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톺아보기] ⑥ 탈성장, 데팡스와 리추얼의 복원 이야기

탈탄소 사회는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현재 규모의 경제는 탄소 감축 목표치와 사회유지 사이에서 지속적인 감축의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탈성장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바타이유와 한병철의 이야기를 소개해 본다. 그 사상가들의 해법은 결국 공동체의 회복임을 먼저 밝힌다.

기후위기 시대는 생태계에 대한 인간의 부하를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그 속도와 정도는 상당히 급진적으로 근본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탈성장의 미래는 피할 수 없는 사회의 미래가 될 전망이다. 그런데 탈성장이 단순하게 경제적 범주로서 그 규모를 축소하는 내용이 아닌 것은, 성장도 탈성장도 정치, 사회, 문화와 촘촘하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탈성장의 모습을 신속하게 가시화하고 시나리오적 발전단계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사회주의가 49년 혁명 이후, 앞선 정치 변화에 인민들의 삶의 문화가 정체되는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이라는 외부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폭력적으로 전개하여, 미시적 문화를 사회주의 문화로 바꾸려고 했던 것처럼, 기후위기 시대의 미시적 삶도 마찬가지이다. ‘기후’라는 변수는 인간 사회의 외부적 요인이며 어느 순간 대중의 삶을 통째로 바꾸려들 것이다. 중국 문화대혁명이 혁명 이후 대표적인 과오인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위로부터의 급진적 문화 개혁은 그만큼 쉽지 않다.

그런데 탈성장 사회의 삶과 문화에 대해 고민할 때 가장 근본적인 변화의 출발은 무엇일까? 자동차 문화를 바꾸고 주거 문화를 바꾸고 육식 문화를 바꾸기 위한, 모든 삶의 변화를 촉발할 핵심적인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타이유의 데팡스, 한병철의 리추얼의 회복이다.

재작년 생태적지혜연구소에서 진행했던 제4회 콜로키움은 책 『탈성장 개념어 사전』으로 진행 되었다. 발제를 위해 책을 읽는 내내 탈성장에 관한 이야기와 바타이유같이 어려운 철학자의 ‘데팡스’ 개념이 책 전체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책의 저자들은 성장에 중독된 소비사회가 데팡스의 상실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인 철학 개념이 탈성장의 이해에서 이토록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점이 내내 신기했다.

데팡스는 ‘사회적으로 남는 잉여 에너지를 처리하는 공동체적 방식’으로 정의된다. 바타이유는 사회적 에너지를 구성원들의 생명유지를 위한 에너지와 잉여에너지로 구분했다. 여기서 문제는 잉여에너지의 처리 방식이었다. 전근대 이전 사회는 잉여에너지를 사회가 교회를 짓거나 커다란 궁전을 짓는 방식으로 처리를 했다. 잉여에너지량이 얼마나 많은지는 3500년 전 저생산력 사회였던 이집트가 만들어낸 피라밋을 보면 알 수 있다. 20세기 이후에는 잉여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유럽 전체를 2번이나 부셨다 다시 건설하기도 했다.

공동체적 사용 방식이 사라지자, 대중들은 잉여에너지를 각자 자기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진다. 생명유지를 위해 집을 사고 쌀을 사고도 너무 많은 에너지가 남는다. 차도 더 큰 차로 바꾸고 고기를 실컷 먹었는데 에너지가 남아있다. 문제는 에너지 사용 후 결과에 대한 불만이었다. 잉여에너지를 사용하여 집을 꾸미고 차를 바꾼들, 그 결과는 과거에 비해 아름답지 않았다. 중세시대에 마을 사람들의 삶은 비루하고 가난했지만, 그들의 모든 에너지를 긁어모아 교회를 만들어 내고 마침내 일요일 마다 모두가 모여 예비를 드린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료프》는 내내 흑백영화이다가 마침내 교회종을 만들어내자 컬러로 바뀐다. 삶은 비루하지만 나의 에너지가 만들어낸 작품은 고귀했다. 파리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만들어졌을 때, 벽돌 한 장의 기여를 했을 뿐인 그들조차 노트르담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었다. 프랑스대혁명 1주년 기념으로 건축된 에펠탑은 왕정타파와 공화주의를 상징한다. 에펠탑은 전파송출 수준의 기능을 제외하면 어떠한 사용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오로지 의미를 위해 건설되는 공공 건축물의 시대. 삶의 물질적 수준은 검소하더라도 도시는 동일시에 빠져들 수 있는 대상이 도처에 있었다. 사회주의 사실주의 건축물들은 이와 같은 ‘선전선동’을 위한 공공 건축물의 마지막 시대를 알린다. 그 이후 팝아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예술품도 상품 소비사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제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은 무한한 기업 이윤을 상징하는,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맨허튼 생명보험 빌딩,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같은 마천루의 형태로 등장한다.

개인들은 교회나 성당, 시광장의 멋진 시청사 건축물을 법적인 지분이 없이도 ‘소유’하면서 누리던 멋진 ‘착각’에서 분리된다. 그들이 자기들의 마천루를 쌓아 올리는 것처럼 자신도 자기 자신의 사유화된 공간을 화려하게 채워야 하게 되었다. 데팡스는 사라지고 잉여에너지 사용의 권한은 개인화 되었는데 개인이 아무리 돈을 벌어 사유공간을 꾸며봐도 과거보다 화려하지 못하고 옆집 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그래서 모두는 벌고 쓰기를 멈추지 못한다.

바타이유는 에너지를 생존유지 에너지와 잉여에너지로 구분했다. 개인은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잉여에너지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도시사회의 물질적 최소수준으로 착각하여 생존유지 에너지로 이해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80년대에 방 2칸에 TV, 냉장고, 세탁기 등이면 충분하던 ‘최소한의 삶의 물질적 조건’이 이제는 너무나 많다. 단지 생존유지를 위한 노력만으로도 등골이 빠진다. 분당의 어느 교사가 전하는 그곳 고등학생들의 꿈이란 ‘자기 아버지만큼 살기’라고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려온 물질적 조건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으며 단지 지금 삶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는 시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십대 내내 학원에서 공부해서 좋은 대학가야하고 직장 다니며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제 집밖에도 집안에도 고귀한 ‘내 것’은 없다. 가문의 목표는 물질적 생활수준의 유지인 셈이다. 왜냐하면 그 수준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추상적 존재일반에게는 자원은 넘친다. 반면에 개별적인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항상 자원은 결핍된 상태이다. 개별화된 인간들은 생존문제 집착한다. 애초에 개인은 지속가능하게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내가 사용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어떻게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불안함에 시달리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생존의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과잉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낭비할 수 없는 강박에 빠진다.

교토의 금각사에 칠해진 30kg의 금은 투자의 입장에서 실패한 사례일 뿐이다. 600년 동안 방치된 자본. 그것으로 튤립에 투자를 하거나 사채시장에 고금리로 투자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낭비해도 괜찮은 잉여 에너지인데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증식의 욕망에 시달린다. 데팡스가 사라진 시대의 자화상이다. 잉여 에너지를 낭비하지 못하고 생존 에너지로에 투입하고 마는 전도현상이 나타난다. 인간은 고립되었고 마치 동물 상태로 돌아가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하는 상황.

자본주의 담론들은 잉여에너지를 사적으로 처리하도록 함으로써 개인들은 술, 카지노, 과시성 쇼핑, 개인파티 등 데팡스를 개인화한다. 
사진출처 : Marko Milivojev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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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담론들은 잉여에너지를 사적으로 처리하도록 함으로써 개인들은 술, 카지노, 과시성 쇼핑, 개인파티 등 데팡스를 개인화한다.
사진출처 : Marko Milivojevic

탈성장 프로젝트는 삶의 의미를 집단적으로 구성하고 정치적 관심을 강조함으로써 데팡스의 복원을 말한다. 자본주의 담론들은 잉여에너지를 사적으로 처리하도록 함으로써 개인들은 술, 카지노, 과시성 쇼핑, 개인파티 등 데팡스를 개인화한다. ‘모든 이에게 페라리를’이라는 구호가 정말로 이루어진다면, 그때 사람들은 페라리를 피아트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인류학적 환상이다. 혼자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탈성장의 주체는 사적으로 물건 축적을 열망하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자기 자신 안에서 의미를 찾지 않는다. 성장의 신화 속에는, 결국 우리가 충분히 가진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어려운 질문들이 빠져있다. 데팡스의 부재가 성장에 매달리는 성과주체를 낳는다.

바타이유의 문제의식이 철학자 한병철에게는 다른 언어로 다뤄진다. 저서 『리추얼의 종말』에서 리추얼은 의례(儀禮)이다. 의례는 관혼상제와 같은 삶의 중요한 사건을 다루는 방식을 규정하고 있으며 종교 행사에서 더욱 확실하게 관찰된다. 리추얼의 반대쪽에는 진정성이 있다. 여기서 진정성은 즐거움, 슬픔, 가치로움 등 모든 인간의 감정을 포괄한다. 누군가의 부고를 들었을 때, 리추얼에서는 슬프지 않더라도 아이고…아이고를 밤낮으로 외쳐야 하지만 진정성에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않아도 괜찮다. 자신이 슬프지 않기 때문이다. 리추얼의 대척점에 놓인 진정성의 세계는 에고를 중심에 놓는다. 여기엔 공동체의 여지가 없다.

에고를 중심에 놓게 될 때, 각각의 에고는 상호간의 진정성을 확인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집합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에고중심의 진진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활발한 소통을 원칙으로 삼는다. 낱낱의 에고들, 개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적극적으로 나누어야 한다. 반면에 공동체를 바탕으로한 리추얼의 사회 속에서 개인은 무대의 배우로서 역할해야 한다. 이미 해야할 일은 정해져 있으며 그 속에서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성당에서의 미사를 보자. 역할을 맡은 자들은 신앙심 여부와 상관없이 노래를 부르고 행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리추얼에서 역할을 부여받은 심리만이 누를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무슨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분명하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내고 소통을 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발언권을 얻기 위해 증명해내야 하는 에고 꾸미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공동의 축제에는 춤의 표현, 집단적 놀이 등 자신의 진정성과 독립된 역할이 있다. 초등학교 운동회를 생각해 보면 그곳은 규칙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공동의 축제는 자신을 에고로부터 떼어놓는다. 반면 오로지 자기를 경축하는 놀이를 찾는 자들은, 다시 말해 소망의 충족을 방향설정의 기준으로 삼은 존재들은 자신을 더욱 강화한다. 자신을 더욱 자기스럽게 고양시키고자 꾸미고 가꾸는 사이, 더 많은 성과를 낳고자 노력하며 더 많은 소비를 하려고 든다. 독일어 자유(Freiheit)는 ‘친구들 곁에 있음’(bei Freunden sein)과 같은 어원을 갖는다. 자유도 공동체에 기초해서 새롭게 정의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성당에서 미사 때 사용하는 모든 ‘사물’은 개인의 것이 없다. 공동체 모두의 것이다. 개인의 사물은 함부로 다루고 변덕에 따라 버려도 괜찮지만, 공동체의 물건은 아껴야 한다. 미사 덕분에 잔을 부드럽게 다루고, 용기를 천천히 전체의 속도에 맞게 닦으며 책 한 장도 침착하게 넘긴다. 사물들과 아름답게 교류하는 것은 공동체 속에서만 배울 수 있다. 소유 한 상태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자극, 새로운 체험에 대한 강렬한 요구는 사실 강렬한 소비를 뜻한다. 사물과 느리고 아름답게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물이 필요하며 과소비에 빠져든다. 한병철은 진짜 강렬함은 반복의 형태에 있다고 말한다. 바하의 골든베르그 연주곡을 좋아하는 저자는 ‘나는 새로운 것이 필요 없어요. 나는 반복을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공동체의 무대 위에 서 있는 자만이 사물과 예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온갖 의례, 리추얼에 진정성이 없으며 형식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은 사실 공동체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 있어서도 기사도란 가치가 있던 시절에는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하더라도 명예와 용기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전쟁은 악의 세력에 대항한다는 의미의 전쟁보다 그저 용병과 같이 낱낱으로 나누어진 군인들이 전쟁의 진짜 진정성, 즉 누가 더 많이 죽였는가라는 득점표로 평가를 받는다. 성과만이 의미 있는 지표이며 나머지는 텅 빈 의미가 되고 만다.

리추얼은 삶에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며 따라서 삶을 안정화한다. 리추얼에서 역할을 찾을 때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병철은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공동의 행위와 놀이의 새로운 형태들을 발명해야 한다.’고 말하며 자아의 저편, 소망의 저편, 소비의 저편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조성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 행위들과 놀이들을 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사회의 물질적인 빈곤은 확실해 보인다. 어떻게 탈성장을 실현할 것인지 논의를 해야 한다. 가속주의를 통해 신속한 전환을 설계하는 가운데, 공동체 회복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공동체 없이는 탈성장을 견딜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타이유와 한병철은 생태주의를 문제의식의 중심에 놓았던 사상가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병리적 문제를 성찰하는 가운데 소비사회가 문제의 한 가운데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그 해법으로는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논의는 쉽지 않을 것이다.

두더지

쌍둥이를 낳아 공동육아를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른다 하여 나를 상징할 수 있는 동물을 찾다가, 나는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살고 있는 사람 같아 두더지라고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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