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과 만나 만들어졌나 – 활력 정동과 관계성

활력 정동에 있어서 그것이 ‘존재의 이행 = 운동의 과정’이라고만 설명되거나, 순간적 변화의 역동성 쪽으로만 주목될 때 약간의 오해가 발생하는 것 같다. 정동이 순간적이고 휘발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정동 개념에 함축된 마주침, 관계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해야 한다. 정동은 무엇보다도 ‘관계적인’ 현상이다.

범주적 정동과 활력 정동

기쁘거나 즐겁거나 슬프거나 화나거나 괴로운 것은 몸의 일일까 마음의 일일까 혹은 둘 다의 일일까. 가령 기쁨은 웃음과, 슬픔은 눈물과 가깝게 여겨진다. 슬프기 때문에 울고, 기쁘기 때문에 웃는다는 식의 인과적 이미지도 익숙하다. 하지만 1세기 전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반드시 옳지 않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가령, “떨리니까 무서운 것이지, 무서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을 생각해보자. 이 말은, 무서움, 공포라고 여겨지는 것이 일사불란한 컨트롤타워로서의 뇌-마음 속 과정의 일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깜깜한 밤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문득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고 상상해보자. 아마도 그 소리의 실체를 알아차리기 이전에 나의 몸은 이미 그 소리를 피하는 행동을 먼저 취할 것이다. 즉, 경험의 내용보다도 그 순간의 소리는 경험의 강도로만 느껴진다. 그리고나서 뒤를 돌아보고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예컨대 ‘무섭다, 반갑다, 화난다’ 등을 환기하게 될 것이다.

즉, 감정이라고 일컬어 온 것들은 사실상 심신의 선후관계가 애매하다. 그것은 우리의 인지 이전에 몸의 반응으로부터 연유하기도 한다. 한편 감정의 술어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몸의 반응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기쁨, 슬픔 등은 결코 허상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 말들에 들러붙은 표상과 함께 우리는 그것을 경험한다. 나아가 기쁨과 즐거움은 가령, 나의 입꼬리가 1mm 위로 올라가면 기쁜 것이고, 1mm 더 위로 올라가면 즐거운 것이라는 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쁨, 즐거움 등이 이렇게 쉽게 식별가능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사유 관습 속에서 그것은 명료하게 파악 가능한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다. 슬픔, 연민, 고통 등등의 이름을 통해 그것들은 어떤 표상을 부여받는다.

감정이라고 일컬어 온 것들은 사실상 심신의 선후관계가 애매하다. 
사진출처: Markus Winkler 
https://unsplash.com/photos/6CSJWMs6JVA
감정이라고 일컬어 온 것들은 사실상 심신의 선후관계가 애매하다.
사진출처: Markus Winkler

이렇게 기쁨, 슬픔 등은 심신에서 발생하는 범주화된 반응이지만, 그 기저를 가로지르는 지각 불가능한 힘까지 생각할 때 ‘정동’ 개념은 꽤 유용하다. 정동 이론에 있어서 자주 인용되는 심리학자 다니엘 스턴은 앞서 말한 기쁨, 슬픔, 즐거움, 분노 같은 것을 개별적이고 범주적인 정동이라고 했다. 범주적 정동은 그 흔적이 비교적 분명하게 인지된다. 눈물이 나고 땀이 나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것은 통상 감정이라고 일컫는 것에 가깝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 앞서 말했듯 이것은 정확하게 식별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슬픔’이라는 말 자체도 끊임없이 순간적인 사건이 연속되고 신체가 변용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즉 범주적 정동의 기저에 흐르는 어떤 미세한 역동적 순간들이 있다. 스턴은 이를 일컬어 ‘활력 정동(vitality affects)’이라고 부른다. 활력 정동은 “살아 있음의 자연적인 과정에 포함한 감정 상태의 순간적 변화에 상응하는, 감정의 역동적이며 움직이는 성질”이다. 스턴이 구분하는 범주적 정동과 활력 정동은, 강도의 차이로서 구분해서 이해해도 될 것이다. 개체로서 경험하는 감정(범주적 정동) 역시 다양한 마주침에 수반되는 것이고, 그 마주침에는 늘 의식하지 못하고 지각하지 못하지만 아주 미시적인 존재론적 힘이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활력 정동과 관계성

그런데 활력 정동에 있어서 존재의 이행=운동의 과정이라고만 설명되거나, 순간적 변화의 역동성 쪽에만 포커싱될 때, 약간의 오해가 발생하는 것 같다. 항간에서 정동이란 순간적이고 휘발적인 것으로 이야기될 때가 있다. 순간성과 휘발성을 다시 개념(재현)의 언어로 포착하려는 시도 자체가 모순이라고 하는 회의가 생기기도 한다. 그리하여 정동 개념이나 문제의식이 함께 폄하될 때도 있다. 그것이 강조될 때 정동이라는 문제의식의 무력함이나 무소용이 환기되기도 한다. ‘정동’ 개념의 문제의식은 다시 현실과 괴리된 관념이나 사변으로만 회의되기도 쉬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동 개념에 함축된 마주침, 관계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정동이론가 메건 왓킨스는 「인정 욕구와 정동의 축적」에서 정동과 감정을 대비시키는 방식만으로는 ‘관계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정동이 무엇보다도 ‘관계적인’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교육 과정과 현장을 필드 삼아 그가 정동의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해 중요한 전거로 인용하는 것이 역시 다니엘 스턴의 활력 정동이었다.

활력 정동은 본래 ‘양육자’와 아기 사이의 정서적 호응을 상호주관성의 초기 형태로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사진출처: Kelli McClintock 
https://unsplash.com/photos/rwBVkoPNkhQ
활력 정동은 본래 ‘양육자’와 아기 사이의 정서적 호응을 상호주관성의 초기 형태로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사진출처: Kelli McClintock

강조컨대 활력 정동은 미시적 차원에 있다. 그렇기에 활력 정동은 존재의 살아 있음 자체를 의미하는 역동성이다. 이러한 활력 정동은 본래 ‘양육자’와 아기 사이의 정서적 호응을 상호주관성의 초기 형태로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라고 한다. 아직 영토화되지 않은 유아의 감각 경험들이 어떻게 향후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할 때, 마주침과 관계를 함축하는 활력 정동은 어쩌면 개인 뿐 아니라 이 세계의 구성 원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는 것 같다. 따라서 이러한 관심은 꽤 실용적(pragmatic)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이것은 애초의 의도를 확장해 이 세계 전반에 비추어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

명명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감정들과 달리 그 범주적 정동을 가로지르면서 그 사이에서 작용하니 활력 정동은 근본적으로 관계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별적 사안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늘 다른 시간이나 상황에서 유래하는 활력 정동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활력 정동 개념은 어떤 행동의 프로세스 혹은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에도 유용하다. 단, 이것은 어떤 행위의 원인을 밝히는 데에 유용하다는 말이 아니다. 정해진 투입-산출 혹은 원인-결과의 회로가 있다기보다, 그 회로처럼 보이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쪽을 설명하는 데에 활력 정동 개념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이야기다. 즉, 활력 정동이 촉발-활성화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곧 관계성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 혹은 과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나-우리의 경험과 기억을 만드는 활력 정동

앞서 말했지만 활력 정동은, 개체적 행동의 메커니즘을 넘어, 개체들끼리 연결된 신체의 행동 메커니즘까지 사유케 한다. 이것은, 나와 너, 인간과 비인간 모든 존재의 마주침과 연루됨의 조건을 상기시킨다. 관계나 돌봄이라는 말은 도덕의 말처럼 들릴 때가 많지만, 활력 정동이 일종의 존재론적 힘-즉 존재의 살아 있음 자체를 증거하는 지속적 운동의 과정-이자 존재의 조건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말들은 조금 다른 설득력을 지닌다. 개개인의 선한 의지에 호소하는 것을 넘어서 관계나 돌봄의 가치를 역설하려 할 때, 활력 정동은 중요한 개념이 된다.

활력 정동은 반복건대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개별적이고 범주적인 정동과 다르게 모든 존재와 행동에 본래적으로 내재한다. 그리고 서로 교류하고 축적된다. 갓 태어난 아기들을 상상해보자. 아기는 선천적이고 정동적으로 반응한다. 그 정동은 유사하게 반복적으로 경험되면서 일종의 성향으로 축적이 된다. 그러니 정동은 순간적이고 휘발적이라고만 할 수 없다. 유사한 경험과 그에 따른 유사한 정동이 반복적으로 행해질 때, 그리고 특정 방식의 반응-행동이 축적될 때 그것은 일종의 기질 혹은 성격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어낸다. 정동이 신체에 축적되고 체화되는 까닭에 어떤 행위가 이루어진다. 정동은 개인의 행동과 삶의 차원을 넘어서 이 세계의 구성 원리까지 사유케 한다. 이때, 활력 정동 개념이 던지는 중요한 과제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가령 소위 주체성의 형성이란, 과거에는 이데올로기와 국가장치 같은 경성(硬性) 언어와 사유를 통해 이야기되어왔다. 하지만 지금 활력 정동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주체성이란 인간-비인간 요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집합주체의 성질에 가깝다. 이때 가타리의 비유처럼 정동은 ‘접착 물질’로 작동한다. 정동은 지각 이전의 직관의 영역에 속해 있지만, 교육, 역사, 이데올로기, 문화 등과 분리시킬 수 없다. 또한 정동의 관점에서 생각할 때 나와 너, 개인과 사회의 구획도 간단치 않다. 복합적이고 정동적이며 서로 연루되어 구조화된 개별화=집합화가 곧 ‘나’라는 존재를 암시할 뿐이다. 일종의 연결 신체로서의 나-우리는 결국 무엇과 접속하고 연결할지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되거나 발현되는 것이다.

결국 무엇/누구와 접속하고 연결되어 가느냐에 따라 활력 정동은 다르게 촉발되고 활성화된다는 것. 나라는 존재는 곧 내가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 한 장소에 축적된 기억과 역사가 곧 그 장소에 연결된 신체를 만든다는 것. 이것이 단지 한 개인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님은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연결된/연결될 관계를 돌보는 일을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김미정

문학을 경유해서 글을 쓸 때가 많습니다.

댓글

댓글 (댓글 정책 읽어보기)

*

*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


맨위로 가기