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문명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것인가? – 연극의 서사구조를 중심으로 ③

연극 이야기 구조의 특징은 말로서 발화된다는 점에 있다. 전환 시대의 이야기 구조는 예언자의 말처럼 선언하는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 되는 것은 예언자 위주의 신, 영혼, 세계에 대한 설명구조가 결국 즉시성, 즉각성, 즉흥성의 현장발화 형태이기 때문에 수정되거나 정정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동시에 아버지-말, 아들-영혼의 형태로 형이상학화되기 일쑤인 것도 구술 문명의 한계이다.

4. 이야기구조의 네 가지 단계와 연극성의 배치

1) 축의 시대 : 예언자(말하기)의 시대

“축의 시대(독일어: Achsenzeit)는 독일 철학가 칼 야스퍼스가 고안한 표현으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를 일컬으며, 1949년 출간한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에 처음 등장한다. 이 시기에 인도의 석가모니, 중국의 공자,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여러 사상가가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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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했던 시기였던 축의 시대에서는 공동체로부터 개인 발언의 자율성이 생겼다. 특히 제정일치 사회에서 왕 이외에는 발언권이 없던 시대에 책사나 예언자의 형상을 띠면서 말의 자율성을 넓혀 나갔다. 인류에게 있어 이만큼 말이 많이 만들어졌던 때가 없었고, 중얼거리는 주문 이외에는 익숙지 않는 민중에게 맥락화된 발언들의 기록되고 전승되었다. 이 시기에 이야기 구조는 대부분 쉬운 언어로 쓰인 민중의 학습서와 같은 것이었다. 사실상 비기(秘記)로서 일 대 일 대응 과외 형태로 왕이나 귀족들에게 전달되었던 내용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사람들은 말의 자율성의 시대에 고무되었다.

개인의 발화가 은유와 비유, 예언, 책략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말이 애니미즘으로부터 분화하여 자율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주술적 형태의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는 주력(呪力)으로부터 처음으로 신, 영혼, 세계 등이 이야기 구조의 형태로 다가온 시기이다. 다시 말해서 말 자율성의 시기인 축의 시대 이후부터는 민중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규칙과 계율, 윤리 등을 학습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비록 왕은 아니지만, 왕에 버금가는 권위와 자존감 등을 민중들이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예언자와 책사, 예술가의 형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율성이 처음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연극 이야기 구조의 특징은 말로서 발화된다는 점에 있다. 전환 시대의 이야기 구조는 예언자의 말처럼 선언하는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 되는 것은 예언자 위주의 신, 영혼, 세계에 대한 설명구조가 결국 즉시성, 즉각성, 즉흥성의 현장발화 형태이기 때문에 수정되거나 정정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동시에 아버지-말, 아들-영혼의 형태로 형이상학화되기 일수인 것도 구술 문명의 한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틀짓기와는 별도로 말이라는 매체가 가진 미래진행형적인 방향성 자체는 엄청난 힘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연극에서의 발화가 색다른 힘과 에너지로 재편되기 위해서는 축의 시대의 예언자적인 말하기에 대해서 차분히 성찰할 필요도 있다.

2) 해석의 시대 : 주석가의 시대, 읽기의 시대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에 관철되고 있는 음성중심주의를 문제 삼는다. 음성중심주의는 말과 글(쓰기)를 구분하고 글(쓰기)에 음성, 말에 특권을 부여하고자 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이는 음성을 일차적으로, 기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데리다는 음성에 최우선적으로 특권을 부여하는 형이상적 전통을 의문시하고 그러한 사고틀이 숨겨진 모순들을 폭로하고자 한다.

「해체주의란 무엇일까? (데리다와 해체주의) – 현대해석학 강의 1」

축의 시대로부터 방대한 예언자의 말이 남긴 문헌에 대한 정리와 각주의 시대가 개방되었다. 이는 해석적인 입장에서의 읽기의 시대로서 해석학적 자율성의 범위가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듯 결국 회귀적인 문헌 읽기의 반복이다. 심지어 예언자의 시대에서 맥락화된 언술들을 사실상 다시 애니미즘적인 주력에 의거한 기도문으로 바꾸기까지 한다. 중세의 수사나 동양의 스님들의 백과사전적인 문헌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이들의 작업은 문학적 자율성이라는 색다른 대지가 열리기 전까지 해석의 자율성에 입각하여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토시 하나 바꾸고 각주를 넣는 수준에 불과했다.

초기의 문학가들은 신의 언어에 필적하는 인간의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숭고의 미를 글에 부여하였고, 이는 구술문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의미한다. 
사진출처 : Alessio Fiorentino
초기의 문학가들은 신의 언어에 필적하는 인간의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숭고의 미를 글에 부여하였고, 이는 구술문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의미한다.
사진출처 : Alessio Fiorentino

이러한 상황은 말이 글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결국 말이라는 음성중심주의에 입각한 글은 아버지-말에 대한 아들-영혼의 형이상학적인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말에 대한 권위에 의존하여 글이 종속되는 형태였으며, 내 안에 또 하나의 권위 있는 아버지라는 로고스를 잉태하는 것에 불과했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것을 구술문명로 규정하면서 문자 문명의 개방을 응시하였다. 사실상 문학의 자율성이 그 다음으로 이어지면서 해석의 자율성을 대체하는 데 초기의 문학가들은 신의 언어에 필적하는 인간의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숭고의 미를 글에 부여하였고, 이는 구술문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석의 시대에 영혼의 글쓰기는 분석 시대의 손 글쓰기로 이행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읽기의 시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연극 자체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카리스마를 가진 한 리더에게 종속되어 아버지 형상 유형의 판에 머문다면, 실질적으로 예술창작의 자율성을 개방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결국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리더십에 따라 서로 수정하고 정정하면서 끊임없는 글의 자율성, 문학적 자율성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해석자나 각주자의 입장이 아니라, 창작자의 입장이 되기 위해서는 말의 권위가 없는 무수한 덧글, 첨삭, 수정, 정정 등의 집단적 리더십을 통해 가능하다.

3) 분석의 시대 : 대답(전문가)의 자본주의, 쓰기의 시대

앞서 얘기했듯이 해석학적 자율성에서 문학적 자율성으로 이행하면서 셰익스피어와 괴테 등의 대문호가 탄생했다. 이는 신의 언어를 넘어서는 인간의 위대성과 숭고함을 갖추려 노력한 시대이기도 했다. 문학의 자율성은 사실상 쓰기의 시대를 개방하면서, 읽기의 시대의 각주자와 해석자의 형상에서 창작자의 형상으로 글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데리다에 따르면 구술문명에서 문자문명으로 이행을 의미하며, 말이 아닌 글의 자율성으로 인해 언제든 수정하고 첨삭할 수 있는 글에 따라 음성중심주의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글쓰기의 시대의 개방은 사실상 권위에 억눌리지 않는 자유로운 말의 시대도 동시에 개방할 수 있었다. 말을 글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현대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처럼 수정하고 첨삭하고 정정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역전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말과 글 둘 다 자율성이 보장되었던 것이 글쓰기의 시대의 개방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영혼의 글쓰기가 아닌 손의 글쓰기는 글 자체를 연장통의 도구로 다루는 방식을 의미한다. 연장으로서의 글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고, 작가의 아우라에 종속되지 않고 자율성을 갖게 된다.

구술 문명의 시대인 형이상학 시대에서는 예언자들이 은유와 비유를 통한 의미를 빗겨나가는 발언을 하면 그것이 권위를 갖게 되어 다시 반복구, 후렴구의 기도문과 같은 형상으로 바뀌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문자 문명에서는 형이상학처럼 신, 세계, 영혼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즉, 본질과 이유에 대한 은유와 비유를 통한 설명과정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대신 작동과 양상에 대해서만 기능적으로 대답을 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은 ~이다”라는 예언자의 말과 완전히 다른 근거를 가진 정의(definition)의 방식이 대답을 자임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이러한 전문가 주의는 대답의 자본주의가 가진 작동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사물, 생명, 자연의 본질과 이유에 대해서 대답(형이상학)하지 못하고 작동과 양상만 기능으로 대답하고 설명할 수 있는 기능적 전문가의 시대를 의미한다.

문자 문명의 극한은 결국 수많은 이야기꾼들의 시대의 개막이라 할 수 있으며, 연극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와 생성의 판과 마당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Pickled Stardust
문자 문명의 극한은 결국 수많은 이야기꾼들의 시대의 개막이라 할 수 있으며, 연극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와 생성의 판과 마당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Pickled Stardust

그러나 전환사회는 전망은 “~은 ~이다”라고 의미화=표상화=모델화를 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은 ~일까?”라는 문제 제기가 가진 n-1 분절의 지평으로 향하는 데 달려 있다. 결국 전환사회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연극에 있어서 관객은 그저 전문적인 연극인의 무대에 들러리가 아니라, 그 자신의 갖고 있는 잠재력과 깊이를 펼칠 수 있는 판과 마당 자체를 갖게 되는 계기로서 연극의 판과 마당의 참여가라고 할 수 있다. 문자 문명의 극한은 결국 수많은 이야기꾼들의 시대의 개막이라 할 수 있으며, 연극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와 생성의 판과 마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대답의 자본주의가 가진 근대적인 이분법인 주인공과 관객의 무대장치를 완벽히 허물면서 수많은 이야기꾼이 함께 만든 판과 마당의 개방을 의미할 것이다.

4) 전환의 시대 : 듣기와 이야기꾼의 시대로서의 연극

전환사회는 수많은 이야기꾼이 함께 말하고 듣는 시대이다. 문제는 듣기라는 판이 깔려 있기 때문에, 수많은 이야기꾼들 각자가 말하고 쓰고 읽고 노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대답의 시대에서 문제 제기의 시대로의 이행으로 앞서 설명했다. 여기서 대답 중심이라면, 하나의 문제 제기에 하나의 답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답을 모델링하면서 기능 분화하면 효율적으로 문제해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대답의 자본주의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반면 문제 제기 중심의 전환사회에 접근하게 되는 하나의 문제 제기는 대답이 없을 수도, 여럿이 대답일 수도, 모두가 대답일 수도 있다는 구성주의적인 지평이 열린다. 다시 말해서 문제 제기는 세상에 대한 재창조와 재구성 능력을 의미하며, 하나의 이야기 구조가 아닌 수많은 당사자와 주인공들의 이야기 구조를 설립하는 과정 자체가 매우 중요해진 상황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꾼의 등장은 전환사회의 전망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이야기꾼이 등장해야 전환사회가 가능할 이 시기에 새로운 국면에 직면한다. 이는 기후 위기로 인해 마음의 위기, 상상력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현실이며, 결국 이 세 가지 위기는 이야기 구조의 위기의 상황으로 직결된다. 이러한 점에서 전환사회의 마중물이 될 기후행동은 주변과 곁, 가장자리의 수많은 이야기꾼을 양성하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꾼은 주인공(전문가)/관객의 이분법이 아니라, 모두가 이야기꾼이 되어야 하는 공동체와 네트워크 유형의 무대의 판을 등장시킨다. 연극의 배우들은 끊임없이 이야기 구조를 부추기는 퍼실리테이터와 같은 형상일 수 있고, 전환사회를 열어낼 활동가 형상일 수 있다.

듣기의 판이 깔리면, 모든 사람이 역사적인 매체 모두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연극 판이라는 가상적인 설정 위에서 예언자적 말하기를 할 수도 있고, 해석자의 읽기를 할 수도 있고, 대답의 쓰기도, 문제 제기의 이야기꾼도 될 수 있다. 예술창작자들은 모든 역사적이고 인류학적 유형의 매체를 계통적으로 다시 복원해 내면서 거대한 전환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속에서의 특이점을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꾼은 누군가를 대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 구조 속에서 녹아내서 얘기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삶의 영토, 실존의 영토에 기반해서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맥락화된 말은 탈맥락화된 말과 초맥락화된 말 등을 다시 구성하며, 그 맥락은 삶의 배치이자 사회적 배치이자, 우주와 자연, 생명의 배치이다. 연극이 삶의 영토에 내재하는 우주, 자연, 미생물, 동물, 식물, 광석 등의 무수한 주체성이 교차하고 횡단하는 것에 대해서 표현양식이라면 충분히 이 시대 이야기꾼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이 글은 2022년 《제40회 대한민국연극제 밀양 대한민국 연극 아카데미 설립을 위한 다원 포럼》에 발표 수록된 글입니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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