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광주비엔날레 톺아보기] 방구석 관람자들과 함께 하는 ‘비대면’ 전시 동행③

작품 소장, 미술품 재테크 등이 연일 화제인 요즘, 이번 《제 13회 광주 비엔날레 –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에서는 미술의 경제적 가치를 넘어, 예술 본연의 기량을 뽐내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동시대의 ‘최전선’에 선 작품들이 전시된 비엔날레는 자칫, 난해하고 불친절한 행사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조금만 가이드를 해준다면 즐거운 유흥이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현대 미술 관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전시 리뷰이자 누군가를 위한 안내서가 되길 바란다. 함께 ‘비대면’으로 전시를 감상해본 후 이번 비엔날레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작품 함께 관람해보기

지난 번 글에 이어서 이번에도 《제 13회 광주비엔날레》의 작품들을 함께 감상해보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갤러리 3, 4, 5에 설치된 작품들을 볼 것이다. 각 갤러리마다 세부 주제가 있지만 결국 하나의 큰 주제가 전체를 관통한다. 갤러리 2 “산, 들, 강과의 동류의식”의 작품들은 대체로 민속문화의 색이 짙고 원시신앙, 샤머니즘적인 맥락을 공유하고 있었다. 갤러리 3 “욕망 어린 신체, 분과적 경계 너머”부터는 여기에 첨단 과학 기술이 더해진다. 자연과 기술이 대립하거나, 한쪽이 다른 한쪽을 잠식하기보다는 ‘결합’된 상태로 함께 한다. 그로 인해 지금껏 보지 못한, 상상 속의 존재,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형상들이 기존의 사유를 뒤집는다. 5점의 작품을 통해 이를 확인해볼 수 있다.

– 작품 5 & 6 & 7

http://noosphericsociety.com/#/section2

http://noosphericsociety.com/#/section6
작품 5. 안젤로 플레사스,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및 〈테크노샤머니즘 예술 선언〉 웹사이트

작품 5. 안젤로 플레사스,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설치 전경 사진.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5. 안젤로 플레사스,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설치 전경 사진.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5. 안젤로 플레사스, 도담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영상 및 퍼포먼스 비디오 스틸샷.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5. 안젤로 플레사스, 도담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영상 및 퍼포먼스 비디오 스틸샷.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5. 안젤로 플레사스,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설치 전경 사진. 누스페릭 마스크를 입은 안젤로 플레사스와 누스페릭 만다라 및 핸드 제스처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5. 안젤로 플레사스,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프로젝트. 설치 전경 사진. 누스페릭 마스크를 입은 안젤로 플레사스와 누스페릭 만다라 및 핸드 제스처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5는 안젤로 플레사스(Angelo Plezzaz)의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Noospheric Society〉 프로젝트 결과물이다. 비엔날레 전시관 갤러리 4에 설치된 플레사스의 거대한 작품은 은박의 대형 커튼으로 독립적인 전시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커튼 위에는 누비공예로 제작된 손이나 눈, 사람의 머리와 같은 정체불명의 것들이 색색깔로 제작되어 부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손마디에 눈이 달린 손가락 끝에는 마치 외계인의 손처럼 동그란 손톱이 달려 있고, 손톱 안에는 스마일이나 별자리 같은 각 문화권의 다양한 상징 기호들이 합성되어 있다. 이러한 누비 공예 작품들은 〈누스페릭 만다라 Noospheric Mandala〉(2018-2021) 연작으로 각 작품에는 누스페릭 소사이어티를 위한 상징을 담겨 있다고 한다.1 커튼 안으로 들어서면 교회 제단을 연상시키는 계단 뒤 벽에 〈누스페릭 마스크 Noospheric Mask〉(2020)를 입은 작가의 모습이 프로젝터 빔을 통해 상연된다.

플레사스는 사이비 교주 같은 형상을 한 채 영상 속에서 “테크노샤머니즘 예술 선언(Technosha-manist Art Manifesto)”을 발표한다. “어떻게 우리가 마녀와 과학자, 치료사와 의사를 결합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기술과 영성의 상반된 입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테크놀로지’와 ‘샤머니즘’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의 지식이 조화롭게 공생·공존한다는 관점에서 “한국”을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1998년, ‘사이버(cyber)’와 ‘무당(shaman)’의 조합으로 탄생한 LG인터넷의 사이버 무당 ‘사샤(Cysha)’2를 소개하며 고도로 기술이 발달한 한국 사회에서는 미신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프로젝트를 위해 한국에 방문한 작가는 전직 조선소 용접공이자 독특한 무속 의식과 굿의 형식을 독학한 무당 도담과 협력한다. 플레사스와 도담은 함께 굿을 벌이기도 하고, 디지털 기기에서 수반되는 전자기파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는 〈누스페릭 마스크〉를 제의 의상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누스페어(Noosphere)’는 인류가 오랫동안 집적해 온 공동의 지적 능력과 자산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가상공간의 세계를 일컫는다. 다시 말해, 사이버 공간에서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으로 만들어가는 인류통합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안젤로 플레사스는 ‘누스페릭 소사이어티’를 구축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는 그러한 프로젝트의 상징물이나 활동 내역 등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플레사스가 주장하는 누스페릭 소사이어티의 핵심에는 과학 기술과 영적인 것의 결합이 있다. 그는 샤머니즘을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이자 치유 기술이라고 제안한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사스의 작업들은 다소 엉뚱하고 코믹한 발상으로 사이비 종교를 패러디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는 ‘누스페릭 소사이어티’가 “영성, 문화적 이질성, 치유, 우주 생활, 개인 정체성, 의사소통, 언론의 자유와 같은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life)’에서 비롯된 문제를 다루는 공동의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디지털 해독의 제단이자 사색하는 만남의 공간, 온/오프라인 현실과의 관계를 재평가하는 공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탐구하는 공간이면서 공간과 시간에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플레사스의 주장은 뉴미디어 아트의 선구자인 로이 애스콧(Roy Ascott)가 사이버네틱스에 입각해 주장한 ‘테크노에틱스’와도 유사하다. 애스콧은 디지털 가상 공간에서 우리의 몰입 경험을 아마존의 퀴쿠루 인디언들이 아야후아스카(Ayahuasca)라는 환각제를 통해 행했던 영적 체험들에 비유한 바 있다. ‘테크노에틱스(technoetics)’는 더 이상 주체-인간 중심 행위자와 객체-비인간 존재 및 사물의 이분법적 관계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기술 발달로 인해 디지털과 연결된 의식, 인공 생명체 등 인간, 자연, 기술이 상호작용하며 테크놀로지와 정신이 결합되는 것을 말한다.3 안젤로 플레사스는 로이 애스콧의 주장에서 나아가 기술 발달이 고도화되고 있는 현재 발생하는 각종 문제들, 모더니티에 의해 파괴되는 연결망에 대한 대안책이자 다가올 미래를 위한 치유의 방법으로, 기술과 영성활동의 결합인 테크노샤머니즘적 의례를 제안한다.

https://www.emodemedeiros.com/transmutations
작품 6. 에모 데 메데이로스, 〈변형 Transmutations〉, 비디오, 3분 23초, 2016. (〈부두노〉 속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영상)

작품 6. 에모 데 메데이로스, 〈부두노〉(2017), 혼합매체,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6. 에모 데 메데이로스, 〈부두노〉(2017), 혼합매체,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6. 에모 데 메데이로스, 〈부두노〉(2017), 혼합매체.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6. 에모 데 메데이로스, 〈부두노〉(2017), 혼합매체.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6, 에모 데 메데이로스의 〈부두노〉 역시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프로젝트처럼 테크노샤머니즘적인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미래학이 고대 신탁기법인 이파를 만나면 어떨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부두노〉는 개오지 조개껍질로 뒤덮인 조개 헬멧으로 눈 부분에는 스크린이 결합되어 있다. 각 스크린에서는 우주로 쏘아 올리는 로켓 발사의 현장 영상이나, 바닷가 해변에 앉아 모래에 무언가 표시를 하는 의례적 행위를 하는 퍼포먼스 영상 등이 교차되어서 나타난다. 개오지 조개껍데기는 고대의 화폐이자, 부와 풍요, 여행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이파(Ifá)’ 예언자들의 주술도구로 쓰였었다. 이파는 나이지리아와 베냉의 부두교에 잔존하는 고대 미래학의 신탁 기법인데, 영매를 통하는 점술과 다르게 이파는 방대한 양의 언어 자료와 수학 공식으로 계산을 통해 신탁을 내린다. 그러므로 가공하지 않은 천연 자원을 재료로 삼아 제작된 헬멧 속에 연결된 기계장치들과 스크린은 마치 이파의 인공지능(AI) 점술사가 운세를 계산하는 듯하다.

작품 7. 사헤지 라할, 〈바신다〉(2020), AI 시뮬레이션.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7. 사헤지 라할, 〈바신다〉(2020), AI 시뮬레이션.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https://www.foreignobjekt.com/sahej-rahal
작품 7. 사헤지 라할, 〈바신다〉(2020), AI 시뮬레이션. 관련 영상

인간의 피조물이지만 스스로 학습하고 발전하는 방식으로 진화를 거듭하리라 예견되는 인공지능은 이제 현대미술을 위한 매체로도 사용된다. 작품 7은 사헤지 라할의 〈바신다〉라는 AI 시뮬레이션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마치 3D 게임 화면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게임 기술에 작가가 입력한 코드가 결합되어 스스로 플레이된다. 〈바신다〉 속에서는 무수한 다리를 가진 기괴한 생명체가 게임 속 세상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스스로 학습한다. 작가는 이 생명체의 머리가 카스트제의 엘리트, 다리는 발로 일하는 하층 카스트를 상징하는 것 같지만, AI 기술을 통해 다리들이 각자의 정신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함으로써 “통치되지 않는 기관들의 집단”으로 작동하고 카스트 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설명한다. 하층 카스트, 계급이라 비유되는 다리들이 각자 무수히 많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욕망의 주체들은 연결된 채 각 욕망들의 흐름에 따라 어디론가 이동한다.

8 & 9 & 10

비엔날레관의 마지막 갤러리로 향해 갈수록 점차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작품 8. 바지날 데이비스, 〈해그 HAG〉, 설치 전경 1982-1989/2012/2021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8. 바지날 데이비스, 〈해그 HAG〉, 설치 전경 1982-1989/2012/2021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8. 바지날 데이비스, 〈해그 HAG〉, 설치 전경 1982-1989/2012/2021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8. 바지날 데이비스, 〈해그 HAG〉, 설치 전경 1982-1989/2012/2021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8은 흑인이자 퍼포먼스 아티스트, 작곡가, 영화감독인 바지날 데이비스(Vaginal Davis)가 1980년대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 조성한 ‘임시 자치 구역’을 설치 작품으로 전시장에 구현한 것이다. 자신이 기획·운영했던 아파트 갤러리 ‘HAG(1982-89)’, 비예산 영화 스튜디오이자 제작사 ‘치즈 엔디크 트리펙타’(1990-2005), 다양한 성, 젠더, 인종,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즐겁고도 요란한 파티를 열었던 ‘클럽 서터’(1994-99)와 관련된 자료들을 아카이빙해 이번 전시 공간을 꾸몄다. 수많은 사진과 잡지, 광고, 포스터 등과 영상 자료들 속에서 퀴어코어한 데이비스가 이분법적 범주를 해체하기 위해 벌인 유기적 저항의 행위들을 살펴볼 수 있다.4

바지날 데이비스는 여러 정체성들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것에 기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 자체로 흑인 및 스페인계 정체성의, 이성애 및 퀴어 정체성 사이의 충돌에 의한 과도한 의미가 자신의 몸에 부가되는 것을 체현했고 이를 예술로 표현했다. 다양한 정체성들은 단순히 조화롭게 결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충되거나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모순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 ‘기괴함’이 마이너리티들의 정치력을 강화하며 차이를 생성하고 새로운 네트워크, 구도 생산을 끊임없이 지속하게 하는 듯하다.

작품 9. 세실리아 비쿠냐, 〈나의 베트남 이야기〉, 비디오 스틸샷, 6분 45초, 2021.

작품 9. 세실리아 비쿠냐, 〈나의 베트남 이야기〉, 비디오 스틸샷, 6분 45초, 2021.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9. 세실리아 비쿠냐, 〈나의 베트남 이야기〉, 비디오 스틸샷, 6분 45초, 2021.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9를 제작한 세실리아 비쿠냐(Cecilia Vicuña)는 칠레의 페미니즘 아티스트로 베트남 전쟁 중 벌어진 마이라이 학살에 대한 응답으로 과거에 산티아고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했던 경험이 있다. 이후로도 비쿠냐는 예술적 실천을 통해 현재 칠레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 연대를 구축해 왔다.5 〈나의 베트남 이야기〉는 작가가 1970년대 제작했지만 소실된 자신의 작업을 떠올리며 제작한 비디오 아트이다. 영상 속에서 작가는 베트남 전쟁의 학살을 목도한 뒤,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담담히 고백하며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를 끄집어낸다. 비쿠냐는베트남 전쟁 당시 자신의 엄마, 자매들, 그리고 숲과 마을, 미래를 지킨 베트남 게릴라군 소녀의 모습과 여성 예술가들의 활동을 연결한다. 2020년 10월, ‘라 카사 데 라스 레코히다스(La casa de las recogidas)’라는 칠레의 페미니스트 예술가 콜렉티브는 칠레 반정부 시위 1주년을 기념하는 평화적 사회혁명 기념일에 비쿠냐의 시구가 적힌 거대한 붉은 스카프를 산티아고 광장의 탑에 높이 건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 비쿠냐는 민족, 국가의 경계를 뛰어 넘어 다양한 특성을 지닌 여성들이 연대해야 함을 노래한다.

작품 10. 안젤라 멜리토플로스, 〈모계 B 파트 2: 지구를 드러내다〉, 2채널 비디오, 75분, 2021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작품 10. 안젤라 멜리토플로스, 〈모계 B 파트 2: 지구를 드러내다〉, 2채널 비디오, 75분, 2021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 (사진 촬영 및 제공: 최소연)

마지막 전시장인 갤러리 5에는 안젤라 멜리토풀로스(Angela Melitopoulos)의 현재진행형인 4부작 비디오 에세이 〈모계B〉(2020-) 중 제 2장인 〈지구를 드러내다〉(2021)가 전시되었다. 이 영상 속에서 작가는 호주 노던 테리토리 주의 앨리스 스프링스 주변의 원주민 공동체의 슬픔에 연대하는 특정 문화에 주목한다. 중앙 호주 지역에서 백인에 의해 살해되고 있는 원주민들에 대한 해결책을 촉구하는 집회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에도 이들은 두 번의 장례를 치뤄야 했다. 따라서 장례의 상주들은 집회에 새로운 참여자들이 모이면 모일수록 “최악의 상실감을 겪었던 사람들과 함께 소리 내어 울어주는” 장례 문화를 위해 계속해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러한 슬픔, 곪아가는 지구의 모습들을 영상 매체를 멀티채널, 음향 환경 등을 활용해 실험적으로 사용하면서 관람객들이 새로운 감각으로 사유하게끔 유도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번 비엔날레에는 69명(팀)의 예술가가 참여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10명의 작가와 작품 외에도 이번 비엔날레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뒤섞거나 영적인 것 혹은 자연과 기술을 교배시키고 결합하거나, 또 다양한 문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연대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이질적이고 기이한, 혼종적인 것들을 생산해내고 또 그것을 현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대안책으로 제시하는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위의 작품들은 그 중에서도 비엔날레의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줄 것 같은 작품들을 추려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외에도 더 많은 흥미로운 작품들이 비엔날레에 출품되었으니 더 많은 작품을 관람하고 싶다면 광주 비엔날레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온라인 전시 투어 영상이나 가이드북을 참고하면 된다.

3) 13회 광주비엔날레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을 다시 보며

이번 비엔날레를 보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1985)이다. ‘동시대 최전선의 미술을 다룬 현대미술 비엔날레를 보고 왜 30여년이 지난 이론을 떠올리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 글이 바로 ‘선언문(manifesto)’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선언문은 어떤 운동의 시작 지점에서 읽는 것이다. 어쩌면 해러웨이가 그 시작점에서 뿌린 선언 이후로, SF에 그쳤던 사이보그 정체성이 농익은 과학기술에 힘입어 실현될 수 있는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도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비엔날레는 마치 전세계에서 각자도생하던 ‘사이보그 예술’들을 집대성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이보그는 한계가 드러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대안일 수 있다. 이제껏 많은 시간 동안 개인적·소수자적 특징들이 분화되었고, ‘전체’라는 개념이 파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면서 ‘정체성 정치’가 지속되어 왔지만 결연이 불가능해져 힘을 잃어버리는 모순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보그들은 분열에서 그치지 않고 ‘아이러니한 엮기(weaving)’를 통해 기존의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판을 짠다. 이번 비엔날레에 출품된 ‘사이보그 예술’들과 이를 집대성한 비엔날레는 이러한 사이보그 정치를 위해, 그 자체로 혼종적으로 구성되고 이질적으로 혼합되어 다양한 ‘엮기’를 선보이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엮기’, ‘과학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엮기’, ‘다양한 정체성의 엮기’ 등이 이번 비엔날레의 큐레이팅 전략이나 혹은 작품들 속에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주마디, 안젤로 플레사스, 바지날 데이비스 등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엮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 엮기는 사이보그 정체성을 가능케 하는 핵심이면서 또 다른 돌연변이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이를 통해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번 비엔날레는 엮기의 전략을 통해 해러웨이가 역설했던 사이보그 정치를 다시 제안한다. “공통 언어를 향한 꿈 대신 불신앙을 통한 강력한 이종언어(heterolglossia)6를 향한 꿈”을 꾸는 사이보그가 되어, 차이를 드러내면서 결합한 아이러니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7 동시대 ‘사이보그 예술’ 작품들은 계급 갈등과 폭력, 착취와 환경파괴, 기후위기, 전염병으로 인한 팬데믹 등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최전선’에 서서, 차이를 드러내며 기이하게 결합한 아이러니한 존재, 사이보그가 되어야 함을 앞장서 외치고 있다.

끝으로, 방구석 관람자들과 함께 비엔날레를 비대면으로 동행하면서 전시를 정말 ‘리뷰(Review)’하게 되었다. 사진, 영상 및 각종 자료들로 온라인 전시를 관람하는 것은 의외로 직관하는 것보다 장점이 많았다. 시공간의 제약을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넓은 전시장 크기에 압도되고, 이틀 동안 광주 시내 전역을 누벼야 하는 체력적인 부담감 때문에 집중력이 많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반면 온라인 전시 관람은 언제든 내가 보고 싶을 때 작품에 다시 접속해 관람을 이어갈 수 있다. 그렇지만 아쉬운 점이라면 함께 전시 소감을 나눌 수 있는 뒤풀이가 없다는 것 아닐까.

(끝)


  1. 안젤로 플레사스의 “누스페릭 소사이어티”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웨어러블 누비 만다라’, 손 모양이나 머리 모양의 누비 만다라가 갖는 상징들을 살펴볼 수 있다.

  2. 사샤는 사이버공간에서 부적 사용법(인쇄 혹은 스크린세이버로 사용)을 알려주고 점을 봐주고, 컴퓨터 바이러스나 음란 사이트 등으로 고통받는 네티즌을 구제하는 일을 했다. 한국경제, “’사이버 세계 이젠 무당까지’ .. LG인터넷 ‘사샤’ 등장”, 양준영 기자, 1998년 9월 18일.

  3. 로이 애스콧, 『테크노에틱 아트』, 이원곤(역), 이원곤 역, 2002.

  4. 데프네 아야스·나타샤 진발라, (2021), p.73

  5. 위의 책, p.93.

  6. 이종언어, 헤테로글로시아는 ‘다양한 목소리의 혼합물로서 한 개인의 발화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하게 타자화된 목소리이자 사회-문화적 기억의 집적’이다. 이희원, 「타자의 언어로 기술하기: 만델슈탐의 자전산문 『시간의 소음』의 헤테로글로시아」, 『세계문학비교연구』, 39집 (2012), P.198

  7.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역), 서울: 책세상, 2019, p. 86.

소연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술은 사회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사회를 이끌어나가기도 합니다. 예술을 통해 체현하는 감각적 경험은 강한 울림으로 우리를 사유로 이끌고, 의미를 생성해나가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도록 하는 정동적 힘을 지닌 예술에 대해 주목하고 이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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