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철학] ③ 배치(agencement), 동적 편성의 재배치로서의 미시정치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은 배치를 재배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와 같이 이야기 구조의 위기, 상상력의 위기, 마음의 위기에 처한 문명의 상황에서 집합적 배치의 실험과 실천은 상상력과 이야기가 격발되는 색다른 실험이 될 것이다.

꿈 내용이 아닌 꿈자리로부터 시작된 배치

배치(agencement)라는 개념은 공동체의 관계망과 위상, 위치, 자리 등과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배치를 살핀다는 것은 자신이 선 자리와 위치, 사물, 자연, 생명과의 관계 맺음을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배치는 공동체적 관계망이 갖고 있는 다채로운 접촉경계면들이 하나로 아우러져 하나의 조감도와 같이 장소, 관계, 의미, 정동(affect)을 살필 수 있는 관계성좌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치 개념을 출발점은 청년이었던 펠릭스 가타리가 장 우리(Jean Uri)박사에게 꿈 상담 할 때의 삽화로부터 시작된다. 전날 악몽을 꾸었던 가타리가 장 우리에게 한 시간여를 꿈 내용을 얘기하면서 스스로의 분석을 늘어놓을 때, 장 우리는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으로 이 얘기를 듣는다. 그러고는 “왼쪽으로 누워 자니? 이제 오른쪽으로 누워 자. 그럼 돼”라고 한 마디를 한다. 이는 꿈 내용이 아닌 꿈자리를 중시하는 태도이며, 결국 꿈자리가 뒤숭숭했을 때, 자세와 태도, 배치를 바꾸면 된다는 굉장히 자율적인 태도인 셈이다. 결국 이는 가타리의 배치에 대한 아이디어와 단상이 되었다.

공동체에서는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가?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공동체의 배치는 ‘자리’라고도 불리며 그 자리에 맞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때때로 자리 자체를 만드는 실천적 인물을 배태하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구조주의적 사유에 빠지겠지만, 사람이 만든 자리라는 점에서 배치와 유사한 지평을 그려나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구조는 불변항이지만, 배치는 유한하고 망가지고 찢어질 수 있는 실존이 만든 관계망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는 전부를 거부하여야 하지만, 배치는 재배치를 통해서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다. 결국 자리를, 구조가 아닌 배치로 사유하는 것이 공동체적 관계망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위상, 자리, 위치, 배열, 배치 등의 사유 속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권력의 배치(dispositif)이다. 미셀 푸코가 얘기했던 미시권력의 배치는 권력이 만들어낸 효과로서, 그 일을 해냈다라고 할 때 그것이 권력이 가진 힘과 능력으로 인해 한 것인지, 아니면 돌봄, 정동, 사랑, 욕망이 한 것인지에 대한 감광판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권력의 위상학과 욕망의 위상학의 차이를 가지면서 공동체적 관계망에 들어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이 아닌 욕망과 정동이 해냈던 일은 대부분 판짜는 자로서 배제되거나 그 중요성이 간과되기 일쑤이지만, 사실상 그것이 배치 자체를 설립한 기본적인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정동노동, 돌봄노동은 배치의 판을 짜는 기본적인 활동으로서 그 중요성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권력적으로 나서는 자만이 시야에 드러날 뿐일 것이다.

마음, 언어, 행동을 결정하는 배치

배치는 마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마음의 내용이 담고 있는 그릇과 구성을 살펴보면 그 배치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배치를 살피는 행동은 결국 마음을 살피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마음 둘 곳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 배치를 형성하지 못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배치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의 공동체의 관계망 그 자체이다. 배치를 바꾸지 않고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심리치료의 과정에서 진공상태의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1:1 대응으로 상담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 그 당시에는 해방감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기존 배치로 돌아가면 그대로인 경우가 많다. 결국 배치를 바꿈으로써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관념상으로만 바꾼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음은 깊은 것이라기보다는 배치에 들러붙어 있는 얇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배치는 언어 자체를 만들어낸다. 가게점원에게 하는 말과, 아버지에게 하는 말과, 공동체 사람들에게 하는 말, 아내에게 하는 말은 모두 배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언표는 동질적이라기보다는 다질적인 천 개의 가면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질적인 언어 중에서 표준말이라는 통사법이나 문법적인 영역은 배치 자체를 스냅사진처럼 화석화되고 굳어진 것으로 만드는 시도이다. 모든 언어는 공동체적인 관계망으로서의 배치에 따르며, 소수언어로서 볼 수 있다. 소수언어는 다수언어의 주변과 곁에서 권력담화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다. 소수언어 중 특이한 점은 을(乙)의 대화법 중에서 감정노동자들이 표준말을 쓴다는 점이다. 이는 그들이 권력담화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한 방어적인 배치에 놓여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이들의 경우에는 전화언어와 부모와의 만남에서만 표준말을 사용한다. 이는 소수언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의 언어가 배치에 깊게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배치는 행동을 결정한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무정형의 행동양식을 보일 수 없는 이유는 배치가 서로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 때문이기도 하다. 동시에 공동체의 판이 뜨거워지고 배치에서 정동이 활성화될 때 공동체에서 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불쑥 생성되고, 머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불쑥 생성되고, 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불쑥 생성된다. 그런 점에서 행동양식은 배치의 강렬도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권력의 배치는 행동을 딱딱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원천이지만, 공동체관계망의 사랑과 정동의 배치는 행동을 유연하게 만듦과 동시에 엄청난 상냥함과 놀랄만한 부드러움으로 향하게 만든다. 모든 문제는 “하라! 하라!”라는 말처럼 행동을 하는 순간 배치 역시도 바뀐다는 지점에 있다. 배치는 과거형이 아니며 행위양식에 따라 설립되는 미래형의 판과 같아서, 그 n개의 차원의 획기적인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배치와 행위양식이 함께 변화하는 방향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배치는 관계성좌로서 행위양식을 규정내리는 구조주의적 방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배치와 행동의 공진화와 동시변화, 공동생산(Syn-poiesis)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배치의 재배치의 자율주의적인 구도가 가능한 것이다.

집합적 배치와 혼종적 주체성

집합적 배치는 공동체적 관계망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단어이다. 여기서 집합의 의미를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공동체에서는 사물, 자연, 인간, 동물, 기계, 미생물 등이 어우러져 집합을 이루고 혼재면을 형성한다. 이 속에는 다양한 도표와 수식, 그래프 등의 비물질적인 것도 포함되고 사랑, 욕망, 정동, 감응, 돌봄 등의 영역도 포함된다. 그러한 것들이 결집하여 배치를 이루는 것이 집합적 배치이다. 다른 개념으로 언표행위 집합적 배치라는 개념도 사용하는데, 이는 언표행위 주체(말하는 나)와 언표 주체(말 속의 나)의 분열이 집합적 배치 속에서 통합된다는 점에 대한 적시이기도 하다. 그 집 속에 개입하는 사물, 자연, 우주, 기계, 미생물들은 다채로운 접촉경계면 사이마다 이야기구조를 형성한다. 사실상 무의식적 차원으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지만, 판 짜는 과정은 섬세하게 그러한 집합적 배치를 살피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날 회의가 잘 안 된 이유는 가습기를 안 틀거나 깜빡 난로를 틀어두고 창문을 조금 열지 않아 졸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모든 습도, 온도, 조도, 명도 등도 집합적 배치에 포함된다.

결국 배치 속에서 등장하는 주체성은 혼종적 주체성이다. 사물로부터 유래한 마음, 기계로부터 유래한 마음, 생명으로부터 유래된 마음 등 여러 마음이 생태계를 조성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잡동사니와 같은 마음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생태계를 이루는데, 정돈, 배열, 배치, 정렬을 하는 정동(affect)의 작용 덕분이다. 혼종적 주체성은 사실상 그것이 생명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유래가 사물, 자연, 기계로부터 시작했는지, 아니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했는지가 모호하다. 그것이 혼재면 속에서 너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다소 모호한 영역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타리는 기계적 무의식이라고 한다. 기계적 무의식은 부부의 침실에서 텔레비전에도 기후증후에도 축구경기장에서 서식하는 마음이라고 일컬어진다. 그것은 사물, 기계, 생명에 들어붙어있는 마음이며, 사실상 서로 섞여서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혼종적 주체성 양상 속에서 “내가 한 것인가? 그것이 나를 하게 만들었는가?”라는 것을 따지지 않는 기계적 무의식의 역설 속에서 집합적 배치를 개방한다.

결국 배치를 잘 살피는 것은 배치 속에서 들어오는 광대역의 무의식에 대한 민감성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 소수자의 인공자연 즉 커먼즈가 등장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애니미즘적인 사유체제가 생겼는데, 이는 사물, 자연, 기계, 미생물 속에 생명력을 두는 것이며, 그것이 유발하는 광대역의 무의식 자체를 살아있음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결국 광대역의 무의식이 들어오는 감각과 0.3가 늦게 반응하고 이 중에서 필터링을 거쳐 뻔한 것으로 만드는 지각 사이에는 심원한 차이가 있다. 결국 광대역의 무의식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감각을 재발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의 발명은 집합적 배치가 만들어내는 섬세한 생태민감성을 재창안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치와 관계망에서의 판짜는 자와 나서는 자

배치에서 정동의 강렬도가 뜨거워지면 나서는 자들이 발생한다. 이를 주체성 생산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주체성 생산은 그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결국 사회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서는 주체성 생산이 필요한 셈이다. 배치가 강도, 온도, 속도, 밀도의 측면에서 얼마나 강렬한 정동을 발휘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나서는 자는 기존에는 전문가로서의 주인공 담론으로 비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해낼 사람은 정규 아카데미 과정에서 훈련된 사람이라기보다는, 공동체의 판에 감응하여 나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에서는 그 판을 짜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선수지만, 처음 해 본 일에 나서는 사람이 된다는 점에서 아마추어의 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배치를 뜨겁게 하기 위해서는 판짜는 자의 노력이 대부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자리 잡고 있다. 판 짜는 자는 스튜어드십으로서의 양육자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거나 서번트십으로서의 그것을 위해 기꺼이 밑받침이 되는 사람이 되거나 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나서는 자들이 혼재면 속에서의 강렬도에 따라 행동하려 할 때 대부분 판짜는 자의 도표적 의식 속에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날 공동체에서 나서는 자는 그 판을 뜨겁게 만들기 위해서 음식을 하고, 정리정돈을 하고, 여러 가지 그림을 붙였던 사람의 의식 속에서 구상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듯 지도제작하면서 판을 짜는 사람의 의식의 중요성은 결국 공동체의 판 자체의 특징을 깨닫고 준비하고 도모하고 부추기는 사람들의 깨어남이 중요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서는 자가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판짜는 자로서 도모하는 자가 깨어 있는 사람인 경우가 공동체에서는 허다한 것이다. 결국 돌봄, 살림, 모심, 보살핌의 과정은 기나긴 판짜기의 반복을 통해서 나서는 자를 도모하는 생명과 자연의 약속이다.

꽃피는 성운과 관계성좌에 대한 사랑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관계성운을 사랑해버린 미친 남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에 그 남성은 새처럼 지저귀는 아가씨들의 성운에 매료되어 그 중 한 여성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권태기 들어서 그 남성은 자신이 사랑한 것이 한 사람이 아니라, 관계성좌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러한 집단적인 배치가 갖고 있는 림, 화음, 선율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관계성좌에 매료되게 만드는 비밀이다. 개인으로 분해되어 무기력했던 사람들조차도 관계성좌 속에서 힘이 생기고 에너지가 넘친다. 이를 통해서 주체성 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은 관계망 창발의 힘이기도 하다.

관계성좌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결국 두 집단 간의 혼종적인 결연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종적인 집단이 서로 이질발생되는 과정은 결국 두 집단 간의 평행선을 툭 건드려 화음을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클라나멘이라는 우발성일 수도 있다. 결국 판 자체는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그것이 관계성운의 비밀이기도 하다. 집단과 집단 사이를 넘나들며 관계 맺기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강렬도를 만들어내는 낙차효과의 비밀일 수도 있다. 꽃피는 성운은 결국 관계성좌 즉, 집합적 배치가 갖고 있는 미학적인 면모와 정동해방의 가능성과 접속하게 한다.

배치의 재배치로서의 미시정치

한 톨의 도토리가 만든 떡갈나무 숲처럼 작은 모듈 단위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공동체, 사회, 전 지구적인 차원까지 파급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사진출처 : Oscar Helgstrand 
https://unsplash.com/photos/5PDs16ea8dI
한 톨의 도토리가 만든 떡갈나무 숲처럼 작은 모듈 단위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공동체, 사회, 전 지구적인 차원까지 파급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사진출처 : Oscar Helgstrand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불변항의 구조와 무기력한 개인을 한 쌍으로 하여 구조혁명을 추구하는 방향성이 아니라, 유한한 실존이 유한한 관계를 맺는 배치에 있다. 구조를 바꾸는 거시정치가 아닌 배치를 바꾸는 미시정치가 공동체적인 관계망에서의 욕망의 자주관리, 욕망의 미시정치의 원동력이다. 욕망의 미시정치는 모든 것을 집합적 배치의 판위에 올려놓는다. 성, 약물, 게임, 도박, 스포츠 등을 판 위에 올려놓고 배치를 재배치하는 집단적 실험에 몰두한다. 이는 불변항의 구조 앞에 무기력한 개인이 아닌 관계성좌 위 정동의 강렬도 속에서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 유능한 공동체 활동가들을 생산한다. 나의 생각, 언어, 행동을 자신의 것으로만 간주하지 않고 배치와 내가 공동 생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바꾸는 실험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배치의 심원한 변화가 주는 효과와 그 역학관계를 실험해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공동체는 사람들을 뻔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혼종적 주체성으로서의 그것이 갖고 있는 집합적 배치 속에서 조망한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잠재성과 깊이, 가능성의 영역이 미래를 향해 열리는 것이다.

판짜는 자인가, 나서는 자인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우리는 공동체의 관계망인 집합적 배치의 판을 깔고, 배치를 재배치함으로써 세상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작은 모듈 단위의 횡단과 이행에 주력하는 것이다.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는 행위양식은 자신을 변화하는 것, 자신이 관계 맺는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톨의 도토리가 만든 떡갈나무 숲처럼 작은 모듈 단위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공동체, 사회, 전 지구적인 차원까지 파급될 수 있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파급과정에 대한 이야기 구조는 사실상 집합적 배치 속에 있는 사물, 생명, 자연, 기계, 미생물과 어우러진 혼종적 주체성이 만들어나가야 할 관계성좌의 이야기들이다.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은 배치를 재배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둘레환경의 변화처럼 배치는 자신이 놓인 생각, 언어, 행동의 판을 놓고 실험하고 실천하는 과정일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와 같이 이야기구조의 위기, 상상력의 위기, 마음의 위기에 처한 문명의 상황에서 집합적 배치의 실험과 실천은 상상력과 이야기가 격발되는 색다른 실험이 될 것이다. 코로나 시대로 인해 공동체의 대면접촉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도 2~3인 단위의 모듈은 여전히 건재하며 집합적 배치의 미시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삶을 바꿈으로써 문명의 전환에 심원한 영향을 주는 것 자체가 그것이 욕망의 미시정치의 목표이며, 삶의 전환, 문명의 전환, 녹색전환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삶의 배치를 놓고 색다른 실험과 실천을 가하는 새로운 나서는 자이자 판짜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故신승철

1971.7.20~2023.7.2 / 평생 연구하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다가 마지막 4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연결자'로 살다 가다. 스스로를 "지혜와 슬기, 뜻생명의 강밀도에 따라 춤추길 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공락(共樂)하고자 합니다. 바람과 물, 생명이 전해주는 이야기구조를 개념화하는 작업을 하는 글쟁이기도 합니다."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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