘은 긴장감에 온몸이 경직되어 갔다. 알 수 없는 짐승 소리와 산에서 뭔가가 내려오는 소리며, 또 듬성듬성 있는 이웃집들은 왜 이렇게 빨리들 주무시는지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혹은 야생동물이 들어오는 건 아닐까. 시골 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 걱정하며 그렇게 두 달여를 보냈다. 도시의 아파트에선 느껴보지 못한 고요와 적막, 새로운 긴장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이 생활에 적응한다. 왜일까?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몸이 적응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몇 달이 지난 지금은 밤에 마당에서 꼬마와 둘이서 수영장을 펼쳐놓고 밤 물놀이를 할 정도로 편안해졌다. 여전히 우리 집 불빛만 대낮 같고, 우리 집만 시끄럽다. 가끔 주말에는 주변 집들에도 손님들이 오시거나 주말 집으로만 사용하시는 분들이 오기도 해서 시끌벅적하지만, 주중에는 우리 집에만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덜 무섭다. 신기하네!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대학을 오기까지 고향을 떠난 적이 없던 나는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되었다. 그 첫날, 면접을 보기 위해 청량리역에 내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학교로 가던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매캐한 냄새며 복잡한 소리와 현란한 시각적 자극들은 시골에서 볼 수 없었던 ‘지저분함과 더러움’이었다. 갈아타야 하는 지하철은 왜 또 그리 복잡하고 먼 거리인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피곤함이 몰려왔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충격’이었다.

서울에서 생활할수록 몸은 점점 고단해지고, 아프고, 피곤했다. 도시에서 먹고, 입고, 자는 일은 피곤한 일이었다. 건강하지 못한 먹을거리, 이동 수단과 이동 거리의 불편함(지하철을 타는 것은 노동이다), 주거 공간의 삭막함(일단 나무가 안 보인다. 지하에도 옥상에도 방이 있고 창문을 열면 먼지가 가득 쌓인다. 심지어 창문 없는 고시원도 있다. 놀랍다!), 불쑥불쑥 들이대는 자극들의 불편함. 어쨌든 살기에는 너무 피곤한 동네이다. 일 년에 몇 차례씩 나를 찾아오시는 부모님도 답답하다는 말과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하시고 일찍 내려가 버리셨다.

서울에 살면서 나는 본능적으로 나무를 찾게 되었던 것 같다. 주거지를 구할 때는 4층 이하이거나 되도록 1층이어야 하고, 거실 창밖으로는 꼭 나무가 보여야 한다.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간혹 층수가 높은 아파트를 계약하면 여지없지 계약 기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이사를 하곤 했다. 산 밑에 위치한 아파트 1층, 2층(이런 아파트는 서울에서 찾기도 힘들고, 아파트까지 가는 거리도 만만찮다)에서 살아왔다.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고,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점점 서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 또한 본능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 지금, 여기 경기도 포천시 직동리다.

되돌아보니 6년 전에도 제주도를 내려가겠다고 설쳤다가 현실적인 이유로 정착에 실패했었다. 그때도 제주도 비자림과 까만 돌에 꽂혀서 즉흥적으로 두 달여 만에 땅을 구입했다가 접었다. 일과 육아로 바쁜 와중에 나는 미친 사람처럼 제주도를 1~2주에 한 번씩 내려가 땅을 보고 왔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떠난 적이 없던 남편은 오히려 시골이 외롭고 무섭고 벌레가 나와서 싫다고 했지만, 뭔가에 홀려 정신 나간 아내를 받아들여 제주도 정착을 결심했었다. 본능인가, 나는 끊임없이 나도 모르게 자연을 찾아갔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지난 20여 년간 서울을 떠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현실적으로 타협하여 도시를 약간 벗어난 시골, 직동리 주민이 되었다. 야호! 몇 달간의 나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생함’이다. 살아있다! 산, 공기, 새, 물소리, 벌레들의 날갯짓, 대왕 거미, 모기, 날씨와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구름과 나무들의 색깔, 빗소리, 파도와 같은 바람과 공기. 이 쓸모없어 보이는 자연스러운 것들이 나에게 ‘삶’을,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일상은 심심한 듯 보이나, 나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근육이 점점 붙어가고, 아침에는 저절로 눈이 떠지며, 하루를 무기력하게 침대에만 누워있는 날이 사라지고, 피부는 검게 그을러 가고 있다. 이 변화는 도대체 무엇인가. 요 며칠 장마로 해가 들지 않아서인지 몸이 바로 반응한다. 찌뿌둥하고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는다. 비타민D의 합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인가. 밤에 자꾸만 늦잠을 잔다. 나의 몸이 자연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여름의 새들은 봄의 새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느낀다. 봄 새들이 우아한 소리로 독창한다면 여름 새들은 떼를 지어 합창한다. 마당에 나와 있으면 뒷산에 새들의 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다. 짝짓기라도 하는 것인가.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음은 확실하다. 여름은 자연에 바쁜 계절인가 보다. 텃밭의 식물들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자라난다. 먹고 돌아서도 또 자라나 있다. 여름의 햇살과 봄의 햇살도 다르고 하늘도 시시각각 다르다. 가을은 또 어떨지. 계절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사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8월 둘째 주에 우리 집엔 이미 가을이 와 있다. 귀뚜라미가 이미 울고 있고 바람이 선선하다. 뉴스에서는 한창 장마로 인한 피해 상황을 보도하고 있는데, 우리 집은 이미 가을이다. 도시에서 계절의 변화는 뉴스를 통해 인지했는데, 지금은 시시각각 변하는 햇살의 강도와 느낌, 바람의 세기와 온도, 각종 벌레의 울음소리 변화, 다양한 초록색의 미묘한 변화, 감나무의 냄새, 개천물의 흐름소리로도 알 것 같다. 아파트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를 매일 아침저녁으로 느낀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안동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산속에 있었다) 학교 옥련동산(연못, 등나무, 뒷산이 있었던 교정)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고 등나무 아래 벤치에 누워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그때가 생각이 난다. 잊고 있었다, 그 찬란한 푸르름을. 여기에 와서야 다시 찾은 느낌이 든다.

“저게 언제 자라나 싶었던 상추와 깻잎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폭풍 성장을 하더라.” 사진출처 : Markus Spiske
“저게 언제 자라나 싶었던 상추와 깻잎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폭풍 성장을 하더라.”
사진 출처 : Markus Spiske

지난 4월, 옆 동네 언니(학교 친구 엄마)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작은 텃밭에다 뭔가를 잔뜩 심어놓고 갔다. 나는 텃밭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농협이 가까이에 있으니 장 보러 가는 것도 수월한데 귀찮게 텃밭을 하다니), 언니는 잡초를 뽑고, 밭을 정리하고, 집에서 만든 거름이라며 뭔가를 뿌리고, 각종 식물을 강제로 심었다. 오이와 호박은 담을 따라 심고, 고추는 6주 정도면 세 식구 충분히 먹을 수 있다며 심고, 각종 상추와 치커리는 물이 빠져나갈 골을 예쁘게 만들어 나란히 심고, 파프리카는 재미 삼아 관상용으로 심고, 토마토는 지나가다 따 먹으라며 심어놓았다. 내 눈에는 잡초 같은 풀들이 군데군데 있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 보니 깻잎과 가지도 있더라. 언니 덕분에 사나흘에 한 번씩 잡초를 정리하는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참 희한하게 재미가 난다. 귀여운 애들이 ‘나 여기 있다’라고 하는 것 같다. 꽃이 폈나 싶었는데 쪼끄마한 열매가 고개를 내민다. 성냥개비만 한 오이가 나고, 줄줄이 매달린 방울토마토가 나고, 땅바닥에 붙어있어서 저게 언제 자라나 싶었던 상추와 깻잎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폭풍 성장을 하더라. 매일 아침 얘네들이 간밤에 잘 있었는지 확인하고, 성장을 대견해하고, 관심도 없는 남편에게 보라고 권한다, 내가! 웃긴다! 내가?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를 귀찮아 하는, 자식에게조차 적당 거리를 유지하는 내가 얘들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을까 노심초사한다. 어이없다. 이건 뭐지? 나이가 들면 식물 키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내가 늙는 것인가. 어쨌든 나의 불타는(?) 애정 때문에 농협에 가지 않아도 우리 집 텃밭 냉장고는 가지, 오이, 호박, 깻잎, 각종 상추, 치커리, 파프리카, 파가 상시 공급 상태가 되었다. 냉장고가 무섭게 채워진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화수분 같은 텃밭 냉장고 덕분에 나는 또 바빠졌다. 요리하는 것을 싫어하고 잘하지도 못해서 대부분 밀키트, 반찬 가게, 각종 맛집과 배달앱을 애용하던 나였다. 김장 김치가 짜니, 참기름을 넣으면 되지 않나 할 정도로 요리와는 거리가 먼 나였다. 오죽하면 엄마가 반찬 하는 분을 일주일에 한두 번 모시는 것을 권할 정도였으니. 그런데 시골에는 아파트 앞 반찬 가게도 없고, 밀키트도, 배달 음식도 없었다. 이사 올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난관이었다. 그리고 텃밭 냉장고의 귀여운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지는 찌고, 볶고, 양념하고, 깻잎은 날것으로 먹거나 쪄서 양념하거나 튀김옷을 입혀 튀겨 먹고, 오이는 소박이 하고, 무침도 하고, 호박은 볶거나 전 부치고, 고추는 생으로 먹고, 각종 볶음과 양념에 잘게 잘라 넣고, 상추와 치커리는 맛있는 쌈장 만들어 쌈으로 먹는다. 아이가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나는 몇 개월 만에 식구들과 지인들이 인정하는 요리의 달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 남편이 의아해하며 맛있단다. 나는 단지 소중하게 키운 텃밭의 작물들을 버릴 수가 없어서 인터넷을 뒤져가며 연습을 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사 온 지 이제 겨우 4~5개월인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하다. 마치 몇 년이 지난 것 같은 이 기분도 신기하다. 여름이 오기 전 한동안은 주말마다 지인들을 초대하여 화로에 불 피우고, 먹고 떠들곤 했다. 아이들도 수시로 초대하여 에어바운스와 작은 수영장을 설치하여 놀게 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초대한 사람도 초대받은 사람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이유가 참 단순하다. 편한 사람들과 불 피우고 술도 마시고 얘기도 할 수 있고 바람도 좋아서란다. 1~2주에 한 번씩 습관처럼 오는 사람들도 있다. 같은 이유일 것 같다. 아파트 생활이 지겨워서가 아닐까. 도시에서의 생활은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달라질 것이 없었던 지루한 삶이었고, 어느 날은 허무하고 슬프기까지 했었던 적이 있었다. 남편과 나는 이야기한다. 다시 도시로 나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만으로도 싫다고. 우리는 다음의 삶에 관해 이야기한다. 바람이 선선한 가을에는 이 집에서 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하다.

나무늘보264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어린 시절 친한 사람들이 ‘늘팽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늘보와 달팽이의 줄임말인 듯. 어릴 때 1년에 10번 정도 제사가 있었는데, 큰집에 가면 큰집 서재에 콕 박혀서 책 보는 것을 좋아해서 사촌 오빠가 놀리려고 지어준 별명입니다. 264는 제가 시인 이육사를 좋아해서 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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