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722년을 되짚어 본 시선들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보기 – 기후 위기 속에서 『춘추』 「은공원년」 읽기

『춘추』는 기원전 722년에서 기원전 479년까지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연대기이다. 이 연대기를 편찬하였다는 공자(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의 생애 대부분이 이 연대기 작성의 대상이 된 시기와 겹치니, 공자는 자기의 생애 전체를 역사적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자에 비교할 때, 지금 여기의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시대를 역사적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크게 잘못되기나 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온 것 같다. 공자와 지금 여기의 우리. 둘 중 어느 쪽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더 나은 것일까 한 번 생각해 볼 만하겠다. ‘현재’를 역사적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한 짓일까?

『춘추(春秋)』 속의 기원전 722년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다. 그로부터 31년 전인 기원전 753년, 로마 시가 건설되었다. 로마 제국의 시작이었다. 그때 남북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장은 알기 어렵다. 동북아시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춘추(春秋)』라는 책을 통해서 조금 알 수 있다. 『춘추』라는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元年春王正月 三月 公及邾儀父盟于蔑 夏五月 鄭伯克段于鄢 秋七月 天王使宰咺來歸惠公仲子之賵 九月 及宋人盟于宿 冬十有二月 祭伯來 公子益師卒”1

『춘추』는 춘추시대 주나라의 제후국이었던 노나라의 역사책이다. 기원전 722년에 있었던 일부터 기록하는 연대기이다. 위의 인용은 기원전 722년에 있었던 일 가운데 기록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1월[정월], 3월, 5월, 7월, 9월, 12월 등 월별로 순차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을 월별로 나누어 문단을 바꿔가며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원년의 봄, 천자가 쓰는 역으로 정월.
○ 3월에, 공이 주의 의보와 멸에서 동맹을 맺었다.
○ 여름철인 5월에, 정나라 백작이 주나라 언에서 단과 싸워 이겼다.
○ 가을철인 7월에, 천자인 왕이 재의 벼슬에 있는 훤으로 하여 와, 혜공과 중자가 돌아가셨음에 대해서 주는 예물을 드리게 하셨다.
○ 9월에, 송나라 사람과 숙에서 동맹을 맺었다.
○ 겨울철 12월에, 제백이 왔다. 공자이신 익사가 세상을 떴다.2

“원년의 봄”이라는 기사는 은공이 봄에 즉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여름이나 가을 혹은 겨울에 즉위하였다면 원년의 봄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였을 것이다. “천자가 쓰는 역으로 정월”이라는 기사는 노나라가 종주국인 주나라의 역법(曆法) 즉 쉽게 말하자면 캘린더(calendar)를 따랐다고 기사를 쓴 사람이 판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3월, 5월, 7월, 9월, 12월의 기록 내용은 동맹 맺기, 무력충돌, 지배자 사이의 예의 차리기, 귀족의 사망 기록 등이다. 이 사건들은 전쟁・외교・죽음으로 축약할 수 있으며, 관계와 생사라고 더 축약할 수 있겠다. 더 중요한 사건들도 있었겠지만, 이것들만 해도 중요한 사건들이긴 하다.

공자는 이 기록을 가지고 그에게 배우러 온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지는 오늘날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은공 원년의 기사를 가지고 추정하여보면, 공자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정치・전쟁・외교 즉 온갖 관계의 성공사례와 실패사례를 논하였을 듯하다. 논의의 과정에서 거듭 중시된 가치나 행동방침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들은 오늘까지 전하고 있는 유교문화 속에 녹아 들어가 있을 듯 싶다. 기사 속의 생사는 권력자의 생사이다. 권력자의 죽음과 권력자 자녀[군자]의 탄생은 권력의 승계와 직결되어있는 일이다. 권력자[군자]의 수양을 기반으로 하는 천하의 평안을 중시한 공자는 평안이 가장 크게 흔들릴 수 있는 계기[momentum]인 권력 계승을 다각도로 다루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서 공자는, 예양(禮讓) 즉 수양한 마음을 바탕으로 하면서 가지게 되는 예의있고 양보하는 태도를 권력 획득 경쟁에 적용하였을 때 발휘될 수 있는, ‘매너’있게 집권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태도에 관해서 논의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논의는 곧 군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이기고 사양하는 마음을 키움[극기복례(克己復禮)]”을 권하는 것으로 정리된 듯하다.

기원전 722년을 되짚어 본 시선들의 발생과 기능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 
사진 출처 :  仇英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
사진 출처 : 仇英

공자가 그에게 배우러 온 사람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였다는 위의 인용문을 『춘추』의 경(經) 혹은 경문(經文)이라고 한다.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경문은 짧고 가늘고 납작하다. 지금에 비하면 공자의 생시는 기원전 722년과 가까웠으므로, 공자와 그에게 배우러 온 사람들 모두, 경문 속 사건의 전후 맥락을 함께 논할만한 풍문과 정보를, 지금 여기의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각자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공자의 생시[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에는 『춘추』의 경문을 두고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식자(識者)들이 공자 말고도 여럿 있었을 것이다. 그중 상당수가 공자처럼, 『춘추』의 경문을 소재로 역사를 해석하고, 『춘추』의 경문에 빗대어 정치의 득실을 논하였을 것이며 자신과 논의 참여자들이 논한 내용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런 기록을 경문과 구별하여 전문(傳文)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공자의 생시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문에 전문이 덧붙여져 있는 『춘추』의 주석서들이 다수 편찬되었던 것 같다. 그 가운데 3종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 이것을 『춘추』3전이라고 한다. 『춘추좌전(春秋左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이 『춘추』3전이다. 이들 가운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은 한나라 무제(武帝) 때[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의 동중서(董仲舒), 청나라 시대의 강유위(康有爲 : 1858~1927) 등이 각자의 정치사상을 펼칠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었다. 한나라가 해체되고 이어진 삼국시대를 마감한 위나라를 이었던 서진(西晉)의 학자이자 관리인 두예(杜預 : 222~284)는 『춘추좌전』을 중시하고 거기에 해설과 주석을 더하여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를 찬(撰)하였는데, 이 책은 오늘날 『춘추』 혹은 『춘추좌전』을 읽고자 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공자가 그에게 배우러 온 사람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였다는 『춘추』는 이후 거의 모든 유교적 교양인들이 각자의 정치적 견해를 펼치는 바탕이 되어주었다. 유교적 교양인들은 『춘추』의 경문 즉 짧고 가늘고 납작한 연대기를 미언(微言)이라 하였다. 미미하고 희미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담겨있는 뜻이 은밀하면서도 심오한 기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이 미언에서 대의(大義)를 읽어낼 수 있도록 안내한 최초의 스승으로 공자를 자리매김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공자가 『춘추』 경문을 소재로 강의를 하면서 역대 정치의 득실에 대하여 포폄(褒貶) 즉 칭찬과 비난을 가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이를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자는 이러한 포폄을 글로 남기지 않았으므로, 유교적 교양인들은 『춘추』 3전 특히 『춘추좌전』에 들어있는 전문을 실마리로 공자의 포폄을 각자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그것을 정견과 사상의 바탕으로 삼았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속의 기원전 722년 봄

“혜공의 원부인은 맹자 즉 송나라 군주의 장녀였다. 맹자가 세상을 뜨니, 성자를 계실로 삼아, 은공을 낳으셨다. 송나라의 무공이 중자를 낳음에, 중자는 태어날 때부터 그이 손바닥에 글자의 무늬가 있음에, 무공은 노나라 군주의 부인이 되겠도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중자는 우리 노나라로 시집을 오셨다. 환공을 낳으시고 혜공이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은공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셔서 환공을 받드신 것이다. …… 원년 봄 천자가 쓰는 역 즉 주력의 정월. 은공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고 쓰지 않은 것은, 은공이 임시 군주 자리를 지키는 섭정이었기 때문이다.”3

위의 인용문은 공자와 동시대인으로 추정되는 좌구명(左丘明)이 지었다고 추정되는 『춘추』 주석서 『춘추좌전』의 은공 원년 기사 제1행 “원년춘왕정월” 주석[전문(傳文)]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맹자와 중자는 혜공의 원부인이고, 성자는 혜공의 계실이고, 중자 소생인 환공은 적자(嫡子)이고, 성자 소생인 은공은 서자(庶子)다. [은공 원년 기사 앞에 먼저 제시된 주장] ② “원년춘왕정월”은 “원년 봄 천자가 쓰는 역 즉 주력의 정월”이다. 노나라는 종주국 주나라의 책력을 사용하는 제후국이다. ③ 서자인 은공이 섭정이었기에 기사에 은공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음이 포함되지 않았다. ④ 환공보다 연장자였으나 서자였던 은공이 군주의 자리를 찬탈하지 않고 적자의 왕위계승을 존중하였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속의 기원전 722년 봄

“원년이란 무슨 뜻인가? 군주가 처음 맞는 해이다. 봄이란 무슨 뜻인가? 한 해의 시작이다. 왕자란 누구를 이르는 것인가? 주나라 문왕을 이르는 것이다. 어찌하여 먼저 ‘왕’을 말하고 뒤에 ‘정월’을 말했는가? 왕인 문왕의 정월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왕정월’이라고 말했는가? 하나로 크게 통일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은공은 어찌하여 즉위를 말하지 않았는가? 은공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찌하여 은공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하는가? 은공은 장차 노나라가 평안해지면 환공에게 돌려주려고 한 것이다. 어찌하여 환공에게 돌려주려 한 것인가? 당시 환공은 어리지만 귀했고 은공은 다 자랐지만 신분이 낮았다. 그렇지만 그 존귀하고 미천한 구별이 미약하여 당시 나라 사람들이 존귀하고 미천한 차이를 알지 못하였다. 은공은 장성하였고 또 어질었기 때문에 여러 대부들이 은공을 이끌어 세웠다. 이때 은공이 사양하고 즉위하였다면 환공은 장차 반드시 즉위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 과연 환공이 즉위하였다면 여러 대부들이 어린 군주를 돕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은공이 즉위한 것은 환공의 즉위를 위한 것이었다. 은공은 장성하였고 또 어질었는데 어찌하여 즉위한 일이 마땅하지 않은 것인가? 적자를 세우는 것은 나이로써 하는 것이며 어진가를 따져서 하지 않는 것이다, 서자를 세울 때는 귀함으로써 하는 것이며 장성했는가를 따져서 하지 않는 것이다. 환공이 어찌하여 귀한가? 어머니가 귀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귀하면 자식이 어찌하여 귀한 것인가? 자식은 어머니의 귀함으로써 귀해지고 어머니는 자식이 귀해짐으로써 귀하게 되는 것이다.”4

위의 인용문은 공자보다 조금 후대의 사람인 공양고(公羊高)로부터 시작되는 공양씨 집안에서 전승되다가 동중서(董仲舒)에 의하여 중요한 책이 된 『춘추』 주석서 『춘추공양전』의 은공 원년 기사 제1행 “원년춘왕정월” 주석이다. 우선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논리가 구성되어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원년춘왕정월”은 노나라가 종주국 주나라의 책력을 사용하는 제후국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확인은 ‘하나로 크게 통일시키기[대일통(大一統)]’를 위해 한 것이다. ② 신분이 낮지만 유능한 은공은 즉위하였음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신분이 낮지만 어려서 능력이 의심받을듯했던 환공에게 평안한 노나라의 권력을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 ③ 자식이 최고권력자가 되면, 천하의 평안을 위하여 그 어머니와 집안을 존중해야 한다. [자이모귀 모이자귀(子以母貴 母以子貴)]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속의 기원전 722년 봄

“비록 일이 없으나 반드시 정월을 거론한 것은 시작을 신중히 한 것이다. 은공이 즉위한 것을 왜 말하지 않았는가? 은공의 뜻이 이루어져서이다. 무엇이 이루어졌다는 것인가? 군주 자리를 취하려 하지 않았는데 군주가 된 것을 말한 것이다. 군주 자리를 취하려 하지 않았는데 군주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장차 환공에게 양위하려고 한 것이다. 환공에게 양위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 바르지 않다고 이른 것이다. 춘추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것을 이루어지게 하고 사람들의 나쁜 것은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데 은공의 바르지 않은 것을 이루어지게 한 것은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로써 장차 환공을 미워하기 위해서이다. 환공을 왜 미워하고자 했는가? 은공이 장차 양위하려 했는데 환공이 은공을 시해했다. 이는 환공이 악한 것이다. 환공이 시해해도 은공은 양위하려 했는데 이는 은공이 선한 것이다. 선한데 바르지 않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춘추는 의를 귀하게 여기고 은혜는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도는 펴고 사특한 것은 펴지 않는 것이다. 효자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고 아버지의 나쁜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先君이 환공에게 주고자 한 것은 바르지 못한 것이며 사특한 것이었다. 비록 그러나 이미 그 사심을 이기고 은공에게 주었다. 이 선군의 사특한 뜻을 탐색하고 드디어 환공에게 주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악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다. 형제는 天倫이다. 자식이 되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받고 제후가 되는 것은 임금에게서 받는다. 이미 천륜을 폐지하고 임금과 아버지를 잊고 자그마한 은혜를 행한 것을 ‘小道’라고 이른다. 만약 은공 같은 자라면 가히 千乘의 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道를 밟아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것이다.”5

위의 인용문은 공자보다 조금 후대의 사람인 곡량적(穀梁赤)이 엮었다고 하는 『춘추』 주석서 『춘추곡량전』의 은공 원년 기사 제1행 “원년춘왕정월” 주석이다.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논리가 구성되어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비록 일이 없으나 반드시 정월을 거론한 것은 시작을 신중히 한 것이다. ② 『춘추』는 의를 귀하게 여기고 은혜는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도는 펴고 사특한 것은 펴지 않는다.[춘추귀의이불귀혜, 신도이불신사(春秋貴義而不貴惠 信道而不信邪)] 혜공은 권력계승 서열이 낮은 은공에게 권력을 물려주었고, 은공은 그러한 혜공의 결정이 의롭지 못함에도 권력을 물려받았으므로, 이후에 그가 권력계승 서열이 자기보다 높았던 환공에게 권력을 전해주려 하였던 것은 기껏해야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되어버렸고, 환공이 은공을 시해하게 된 것도 혜공과 은공이 은혜를 주고받는 소도(小道)를 걸은 결과이다.

기원전 722년을 되짚어 본 시선들을 지금 여기에서 되짚어 보기

『춘추』 경문은 편찬자의 관심이 관계와 생사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여주었다. 관계에는 정치・전쟁・외교가 다 포함되어있다. 한편 기사 속에서 문제가 된 생사는 권력자의 생사이다. 그리고 그런 기사를 둘러싼 논의가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나를 이기고 사양하는 마음을 키움[극기복례(克己復禮)]”과 같은 행동방침과 연결될는지도 모른다는 추정은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다. 그것이 편찬된 시대 속에 놓고 보면, 『춘추』는 주나라를 봉건제의 종주국으로 하는 천하에서 긴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전문에 따르면, 노나라는 종주국 주나라의 책력을 사용하는 제후국이다. 권력을 승계한 서자인 은공은 적자인 환공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을 예정하고 섭정을 자처하였기 때문에 기사 속에 은공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서술이 들어가지 않았다. 환공보다 연장자였으나 서자였던 은공이 군주의 자리를 찬탈하지 않고 적자의 왕위계승을 존중하였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전문에 따르면, 제후국이 종주국의 책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로 크게 통일시키기[대일통(大一統)]’의 일환이다. 천하의 평안을 기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혈통이 존중의 근거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평안을 위하여, 아들이 권력을 가지면 그 어머니와 집안을 존중[자이모귀 모이자귀(子以母貴 母以子貴)]해야 하는 것이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의 전문에 따르면, 별 일이 없는데도 정월을 거론하는 것은 시작을 신중히 하는 것이다. 『춘추』는 의를 귀하게 여기고 은혜는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도는 펴고 사특한 것은 펴지 않는다.[춘추귀의이불귀혜, 신도이불신사(春秋貴義而不貴惠 信道而不信邪)] 혜공이 서자 은공에게 권력을 물려준 것과 은공이 권력을 물려받은 것은 의보다 은혜를 중시하는 소도(小道)를 걸은 것이어서, 은공이 환공에게 권력을 전해주려 하였음에도, 환공이 은공을 죽이는 패륜을 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환공의 패륜은 혜공과 은공이 은혜에 연연한 부작용이다.

비교하고 종합하여보면, 『춘추』 경문과 『춘추』3전 전문들을, 권력 세습의 경로를 ‘하나로 크게 통일시키기[대일통(大一統)]’로 봉건제 사회의 안정화를 기하는 것을 중시한다. 이에 비하면, 『춘추곡량전』의 전문이 “정월을 거론한 것은 시작을 신중히 한 것”이라 한 것은 이런 흐름에서 조금 비껴나가 『춘추』 자체를 절대화하는 데로 나아간 해석으로 보인다. 한편 『춘추곡량전』 전문은 은공에 대한 포폄에서 나머지 2전과 방향을 달리하지만 미언에서 대의를 찾아 춘추필법을 따라 포폄하려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춘추』 경문을 바라보는 3전 전문들의 시선이 제각각의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경문에 기록된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으로 보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애초에 『춘추』 경문에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사건들을 선별하여 기록한 시선에는, 지금 여기의 우리들 가운데,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지금 여기의 우리가 우리 시대의 연대기를 쓴다면, 기록 대부분은 자본주의가 빚어낸 부작용들이나 기후 환경 위기를 보여주는 사건 사고에 관한 것일 듯하다. 『춘추』 경문에 기록된 사건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낮설 뿐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춘추』로부터 시급히 배워야 할 것도 있는 듯하다. 그것은 현재의 삶을 정면으로 대하고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춘추』는 기원전 722년에서 기원전 479년까지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연대기이다. 이 연대기를 편찬하였다는 공자(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의 생애 대부분이 이 연대기 작성의 대상이 된 시기와 겹치니, 공자는 자기의 생애 전체를 역사적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자에 비교할 때, 지금 여기의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시대를 역사적 성찰과 비판의 대상을 삼는 것이 크게 잘못되기나 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온 것 같다. 공자와 지금 여기의 우리. 둘 중 어느 쪽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더 나은 것일까 한 번 생각해볼 만하겠다. ‘현재’를 역사적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한 짓일까? 기후 환경 위기 속으로 이미 한 발 들여놓았음에도, 나는 마치 그것이 나의 일상과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고 생활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 내가 사태를 맥락을 살펴 가며 이해하는 것을 쿨[cool]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문화에 휩싸여있는 것은 아닌가? 앞뒤 자르고 딱 눈앞에 있는 것, 바로 피부에 와 닿는 것만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스마트[smart]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와 나의 삶의 태도는 무관한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도 낡고 무엇보다도 ‘가부장적’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는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춘추』와 3전을 보면서도, ‘현재’를 역사적 성찰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춘추』와 3전의 시선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 杜預[撰], 文璇奎[譯註], 『新完譯 春秋左氏傳』 上, 明文堂, 1985, 37~48쪽.

  2. 杜預[撰], 文璇奎[譯註], 『新完譯 春秋左氏傳』 上, 明文堂, 1985, 37~48쪽.

  3. 杜預[撰], 文璇奎[譯註], 『新完譯 春秋左氏傳』 上, 明文堂, 1985, 37~48쪽.

  4. 南基顯[解譯], 『춘추공양전』, 자유문고, 2005, 31~33쪽.

  5. 南基顯[解譯], 『춘추곡량전』, 자유문고, 2005, 41~43쪽.

이유진

1979년 이후 정약용의 역사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1988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였다.
규범과 가치의 논의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