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평야를 만드는 만경강 상류에 고산 사람들이 살아간다. 평야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물이 흐르고, 흙이 쌓이고, 사람들이 논을 일구고, 계절을 견디며 살아온 시간이 평야를 만든다. 그러므로 만경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다. 그것은 흘러가는 자연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삶을 길러낸 오래된 시간이다.

고산은 오래된 마을이다. 오래전부터 강이 흘렀고, 사람들은 그 물 가까이 살아왔다. 논과 밭이 먼저 있었고, 계절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김을 매고, 거두는 시간이 이 마을의 오래된 리듬을 만들었다.
고산에는 고산권 벼농사두레, 사람들이 줄여 벼두레라 부르는 모임도 있다. 함께 논을 돌보고, 함께 벼를 키우는 사람들이다. 농사는 혼자 짓는 일 같지만, 사실은 물과 흙과 사람의 손이 함께 짓는 일이다.
그 벼로 쌀을 만들고, 그 쌀로 막걸리를 빚는 사람도 있다. 삼산도가 대표는 직접 벼농사를 지어 만든 쌀로 막걸리를 만든다. 그리고 노래를 부를 때면 〈막걸리 한잔〉을 부른다. 논에서 자란 쌀이 술이 되고, 술을 빚은 사람이 다시 노래를 부르는 일. 고산에서는 노동과 노래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고산의 시간은 강의 흐름을 닮아 있다. 급하게 앞으로 밀려가기보다 굽이치며 흘러간다. 그래서인지 이 마을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가게들이 남아 있다. 빨리 소비되고 사라지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공간들이다.
읍내 파출소 옆에는 청개구리 요거트 가게가 있다. 주인은 정말 청개구리처럼 사는 사람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방향보다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더 믿는다. 남들이 효율을 말할 때 그는 천천히 요거트를 만들고, 더 많이 팔리는 것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맛을 오래 붙든다.
그 근처에는 아주 젊은 청년과 엄마가 함께 운영하는 ‘스페인아오라’라는 빵가게도 있다. 가족들이 스페인을 좋아해서 가게 안에는 그곳에서 건너온 소품들과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 스페인어로 ‘지금, 현재’를 뜻하는 그 이름처럼, 이들은 가장 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지금’을 붙잡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살아 숨 쉬는 천천히 기른 천연발효종으로 가장 천천히 빵을 구워낸다. 밀가루와 물이 시간을 견디며 부풀어 오르는 속도를 묵묵히 기다려주는 일. 고산의 골목 한 구석에는 그렇게 먼 유럽의 시간과 이 마을의 느린 속도가 다정하게 빵 굽는 냄새로 섞여 들고 있다.

어느 날은 판소리 선생님이 차를 마시러 들렀다가 자연스럽게 사철가를 가르치게 되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이 다시 돌아오는 노래. 계절은 반복되지만 사람의 삶은 같은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래를 만든다. 사라지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고산에서는 자발적으로 모인 양육자들이 연극공연을 준비하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사람들은 자주 자기 마음을 뒤로 미뤄둔다. 그런데 그 양육자들이 무대 위에 올라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취미활동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자기 얼굴을 다시 바라보는 일에 가까웠다.
언덕삼촌이 가르치는 기타교실도 있다. 그는 서울에서 인디밴드 활동을 했고, 음반도 낸 사람이다. 그러다 고산이 좋아 딸과 아내와 함께 이곳에 살게 되었다. 낮에 열리는 그의 기타교실은 단순한 강좌라기보다, 한 사람이 자기 음악을 들고 마을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과 박자를 나누는 자리 같다. 사람들은 기타를 배우며 노래를 부르고, 서툰 코드 사이에서 하루의 마음을 조금씩 풀어놓는다.
과일가게 옆 새와구슬은 공간만큼이나 주인을 닮았다. 7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은 어느 날 연극무대가 되고, 어느 날 음악 콘서트장이 되고, 또 어느 날 독서모임장이 된다. 예쁜 액세서리를 만들어 파는 야무진 주인을 닮아, 그곳은 작지만 허술하지 않다. 간판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열지만, 그 안에서는 늘 누군가의 목소리와 손끝과 마음이 오간다.
특히 장날이 되면 고산의 시간은 조금 더 다정하게 들썩인다. 대형마트의 매끄러운 바코드 대신, 5일장 바닥 위에서 서두르지 않는 흥정과 사람의 웃음소리가 오간다. 마을은 늘 같은 사람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날의 북적임 속에서 누군가는 이곳을 떠나고, 누군가는 새로 들어온다. 잠시 머물다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우연히 장터를 찾았다가 이곳의 속도에 마음을 빼앗겨 계속 살기로 결심하는 사람도 있다.
사계 사장님도 그랬다. 고산에서 한 달 살기를 하러 왔다가 결국 이곳에 남기로 했다. 그의 친구인 글 쓰는 나무쌤도 이 마을의 시간 속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 고산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은 머물기로 마음먹으면서 고산 사람이 된다.
고산에는 이곳을 지키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다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다. 누군가는 가게를 지키고, 누군가는 노래를 가르치고, 누군가는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 선다. 또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강가를 걷고, 마을의 안부를 묻고, 오래된 자리를 지킨다.
그러나 만경강 옆을 지키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나무와 새와 동물들도 함께 살아간다.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강가의 풀들은 계절마다 다시 올라오고, 새들은 물길을 따라 날아오며, 작은 생명들은 돌 틈과 풀숲 사이에서 자기 삶을 이어간다.
강은 사람만을 위해 흐르지 않는다. 강은 논을 적시고, 마을을 지나고, 새의 그림자를 품고, 짐승의 발자국을 남긴다. 사람은 그 곁에 잠시 집을 짓고 살아갈 뿐이다.
노래를 배우는 일, 연극을 하는 일, 기타를 치는 일, 벼를 기르고 막걸리를 빚는 일, 작은 가게를 오래 지키는 일. 이런 일들은 세상을 한꺼번에 바꾸지는 못한다. 다만 사람을 너무 쉽게 부서지지 않게 한다.
만경강은 오늘도 고산을 지나 서해로 흐른다. 물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지만 사람들은 그 곁에서 자기 삶의 속도를 붙잡으려 애쓴다.
너무 빨리 사라지지 않으려는 마음. 그리고 서로의 속도를 지켜주려는 마음. 나는 어쩌면 그것이 고산 사람들이 오래도록 이어온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