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사랑] ㉑ 증오의 해독제는 사랑

배제와 차별 같은 미시파시즘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이미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는 배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욕망의 부드러운 흐름은 이처럼 겉으로는 강고해 보이는 미시파시즘의 질서를 눈 녹듯 녹아내리게 만들어, 슬픔의 무능력을 사랑과 욕망의 능력으로 점차 바꾸어냅니다.

[소울컴퍼니] ⑨ 영웅에 관하여

영웅을 신화나 종교 경전에서만 찾을 수 있을까. 영웅이란 어떤 존재일까? 영웅의 정의를 재해석하며 영웅성을 먼 곳의 위대한 인물에서 찾는 대신, 일상 속에서 헌신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행동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해보자고 제안한다. 캠벨이 정의한 영웅은 자신을 넘어 타인과 더 높은 가치를 위해 헌신하며 삶의 연결성을 회복하려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를 넘어 서로의 권리와 존엄성을 지키며 새로운 관계와 연결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시대의 영웅이지 않을까.

[탈성장과 건강] ③ 건강지상주의에 내재된 성장주의

건강을 ‘현재에서 더 나아가야 하는 어떤 것’으로 지나치게 이상화할 때, 건강을 추구하는 것은 성장주의의 한 형태가 된다. 이는 국가가 경제성장을 위해 필요한 건강한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했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

걷는 동안 몸에서 일어나는 발명들 -watching과 street wisdom

걷기는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고 세계를 드러내는 본질적인 방법이 되며 새로운 발명을 선사하기도 한다. 지역을 걸으며 관찰하는 프로그램(노플랜워크숍)이나 거리와 관계맺는 익숙한 방식을 바꿔 새로운 영감을 주는 스트리트위즈덤을 통해 몸의 감각을 깨워보는 것은 어떨까?

[몸살 앓는 제주] ⑱ 송악산 개발역사를 거슬러 지속가능한 모습 상상하기

지질학적으로 매우 희귀한 지형일 뿐만 아니라,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송악산. 그 생태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사업에 끊임없이 몸살을 앓아왔으며, 2019년 ‘송악산뉴오션타운’이 환경영향평가 심의까지 통과되어 개발사업을 착수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발 벗고 나선 ‘송악산 개발 반대대책위’가 개발 부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벌인 활동을 소개하고, 2025년 또 다시 위기에 빠진 송악산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고민하고자 한다.

야만의 도시를 떠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우리의 삶을 생존으로 일축시킨다. 생존 경쟁이 되어 버린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권리를 잃고 말았다. 자연으로부터 소외되기를 자처한 현대 사회는 결국 서로의 생존을 쥐고 갑질하는 사회로 전락했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삶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스피노자의 사랑] ⑳ 되기의 철학과 이기의 철학

사랑은 합일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는 '되기'의 과정이다. 서로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특이성을 강화하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흐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되기'로 설명하며, 사랑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차이를 낳는 차이의 연속이다. 이를 통해 되기의 철학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초록산책] ⑥ 봄을 맞이하는 자세

3월을 눈과 함께 시작했지만 봄을 이기는 겨울이 없기에 마침내 봄은 꽃을 흩뿌리며 오고야 말 것입니다. 겨우내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초록 생명들이 단단한 땅과 메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부활하여 모두를 위한 밥상을 마련하며 뭇 생명의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삭막한 겨울 풍경을 새로운 볼 것들로 풍성히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때야 할까요?

[예술로 지역활력] 일본의 ‘에츠코츠마리 대지예술제’가 증명하는 것

예술이 어떻게 지역의 활력을 가져올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일 좋은 사례로 일본 ‘에츠코츠마리 대지예술제 트리엔날레’를 들 수 있다. 그 전까지 에츠코츠마리는 일본에서도 가장 추운 곳이면서 인구감소,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농촌지역이었다. 이처럼 활력을 잃어가던 지역에서 어떤 특별함이 에츠코츠마리 대지예술제를 지속가능하게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자.

[소울컴퍼니] ⑧ 적의를 보이는 것들

"적·의를 보이는 것·들"은 문장 교정에서만 찾을 수 있는 불필요한 표현이 아니다. 우리 시대에서도 ‘적의를 보이면서’ 사회적 적대감의 긴장을 높이려는 시도가 자주 접한다. 서로의 문장과 논리만 옳고, 대화 방식과 태도에 대한 성숙한 성찰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 안의 ‘적의를 보이는 것들’에 맞설 새로운 상상력과 삶의 태도가 절실하다. “새로운 대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며 우리 모두가 적의(敵意)를 넘어서 창조적이고 연대하는 방식을 찾는 일만이 적대감을 넘어서 희망과 환대, 우정의 힘을 실천하는 방향을 설정하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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