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식문화’란 뭘까?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 『SUSTAIN-EATS』를 발행하는 나에게 누군가 ‘지속 가능한 식문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 해답을 ‘고(故) 황현산 선생님’의 말씀에서 얻었다. 식(喰) 행위를 넘어 여러 사회 이슈들로 이어지는 현대의 밥상에서 ‘지속가능한 식문화’는 어떤 얼굴로 자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았다.

“공공책방1은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합니다.”

‘더 농부’에서 인터뷰 전에 보내준 사전 질문지에 적힌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을 발행하는 이에게는 끝이 없는 수렁이다. 기획할 때마다 자문하고 질문한다. 두 에디터의 성향이 다른 덕분인지 지속가능한 식문화에 대한 공공책방만의 정의는 여러 색으로 뒤덮였다.

정의는 명확함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이다’라고 정하는 순간 ‘~아니다’에 속하는 영역이 생긴다. 정의내림을 지연시키는 것은 오랜 머뭇거림이자 의도적인 ‘선 흐리기’이다. 지속가능한 식문화는 지속가능성, 식, 문화, 이 세 가지에 방점을 둘 수 있다.

지속가능한 식문화는 지속가능성, 식, 문화, 이 세 가지 영역에 방점을 둘 수 있다. 이 세 영역이 겹쳐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이 세 영역에 인접해 있지만 포함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식문화는 지속가능성, 식, 문화, 이 세 가지 영역에 방점을 둘 수 있다. 이 세 영역이 겹쳐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이 세 영역에 인접해 있지만 포함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먼저 지속가능성은 생태적(환경친화적)에 해당한다. 파괴된 자연을 돌이키기 위해 또는 환경을 착취하며 생산하는 시스템을 돌이켜 변화를 이끌어낸 영역이다. 두 번째로는 식, 음식 자체에 중점을 두어서 전통 음식, 못난이 농산물, 음식물쓰레기, 식재료, 종 다양성, 요리법 등 실제로 먹거리 자체에 집중하는 흐름이다. 마지막으로는 문화이다. 문화는 비건(/채식), 전래식(/카니보어), 밀키트, 배달 음식 등과 같이 사람들이 만든 흐름이다.

정의는 이 세 가지 영역 위에 놓인 무게추의 기울기에 따라 과한 변화가 일어난다. 배달 음식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함에 따라 배달 기사의 교통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생태적 흐름에서 배달업 자체가 탄소량을 과하게 증가시키기에 이용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안에 있는 노동자들의 삶은 어떠한지 주목하기 어렵다. 반면 배달업의 증가로 비건들의 생활이 더 윤택해졌다. 한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볼 때 생기는 그늘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지속가능한 식문화에 대한 경계를 최대한 흐릿하게 긋고 있다. 더불어 이 세 영역이 겹쳐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이 세 영역에 인접해 있지만 포함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넓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문장으로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정의하기보다 이미지로서 지속가능한 실천을 하는 사람을 상상한다.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밥상 앞에서 어떤 모습일까? 탄소발자국을 계산하며 요리를 하는 사람일까, 토종 식재료만을 고집하는 사람일까? 비건을 고집하는 사람일까? 나에게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실천하는 사람은 밥상 앞에서 궁상떠는 사람이다.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말처럼 궁한 사람은 어렵고 부족하기에, 한 끼의 식사도 그에게는 축제의 음식이다. 밥상을 마주한 그에겐 미소와 행복이 가득하다. 음식을 귀하게 먹을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이 나에게 하루의 생명을 주었음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밥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성보다 감성의 영역에 가깝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부른 사람에게는 쓰고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배고픈 사람에겐 달다. 원수와 마주한 식탁은 체할 것같이 목이 막히고 애인과 마주한 식탁은 아무리 먹어도 속이 편하다.

요리하는 사람에게 이성의 시간은 식사 시간이 아닌 요리, 식사, 설거지가 끝나고 다음 식사 전까지다.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다 보면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떠다닌다. 그때가 지속가능한 식문화가 자라야 할 시간이다. 밥상은 축제이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 기획, 준비, 반복, 데코가 필요하고 기다림과 번거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거리와 남은 식재료를 확인한다. 식재료가 부족하면 시장에 가서 구입하고 집에서 다듬는다. 그전에 쌀을 씻고 불려서 밥솥의 취사 버튼을 누른다. 국 한 그릇을 끓여도 지속적으로 맛을 보면서 간을 맞춘다. 다 된 밥과 국은 자신만의 취향이 담긴 그릇에 담아서 식탁으로 옮긴다. 반찬은 그릇에 먹을 만큼 담는다. 나 같은 경우는 큰 접시에 반찬을 옹기종기 담는다. 설거지할 그릇을 덜기 위함이다. 틈이 된다면 중간중간 설거지하면서 밥 먹은 후에 찾아오는 노곤함에 미뤄질 일들을 줄인다.

요리하는 사람은 이 과정의 반복을 경험한다. 오랜 반복은 과정의 소요 시간을 줄일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내가 하지 않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대신할 뿐이다. 밥상을 꾸리는 일은 필연적인 삶이다. 요리가 능숙하지 않으면 맛이 없을 수도 있고. 운이 좋아 맛있을 수도 있다. 내 요리는 맛이 없다. 하지만 맛있게 먹는다. 밥상 앞에서 그런 시름은 필요 없다. 내 앞에 놓인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요하다.

고(故) 황현산 선생님은 음식 앞에서 생각을 비우고 음식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축제의 음식을 먹는 자는 마땅히 두 손을 적셔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먹는 음식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가 거둔 곡식과 소채, 우리가 잡은 짐승들에게 속죄하는 길이다. … 오리는 내놓고 죽어 우리 손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옷이 젖는 걸 관계하랴. 어찌 속죄가 없이 행복하랴.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자신이 살해한 생명들과 자기가 먹는 음식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려는 우리가 두렵다. … 희생된 생명들은 거기서 생명이기를 그치지만 그것들과 하나가 되려는 사람들 속에서 어떤 행복의 형식으로 다시 피어난다고 말해도 무정한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희생된 생명으로 왔기에 식탁에서만큼은 우리 모두 행복해야 한다.’ 적어도 공공책방이 발행하는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 『SUSTAIN-EATS』는 그러하다. 
사진출처 : Adonyi Gábor
‘우리의 생명이 희생된 생명으로 왔기에 식탁에서만큼은 우리 모두 행복해야 한다.’ 적어도 공공책방이 발행하는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 『SUSTAIN-EATS』는 그러하다.
사진출처 : Adonyi Gábor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오랜 시간 재직했던 고 황현산 선생님께서 식사 예절에 어긋나는 글을 썼다는 것이 참 감명 깊다. 우리가 잘 아는 미식과 식사 예절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미식’ 또는 ‘식도락’을 뜻하는 프랑스어 ‘가스토로노미’는 1801년에 시인이자 역사가・사회학자 조제프 베르슈가 최초로 사용했지만 17세기부터 부르주아 요리가 성문화되기 시작했고 19세기에 들어서서 미식, 요리법, 식사 예절 등이 체계화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이성을 통한 인간의 완성과 자유를 기조로 삼았던 만큼 식문화에서도 도식화가 이뤄졌다. 지금도 전통적인 미식 문화를 추구하는 프랑스인은 레스토랑에 갈 때마다 식전주를 시작으로 해서 전식, 본식, 후식의 고전적인 순서대로 음식을 주문하며 절대로 중간에 순서를 건너뛰는 법이 없다고 한다. 이 안에는 식기 사용법, 와인 음미법, 식법 심지어 매니저를 대하는 법 등 예부터 관습처럼 굳어진 공정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식문화의 사회적 의미는 ‘식’보다 귀족 문화에 있다. 현대에서도 이런 식문화가 필요한 공간은 고가의 레스토랑이 대부분을 차지하듯, 유럽 식문화의 공간도 상류층의 식탁이었다. 유럽의 상류층은 중세 이래 식문화를 구축해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했으며 자신보다 하위 직위 또는 다른 계급과의 차별성을 드러냈다. 이는 “너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면, 네가 무엇을 먹는지를 말해주면 내가 가르쳐주마!”라는 미식가의 시조라고 불리는 브리야사바랭의 풍자적인 경구만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식탁에 앉는 순간 사람은 ‘당연하게’ 정해진 매뉴얼대로 움직인다. 매뉴얼을 틀리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식문화는 음식을 더 맛있게 먹기 위한 목적에서 생긴 문화임에도 식문화를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옥과도 같을 수 있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생체권력’ 개념과 동일하다. 생체권력이란 중세 시대의 권력은 ‘죽게 하는 권력’에서 시작되었다면, 근현대에 와서는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살게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의료체계, 복지체계, 교육체계 등 끊임없이 노동자의 삶을 유지시키는 권력이다. 식문화 영역에서의 생체권력은 ‘음식을 뺏을 권력’에서 ‘음식을 맛있게 먹게 하는 권력’으로 변형되었다. ‘식문화를 준수할 때 더 맛있다’라는 이성적 관념이 식문화 안에 스며든 것이다.

그렇기에 고(故) 황현산 선생님의 주장은 더욱 감미롭다. 자신의 학문적 근원지인 프랑스의 기조와는 반대편에 서서 식기를 내려놓고 소맷자락을 젖혀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지속가능한 식문화의 핵심은 생명의 연관성임을 뜻한다. 지속가능한 식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활동과 정의가 오가고 있다. 소비자 영역에서는 먹는 형태에 따라 크게 비건(또는 채식)과 논비건으로 구분되며 비건에는 락토, 오보, 페스코, 플렉시테리언으로 나눠진다. 이는 지속가능한 식문화의 강도 측면으로 볼 수 있다. 강도에 따라서 육식과 육식 생산을 아예 금지하기도 한다. 반면 생산자 영역에서는 동물복지 농장의 확대와 유통/시장 시스템의 개선으로 친환경적 요소들의 증가를 꾀한다. 누군가에게는 건강 측면에서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활동가 영역에서 지속가능한 식문화는 식(喰) 행위를 넘어서 식재료의 생산, 유통, 처리까지도 나아간다. 토종 씨앗 보존, 못난이농산물 폐기, 종 다양성 확보, 음식물쓰레기 분해 처리, 화학비료, 생산 노동자 착취,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파괴 등. 이 문제들은 식탁에서 이뤄지진 않지만 모두 지속가능한 식문화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지속가능한 식문화의 넓은 측면이다.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추구하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식탁에서 궁상떠는 사람들이다. 두 손을 뻗어 소맷자락을 적셔가며 음식을 먹는 이들이다. 자신이 먹는 음식이 타 생명에서 왔음을 알기에 심신을 쏟고 있다. 고(故) 황현산 선생님의 말씀 따라 ‘속죄의 과정’이다. 이들이 말하고 싶은 결론은 이러할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희생된 생명으로 왔기에 식탁에서만큼은 우리 모두 행복해야 한다.’ 적어도 공공책방이 발행하는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 『SUSTAIN-EATS』는 그러하다. 매거진을 읽는 모두가 그날의 식탁에서 타 생명을 발견하고 감사하며 행복하기를 기대한다.


  1. 공공책방 : 지속가능한 식문화 매거진 『SUSTAIN-EATS』를 발행하는 출판사다.

김정모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는 매거진 ‘Sustain-Eats’ 편집자.
다양한 경험과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